2022년 12월 16일(금요일)
포은 단심로 : 경북 영천시 임고면.
▣산행코스 : 임고서원주차장-기룡지맥-조옹대-임고서원-임고서원주차장.
▣산행시작 : 임고서원 주차장 11시 43분.
▣산행종료 : 임고서원 주차장 14시 43분.
▣전체거리 : 약 8.79km.
▣전체시간 : 03시간 00분.
▣운동시간 : 02시간 49분.
▣휴식시간 : 00시간 11분.
▣누 구 랑 : 나홀로.
11 : 43 임고서원주차장 출발.
12 : 39 기룡지맥.
14 : 15 조옹대.
14 : 34 임고서원.
14 : 43 임고서원주차장 산행종료.
▲ 11시 43분 : 임고서원주차장 바로 옆의 임고파출소에서 산행 출발.
내가 본 우리나라 파출소 건물중에 가장 쾌적해보이는 한옥 파출소다.
▲ 파출소 바로 뒷편에 포은단심로 들머리가 있다.
오늘 아침에 영천 기룡산을 검색하다가.. 국제신문의 임고서원 <포은 단심로>가 눈에 확 들어온다.
산행시간도 약 3시간이라 하고.. 가는길도 우리집에서 54분 소요라서 적당하다..
그런데... 기온이 낮 3~4도에 바람이 3~4m라고 해서 망설여진다.. 창을 열고 밖을 보니 하늘은 청명하다.
구라청을 믿고(?).. 출발!~.. 현지에 도착하니 역시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바람 한점 없다.
▲ 계단에서 뒤돌아본 들머리 모습.. 주차장과 파출소 사이에 들머리가 있다.
▲ 계단 중간에 설치된 간이 전망대..
▲ 임고서원(구.서원) 전경.
▲ 해발150m대의 낮은산이지만 오름이 가파르다.
▲ 주능선에 올라서니.. 이정표가 전망대에 다녀오라고 한다.
▲ 전망대 가는길..
▲ 주변의 나무들이 키높이로 자라서.. 전망보다는 바람길이 좋은 쉼터다.
▲ 구 서원과 신 서원 사이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마주치는 삼거리.. 갈림길마다 이정표가 잘되어 있다..
▲ 동네 야산의 수레길 같은 편안한 길에..
나뭇잎의 바스락거림도 없고.. 새들의 지져귐도 없는 고요함이다.
▲ 낮은 언덕같은 구릉을 기분좋게 몇번 오르내리면..
▲ 봄이면 도화(桃花)가 만발하여 무릉도원이 될것 같은 복숭아 밭..
▲ 갈림길에 어김없이 서 있는 친절한 이정표..
▲ 송전탑속의 세계..
▲ 그늘이 좋은 포은 정몽주의 단심로에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죽어서도 고려 임금을 섬기는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는 <단심가>를 읊조려 본다..
음미 할수록 포은의 의리와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여운으로 남는 시다.
▲ 이 좋은 숲길을 오롯이 혼자 걷는길.. 오늘은.. 내가 주인이다.. 바람도 없고 안 왔더라면 후회 할뻔 했다.
▲ 12시 21분 : 일성부원군묘소 갈림길..
"일성부원군(정운관)"은.. 포은 정몽주의 아버지다.
그래도 큰 성인을 내신 분의 묘소라서 가보려고 500m 정도 진행하니 계곡 바닥까지 내려 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모양인지 농장이 보인다.. 아니다 싶어 되돌아 간다. 알바 아닌 알바를 한 셈이다..
▲ 일성부원군 갈림길에서 8~9분 올라가면 "기룡지맥길"과 만나게 된다.
▲ 길가에 햇볕 좋은 산소가 있어서 쉬어 갈겸 가보니...
▲ "해우처사벽진이공승학지묘"라 되어 있다.
처사(處士)라 함은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을 일컷는 말이다. 아마도.. 후손이 크게 성공한 모양이다. ㅎ~
▲ 삼거리.. 여기에도 친절한 이정표가 서 있다.
▲ 얕으막한 정수리에 올라서니 다시 일성부원군묘소로 가는길이다.. 포기하고 직진으로 내달린다..
▲ 일성부원군(정운관)의 묘.
가보지 못한 아쉬움에 다른 블로그에서 빌려 왔다..
▲ 벤치도 있고.. 길의 경사가 완만해 그리 힘들지도 않고 소나무가 우거진 숲길은 호젓하다.
▲ 13시 06분 : 기룡지맥 갈림길이며 단심로의 반환지점이다.
그 친절했던 금자씨 말고 이정표가 막상.. 꼭 있어야 할 곳에 없다. 양쪽다 많이 다녔는지 길이 반들거린다.
그러나.. 공부한 사람만이 아는 동물적 감각으로 여기가 기룡지맥 갈림길임을 알고.. 지세도 살필겸..
3~4분정도의 거리에 있는 오늘 산행중에 제일 높은 238.8m에 다녀 오기로 한다.
▲ 13시 11분 : 기룡지맥의 238.8m봉.
기룡지맥이란... 보현지맥 보현산 1,124m 동쪽 1.64km 지점에서 분기하여 갈미봉(786.5mm) 외미기재.
기룡산(965.5m). 시루봉(대구. 포항고속도로) 28번국도를 건너 신령천이 금호강(자호천)에 합수하여
영천시 오수동에서 유봉지맥과 마주보며 끝나는 도상거리 32.2km의 산줄기다.
▲ 이제 오로지.. "조옹대" 만 바라기하며 하산이다.
▲ 과거에.. 성황당(서낭당)이 있었음직한 고개마루다.
▲ 하산길은 포은산책로인가 보다..
▲ 단심로를 걸으며.. 드라마나 역사를 통해 배운 파란만장했던 포은의 삶이 생생하여
그의 어머니가 지은 "백로가' 도 읖조려 본다.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白鷺)야 가지 마라
성난 가마귀 흰빛을 새우나니
창랑(滄浪)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아들 포은이 이성계(조선 태조·1335~1408)의 역성혁명을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할것을 예감이라도 했을까..
포은의 절의가 그 어머니에게서 기인했음을 짐작케 하는 시다...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 길이 두갈래다.. 어디로 가든 만날것 같다.. 이왕이면 군자대로행이라 했다.. 큰 길로 가자..ㅎㅎ~
▲ 높지는 않지만.. 수직 절벽아래 자호천이 시퍼렇게 흐르고 임고면 양평리의 너른 들이 시원하다.
▲ 북쪽방향의 양평리 너머로 영천의 기라성 같은 산군들이 보인다. 꼬깔산 아래에 영천호가 있다.
▲ 동쪽으로는 운주산 도덕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영천지역의 산줄기는 백두대간 상의 태백산에서 남으로 뻗어 나온 낙동정맥의 지맥이 영천에 이르러 산세가
약해지면서 운주산(806m), 도덕산(703m), 관산(394m)이 동쪽 경계를 형성하고 서쪽은 팔공산(1,193m),
태실봉(466m) 등이 솟아 있으며 남쪽은 금박산(432m), 구룡산(675m), 사룡산(685m)이 연이어 있고,
북쪽은 보현산(1,124m), 화산(828m), 수석봉(821m), 모자산 등이 급경사의 산지 사면으로 둘러싸여
동서 방향으로 이어져 있어 영천의 지형은 완전한 분지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 여름날 자호천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너무나 시원할 것 같아서 야등팀이 생각난다.
▲ 하산길에서 첫번째 정자..
▲ 조옹대 가는길.. 빗나간 구라청 바람예보로 등짝에 땀이 맺혀도 좋다.. 너무 좋다~ㅎㅎ..
▲ 임고초등학교.. 보건소.. 복지센터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 영천은 삼한시대 부족국가 골벌소국이 형성된 이후 절야화군, 임고군, 영주 등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1413년(태종 13) 작은 군현은 주(州)라는 명칭을 금지하고, 대신 천(川)과 산(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도록
하여 영천(永川)이라 하였다.
▲ 두번째 정자.
▲ 조옹대가 보인다.
▲ 14시 15분 : 조옹대 도착..
정자 입구현판에는 무괴정(無愧亭)이라 되어 있다.. 부끄럼이 없다는 뜻이다. 포은이 그랬다..
▲ 뒷쪽의 임고서원마당에서 잘보이는 곳에는 조옹대(釣翁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포은 선생이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이 조옹대라 부르고..
또 선생이 낚은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용(龍)이라고 해서 조룡대라고도 불렀다고도 한다.
▲ 포은의 호중관어(湖中觀魚)... 중국 장자(莊子)의 추수편(秋水篇)에 실린 이야기.
잠재심연혹약여(潛在深淵或躍如).. 깊은 못에 잠겨 있되 힘차기도 한 것을
자사하취저우서(子思何取著于書).. 자사는 무엇 때문에 글에다 썼던가.
단장안공분명견(但將眼孔分明見).. 다만 분명하게 살펴보니
물물진성발발어(物物眞成潑潑魚).. 모든 것이 팔팔한 고기와 같네.
어응비아아비어(魚應非我我非魚).. 고기는 내가 아니고 나 또한 고기 아니니
물리참차본부제(物理參差本不齊).. 만물은 들쭉날쭉 본디 같지 않건만
일권장생호상론(一卷莊生濠上論).. 호량의 논의를 쓴 장자의 한 권의 책이
지금천제사인미(至今千載使人迷).. 이제까지 천년동안 사람을 어지럽히네~..
▲ 퇴계 이황의 <임고서원>
포옹풍열진오동(圃翁風烈振吾東).. 포옹은 명성과 절개가 우리나라에 떨쳤으니
작묘양양장학궁(作廟渠渠壯學宮).. 커다란 사당에 장한 학관도 만들었네
기어장수제사자(寄語藏修諸士子).. 수양하는 선비에게 한 말씀을 부치나니
연원절의양감종(淵源節義兩堪宗).. 연원과 절의 둘 다 조종이라 할만하다~..
▲ 목은 이색의 억정산기(憶鄭散騎)...
▲ 조옹대에서 바라본 임고서원.
임고서원은 정몽주를 추모하기 위하여 1553년(명종 8) 부래산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3년(선조 36)에 중건되었으나.. 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65년 복원하여 1990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기존의 서원 옆에 새로이 서원을 세워 웅장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현재는 보이는것 처럼 옛 서원과 새로 지은 서원이 공존하고 있다.
▲ 정몽주유물관.. 충효관.. 계현재.. 포은연수관등등..
▲ 은행나무와 선죽교와.. 왼쪽의 송탑비가 한눈에 보인다.
▲ 포은유물관..
꽃피는 봄날에 임고서원 주변을 다시 불러 보고자 한다.
▲ 포은 정몽주 선생이 낚시를 하였다는 조옹대가 그림이다.
▲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송탑비(頌塔碑).
글씨는 퇴계선생의 유묵 중에서 집자(集字)한 것이다.
▲ 조선시대 어제어필(御製御筆). 임금의 시와 글이며... 숙종. 영조. 고종의 시들이 적혀 있다.
▲ 임고서원(신 서원)..
조선 명종 8년(1553) 부래산에 창건하여 사액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 이곳에
중건하고 재사액(再賜額) 되었다.
▲ 정문의 역할을 하는 누각은 영광루(永光樓)다.
영광루의 아래쪽에는 경앙문(景仰門)이고.. 우측문만 열려 있다.
▲ 임고서원.
정몽주의 본관은 영일, 호는 포은이다. 1355년 아버지 상에 3년, 1365년 어머니 상에 3년간 여묘하였으며
1357년 과거에 합격한 후 예문검열 등을 거쳐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사 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익양군충의백에 제수되었고 명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갔으며, 내정, 외교, 교육
등에 공적이 많았는데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 의하여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이로써 고려는 474년의 사직(918~1392)을 닫게 된다.
▲ 주 건물인 흥문당(興文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고 흥문당 좌우에 전사청(典祀廳)과
심진각(尋眞閣)이 위치하고 있다.
▲ 흥문당(興文堂)대청마루.
▲ 흥문당 오른쪽의 경의협..
▲ 흥문당 왼쪽의 명성협..
▲ 통정대부 공조참의로 추증된 최선매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신 서원 좌측에 세워져 있다.
최선매는 임진왜란 때 서원이 소실될 위기에 처하자 포은선생의 영정과 위판을 기룡산 석굴에 피안시켜
난리가 평정된 후 서원을 중건하여 다시 안치한 분이다.
▲ 수령 600여년의 임고서원 은행나무..
서원이 부래산에 있었을때부터 심겨져 있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없어진 서원을 이곳에 다시 지을때
함께 옮겨 심었다고 한다.
▲ 600년의 세월이 피워내는 노란 은행잎이 아름다운 가을에 와도 좋을듯 하다.
▲ 임고서원을 뒤로 하고..
▲ 선죽교쪽으로..
고려시대에는 난간이 없었으나 조선 정조 4년(1780) 정몽주의 후손 정호인이 개성유수로 부임하여 난간을
설치하여 통행을 제한하는 대신 행인을 위하여 바로 옆에 좁은 돌다리를 가설하였다.
▲ 선죽교.
정몽주선생이 후에 태종이 된 이방원 일파에게 피살된 장소인 선죽교(善竹橋)가 복원이 되어 있다.
원래는 선지교(善地橋)라 불렀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 나왔다 하여
선죽교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글씨는 한석봉의 작품이다.
▲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인 선죽교는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 약 1km 거리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다리로 고려 태조 왕건이 919년 송도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8.35m,
너비 3.36m의 화강석 다리다.
▲ 개성의 선죽교를 실측하여 그 규모대로 임고서원 앞에 가설하고 한석봉이 쓴 선죽교 돌비석 또한
탁본하여 세우게 된 것이다.
▲ 산수유..
▲ 14시 43분 : 임고서원 주차장 산행종료.
▲ 충성심과 효심을 아울러 구비한 불사이군의 충신으로 추앙을 받는 포은 정몽주선생을 모신 임고서원을
둘러 보고.. 선죽교를 건너니 겨울만큼이나 시린가슴이었다.
1388년 5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고려 멸망.. 억불숭유 통치의 조선 500년.. 조선총독부.. 일제강점기..
독립.. 동족상잔의 6.25.. 그리고.. 대한민국의 오늘을 돌이켜 보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