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8일.
형제봉(193m) : 대구시 수성구.

 

산행코스 : 만촌역-모명재-형봉-제봉-산너머산아래-동대사-만촌역.

산행시작 : 만촌역 09시 28분.

산행종료 : 만촌역 12시 54분.

전체거리 : 약 6.66km.

전체시간 : 03시간 26분.

운동시간 : 02시간 37분.

휴식시간 : 00시간 49분.

누  구  랑 : 야대장님. 김프로. 요산. 게스트.

 

09 : 28  만촌역 출발.

09 : 34  모명재.

09 : 55  형봉.

10 : 30  제봉.

11 : 17  산너머산아래.

12 : 00  동대사.

12 : 54  만촌역 산행종료.

 

▲ 모명재 가는길..

 

오늘의 야등팀 산행은 가까운 만촌의 형제봉이다..

지하철을 타고 산행출발지인 만촌역으로 가는동안 휴대폰에서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날이니 바깥출입을

자제하라는 메세지가 연신 울린다. 오늘의 기온은 -8도에서 낮최고 -3도로 어제보다 5도가 낮아졌다고 한다.

 

만촌역 지하에서 09시 22분에 약속한 멤버들과 만나 에스컬레이트를타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데

차가운 기운이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다행히 바람이 크게 불지 않아서 산행하기에는 무난 할 것 같다.

 

▲ 명정각(命旌閣).

명정각은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1823~1893)의 효행을 알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내린 것이다.

 

▲ 모명재 입구.. 소슬대문의 현판에 "만동문"이라 되어 있다.

1592년 임진년에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은 중국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 한다.

이에 명나라는 이여송을 대장으로 임명하고 풍수전략가인 두사충을 참모로 하여 파견 된다...

이듬해인 1593년 조선의 관군과 의병...그리고 이여송과 두사충(杜思忠)이 이끈 명나라 원군은

왜군을 격파하여 평양성을 탈환한다.

 

그러나 승전의 기쁨도 잠시...경기도 고양의 벽제전투에서 왜군에게 대패한다.

패전의 책임이 진지의 구축을 맡은 두사충(杜思忠)에게 책임이 돌아가 참수하려고 하자...

 

참패의 원인이 진지 위치가 아니라 병사들의 사기 문제였다는 우의정 정탁(鄭琢)등 조선 대신들의

구명운동으로 두사충은 위기를 면한다.

조선에서 다시 태어난 두사충(杜思忠)은 전쟁이 끝나고 조선에 귀화 하였다.

 

▲ 모명재..

두사충(杜思忠)이 대구 대명동에 자리를 잡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매달 초하루에 대덕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제단을 쌓고 배례를 올렸다.

명나라를 그리워 한다는 뜻으로 모명재(慕明齋)라 하였다.

 

현재의 모명재 건물은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밑에 지은 것인데

건물이 너무 낡아 1966년에 중수하였다.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의 글씨는 이순신장군이 두사충에게 지어준 시다.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 : 두복야(복야는 두사충의 호)에 드리는 시..

북거동감고(北去同甘苦) :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같이했고

동래공사생(東來共死生) :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같이하고

성남타월야(城南他月夜) : 성곽 남쪽타향의 달밤아래서

금일일배정(今日一盃情) : 오늘은 한잔술로 정을 나누세~.

 

▲ 술잔을 나누는  이순신장군과 두사충...

 

풍수지리에 밝은 두사충 장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차례에 걸쳐 원군의 지리참모로 참전하였다.

두사충은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 출정하였으며 이순신장군이 전사하자

묏자리를 잡아 주었다고 한다.

 

특히 이순신장군이 한산도에 주둔하였을때 서로 시를 지으며 친분을 쌓았으며

이순신장군은 그때의 감회를 <봉정두복야>라는 시로 화답하였다.

 

두 장수가 전쟁중에도 나라를 떠나 군인으로써 우정을 쌓으며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고민하던 모습을 떠 올려 본다.

 

▲ 햇볕 좋은 모명재 담벼락에서 산행채비를 하고..

 

▲ 두사충의 묘를 경유한다.

 

▲ 두사충의 묘..

 

명나라 최고의 풍수가답게 죽음을 예감한 두사충은 오래전에 자신의 묘 터를 스스로 점지해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울 자리를 찾아서 형제봉 앞을 지나던 중 그만 숨을 거두게 된다.

그 바람에 두사충이 묻히고자 했던 자리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그 자리가 지금의 고산지역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그의 묘는 모명재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후손인 두릉두씨(杜陵杜氏) 역시 지금까지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 두사충이 대구에 자리를 잡은 지도 어느덧 수십 년이 흘렀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두사충 마음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대덕산(앞산)을 올랐다. 산에 올라 고향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리움이 한없이 메아리 치자 두사충은 아예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와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붙이고, 제단을 쌓아 매달 초하루 관복을 입고 명나라 황제가

살던 북쪽을 향하여 배례를 올렸다... 두사충이 배례를 올렸던 대덕산 일대는 현재까지 '대명동(大明洞)'이라

부르며, 대명동은 11동까지 있는 대구에서 면적이 가장 큰 동이 되었다.

 

▲ 형제봉 중에 형봉에 도착..

옛날에 이 산골에 힘이 장사인 남매가 살았는데, 나물 캐고 쑥 캐며 살던 남매는 하루는 산 쌓기 내기를 했다.

오빠와 누이동생은 각자 입은 옷을 이용해 산을 쌓았고, 아침에 해 뜰 무렵 산을 쌓기 시작해서 해 질 때까지

더 높이 쌓는 사람이 이기는 경기였는데 오빠는 저고리 옷섶으로 흙을 날라 산을 쌓았고 여동생은 치마폭으로

흙을 쌓았다. 저고리 옷섶보다는 치마폭이 넓었고, 당연히 동생이 더 빨리 흙을 쌓을 수 있었다. 해가 질 무렵

동생이 쌓은 산이 더 높은 것을 발견한 오빠가 심술이 나서 동생 산을 짓밟아 버렸다 한다. 이 때문에 동생이

쌓은 산은 뭉텅하게 낮아졌다는 유래가 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끝이 뾰족하고 높은 산을 형봉, 뭉툭한 산을

제봉이라고 불렀다 하며, 또한 이 제봉은 누이동생이 쌓은 산이라고 해서 매봉(妹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형봉과 제봉을 지나.. 제봉건강쉼터에서 오른쪽으로..

 

▲ 오랜만에 와 보는 곳이다.. 전라도 아지매가 그만 두면서 발길이 뜸해 졌다..

 

▲ 야대장님의 친구분께서 게스트로 참석해 주셔서.. 반가웠습니다.

 

▲ 동대사가 있는 서당지..

 

▲ 서당지와 쌍둥이 저수지인.. 옥내지..

 

▲ 동대사 입구의 호랑이상.. 동대사는 천태종 소속이다.

 

▲ 동대사 관음전.

 

▲ 동대사에서 다시 형봉으로..

 

▲ 뷔페에서 하산주 한잔..

 

▲ 역시나 웅크리기 보다는.. 무언가를 행하고자 하는이에게 길은 열린다..

오늘의 형제봉 산행이 그랬다.. 막상 산속으로 드니 곳곳에 내어주는 햇살좋은 쉼터는..

오분순한 정나눔이 되었다...

이런 것이 소소하지만 큰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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