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1월 16일(목요일).
무등산국립공원 : 광주광역시.
▣산행코스 : 원효사주차장-무등산옛길입구-목교쉼터-서석대-인왕봉-입석대-장불재-석불암-규봉암-원효사주차장.
▣산행시작 : 원효사주차장 09시 47분.
▣산행종료 : 원효사주차장 15시 31분.
▣전체거리 : 약14.7km.
▣전체시간 : 05시간 44분.
▣운동시간 : 05시간 29분.
▣휴식시간 : 00시간 15분.
▣누구하고 : 산이좋아산악회.
09 : 47 원효사주차장 출발.
09 : 53 무등산옛길입구.
11 : 07 목교쉼터.
11 : 25 서석대.
11 : 42 인왕봉.
12 : 10 입석대.
12 : 20 장불재.
13 : 12 석불암.
13 : 27 규봉암.
14 : 40 꼬막재.
15 : 31 원효사주차장.
▲ 09시 43분 : 광주광역시 무등산 원효사주차장.
▲ 산이좋아산악회 2025년 1월 첫산행 출발에 앞서... 무등산 눈꽃세상을 기대하며 단체샷.
▲ 많이 추울거라는 일기에보와는 달리.. 여기 현장의 기상정보는 0풍속에 -1.6도로 출발한다.
▲ 무등산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서..
오늘의 산행코스는 무등산 옛길을따라 인왕봉에 올랐다가 무등산을 한바퀴 돌아오는 환종주로 결코 만만치 않은 거리다.
▲ 09시 53분 : 무등산옛길 입구.
▲ 무등산 옛길은 광주 도심에서 원효사를 거쳐 서석대까지 옛사람들이 오르던 길을 복원한 길이다.
▲ 무등산 옛길 코스는.. 목교쉼터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오름으로 이어진다.
▲ 10시 03분 : 풍암제 갈림길.
이정표를 보지않고 길바닥만 보고 가면.. 자칫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 금곡동제철유적(金谷洞製鐵遺蹟)은..
이곳은 임진왜란 때 김덕령(金德齡) 장군이 무기를 만들었던 장소로 전해져 주검동(鑄劍洞)이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1567~1596)의 의병 활동과 관련한 무기 제조창으로 알려졌다. 1992년 발굴조사결과 제철에
필요한 시설과 철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시설, 가공하는 시설이 확인되었다. 또한 쇠로 만든 화살축, 추 모양 철기, 못,
찌꺼기 등이 발견되었다. 무등산에서 철이 생산되었다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1994년 2월 18일 광주광역시의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었다.
▲ 큰 바위에 "만력계사 의병대장 김충장공 주검동(萬曆癸巳 義兵大將 金忠壯公 鑄劍洞)"이라 새긴 글귀가 있다.
만력 계사년은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1593년도다. 만력은 1573년 부터 1620년까지 사용하던 연호이고, 계사는 선조
26년 1593년으로 의병으로 활약한 시기를 뜻한다. 충장이란 시호를 쓴 것으로 보아 1788년 이후 김덕령 장군의 활약상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새긴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김덕룡장군(1567~1596)은 무등산 자락인 충효마을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여러차례 왜군을 무찔렀다.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했지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모함으로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김응남(金應南) 등
이 그의 무고를 힘써 변명하였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그의 나이 불과 29세때 였다.
▲ 10시 20분 : 물통거리.
옛날부터 나뭇꾼들이 땔감이나 숯을 구워 나르던길이었어나 1960년대에 군부대가 보금품을 나르던 나르던길로써 1980년
이후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길이다.
▲ 10시 33분 : 치마바위.
김덕령장군이 백마를 타고 서석대에서 의상봉으로 뛰어 달리는 훈련을 할때 이곳으로 떨어지는 순간 김덕령장군의 누나가
치마로 백마와 김덕령 장군을 받았다는 치마바위이다. 무등산 2봉인 지왕봉에는 김덕령장군이 수련하면서 뛰어 넘었다는
뜀바위가 있어며.. 의상봉정상 바위에도 말발굽 흔적이 있다.
▲ 11시 07분 : 목교쉼터 임도 갈림길.
▲ 목교안전쉼터.
▲ 서석대능선의 상고대.
▲ 전망대에서..
▲ 중봉너머로 광주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데.. 오늘은 곰탕이다.
▲ 살짝 보이는 장불재 통신탑..
▲ 11시 25분 : 서석대 전망대..
▲ 서석대는...
무등산 주상절리대의 일부로, 한 면이 1m 미만인 돌기둥이 약 50m에 걸쳐 동서로 빼곡하게 늘어서 있다.
육당 최남선 선생은 서석대에 저녁노을이 비치면 수정 병풍처럼 반짝인다 하여 ‘수정 병풍’이라고도 하였어며, 입석대와
더불어 천연기념물 제465호로 지정되었다.. 서석(瑞石)은 선돌의 한자식 표현으로 고대 선돌숭배 신앙의 중요한 표상이다.
서석대를 구성하는 암석은 무등산응회암이라고 명명된, 중생대 백악기 후기에 분출된 화성쇄설물이 지면으로 퇴적된 직후
뜨거운 상태에서 입자들이 서로 달라붙어 형성된 용결응회암이다.
▲ 서석대는..
조선전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고경명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서석대에 관한 기록을 이렇게 남겼다..“가까이 보면 겹겹
이 막힌 요새와 철옹성에 무장한 병사 일만명을 나열한 듯 하다.. 세속을 초월한 선비가 군중을 떠나 홀로 가는 듯하구나~.”
▲ 11시 31분 : 서석대 표지석.
여기서 인왕봉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 올것이다.
▲ 인왕봉 가는길..
▲ 올라온자에게만 주어지는 설국의 세계.. 무등산이 나에게만 주는 선물같은 그림이다.
선두그룹에서 조금 일찍 서둘러 올라왔더니.. 길위에 아무도 없는.. 오롯이 나만의 무등산이 된다. 그리고 칼바람..
▲ 바람에 실려 가는 백운이 백마능선에서 말갈퀴가 된다.
▲ 인왕봉정상석 입구..
그런데 분위기가 바뀌었다.. 2024년 4월 28일에는 정상표시가 화살표시에 있었다.
▲ 2024년 4월 28일의 인왕봉정상표시는 이러했었다.
▲ 11시 42분 : 새로 세워진 인왕봉 인증.
무등산(無等山)은 광주와 담양군, 화순군과 경계에 있는 산으로 마한 백제시대에는 무돌, 무당, 무덤산이라 불렀고
통일신라 이후 무악(武岳), 무진악(武珍岳), 고려시대에는 서석산(瑞石山), 입석산(立石山)이라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무등산이라 하였다 한다. 무등산은 산세가 유순하고 산형이 순하고 덕있게 생겼으므로 덕이 높아 차등이
없다하여 무등산(無等山)이라 하며.. 1972. 5. 22.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2. 12. 27. 국립공원으로 승격하였다.
무등산 정상은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 인왕봉만 57년 만에 2023년 09월 23일
상시 개방되었고 지왕봉 천왕봉에는 군부대가 주둔하여 통제 되고 있다.
▲ 인왕봉의 암석.
무등산 정상에 있는 세 봉우리를 삼봉, 삼왕봉, 삼황봉 등으로 부르는데... 가장 높은 곳이 천왕봉(天王峯)이고 가운데가
지왕봉(地王峯)이며, 지왕봉에서 서쪽 서석대 방향으로 내려오는 곳에 있는 봉우리가 인왕봉이다. 고경명(高敬命)의
『유서석록』에서는 지왕봉을 비로봉(毗盧峯), 인왕봉을 반야봉(般若峯)이라고 하였다. 고경명의 묘사로는 천왕봉과 지왕봉
사이의 거리는 백여 척[약 30m]이고, 지왕봉과 인왕봉의 거리는 무명베 한 필 정도로 가깝다고 적고 있다. 인왕봉은 천왕봉
의 동쪽에 있는 지왕봉의 서쪽으로 인접하여 있는 봉우리이며, 인왕봉 정상에는 주상절리가 집중되어 있다. 서남쪽으로
서석대, 입석대가 있다.
▲ 인왕봉의 칼바람에 쫏기듯.. 빠르게 내려 간다.
▲ 무등산의 칼바람도 소백산 비로봉 칼바람 못지 않게 대단하다..
▲ 바람은 카메라에 담을수가 없지만.. 억새의 굽은 허리에서 바람의 흔적을 알수가 있다.
▲ 다시 서석대 표시석에서..
인왕봉이 개방되기전까지는 무등산 정상자리를 대신 하고 있었다.
▲ 장불재 하산길이 몽환적으로.. 천상의 세계가 따로 없다. 이런 풍광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 하늘이 서서히 열리며.. 장불재가 뚜렷하고..
▲ 햇살속에 빛고을 광주시가 보인다.
▲ 안양산의 철쭉.. 낙타봉넘어 백마의 말갈퀴 같은 억새.. 만연산의 작지만 옹골찼던 암릉길이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 뒤돌아 본 서석대 길..
▲ 하산길 내내 눈을 현혹시키는 백마능선..
▲ 그리고.. 한없이 내어주던 엄니의 젖무덤같은 안양산의 부더러움.. 그 위로..한줄기 백운은 눈을 홀리기에 충분하다..
▲ 승천암(昇天巖).
옛날 이 부근의 암자에 무엇엔가 쫓기던 산양을 스님이 숨겨준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의 꿈에 이무기가 나타나 산양을
잡아먹고 승천해야 하는데 네가 훼방을 놓았다며 만약 종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너라도 잡아먹어야겠다고 했다.
얼마 후 난데 없이 우렁찬 종소리가 들렸고 이무기는 곧장 스님을 풀어주고 승천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얽힌 바위이다.
▲ 풍력발전기가 있는전남 화순의 별산 너머로 모후산도 보이고 그 뒤쪽으로는 순천 조계산도 희미히게 다가온다.
▲ 어마어마하게 큰..주상절리 파편들..
▲ 누운놈과 선놈들의 주상절리다.
▲ 입석대(立石臺)는...
임진왜란 때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광주출신의 고경명(高敬命 : 1533~1592)선생은
전라도의 유일한 문과 장원급제자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까지 무등산을 사랑하면서 선조 7년(서기1574년 ) 광주목사
임훈등과 함께 500년 전 무등산에 올라 그 유명한 무등산 산행기 유서석록(遊瑞石錄)을 남겼다.
고경명이 1574년 4월 21일에 입석대와 입석암을 바라보고 유서석록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네 모퉁이를 반듯하게 깎고 갈아 층층이 쌓아 올린 품이 마치 석수장이가 먹줄을 튕겨 다듬어서 포개놓은 듯한 모양이다.
(중략) 돌의 형세를 보니 뾰족뾰쪽 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 가운데 헤아려 볼 수 있는 분명한 것은 16개의
봉우리다. 그 속에 새가 날개를 펴듯, 사람이 활개를 치듯 서 있는 건물이 암자이다. 입석암(立石庵)은 입석대의 한가운데
자리 잡아 우러러 보며 위태롭게 솟아서 곧 떨어져 눌러 버리지 않을까 두려워서 머물러 있기가 불안하기 그지없다.
바위 밑에 샘이 두 곳 있는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지금은 주상절리의 생성과정이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지만.. 그 옛날에는 신비스러웠을 것이다.
▲ 입석대(立石臺) 아래는 암자가 있었다.
▲ 제주 바닷가나..동해안의 주상절리대와는 달리 해발 750~1187m 산악지대에 분포된 점이 특징이다.
▲ 12시 19분 : 장불재.. 대피소에서 마음에 점을찍고 간다.
▲ 장불재는 광주광역시와 화순군의 경계가 되는 해발 900m의 고갯길이다.
장불재의 유래는 문헌비고에는 장불치, 동국여지승람에는 장불동이라 적혀 있으며
"옛날 이 고개에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 장불이 있었다"하여 이 고개를 장불재라고 부른다고 한다.
▲ 장불재의 손가락 바위.
▲ 장불재의 고 노무현 전대통령.. 아!~~ 참 좋다.
▲ 장불재쉼터에서 바라본 서석대 방향.
▲ 그리고 서석대를 당겨본다..
▲ 당겨본 입석대.
▲ 12시 44분 : 규봉암방향으로..
갈길이 머니.. 서둘러 낙타봉이 보이는 쪽으로 길을 서두른다.
▲ 도원마을 갈림길.. 규봉암은 직진이다.
▲ 피안교..
아주 작은 목교에 이름이 있다..
▲ 13시 02분 : 석불암 갈림길에서..
아미티불을 알현하기위해 석불암으로 향한다.. 두 길은 규봉암 직전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 석불암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 이곳에서 바라보는 모후산도 그림이다.
모후산은.. 고려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자비령을 넘어 쳐들어오자 왕과 왕비는 태후를 모시고 안동, 순천을 거쳐 이곳
산기슭까지 피난왔다고 하는데.. 수려한 산세에 반한 왕이 가궁을 짓고 환궁할 때까지 해를 넘겨 1년여 남짓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산의 이름을 어머니의 품속같은 산이라 하여 모후산으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 지공너덜..
주상절리가 오랜 세월 풍화작용에 의해 깨어져 산능선을 타고 모인 산물로, 특이한 지형경관을 이루며, 인도 승려인 지공
대사가 이곳에서 석실을 만들고 좌선 수도하면서 그 법력으로 억만 개의 돌을 깔았다는 유래가 전해온다.
▲ 석불암 축대..
▲ 석불암 일주문...
안으로 들어가서 요사채 뒤로 돌아가면 석불사 아미타불을 모셨다..
▲ 석불암 아미티여래불은.. 1933년 일제강점기에 조성한 아미타여래이며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최근 다시 지은 것으로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작은 민가형 건물이다.
▲ 석불암 순둥이 견스님...
▲ 안쓰럽게도 다리를 하나 잃었다.. 아마도 불법 올가미에 걸렸던건 아닌지..
▲ 석불암 요사채.. 카메라를 막 들이대는 순간.. 바깥쪽 창문이 열리며 스님이.. "차 한잔 하고 가세요~~" 하신다.
들어가면 금방 나오기가 쉽지 않을것도 같고.. 해서.. "스님 대구에서 왔는데 갈길이 너무 멀어서 죄송합니다~" 라고 하니..
그러냐고.. 대구 팔공산 모 암자에서도 7년간 수도하였다면서.. 조심해서 하산하라고 하신다.. 감사합니다..
▲ 지공대사 수도처..
▲ 내부모습..
▲ 석불암에서 규봉암 가는길의 우람한 바위들이 부처님 세상에 있어서 그런지 바위사이로 순하게 길을 내어 준다...
▲ 규봉암 직진길과 다시 만난다.
▲ 규봉암 가는길..
▲ 규봉암 높은 축대.. 마치 산채를 연상하게 하는 규모다.
▲ 규봉암 일주문을 새로 조성했는가 보다..
▲ 규봉암 문바위..
▲ 규봉암 들어가는길이 원으로 되어 있다.. 음양이 없는 무극의 세상이라는 의미기 있지 않을까..
▲ 규봉암은..
1300년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절로 주위에는 삼존석. 십대 바위들이 병풍처럼 서 있는데 암자는 마치 범종이 매달려
있는 형국이라 한다. 규봉암은 무등산에 있는 조계종 사찰로 창건연대가 확실하게 전하는 문헌은 없고 신라시대 의상대사
가 창건하고 순응대사가 중창했다고 전한다. 또, 고려 초 도선국사, 보조국사가 창건하였다고도 한다.아후 6.25전쟁때
사찰이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가 1957년 관음전과 요사채를 지어 복구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규봉암은...
무등산 광석대는 서석대.. 입석대와 더불어 무등산 3대 주상절리대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우며.. 유네스코 세계지질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 광석대 돌기둥 아래에는 규봉암이 자리 잡고 있으며...
예로부터 "규봉암을 보지 않고 무등산에 올랐다 말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풍광이 빼어난 절경 중 한 곳이다.
▲ 규봉암 관음전의 풍경소리가... 청아하고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 규봉암 원통문을 나서며 바라 본 문바위...
▲ 여기서도 자칫하면 도원마을로 빠질수 있는 삼거리다..
▲ 규봉암을 지나서 부터는 너무나 착하게 거의 수평으로 이어지는 하산길이다...
▲ 그런데...하산길이 너~~~무... 엄청~~~ 멀다.
▲ 멧돼지 일가족이 눈밭에 먹을게 없었던지... 뒤집어 놓았다.
▲ 광일목장 갈림길...
▲ 14시 19분 : 북봉의 신선대 갈림길..
▲ 북봉 신선대 가는길... 아무도 가지 않았다.
▲ 당겨본 북봉의 신선대바위.
가지못하면.. 내앞으로 호출하면 된다... 별로 매리트(merit)가 없는것 같다.
▲ 다시.. 무념무상으로 걷고 또 걷고..
▲ 또 걷는다.
▲ 14시 40분 : 드디어 꼬막재 도착... 하산시간 16시까지는 충분히 도착할수 있을것 같다.
▲ 꼬막재 유래..
옛 선조들이 나들이 할 때 이용했던 중요한 길로서, 그리 높지 않고 나즈막한 재이어서 꼬막재라 불리워졌다고 한다.
▲ 꼬막재의 쭉쭉빵빵 소나무..
▲ 꼬막재에서의 내림길도 비교적 완만한 경사다..
▲ 폐업한 무등산 호텔건물이 보이고..
▲ 15시 19분 : 자연애 문을 나선다.
▲ 15시 31분 : 무등산 환종주 산행종료..
▲ 평균속도 2.7km인걸 보니.. 길은 전체적으로 순했던모양이다..
▲ 남은 시간 29분을 활용하여.. 원효사로..
▲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의 지증왕이나 법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뒤 삼국통일을 전후한 문무왕 때
원효(元曉)가 이곳에 머물면서 암자를 개축한 뒤부터 원효사 · 원효당 · 원효암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 감로정..
▲ 물에 동전을 던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중금속 오염은 어쩌라고... 잘못된 불심이다.
▲ 원효사 무등선원..
▲ 원효루를 나서며.. 정면으로 보이는 무등산..
▲ 원효사를 떠나서..
▲ 전남 담양의 메타쉐콰이어길이 이쁜 곳에..
▲ 16시 34분 : "ㅊㅍ"전통 안두부..
▲ 두부버섯전골..
▲ 산이좋아 회장님의 건배..
2025년의 첫산행을 마무리하는 산이좋아 회장님을 보며
문득.. 불광불급(不狂不及) 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각난다.
"미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라는 뜻으로..
어떤 일에 깊이 열정을 다하지 않으면 큰 성취를 이루기 어렵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여기서 "미치다"는 평범함을 넘어선 몰입과 열정이 탁월한 결과를 가져옴을 의미한다.
오늘의 무등산 환종주 산행을 무탈하게 마칠수 있음도
회장님과 산대장님의 열정과 회원님들의 노련함이 만든 결과이다..
덕분에..
무등산 설국의 눈꽃세상은..
큰 선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