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 18일(목).

변산반도국립공원 : 전북 부안군.

 

산행코스 : 유동쉼터-어수대-우슬재-비룡상천봉-와우봉-쇠뿔바위봉-서쇠뿔바위봉-지장봉-사두봉-부안호상류.

산행시작 : 유동쉼터주차장 10시 19분.

산행종료 : 부안호상류 15시 03분.

전체거리 : 약 8.94km..

전체시간 : 04시간 43분.

운동시간 : 04시간 15분.

휴식시간 : 00시간 28분.

 

10 : 19  유동쉼터주차장 출발.

10 : 29  어수대.

10 : 42  우슬재.

11 : 23  비룡상천봉.

11 : 34  와우봉.

11 : 44  고래등바위.

11 : 52  동쇠뿔바위봉.

12 : 44  서쇠뿔바위봉.

13 : 18  지장봉.

14 : 21  사두봉.

15 : 03  부안호 상류.

 

▲ 08시 30분 : 마이산휴게소 익산방향.

오늘은 전국이 초미세먼지 "나쁨"이고.. 미세먼지도 "나쁨"이다.

 

▲ 10시 16분 : 유동쉼터주차장.

유동마을 인근에 옥등괘벽(玉燈掛壁)이라는 명당에서 옥등에 불을 밝힐 기름이 난다 하여 유동(油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 레고블록 사자.

 

오늘의 날씨는 맑음이지만.. 공기질은 최악이다..

호흡수를 줄이라는 산대장님의 농담처럼..  호흡수를 줄이기에는 무리수일것 같아서.. 마스크로 중무장을 하고..

 

▲ 10시 19분 : 실질적으로 산행이 시작되는 어수대로 향한다...

변산반도국립공원은 1971년 12월에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대 구릉지를 중심으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수려한 

자연경관, 다양한 (육상․해상) 자연자원 및 역사문화자원의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1988년 6월 11일 에 19번째 국립공원

으로 승격되었다.. 쇠뿔바위봉 코스는 1988년 변산반도국립공원 지정 직후에 폐쇄 되었다가 2011년 5월에 재개통 되었다.

 

▲ 산이좋아 산악회의 만차.. 45명이 출발하니..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어수대길도 만원이다..

 

▲ 삼신굿당이라는 건물이 보이는 골짜기를 따라간다.

 

▲ 골담초.

꽃말은.. "청초.. "겸손" 이다.

골담초는 간의 해독 작용을 촉진하고 혈액 순환을 개선하여 간 건강을 유지하고 체내 독소를 배출하는 데 도움을 준다.

 

▲ 비가오면 어수대 위쪽의 병풍바위 중간암벽으로 흘러 내리는 폭포수가 장관이라고 한다.

  

10시 29분 : 어수대.

"동국여지지"에 신라왕 김부(경순왕)가 서쪽으로 순행하여 이곳에 이르렀다가 즐거워 돌아가기를 잊은 경순왕이 이곳에서

3년이나 머물렀다고 한다. 그래서 어수(御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르게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백제 부흥운동 당시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이곳에서 물을 마셨다는 전설이 전한다.

 

▲ 어수대옆 기생 매창의 시비.

천년 옛절에 님은 간 곳 없고..

어수대 빈터만 남아 있네..

지난 일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

바람에 학이나 불러볼까나~..

매창 이계랑(李桂娘·1573~1609)은 부안에서 태어나 서른일곱 살에 부안에서 죽었다.

허난설헌, 황진이와 함께 조선 3대 여류 시인으로 꼽힌다.

 

400여년전 조선시대 때 기생 황진이에 버금가는 기생 매창(梅窓)과 14세 때 한양에서 부안으로 방문한 천민 출신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과의 운명적인 만남과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유명하다.

경남 남해 용문사에 <유희경>과 관련한 유물이 보관 되어 있다고 한다.

 

▲ 어수대 연못.. 부안댐 물의 시원지다.

매창과 유희경은 정인(情人)이었고.. 문우(文友)요 벗이었던...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은 이곳 어딘가에 있었던

정사암(靜思庵)을 고쳐짓고 살면서 유명한 홍길동전을 집필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 쇠뿔바위봉이 처음이라는 짝지부터 챙겨주고.. 두번째 방문인 나는 통과다..

 

▲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는 우슬재 오름길이.. 초반에는 무리없이 올라가다가..

 

▲ 우슬재까지 반정도 올라온 지점에서 부터 고개를 바짝 치켜 든다...

 

10시 42분 : 우슬재..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모습으로 이곳이 소의 무릎에 해당하는 지점이어서 우슬재라고 불린다.

 

▲ 우금산 가는길은 막아 놓았다... 그래도 흔적은 있다.

 

▲ 우슬재에서 비룡상천봉으로..

 

▲ 쇠물푸레..

꽃말은... "겸손"이다.

 

▲ 우슬재에서 5~6분 진행하면서부터는.. 오름의 시작이다..

등줄기에는 육수가 흐르기 시작하고.. 마스크를 쓰고 올라가기에는 부친다.. 에라~이.. 확 벗어 버린다.

 

▲ 벗어버리는 순간... 서해 바람이 와우봉 능선을 타고 비룡상천의 기운으로 올라 온다.. 숨한번 크게 들이 쉰다.

 

▲ 우금산 우금바위..

우금바위 일원은 고려시대 문신 이규보가 쓴 기행문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와 조선 후기 문인이자 화가인 강세황이

남긴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에 기록됐을 정도로 오랫동안 사랑 받아 온 자연유산이다.

우금바위 아래쪽에 있는 동굴은 수행 공간으로 이용 되었고.. 주변에는 백제 패망 후 부흥운동이 일어난 장소로 알려진

우금산성과 삼국시대에 세워진 고찰 개암사가 있다.

 

옛날 묘연 왕이 이 골짜기에 숨어들었는데, 우씨(禹氏)와 김씨(金氏) 두 장수가 묘연 왕을 무찔렀다고 해서 우금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백제 멸망 이후엔 그 후손들이 우금암을 중심으로 우금산성을 쌓아 부흥운동을 벌인 본거지였다.

많은 역사가 서린 곳이다.

 

▲ 변산에는 2개의 옥녀봉이 있다.

 

▲ 비룡상천봉 8부능선쯤에서부터 방구돌이 나타난다.

 

▲ 내가 좋아하는 연두와 초록의 만남.. 멋진 앙상블이다. 조금 욕심을 낸다면.. 점점히 박힌 산벚꽃이 있었다면...

 

▲ 날씨가 좋았다면.. 서해 고군산군도로 가는 새만금방조제가 보일텐데.. 아쉽다.

보이는 아래 마을은 용와(龍臥)마을이다. 비룡승천(飛龍昇天)의 명당이 있다는 전설의 마을 이름이다.

 

▲ 짝지에게  비룡승천(飛龍昇天)의 에너지를 받으라고.. ㅎㅎ~

 

비룡상천봉(飛龍上天)으로 가는 능선길이 기분좋게 착하다.

 

▲ 주능선 오른쪽에 국토지리원에 명시된 비룡상천봉인데.. 조망은 1도 없는 곳이라 통과할 것이다.

 

11시 23분 : 편의상의 비룡상천봉이다.... 진짜배기 비룡상천봉은 굿바이~다.

 

11시 34분 : 와우봉.

오늘 걸어 가는 길위에는 1타 8피가 아닌 1타 8봉으로 비룡상천봉. 와우봉. 동서쇠뿔바위봉. 지장봉. 투구봉. 사두봉.

서운봉등.. 8개의 봉우리가 있지만.. 정상석 표지는 부안산우회에서 세운 정상표지판.. 이것이 전부다.

 

11시 39분 : 드디어 쇠뿔바위봉이 보인다.

 

▲ 과거에 없었던 철제 난간이 설치 되어 있다.

 

▲ 시간이 지났어도 반가운 소나무다..

과거 이 소나무 아래에서 변산의 할미꽃을 만났던 장소다.. 얼마나 이쁘던지.. 지금은 흔적도 안보인다.

 

▲ 고래등과 동쇠뿔바위봉..

 

▲ 서쇠뿔바위봉에는 전망데크가 보인다.

 

▲ 고래등을 타고 머리부분까지 오니.. 고래가 반갑다며..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만 가득하다.

 

▲ 돌아다 본 고래등..

 

11시 52분 : 동쇠뿔바위봉 정수리에 올랐다..

소의 뿔을 닮았다고 해서 쇠뿔바위라고 한다는데 정상에서는 어디가 쇠뿔인지 알 수 없다.

 

▲ 발아래 내려다 보이는 청림마을에서 보면 쇠뿔처럼 보일런지...

 

▲ "정감록"에서 명당으로 꼽은 지역인 청림마을은 변산바람꽃 자생지로 유명한 마을이다.

바듸재 인근의 굴바위에서 와룡소를 넘어 가마소를 거쳐 내변산탐방지원센터까지의 계곡이 아름다운 곳이다.

 

▲ 변산반도국립공원은 바닷가의 외변산과 내륙의 내변산으로 구분되어진다.

 

▲ 동쇠뿔바위에서 바라본 고래등바위.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변산국립공원은... 산은 산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깊고 푸른 숲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우리나라 유일의 해안과 산지를 동시에 끼고 있는 해안.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 동쇠뿔바위봉을.. 내변산 12경 중에 제1경일만큼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에서..

즐길것 즐기고 먹을것 먹고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 고래등의 바위가 만드는 아름다운 곡선이다..

 

▲ 서쇠뿔바위봉 전망대로..

 

▲ 서쇠뿔바위봉 초병에게 관등성명을 복창하고..

 

12시 44분 : 서쇠뿔바위봉 데크전망대.

 

▲ 다녀 온... 동쇠뿔바위봉.

 

▲ 하산 방향의 능선과 뱀사골계곡..

 

▲ 서쇠뿔바위봉에서 바라 본.. 의상봉..

변산반도국립공원의 주봉이며.. 최고봉이다.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다.

 

의상봉(義湘峯)은 신라 시대 의상 대사(義湘大師)[625~702]가 이곳에 의상암(義湘庵)이라는 절을 세웠다고 하여 유래한

지명으로, 동쪽 기슭에 의상암 터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상암이 신라의 승려 의상이 살던 곳

이라는 기록이 있다. 의상봉 이외에 마천대(摩天臺)라고도 불린다.

마천대라고 불리는 것은 조선 중기 허진동(許震童)[1525~1610]이 의상봉에 올라 지은 시에서 유래하였다.

 

▲ 의상봉(義湘峯)의 병풍바위에는.. 진표 율사(眞表律師)가 수도하였다고 전해 오는 암자인 부사의방(不思議方)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은 신라 때 승려 진표가 살던 곳으로 100척 높이의 나무 사다리가 있으며..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면 방장에 이를 수 있고, 그 아래는 무시무시한 골짜기라는 기록이 있다.

 

▲ 길게 누운 고래등 바위를 보고 전망대를 떠난다.

 

▲ 전망대로 갈때에는 수문장처럼 보이더니.. 나올때는 "미어캣"처럼 보인다.

 

▲ 서쇠뿔바위봉의 거대한 직벽의 위용...

 

▲ 예년에 비해 단풍잎이 건강하고 깨끗한걸 보니.. 올가을 단풍은 아름다울것 같다.

 

13시 09분 : 동초재..

 

13시 16분 : 지장봉..

 

▲ 지장봉 아래를 우회하여.. 지장봉 하단부로 이어진다.

 

▲ 지장봉 하단부에서 뒤돌아본 쇠뿔바위봉.

 

▲ 우람한 포스의 지장봉..

 

▲ 불가에서의 지장보살은...

부처 입멸 후부터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의 부처 없는 세상에서 육도의 중생을 교화한다는 대비보살이다.

 

▲ 참으로.. 자연의 오묘함이여...

부처없는 사바세계의 전설을 지장보살에게 고하고자 함인가.. 거북이 한마리 기를쓰고 올라가는 모습이다.

 

 당겨 본 돌거북..

 

▲ 여기서 보니 멀리 사두봉이 우뚝하고.. 아직도 가야할길이..아련하다..

 

▲ 지장봉 암벽사면을 보니.. 빗자루로 쓸어 내린듯 하다.

 

13시 35분 : 새재 갈림길..

 

▲ 청림마을 탈출로를 확인하고.. 사두봉으로..

 

▲ 의상봉 남쪽사면과 삼각봉..

 

▲ 쇠뿔바위봉과,, 지장봉...

 

13시 54분 : 투구봉..

 

▲ 투구봉에서 사두봉 오름길이.. 오늘의 등로중에 가장 힘들게 하는 구간이다.

 

▲ 가파른 구간에서도 쉬어가라며 내어주는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의상봉..

 

▲ 구름다리 같은게 보여서..

 

▲ 당겨 본 의상봉..

 

▲ 넘어가는 고개 마루인줄 알고 꾸역꾸역 올라왔더니...

 

▲ 헐!~~ 사두봉 오름길이다..

사두 라면.. 뱀머리 사두(蛇頭)일까?.. 배암머리처럼 대가리를 바짝 쳐들고 있다.

 

14시 21분 : 사두봉 정상..

세상사가 그렇다.. 아는것 만큼 보이고... 올라간 만큼 멀리 넓게 보인다.. 막힘 없는 조망이 완전 압권이다..

 

▲ 남쪽방향에서 보이던.. 삼예봉 덕성봉도.. 어느새 북쪽으로 가 있다.

 

▲ 육안으로는 부안호의 윤슬이 반짝반짝 빛이 났는데.. 미세먼지로 반감되었다.

 

▲ 동물 이동 관찰카메라...

내 모습도 잘 찍혀야 될텐데... 폼 한번 잡아주고..ㅎㅎ..

 

▲ 바람길이 너무 좋은 쉼터에서..

 

▲ 천년 방구돌과.. 소나무.. 그리고 그림깉은  부안호..

 

▲ 서운봉 갈림길..

 

▲ 부안호 상류.. 청송의 주산지에 버금가는 그림이다.

 

 15시 03분 : 산행 종료..

주어진 하산시간 15시 00분에서 3분 초과다..

 

이 자리는 내가. 과거에 12년간 몸 담았던 모 산악회의 산대장이 플라스틱 막걸리 말통을 개조하여 수도꼭지를 달아서

하산 하면 꼭지를 틀어 시원한 막걸리 한사발을 드리키던 그 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오늘은 시원한 맥주 주신분.. 감사합니다.

 

▲ 운동시간... 4시간 15분.. 깔끔한 시간이다.

 

▲ 후미팀을 기다리며.. 하산지점에서 약 90m후방에 있는...

 

▲ 와룡 허익선생충의비를 둘러 본다.

조선 인조때 사람으로 1636년(인조14년) 12월부터 1637년 1월 조선과 청나라의 싸움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을

하였으나.. 조선이 청나라에 굴복하여 치욕을 당하자.. 이에 비분강개하여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곳 부안에 은거하였다.

 

▲ 다시 부안호를 둘러보고 나니 후미팀들도 무사 귀환이다.

 

14시 15분 : 칠0꽃게장..

전북 부안군 진서면 곰소항에서.. 기분좋은 만차에 하산식도 기분좋게 팍팍~ 쏜다고 한다..

 

▲ 만차 탑승에 산대장님의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 갔는가 보다.. 당당한 어깨가 멋집니다..ㅎㅎ~

 

▲ 곰소항의 꽃게탕과.. 갈치쪼림(?).. 김치.. 다.. 맛있다.. 역시나 남도의 음식은 다르다..

 

쇠뿔바위봉.. 좀 심하게 뻥을 치면.. 한국의 그랜드 케년이고..

미세먼지가 "옥의 티" 였지만... 내변산 12경 중에 제1경일만큼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

언제 와도 좋은 맛집같은 진국인 "쇠뿔바위봉"에서.. 즐김의 기억은 새로운 추억의 앨범에 갈무리 된다.

 

그런데..

5월에 말레이시아 키나발루산행후..

6월의 두방산 산행을 끝으로 산대장직을 사임하겠단다.. 이런이런~ ㅠㅠ...

해서.. 세번이나 간.. 두방산 첨산이지만.. 마음접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참석해서..

수고했다고 손이라도 잡아 주어야겠다.

2024년 04월 04일(목).

선운산 : 전북 고흥군.

 

산행코스 : 삼인학습장입구-문학비공원-형제봉-노적봉-구황봉-안장바위-청룡산-천마봉-선운사-선운사주차장.

산행시작 : 삼인학습장입구 09시 54분.

산행종료 : 선운사주차장 16시 09분.

전체거리 : 약 16.51km..

전체시간 : 06시간 15분.

운동시간 : 06시간 06분.

휴식시간 : 00시간 09분.

 

09 : 54  삼인학습장입구.

10 : 00  문학비공원.

10 : 36  형제봉.

10 : 49  노적봉.

11 : 05  구황봉.

11 : 48  안장바위.

12 : 01  병풍바위.

12 : 49  비학산.

13 : 00  희어재.

14 : 02  청룡산.

14 : 42  천마봉.

15 : 48  선운사.

16 : 09  선운사주차장.

 

▲ 09시 54분 : 삼인학습장입구.

 

▲ 구황봉능선을 가로지르는 "풍천터널"을 배경으로..

시속에서 통칭하는 "산꾼"이 아닌.. 공인기관에서 인정해 주는 "산꾼"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호칭이 있다면..

그 호칭을 부여받을 자격이 충분한.. 전문 산꾼들이 모인 대구 화랑산악회의 4월 산행은 고창 선운산 자락에서 출발한다.

 

▲ 단체 인증을 마치고.. 삼인안전 체험관쪽으로..

 

▲ 삼인종합학습장.

2018년에 폐교된 삼인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하여 고창군 안전체험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 삼인초등학교운동장은 폐교후 조각공원이었다가.. 지금은 문학비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 공원 안쪽으로 가면..

 

▲ 산행 시그널이 달려있는 곳이 산행 들머리다..

 

10시 08분 : 구황봉 갈림길..

공원에서 약 6~7분정도 오르면 구황봉 주능선에 닿게 되고.. 왼쪽은 오계봉으로 가는 길이다.

 

▲ 능선에는 소나무와 산죽이 엉켜있지만 길은 잘보이고 양호한 편이다.

어제는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고.. 오늘의 고창은 흐림이고 오후 3시경에 0.1mm의 비가 예보되어 있다.

 

10시 36분 : 형제봉 도착.

 

▲ 잘 빠진 형제봉의 명품송도 올려다 봐주고.

 

▲ 진행 방향의 노적봉과 구황봉을 가늠해 본다.

 

10시 49분 : 노적봉.

산이름 작명가인.. 서래야님의 코팅지가 무사히 달려 있는걸 보니.. 산이름과 현재 위치가 부합 되는가 보다.

맞지 않으면 후답자들이 가차없이 떼어 버린곳을 많이 보았다. ㅠㅠ~~..

 

▲ 구황봉 오름길의 방구돌에...

 

▲ 바위에 각자가 되어있는 글자가 보여 가까이 다가가 보니.. 위에서 부터 용산오국(龍山吳國)주씨양(主氏陽)이다..

가로로.. 세로로 아무리 읽어 보아도.. 도대체가 영문을 알수 없는 글이다..???..

 

▲ 바위 위에 올라가 본다.

 

▲ 구황봉 바로 아래의 구암마을에 있는 "병바위" 와 "소반바위"가 보인다.

 

11시 05분 : 구황봉 정상에는 산성인지 알수없는 돌담이 보인다...

 

구황봉을 중심으로 정상 주변에는 9개의 암벽과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 구황봉을 지나자 말자 급내림이더니...

 

▲ 바로.. 조망이 좋은 구황봉 탕건바위가 기다린다.

 

▲ 가야할 능선에 선바위와 안장바위가 기다린다..

 

▲ 당겨본 선바위.. 여기서보면 하나의 바위지만..가까이 가보면 두개다.

 

▲ 탕건바위를 내려와서.. 조망이 없어서 패쓰했던..인경봉 내림길과 만나고..

 

▲ 곧 이어..주 등로에서 살짝 비껴있는 선바위로 간다.

 

▲ 가까이 다가서면 우람한 몸집의 선바위가 두개로 나뉘어져 있다.

 

▲ 선바위에 둥지를 튼 소나무가 12년이 지난 지금도 푸르다.. 자연의 경이로움이다..

키도 몸집도 키우지 말고 그모습 그대로 천년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합장으로 기원하며 돌아선다.

 

11시 24분 : 도솔제 갈림길..

 

▲ 늪지를 지나면서 부터..

 

▲ 안장바위가.. 어서 오라며 머리를 내밀어 주는데 오름이 제법 가파르다.

 

▲ 도솔제의 물빛이 푸르다 못해 시퍼렇다..

 

▲ 오름길에 주변경관을 둘러보는 사이에...

 

▲ 안장바위가 가까워 졌다.. 안장바위는 두개의 바위로.. 건너편의 사자바위능선에서 보아야 안장처럼 보인다.

 

▲ 뒤돌아 본..구황봉.

누구나 삶에 지치고 힘들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산행도 그렇다..

 

▲ 두개의 안장바위에서 첫번째 바위로.. 이리로 가면 올라갈수가 있다..

 

▲ 두번째 안장바위... 올라가 본다.

 

▲ 구암마을의 거북바위.

흐려서 아쉽지만.. 안장바위 전망대에서 본.. 구암마을의 병바위와 소반바위.

전설에 의하면 선동마을 뒤 선인봉의 선인이 반암뒤에 차일을 치고 잔치를 하고 있는 집에서 술에 몹시 취해 버렸다.

만취한 선인이 일어서면서 한발로 소반을 걷어차자 소반 위 술병이 굴러 떨어져 주진천에 거꾸로 꽂힌 것이 병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 이쪽에서 평범한 바위지만..

 

▲ 지나와서 돌아다 보면..이런 모습이다... 노승바위라고도 하고.. 일명 해골바위라고도 한다.

 

▲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여주인공 "오드리 햅번"이 사자(동상)입에 손을 넣고 화들짝 놀라는 장면이 생각난다.

 

12시 01분 : 병풍바위에서..

 

▲ 비학산 아래.. 삼천굴도 가늠하고..

삼천굴은 백제 의자왕이 삼천궁녀와 함께 피난 왔다는 굴이다. 전설을 뒷받침 하듯이 골짜기 이름도 삼천골이다.

 

▲ 멀리 운곡저수와 화시산 능선과...

 

▲ 구암마을을 내려다 보며.. 에너지 보충을 한다.

 

▲ 왕복 400m의 삼천굴을 다녀 오고 싶지만.. 오늘의 산행거리가 너무 멀다.. 아쉽지만 통과다.

 

▲ 비학산 오름길에 만난 단독주택..

 

12시 49분 : 비학산..

빛바랜 표지판이 "준.희"님을 대신하여 근무에 충실하고 있다.

 

▲ 급경사의 비학산 내립길... 습기 머금은 바위가 미끄럽다.. 조심조심..

 

▲ 내려다 본 희어재...

왼쪽은 아산면 월성에서 오는길이고.. 오른쪽은 도솔제로 이어 진다.

 

13시 00분 : 희어재...

희어재는 고창군 아산면 월성에서 선운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무장면 해리쪽에서 선운사로 가는 이 고개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을 지니고 있다.

 

선운사 사내 암자인 참당암을 지을때 새끼를 월성 마을에 맡겼다. 절을 지으면서 새끼를 가지러 가니 그제서야 짚을 추리고

있지 않은가? 당장 써야 할 새끼를 이제야 꼴 채비를 하고 있으니 낭패다. 발을 동동구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새끼 머리를 꼬아 주면서 끌고 가라고 했다. 충분히 쓸 수 있도록 대어 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월성에서 새끼를 꼬고 참당암에서 끌어당겨 썼기 때문에 고개가 닳고 닳아 희어져서 "희어재"라고 한다는 것이다.

월성에서 새끼를 고아 댄 사람은 도인이었던가 보다.

 

▲ 쥐바위쪽으로...

 

▲ 쥐바위 오름길에 내려다 본 아산면 월성... 아래 가운데 보이는 축산농가 앞에 이정표가 있다.

 

▲ 지나온 비학산...

 

▲ 청룡산으로 이어지는 쥐바위능선... 암릉구간에 우회로가 있다..

 

▲ 당겨 본 암릉구간...

 

▲ 부처님의 옆얼굴 같다...

다소 먼거리의 산행길에 부처님의 가피로 무사무탈로 산행을 마치게 하여주옵소서!~~.. 

 

▲ 기암..

 

▲ 는개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마음은 바빠지고.. 그럼에도.. 쥐바위 너머로 배맨바위가 살짝 보여서...

 

▲ 당겨 보니... 영락없는 거북이다...

 

▲ 걸어온 길... 멀리도 왔다..

 

▲ 암릉구간...

는개비에 바위가 미끄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전을 생각하고 우회로로 갔더니.. 완전 낭패다.

 

▲ 조금만 내려가면 되겠지... 했었는데...

 

▲ 이런 제기... 끝없이 내려갔다가 올라간다.. 안전하게 가려다가 판단 착오다.. 후답자분들은 우회하지 마시길..

 

▲ 국기봉 아래 갈림길에서 국기봉은 통과하고 청룡산으로...

 

▲ 가야할 쥐바위에 선답자들이 보인다....

 

▲ 도솔저수지로 가지 않고 도솔암으로 바로 가는 길이다... 계속 청룡산으로 고고~..

 

▲ 쥐바위 오름길의 돌탑.. 12년만의 해후다.. 반갑다..

 

▲ 짙어진 는개비에 세상이 온통 회색이다...

 

▲ 쥐바위...

 

▲ 쥐바위 천길 단애... 아차하면 영영~ 저차 된다..

 

▲ 습기에 바위가 미끄럽다...

 

▲ 천천히 안전하게..

 

▲ 쥐바위 아래의 기암...

 

▲ 14시 02분 : 청룡산...

 

▲ 이곳에 처음 올라온 동료만 찍어주고 나는 패쓰...

 

▲ 선운사쪽으로...

 

▲ 가야할 천마봉과 낙조대...

사진상으로는 표시가 안나지만.. 배맨바위에서 천마봉까지가 은근히 지루한 구간이다.

 

▲ 달팽이귀신 바위라고...

 

▲ 배맨바위...

 

14시 42분 : 천마봉...

 

▲ 천마봉에서 내려다본 도솔암과 마애불과 내원암...

 

▲ 마애불도 당겨서 모시고...

 

▲ 사자바위를 향해 기어가는 애벌레..

 

▲ 천마봉에서 도솔암으로 바로 내려가는 데크계단...

내림 난이도가 원주치악산 사다리병창만큼이나 급경사다.. 패쓰하고.. 조금 돌더라도 용문굴쪽으로 간다..

 

▲ 낙조대에서 용문굴로..

 

14시 57분 : 용문굴..

 

▲ 도솔암과 내원궁 갈림길..

 

▲ 천마봉에서 내려오는 계단길..

 

▲ 선운사도솔암마애불(磨崖如來坐像)보물 제1200호.

백제의 위덕왕이 선사 검단(黔丹)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을 조각하고, 그 위 암벽 꼭대기에 동불암(東佛庵)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 장사송(천연기념물  제354호)..

장사송이라는 이름은 과거에 이곳이 장사현에 속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장사송은 적송으로 큰 가지가 여덟으로 갈라져 우리나라 8도를 상징하는 듯 하다.

 

▲ 진흥굴..

신라 24대 진흥왕이 말년에 부인과 중애공주와 함께 수도를 하였다는 "진흥굴"이다...

 

▲ 진흥굴안에서 바라본 모습..

 

▲ 도솔천의 물이 검게 보이는 이유는 도토리의 타닌 성분 때문이라고 한다.

 

▲ 연리목..

 

▲ 청송 주왕산의 주왕굴 입구의 급수대 바위와 비슷하게 보인다...

 

▲ 선운사 쉼터..

도솔제와 투구바위 능선 갈림길이기도 하다..

 

▲ 선운사 동백나무 숲..

선운산은 동백숲으로 유명하다.  4월에는 동백꽃과 벚꽃, 진달래꽃이 한데 어우러져 흐드러지게 핀 장관을 볼 수 있다.

동백숲(천연기념물 184호)은 선운사 뒤쪽 5천여평의 산비탈에 수령 5백년을 자랑하는 동백나무 3천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춘백으로도 불리는 선운사 동백은 가장 늦게 핀다.하동의 매화가 지고난 4월부터 꽃봉오리를 터뜨린다.

절정은 4월 하순, 선운산 동백은 4월초부터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여 5월초순까지 피어나 선운사 뒤쪽 동백숲은

꽃병풍을 두른 듯 장관을 연출한다.

 

미당 서정주는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라고 늦은 동백을 노래하고 있다.

 

▲ 선운사.. 그 천년의 세월을 붙들고 살아온 담쟁이..

 

▲ 선운사 천왕문..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

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선운사 만세루..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기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선운(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 선운사 영산전 뒤편의 동백숲..

선운사 동백나무는 사찰 창건당시 동백열매의 기름을 등유로 사용하기 위하여 식재한 것으로 추정되며... 동백나무숲은

선운사 대웅전으로부터 400m 지점 뒷산에서부터 시작하여 대웅전 뒷산을 병풍처럼 둘러쳐 16,500㎡에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 북방에 위치하고 있는 자생지로 학술적 연구자료가 되어 1967년 2월 11일 천연기념물 184호로

지정되었다.

 

▲ 5월 15일 부처님 오신날의 준비로.. 스님들이 대웅전앞에 연등달기를 하고 있다.

 

▲ 선운산 아래 선운사 경내를 나서며... 선운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도솔산(兜率山)이라 하였으나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禪雲寺)가 유명해지면서 선운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일주문에는 도솔산 선운사로 되어 있다.

 

▲ 송악을 보려고 갔더니.. 도솔천이 범람하여 건너 갈수가 없다.

 

▲ 송악(천연기념물 367호)..

고창 삼인리의 송악은 줄기의 둘레가 80cm에 이르고 높이가 15m.. 내륙에 자생하는 송악중에서 가장 큰 나무로 짧은 가지

끝에 여러개가 둥글게 모여서 달린다.  약용으로 쓰이는 송악은 본래 따뜻한 지역에서만 자라는 늘 푸른 덩굴식물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남부의 섬이나 해안지역의 숲 속에서 주로 자라며, 동해는 울릉도까지, 서해는 인천 앞 바다의 섬들까지

퍼져 있다.  그러나 내륙에서는 이곳이 송악이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이다.

이 나무 밑에 있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속설이 있으며.. 소가 잘먹는다고 하여 "소밥나무"라고도 한다.

 

15시 09분 : 선운사 주차장 산행 종료..

 

▲ 16.5km.. 오랜만에 많이 걸었다. 평균 속도 2.7km.. 꽤나 괜찮은 성적이다.

 

16시 39분 : 선운사 주차장에서 약 3~4분 거리의 서ㅇㅇ식당(풍천장어)에서..

 

▲ "힘좋아탕" 으로.. 속을 달랜다.

바로 옆 테이블에 계신 산여울 선배님이 일행 네분과 소규모 건배를 하시는데.. 건배사가 재미 있다.

선창... 가자가자 뿅가자!~...

후창... 뿅가자!~~...  이 건배사를 다른데 가서 써먹어야 겠다..ㅎㅎ..

 

▲ 당분간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의사의 말대로.. 얼른 한그릇 뚝딱하고 밖으로 나오니.. 식당 바로 뒤가 주진천이다.

"풍천장어"는 전북 고창군을 흐르는 주진천과 서해가 만나는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부근에서 잡히는 뱀장어를 가리킨다.

"풍천장어"라는 명칭의 유래는 한 두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지역주민들은 주진천을 풍천강이라고 부른다. 민물에서 7~9년 성장하다가 산란을 위해 태평양으로 회유하기 전

바닷물과 민물이 합해지는 풍천강에서 장어가 많이 잡혀서 풍천장어라는 이름이 붙었다..

두번째.. 주진천에 하루2번 바닷물이 들어오는데 자연산 장어가 바닷물과 바람을 함께 몰고 들어온다고 해서 바람풍 자와

내천 자를 써서 풍천장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 여기서 차로 7~8분 가면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서해 바닷가가 나온다. 선운리는 미당 서정주 선생의 생가다.

바다 쪽 갯벌이 간척되기 전, 바닷물은 지금보다 훨씬 내륙 안쪽으로 들어 왔다고 한다.

 

빼어난 경관을 만끽 하고자 설레임으로 다시 찾은 선운산..

받쳐주지 못하는 흐린 날씨에 아쉬움도 컸지만...

무사무탈 완주산행을 마친 하루에 감사하다..

2024년 03월 21일(목).

동석산(219m) : 전남 진도군 지산면.

 

산행코스 : 하심동마을-미륵좌상굴-칼능선전망대-동석산-석적막산-큰산-큰애기봉-세방낙조주차장.

산행시작 : 하심동마을쉼터 11시 11분.

산행종료 : 세방낙조주차장 14시 49분.

전체거리 : 약 6.07km. .

전체시간 : 03시간 38분.

운동시간 : 03시간 29분.

휴식시간 : 00시간 08분.

누  구  랑 : 산이좋아산악회 따라서...

 

11 : 11  하심동마을 출발.

11 : 44  미륵좌상굴.

11 : 59  칼능선전망대.

12 : 13  동석산.

13 : 09  석적막산.

13 : 48  큰산.

14 : 03  큰애기봉전망대.

14 : 49  세방낙조주차장.

 

10시 33분 : 진도대교를 건너서..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과 진도군 군내면을 연결하는 다리인 진도대교는..

길이 484m, 너비 11.7m, 왕복 2차로의 한국 최초의 쌍둥이 사장교(斜張橋)이다. 1980년 착공하여 1984년 완공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울돌목 해협은 조류가 거세어 당시의 국내 기술력으로는 해상구조물 시공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에 영국 RPT사의 설계 및 감리 아래 양쪽 해안에 교대와 교각 등 하부 구조물을 설치한 한 후 콘크리트

교각 위에 높이 69m의 강재주탑을 세우고 케이블로 교량 상판을 지지하는 사장교를 건설하였다.

 

 11시 09분 : 동석산이 올려다 보이는..

 

▲ 하심동 마을 쉼터에 도착하여..

 

▲ 11시 11분 : 산행채비를 하고 출발..

 

산행 들머리에 있는 종성교회는..

산행지 입구라는 입지적 조건으로.. 전국의 산꾼 들에게는 가장 많이 알려진 교회일 것이다..

 

▲ 종성교회 입구를 지나면 여기가 공식적인 동석산 산행들머리다.

 

▲ 봄은 왔으되 봄 같지 아니한 춘래불사춘이라 했던가...

이번주 들어서 기습적으로 몰아친 꽃샘추위로 봄의 전령사 진달래도 움츠리고 생기가 없다..

 

▲ 칼날같은 나아프릿지 암릉으로 구성된 틈새바위를 지나면..

 

▲ 본격적인  암벽구간이 시작 된다.

 

▲ 처음으로 나타나는 철계단에서 좌측의 조망 좋은 바위에 올라..

 

동석산이라는 이름은 "구리 동(銅), 주석 석(錫)"자로서.. 그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 천길 단애에 매달린 소나무애개.. 격려의 눈맞춤으로 안아 준다.

 

▲ 심동저수지 너머로 돈대산의 추억과 도리산 전망대의 일품 조망이 아름다운 상.하조도가 보이고 그 뒤쪽으로는

세번을 다녀 왔어도 그 풍광이 더욱 새록새록해 지는 관매도를 떠 올려본다.

 

▲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동석산의 모습은 서남쪽의 조도에서 보면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 조망을 끝내고 계단을 오르면서 뒤돌아보니..

 

▲ 지나왔던 조망바위에는 동료들이 아직도 풍광을 즐기고 있다.

 

▲ 아찔히게 수직으로 이어지는 암릉은 거칠고 위험해 보이지만 발디딤이 좋아서 난간대를 잘 잡으면 쉽게 오를수 있다.

 

▲ 오른쪽 바위 상부에 미륵좌상굴이 보인다..

 

▲ 당겨본 미륵좌상굴.. 조금후에 다녀올 것이다.

 

▲ 예전에 비하면 안전시설이 보완되어 있어서 별다른 위험성은 없다.

 

▲ 첨탑을 오른다..

우리들은 산을 보고 산을 오른다.

그러나 산이 나를 불러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산을 오르고 싶은 욕구가 솟아 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수 없는 힘의 욕구... 그것은.. 곧.. 내가 살아있는 생명력인 것이다.

 

▲ 지나온 암릉과.. 안전계단.. 안전시설이 전혀 없었던 초창기에는 오로지 밧줄 하나에 매달려 올라 왔었다.

 

▲ 그리고.. 올라가야 할 암릉..

 

▲ 그 암릉을 배경으로.. 나도 암릉의 일부가 된다.. 사진 담아 주신분 감사합니다.

 

▲ 아래쪽의 미륵좌상굴 가는길..

 

▲ 내려와서 보니 역시나 급경사 내림이다.. 그래도 다들 잘도 내려온다..

 

▲ 오른쪽 천종사쪽으로 약100m가량 내려간 지점의 바위에 미륵좌상굴이 있어 다녀온다.

 

▲ 11시 44분 : 미륵좌상굴(일명 : 중업바위)..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 암굴에 수도승이 한명 살았다고 한다.

 

이 굴에서는 신기하게도 한사람이 먹을수 있을 만큼의 쌀이 매일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수도승은 먹을 식량걱정이 없으니 탁발도 다닐 필요도 없이 늘 태평한 얼굴로 항상 기름기가 자르르 흘렀다.

동네사람들은 보릿고개마다 먹을거리가 떨어져 모두가 피골이 상접한데도 이 수도승은 탁발도 안다니면서 얼굴은

늘 기름져 있어서 동네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딜가나 궁금증은 못참는 사람들이 꼭 한두명은 있는법이다. 이동네도 그런사람이 한사람 있어서 어느날 몰래

그 스님의 동태를 살피는데... 이윽고 밥지을 시간이 되자 이 스님은 중업바위의 굴속에서 쌀을 담아 오는것이 아닌가?...

 

이 동네사람은 혼자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몰래 들어가서 그 구멍엘 가보니 쌀이 한줌밖에 나와있질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 구멍속을 후벼 팠더니 더이상 쌀은 안나오고 대신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지 않은가?....

깜짝 놀란 이사람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가다가 그 바위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후로 그 수도승도 시름시름 앓다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는데.. 지금도 한 종지의 물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 미륵좌상 암굴위 전망대.

 

▲ 미륵좌상 암굴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석산 정상쪽.

 

▲ 지나온 암릉...

 

▲ 아래쪽의 천종사(千鐘寺)...

천종사(千鐘寺)라는 이름은 "세찬 바람이 거대한 바위산 양쪽 골짜기로 불어와 바위에 부딪히면 마치 천개의 종소리가

나는 것처럼 들린다."라고 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초간단 미니발판..

 

▲ 억겁의 시간 저편에서 급격하게 식어버린 화산암..

 

▲ 시간의 무정함이여~~.. 잎은 없어도 무성한 잔가지들이 파란하늘 도화지에 그림을 만들어 주던 나무였는데..

이제는 해풍에 앙상하게 뼈만 남았다.. 언젠가는 너도 쓰러지겠지..

 

▲ 동석산정상이 670m남은 지점에서 등로를 살짝 벗어나서..

 

▲ 낡은 밧줄과 링이 있는 암벽을 타고 올랐다가 다시 내려 와야 한다..

 

▲ 링을 붙잡고 기어이 올라가는 이유는... 바로.

 

▲ 동석산 하일라이트.. "칼날능선"을 보기 위함아다.. 병풍같은 바위 두께가 1m도 안되기에 지나갈수는 없다.

저기를 건너 간다는 것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사람일것이다..ㅎㅎ

이곳 진도군의 119구급대에는 이런 애기도 있다고 한다. 경남 사량도의 <옥녀봉>도 험하지만.. 떨어지면 살아날 확율도

있어서 구급차가 쏜살같이 달려 가지만.. 동석산에서 떨어졌다고 하면 100% 사망이라.. 구급차가 천천히 간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동석산이 위험 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 다시.. 링이 없는쪽의 릿지를 타고 내려온다... 보기 보다 미끄럽지는 않다.

 

▲ 동석산 정상 방향으로..

 

▲ 동석산 칼날능선으로는 갈수가 없기에 왼쪽으로 우회한다.

 

▲ 동석산 칼날능선의 위용..

 

▲ 칼날능선을 병풍삼아..

 

▲ 바로가면 동석산 정상가는 길이 편안하고.. 오른쪽은 다소 품이 들어가는 전망이 좋은 길이다.. 당근 오른쪽으로..

 

▲ 칼날능선.. 조금전에 올랐던 방구돌에서 반대편으로 왔다.

 

▲ 동석산 정상이 지척이다..

 

12시 13분 : 동석산 정상인데... 이럴수가..

 

헐!~~.. 이럴수가.. 불과 3년만에 동석산 지킴이 소낭긔가 말라 버렸다.

 

▲ 2020년 8월 1일의 그날과는 너무나 다르다.. 저렇게 푸르고 싱싱했었는데..

 

▲ 가야할 석적막산과 애기봉 능선..

 

▲ 머리위에 드론이..

 

▲ 12시 21분 : 동석산 바로 아래에서.. 서해를 바라보며.. 마음점을 찍는다.

 

▲ 능선을 따라서 잘가고 있는데 조자룡같은 초병이 수하를 하며 길을 막고 가학마을 쪽으로 돌아서 가라고 한다.

 

▲ 오른쪽으로 우회 하여..

 

▲ 잠시 착한길을 따라 가다가 능선에 올라서니..

 

▲ 이번에는 장비같이 험상궂게 생긴 초병이.. 왼쪽으로 우회하라고 한다.

 

▲ 칼날능선의 위용에 버금가는 우람한 암릉이다..

 

▲ 올려다 보니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다..

 

▲ 암릉이 바람을 막아주어 따뜻한 우회로에 무언가 기다릴것만 같은 예감이다...

 

▲ 예감은 적중이다.. 봄처녀 "제비꽃"이 수줍은듯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둘러보아도 다른 야생화가 안보인다..

제비꽃의 꽃말은... "순진한 사랑"... "나를 생각해주오" 이다..

 

▲ 척박한 바위 꼭대기에도 생명을 이어가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 척박한 바위에서의 나무는 물한방울 이라도.. 지나가는 구름 한조각 이라도.. 모두 생명을 이어가는 중요한 것들이다.

 

▲ 바위에 코가 닿을 정도로 가파르다..

 

▲ 우회한 암릉의 뒷모습이다..

 

▲ 저 바위봉이 삼각점봉이다.. 초창기에는 저기가 동석산 정상인걸로 알았었다.

 

▲ 전에는 직등으로 암릉을타고 올라갔었는데... 일주일전에만 왔어도 올라갔을텐데..ㅎㅎ..

 

▲ 길을 걷다가 보니 혼자다...

노자(老子) 왈.. 지지불욕(知足不辱)이면.. 지지불태(知止不殆)라 했다..

"만족을 알면 모욕 당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라는 말이다.. 아서라 말어라 안전한 길로 가자..

 

▲ 아마도.. 동석산 전구간을 통털어서.. 발디딤이 제일 난해한 곳으로.. 여기가 제일 난코스였던 곳인데

지금은 안전발판이 설치 되어 있다...

 

12시 56분 : 삼각점봉.. 정상석은 없고 텅빈 자리를 삼각점이 외로히 지키고 있다..

동석산은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으로 새벽 동이 틀 무렵이면.. 도포를 입고 지팡이를 쥔 노승이 불공을

드리다가 사라진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동석산의 암릉이 마무리 되어가는 아쉬움인가?... 지나온 암릉길을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 가야할 석적막산과 큰애기봉을 다시 가늠해 본다..

 

▲ 언젠가 저 산봉들을 타볼려고 하다가 무산된 일이 있다..

 

▲ 동석산 삼각점봉을 지나서부터는 등산로 환경이 육산으로 바뀐다..

 

▲ 석적막산 오름길의 전망바위에서 마지막으로 동석의 암릉을 뒤돌아 본다..

 

▲ 13시 09분 : 석적막산..

 

▲ 석적막산과 동석산 암릉..

 

▲ 석적막산을 지나면서부터는 소사나무 육산길로 편안하게 이어 진다.

 

▲ "현호색".. 신비의 색깔이 아름답다..

꽃말은... "빛나는 마음".. "보물주머니".. "비밀".. "희소식" 이다.

 

▲ 동석산에서도 귀한 인연을 만났다.. "노루귀" 다..

노루귀의 꽃색은... 흰색.. 분홍색.. 보라색.. 파란색 등으로 다양하며.. 꽃색에따라 꽃말도 다르다.

흰색 노루귀의 꽃말은... " 순결" 과.. "순수함" 이다..

 

▲ 분홍색 노루귀의 꽃말은..

"애정".. "다정함".. "보살피는 사랑" 이다.

 

▲ 정말 그렇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이제막 피우기 시작하는 "산자고".. 너도 그렇다..

 

13시 30분 : 가학마을 갈림길..

 

▲ 큰산(일명.. 작은 애기봉) 오름이 장난아니게 가파르다...

 

▲ 큰산에서 바라본 큰애기봉...

 

▲ 때로는 역광의 진달래 꽃잎이 이쁘다...

 

▲ 콩자개덩굴...

 

▲ "흰색노루귀" 군락을 만난다..

 

"산자고"의 꽃말은... 가녀린 미소다..

산자고에서 자고(慈姑)는 자비로운 시어머니라는 말이다. 

이 식물이 산자고라 불리게 된 데에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홀로 삼남매를 키운 여인이 있었는데, 딸 두 명을 시집보내고 막내아들만 남았지만 하도 가난해 아무도 시집을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해 봄날 한 처녀가 보따리를 들고 나타났다. 물어보니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다가 아버지가 죽자

유언에 따라 그곳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 처녀를 며느리로 삼았다... 그들은 아주 행복했지만 사람들이

부러워했기 때문일까? 그만 며느리가 등창이 나고 말았다... 날로 고름이 심해졌으나 돈도 별로 없고 마땅히 의원을 찾아

갈 수도 없이 보내다가 어머니가 우연히 산에서 이 꽃을 발견해 며느리의 등창이 난 곳에 발랐더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뒤로 이 작은 꽃을 산자고라 부르게 되었다.

 

▲ 현호색..

혼자 걷지만 혼자가 아니다.. 야생화가 덤으로 주는 선물에.. 쪼그리고 앉아서 꽃잎 가까이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는 이맛에

나는 어느새 자연과 하나가 되어 간다.. 꽃잎 하나마다 품고있는 작은 세상의 색깔이 너무 황홀하다.

 

▲ 13시 57분 : 전망대 갈림길..

 

▲ 14시 03분 : 큰애기봉 전망대..

큰애기봉 바로 아랫마을의 가치리(加峙里)는 한때 200여호의 큰 동리였기에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고 그 동쪽 외진 곳에

개들샘이란 유일한 공동우물이 있고 마을 앞 지척에는 원뚝이라는 포구(浦口)가 있었다.
지금은 간척지가 된 당시의 그 원뚝 포구는 진섬, 가사도, 사자도, 손가락섬, 발가락섬, 굼섬 조도 등지에서 모여든 어선

들로 언제나 북새통을 이루어 비릿한 생선냄새와 술 익어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큰애기봉의 전설>

그런 세월의 어느 날 가치리 부잣집 정씨네 집에서 담살이(가정부)를 하던 순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하며
우물길에 나선지 벌써 몇 번 째
 집안의 물항아리는 이미 차고 넘쳤건만, 귀신에 흘린 듯.. 총각 선원 하나가 빨래를 하는 그

우물을 들락거리는데 열 일곱 순이는 총각의 복쟁이 마술에 걸렸던 것이다 

그런 순이 맘을 벌써 간파한 총각이 불쑥 말을 건넸다.

 

"총각"ㅡ 거시기말여.. 큰애기는 참말로 이쁜디.. 이름이 머여?'
"순이"...ㅡ 근디 남자가 먼 빨래를 요로콤 많이도 헌다요?'
"총각" ..'응 나는 아부지와 단 둘이 사는디 섬에는 물이 귀하잔여ㅡ'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총각의 입에서  '순이 우리 언제 어디서 한 번 만나자 우리 아부지는 순이 같이 착하고 이쁜 며느리

를 바란당께ㅡ'... 순이는 터지기 직전의 가슴을 움추리며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때 저ㅡ만큼서 수다쟁이 각제네가 오고 있었다  '순이 어서 대답해ㅡ 누가 오고 있응께 말여'
'응 쩌ㅡ그.. 저 봉우리'.. 너무 다급한 나머지 순이는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지금의 큰애기봉을 가르켰던 것이다..

 

그 다음 날부터 순이는 나무하러 간다는 핑개로 약속 장소인 그 봉우리를 오르내리기 시작 했다
그러나 그 총각 선원은 죽었는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본래도 호리호리하던 순이의 몸매는 그리움에 날로
가을 날 억새

풀이 말라가듯 매말라 갔다.. 동네엔 들불처럼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불쌍한 순이가 귀신에 흘려 미처간다는 소문에..

파도가 허옇게 이랑지기 시작하는 늦 여름에 주인은 쓸모 없는 순이를 내어 쫓았다, 

날로 순이의 모습은 가치리에서 사라지고 그해 섣달. 이웃 마을 사냥꾼이 봉우리에 올랐다가 칠흑 같은 댕기머리에

소복을 입은 처녀가 하염 없이 섬들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왠 큰애기여ㅡ' 하며 처녀의 어깨를 흔들자 그녀는 그만 눈사람처럼 폭삭 무너지고 말더라는 것이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이 봉을 큰애기봉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변덕을 떠는 바다처럼 바람 같은 뱃사람

말을 철석 같이 믿었던 순이야말로...큰애기봉의 정령이요, 혼백이요, 메아리임이 분명 하다며...
수많은 등산객이 찾아와 큰애기봉의 전설을 담고 간다..

 

▲ 세방낙조 인근의 섬들에는 재미난 전설이 전해 온다..

낙조가 잘 보이는 지력산 동백사에 한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석양 무렵, 노을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학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스님도 학들을 따라 지력산으로 날아올랐다.

그런데 수행이 부족해 학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만 바다에 추락하고 말았다. 이때 스님의 장삼(長衫) 위에 걸치는 가사가

떨어진 곳은 가사도(加沙島), 장삼이 떨어진 곳은 장삼도, 바지가 떨어진 곳은 하의도, 상의가 떨어진 곳은 상의도,

발가락이 떨어진 곳은 양덕도, 손가락이 떨어진 곳은 주지도, 심장이 떨어진 곳은 불도(佛島)가 되었다는 것이다.

 

▲ 올망졸망 고만고만한 섬들이 그림이 되어준다...

 

전망대에서 동남쪽의 여귀산..

 

▲ 하산지점인 낙조전망대를 확인하고 나서..

나 또한 시원하게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소리에서... 큰애기 순이의 흔적을 찾아 보았다 마는.. 허공에 흩어지는 애잔한

마음을 전망대에 남겨 두고 나그네는 발길을 돌린다.

 

 14시 13분 : 세방낙조전망대 갈림길로 다시 돌아와서..

 

▲ 개별꽃...

꽃말은..."귀여움"이다.

 

▲ 동백숲 군락지인데 급경사 내림길이다.

 

바알갛게 멍들었다는 동백꽃은..

무슨 사연이 그리 많아 헤일수 없이 수많은 밤을 그리움으로 지새웠을꼬~.

 

▲ "분홍색 노루귀"..

 

▲ 봄까치(일명 개불알꽃).. 꽃말은..."기쁜 소식"이다..

 

▲ 임도를 가로질러.. 세방 낙조 전망대로 간다.

 

▲ 3년전 까지도 있었던 8각정이 무슨 연유로 사라졌다.

 

▲ 큰애기봉을 올려다 보니 전망대에 사람이 보인다.

 

▲ 당겨본 발가락바위..

 

▲ 손가락바위..

 

14시 49분 : 세방낙조 주차장이 나오고 오늘의 산행은 마무리 한다.

 

▲ 트랭글을 정리해 보니.. 암릉길은 암릉길인가 보다.. 평균속도가 1.7km다..

약속된 하산시간이 16시까지 인데 1시간10분 가량 일찍 내려왔어니.. 그만하면 양호한 편이다.

 

▲ 주차장 아래쪽의 세방낙조 전망대를 둘러 본다.

진도 해안도로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세방낙조 전망대" 에서 내려다보는 다도해의 경관은 압권이다. 

이곳에서 보는 낙조는 환상적이다... 해질 무렵 섬과 섬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일몰의 장관은 주위의 파란 하늘을 단풍보다

더 붉은빛으로 물들인다...라고 한다

 

▲ 조류의 흐름이 빠르다.. 저런곳에 빠지면 어른 장정도 속수무첵으로 빨려 간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악마의 조류라고 하는 맹골도가 있다.. 세월호가 침몰한 곳이다..

 

▲ 윤슬이 아름다운 각흘도 저 너머에 맹골도와 세월호의 아픔이 있는 방향이다.

 

▲ 진도타워..

 

▲ 진도대교 밑의 명량해협 울돌목..

좁은 해협의 물살이 빨라서 마치 물이 우는듯 하다 해서.. <울돌목>이라 불리우며... 또한.. 울돌목은 이 충무공의 3대 해전

중의 하나인 명량대첩지로.. 1597년 정유재란떄 <이순신 장군>이 빠른 물살을 이용해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무찌른 역사의 현장이다..

 

16시 39분 : 진도대교 인근의 "임ㅇㅇ한정식 뷔페식당" 에서..

 

▲ 원거리 산행에서 오는 기분 좋은 피로감을 내입에 맞는 음식물로만 듬뿍 담아서 먹고 마시고 속을 풀고 달랜다.

 

▲ 산이좋아 회장님의 건배.. 산이 좋아라.. 사람이 좋아라~~..

 

작지만 암팡지고 옹골찬 동석산의 암벽을 넘어면서 스쳐간 풍광들은

용아장성의 비주얼에 버금가는 암릉 능선이었고 다도해의 일품 조망은시원한 안구정화 였기에.

세번째 오른 동석산이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다시오고 싶어지는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무엇보다.. 동석이가 내어준 야생화와의 만남은 덤으로 받은 희열이었다.

2024년 03월 10일(일).

천은사 상생의길 / 화엄사 홍매화 / 산수유마을 : 전남 구례군.

 

탐방코스 : 천은사주차장-청류계곡-천은사-수홍루-보듬길-누림길-천은사주차장.

탐방시작 : 천은사주차장 10시 02분.

탐방종료 : 천은사주차장 11시 11분.

전체거리 : 약 3.87km. .

전체시간 : 01시간 08분.

운동시간 : 01시간 08분.

휴식시간 : 00시간 00분.

누  구  랑 : KJ산악회 따라서...

 

10 : 02  천은사 상생의 길 출발.

10 : 05  나눔길 입구.

10 : 14  청류계곡.

10 : 25  천은사.

11 : 11  천은사주차장.

 

▲ 10시 02분 : 전남 구례군 천은사 주차장 출발.

 

▲ 천은사(泉隱寺)입구.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828년(흥덕왕 3)에 덕운대사가 창건했는데 극락보전 앞뜰에

있던 샘물이 감로와 같다고 하여 감로사라고 했다. 875년(헌강왕 1) 도선대사가 중축한 이래 여러 차례 중건. 중수했다.

숙종때.. 단유선사가 절을 중수할 무렵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였으므로 이에

한 스님이 용기를 내어 잡아 죽였으나 그 이후로는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

 

샘의 물이 자취를 감추자 절이름을 "샘이 숨었다"라는 뜻으로 천은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은 했지만 절에는 여러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마을사람들은 입을 모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하였다.

 

얼마 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절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이광사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 한 필체(水體)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대로 따랐더니 신기하게도 이후로는 화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 천은사 일주문..

현판은 동국진체를 완성한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자 양명학자인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이광사는 추사 김정희와 얽힌 일화로 유명한데.. 원교가 해남 대흥사의 대웅보전 편액을 쓴 후, 이를 본 추사 김정희가

촌스럽다고 떼어 내라고 하고 자신의 글씨로 대신하게 했다. 제주도 귀양을 마치고 돌아온 추사는 다시 대흥사에 들러

"이광사의 글은 부족함이 없는 명필" 이라 말하고 자신이 쓴 현판을 내리고 창고에 있던 원교의 현판을 다시 걸게 했다.

 

천은사는 tvN에서 2018년 24부작으로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세 코스로 구성된 "천은사 상생의 길" 중에 먼저.. 나눔길을 역순으로 걷고 천은사로 내려 올 것이다.

 

▲ 조금후에 만나게 될.. 천은사 수홍루.

 

▲ 왼쪽은 명상쉼터로 가는 데크길.. 직진은 천은사로 이어지는 나눔길..

 

▲ 명상쉼터에는.. 중년의 부부가 선점을 하고 있다.

 

▲ 청류계곡을 건너는 목교..

 

▲ 천은골 청류계곡..

 

▲ 수령 300년 이상이라는 천은사 보호수..

 

▲ 천은사 관음전.

 

▲ 천은사 관음전의 천수천안십일면 관세음보살상..

중생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무엇이든 보고 들으며.. 어느 곳에든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베푼다는 관세음보살상이다.

 

▲ 천은사 관음전 뒷쪽 옹벽에 서옹스님의 휘호가 있는 "수처작주"라는 글씨가 박혀 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당나라 임제선사의 임제록에 나오는 말로

"가는 곳마다 주체가 되라, 지금 서 있는 곳이 모두 진리의 세계다"..라는 의미다..

 

▲ 천은사 팔상전.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그린 팔상도를 봉안한 전각이머... 1774년에 지어졌다.

 

▲ 천은사 팔상전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이 단독으로 모셔져 있다.

 

▲ 천은사 포대화상.

포대화상이 앉아 있는 바위는.. 멧돼지가 바위로 변하여 마을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복돼지 바위다.

포대화상의 본명은 "계차"로 항상 포대자루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포대화상이라 불렸고, 배가 나오고 대머리가 특징이다.

 

▲ 천은사 극락보전.

천은사(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5호)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로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사찰 중의 하나로 꼽히고.. 신라 때 창건된 고찰이다. 신라 중기인 828년(흥덕왕3)에 인도의 덕운(德雲) 스님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명산을 두루 살피던 중 지리산에 들어와 천은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어나.. .창건주에 대한

기록은 밝혀진 바가 없어 그 시기와 유래를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절은 더욱 번성하여 충렬왕 때(1275~1308)에는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지정되었다.

그후 계속해서 많은 수도자가 진리의 광명을 터득하는 수행처로서의 역할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절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고,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등의 병화를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는 등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극락보전에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주인으로서 중생들의 왕생극락을 인도하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으며

오른쪽은 관세음보살, 왼쪽은 대세지보살 등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편액은 일주문 편액을 쓴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천은사 회승당.

단청이 없고, 퇴색된 나무 벽으로 되어 옛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회승당 툇마루 한켠에 자리 잡은 범종에는 한국전쟁 때 생긴 조그마한 총알자국이 있다는데 확인을 못하였다.

 

 천은사 명부전에는 주존으로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고,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다.

 

 천은사 보제루.

"보제"는... "모든 중생을 두루 제도한다"라는 뜻이다.

사찰의 중심 불전 맞은편에 있어, 법요식 같은 행사 장소 또는 강당의 역할을 한다.

 

 천은사 보제루 내부.

"무량수각"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전국 사찰에 이 글씨체의 모각 편액이 많이 걸려 있다.

무량수각은 아미타불을 봉안한 극락보전의 다른 이름이다.

 

 천은사 보제루 현판.

원교 이광사의 제자로 조선 후기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1770~1847) 선생의 글씨다.

창암 선생은 19세기에 붓하나로 호남서단을 평정한 인물이다. 병중에도 하루에 천 자 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벼루를

세 개 구멍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닳아 없앴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추사 김정희, 구눌 조광진(1772~1840)과 함께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손꼽히는데..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서예를 연마했다고 한다.

 

 천은사 범종각.

 

 천은사 천왕문으로 올라가는 삼도보계다.

"삼도보계"란 세 줄짜리 보석 계단이란 뜻으로... 석가모니가 도리천에 머물고 있는 어머니(마야부인)을 뵈러 올라가 석 달

동안 설법을 한 후, 하늘에서 사다리같이 생긴 세 줄짜리 보석 계단으로 내려왔는데, 이 때 양옆에 제석천과 범천이 같이

내려왔다고 한다. 그래서 불국사.. 범어사.. 화엄사 등에 삼도보계를 상징하는 삼도계단이 있는 것이다.

 

 천은사 수홍루.."수홍(垂虹)" 이란... "무지개가 드리워져 있다"라는 의미다.

피안교 위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2층 누각형태로 세워진 수홍루는 조선 영조 때 건물입니다. 많은 분들이 여름과 가을에 수홍루 뒷편의 다리에서 수홍루와 천은제를 함께 찍는 인생샷을 남겨 가십니다. 특히, 일몰 모습이 장관이라고 합니다.

 

수홍루에서 바라본 천은사 저수지. 아래쪽에 무언가 보여서..

 

 물을 다스리는 신장인가 보다..

 

 피안교 위에 세워진 수홍루는 조선 영조 때 건물이다.

 

수홍루 지붕을 잘라버린 인증샷...ㅠㅠㅠ..ㅎㅎ~

많은 사람들이 여름과 가을에 수홍루 뒷편의 다리에서 수홍루와 천은저수지를 함께 찍는 인생샷을 남기는 곳이라고 해서..

젊은이에게 부탁하였더니.. 아쉽게도 지붕을 날려 버렸다... 바로 확인을 해보고 다시 찍어 달라할걸~..ㅎㅎ

사진의 주제는 아름다운 누각인 수홍루이고 나는 수홍루의 손님이다..

 

▲ 수홍루에서 시계역순으로 가기위해.. 매점 옆으로 간다.

 

▲ 천은사 상생의 길.. 두번째 구간 보듬길이다.

2020년 12월에 천은사.. 환경부.. 국립공원공단.. 전라남도 등 8개 관계기관의 협력 끝에 천은사 문화재입장료 징수 폐지를

기념하고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공존하는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나눔길, 보듬길, 누림길 3개 구간에 총 3.3km로 조성

한 산책로를 말한다. 아름다운 일이다.

 

▲ 그 전에는 천은사로 들어오는 입구에 매표소가 있어서 천은사 탐방객과 노고단 등산객에게도 "문화유산지구 관람료"를

받았었는데, 이제는 모두 폐지되어 무료 입장이다. 이 곳 문화재 관람료를 가지고 대중과 마찰이 생긴 내용의 소재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에서 다뤄지면서 더욱 유명세를 타기도 하는 곳이다.

 

▲ 천은사 산문 바깥 쪽에는 방장산 천은사로 되어 있고.. 여기서 부터는 상생의 길중에 세번째 구간인 "누림길" 이다.

 

예로부터 지리산은 방장산으로도 불렸다. '방장'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1장(丈, 3.3m) 크기의 정사각형 방이란 뜻으로

덕이 높은 승려의 처소나 큰 수행 도량의 최고 어른을 이르기도 한다. 천은사 산문의 앞·뒷면의 편액은 호남 서예가

학정 이돈흥(1947~2020) 선생의 글씨다. 학정 선생은 송곡 안규동 선생에게 서예를 배웠고, 원교 이광사, 추사 김정희,

송곡 안규동으로 이어지는 호남 서예를 대표하는 21세기 한국 10대 서예가 중 한 분으로 손꼽히고 있다.

 

▲ 산문 안쪽에는 천은사 이름 앞에는항상 따라붙는 수식어 "남방제일선찰"이라 되어 있다.

고려 충렬왕 때 "남방제일선찰"로 지정된 게 그 유래다.

 

▲ 다시. 천은사 일주문을 통과..

 

2022년 12월에 보물로 지정된 구례 천은사일주문은 하동 쌍계사의 일주문과 유사한 모양이며, 그 모습이 화려하여

"아름다운 일주문" 으로 평이 나 있다. 일주문의 문지방이 목재가 아닌 석재로 되어 있는 것은 우리나라 사찰 중 유일하다.

 

▲ 천은사 부도탑..

 

▲ 천은사 감로천.. 그 옛날의 감로수라 생각하고..한바가지 시원하게 마시고...

버스에 승차하여 화엄사 홍매화를 만나러 간다.

 

▲ 11시 30분에 천은사 주차장을 출발하여.. 11시 45분에 화엄사입구 회차장에 도착..

 

▲ 11시 45분 : 화엄사입구 회차장에 도착하니..

아래쪽 주차장까지 태워다 주는 무료셔틀버스가 관광객들을 태우고 있다.

 

화엄사 일주문인데.. 양쪽으로 담장이 있는게 특이하지만.. 사연이 있다.

편액은 선조의 아들 의창군 광(珖)의 글씨로.. 지리산화엄사는.. "지혜가 뛰어난 산속에 화엄경을 모신 사찰" 이다.

임진왜란 때 주지 설홍스님 등 300여명의 스님이 구례의 길목 석주진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부 전사하였고.. 왜군이 화엄사

전각을 모두 불태웠다. 그래서 일주문에 대문과 담장을 만들어 중생에게는 문을 활짝 열고.. 관리들의 수탈과 왜적의 침략

으로부터 지키기위해 문을 굳게 닫았다.

 

▲ 화엄사 일주문에서 오른쪽의 대문도 성문처럼 굳게 만들어 놓았다..

 

▲ 화엄사 홍매화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찾아온 수많은 상춘객들로 절집 마당이 가득하다.

문화재청은 2024년 1월 24일 대한불교조계종 지리산 대화엄사의 홍매화 1주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이번에 지정된 홍매화는 화엄사 각황전(국보) 옆에 있는홍매화 사진 찍기 대회 대회가 매년 열리고 있으며..

올해 4회 대회 2월 25일부터 3월 23일까지 홍매화와 들매화 사진 콘테스트가 있다.

수상작 발표는 4월 23일 오전 9시에 화엄사 홈페이지와 BBS불교방송에서 발표하고 시상식은 부처님 오신날에 발표한다..

 

▲ 화엄사 초입의 오른쪽에 분홍에 가까운색의 홍매화가 있다...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그 홍매화가 아니다.

 

이 홍매화는... 분홍에 가까운 색이다.

 

화엄사 3지혜.. 첫번째는 불견이다 : 남의 잘못을 보려 하지 말라.

 

▲ 화엄사 3지혜.. 두번째는 불문이다 : 남의 말에 일희일비 하지 말라.

 

▲ 화엄사 3지혜.. 세번째는 불언이다 : 남을 비방 하지 말라.

 

▲ 화엄사 벽암국일도대선사비... 구례 화엄사 중창의 주역인 벽암대사의 탑비다.

대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했었고..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성도 지었다고 한다.

 

▲ 화엄사 금강문..

금강역사와 문수.. 보현동자가 있는 사찰의 대문이다.

 

▲ 좌측의 "밀적금강" 은 금강저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으로.. 항상 입을 닫고 "훔"소리를 낸다고 하여

"훔금강역사"라고도 한다...우측의 "보현동자"는 보현보살이 동자로 화현한 것으로 코끼리를 타고 있으며, 실천과 자비의

상징이다..

 

▲ 좌측의 "문수동자"는 문수보살이 동자로 화현한 것으로 사자를 타고 있으며.. 지혜의 상징이다.

우측의 "나라연금강" 은 천상의 역사로서 그 힘이 코끼리 100만배로 항상 입을 벌리고 "아"소리를 낸다고 하여

"아금강역사" 라고도 한다.

 

▲ 화엄사 중흥비와 영세불망비.

 

▲화엄사 천왕문.

금강문을 지나면 바로 만나는 천왕문은 사천왕상을 모신곳이며 건물의 배치는 약간 비틀어져 조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찰의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라고 한다.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 사는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이 되었다. 구례 화엄사의 사천왕상은

극히 정교하고 아름답게 조성되었다. 특히 머리장식이 화려하고, 목의 머플러는 거의 현대적 감각으로 꾸며져 있다.

 

▲ 화엄사 사자문. 스님들의 수행처인데 열려있다.

 

▲ 화엄사 법고루와 당간지주.

 

▲ 화엄사 보제루.

 

▲ 구례 화엄사 대웅전(보물 제299호)과 동 오층석탑(보물 제132호).

화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華嚴宗)을 선양하였던 사찰이다.

 

▲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보물 제133호).

 

▲ 구례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

부처님은 스스로 깨닫고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므로 "각행원만불"이라하여 "각황(覺皇)" 이라고 한다.

숙종 임금이 "각황" 이라는 이름을 주고.. 형조참판 이진휴의 글씨라고 한다.

 

▲ 구례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과 석등(국보 제12호).. 둘다 국보급이다.

 

각황전 앞 석등은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의상대사가 조성하였으며, 높이가 6.36m로 우리나라 석등 중에서 가장 크다.

각황전과 조화를 위해 크게 조성했으며,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밝혀 지혜로 이끈 부처님의 다른 모습을 의미한다.  현재는

오염물제거, 파손부재 접합, 복원 등 작업을 위해 해체하여 보존처리 중으로 2025년 6월 이후에나 볼수 있다고 한다.

 

▲ 구례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

각황전은 팔작지붕에 다포양식으로 단청은 없지만, 매우 화려한 느낌을 주며, 외부는 중층구조이나, 내부는 위 아래가 트인

통층 구조다. 법주사 대웅보전.. 마곡사 대웅보전.. 무량사 극락전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불전중의 하나다.

각황전이 있기전 통일신라 때는 4.6m나되는 석가모니를 모시는 3층의 장육전이 있었고, 사방벽에 화엄석경을 둘러 깨달음

의 세계가 장엄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 숙종 때 계파대사가 4년에 걸쳐 중층건물로 재건하였다.

 

▲ 구례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불단.

중앙에 석가모니불과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에 다보불이 모셔져 있고.. 좌우로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적보살,

관세음보살이 모셔저 있다.

 

▲ 구례 화엄사 각황전 내부 불전.

 

▲ 적멸보궁 가는길.. 각황전 왼쪽으로 올라간다.

 

▲ 108계단을 오르다가 뒤 돌아본 각황전.

 

▲ 108계단에서 올려다본 명품송.

 

▲ 견성전(적멸보궁) 가는길의  4사자상(국보 제35호)과 석등.

 

▲ 구례 화엄사 견성전(적멸보궁).

 

▲ 적멸보궁.

부처님 사리탑을 볼 수 있는 통창이 있고.. 불상은 모셔져 있지 않다.

 

▲ 견성전(적멸보궁) 4사자상(국보 제35호)과 어머니상(가운데).

 

▲ 확대해본  4사자상(국보 제35호)과 어머니상.

4사자삼층석탑은 2층 기단에서 희노애락 표정의 4마리의 사자가 머리 위에 탑을 이고 있고, 탑안에는 합장을 하고있는

어머니상이 조각되어 있다. 자장율사가 연기조사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높이 5.5m의 불사리 공양탑이다.

 

연기조사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효대(孝臺)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의 풍경이 한폭의 그림이다.

 

▲ 석등..

연기조사가 탑을 향해 무릎을 꿇고 탑을 이고 있는 어머니를 향해 차 공양을 하는 모습을 조각한 석등 조각상이다.

 

▲ 다시 108계단을 내려와서..

 

▲ 각황전에서 바라본 대웅전 마당.

신라말 후삼국시기에 화엄종은 해인사 중심의 북악파(왕건)와 화엄사 중심의 남악파(견훤)로 나뉘었는데, 견훤의 패배로

화엄사의 주인이 바뀌면서 신도들은 수행 중심의 각황전이 아닌 예불 중심의 대웅전으로 오게 된다.

각황전과 대웅전이 한 사찰에 두개의 대법당이 공존하는 사찰이 되어.. 이러한 가람 배치를 통해 조화를 이루게 한 것이다.

 

▲ 드디어..  문화재청이 2024년 1월 24일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홍매화를 보려고 왔는데 10%도 안 핀것 같다.

 

홍매화는 조선 숙종 때 계파선사가 장육전이 있던 자리에 각황전을 중건하고 기념하기 위해 심은 나무다.

화엄매라고도 불리는 이 매화나무는 꽃과 열매가 다른 재래종보다 작지만 꽃향기는 그보다 더 강하다고 한다.

봄이면 아름다운 꽃과 향긋한 향기로 화엄사에서 인기있는 명물이라고 한다.

 

▲ 천연기념물 지정 공식명칭은 "화엄매" 이다..

아쉬움에 먼저 핀 화엄매 하나를 접사로 찍어 보았는데.. 잘 나온것 같다.

 

▲ 각황전을 배경으로..

 

▲ 다음주 17일(일)을 넘어서야 만개할것 같다..

 

▲ 발걸음이 쉽게 떼이지 않는 아쉬움에 만개 했을때의 모습을 다른 블로거님에 사진을 빌려 왔다.

 

▲ 화엄사 원통전..

 

▲ 화엄사 원통전 불단..

원통전에는 관세음보살이 협시보살 없이 홀로 모셔져 있다.

 

▲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

사자탑은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조성한 것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감로수를 받들고 있고, 네모난 돌에는 사천왕이

조각되어 있다... 네 마리 사자의 얼굴에는 인간의 희, 노, 애, 락을 표현하고 있다. "4사자 감로탑" 으로도 불리운다.

 

▲ 화엄사 대웅전..

대웅전 편액은 인조의 숙부인 의창군 광(珖)이 썼다.. 원래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주존으로 모신 법당을 말하는데..

이 곳은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모시므로 "대적광전" 이나 "대광명전" 이라고 썼어야 되는데.. 대웅전이라고 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한다고 한다.

 

▲ 화엄사 대웅전의 목조 비로자나 삼신불 좌상(국보 제336호).

중앙에 법신 비로자나불이 지권인을 하고 계시고, 우측에는 보신 노사나불이 우리나라에서 는 유일하게 보관을 쓰고 손을

펼친 설법인을 하고 계시며, 좌측에는 화신인 석가모니불이 항마촉지인을 하고 계신다. 위 삼신불은 1635년 청헌스님 등

18분의 스님이 조성하였으며, 위계에 맞추어 비로자나불은 3.8m, 노사나불은 3.7m, 석가모니불은 3.5m로 조성하였다.

후불탱화는 18세기 유명한 의겸스님이 참여해 조성하였다.

 

▲ 화엄사 대웅전 불전 내부..

 

▲ 화엄사 영전.

영전에는 의상대사, 자장율사, 도선요공선사, 대각국사 의천, 서산대사 등 역대조사들의 진영을 모셔 놓은 곳이다.

 

▲ 화엄사 영전에서 뒷쪽으로 화엄사의 또 다른 천연기념물인 "들매화"를 보기위해 화엄사 산내 암자인 구층암으로 간다.

 

▲ 화엄사 구층암과 삼층석탑...

 

▲ 화엄사 들매화는 구층암 바로 뒤에 가는길이 이어진다.

 

▲ 화엄사 들매화는 2007년 10월 7일에 천연기념물 제485호로 공식지정 되었다.

 

▲ 화엄사 들매화가 만개하고 연못에 만수가 되면 물에 비치는 반영도 아름다울것 같다.

 

▲ 돌아가는길에 구층암 뒤 툇마루에 기둥이 예사롭지 않다. 죽은 모과나무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기둥으로 썻다고 한다.

 

▲ 화엄사 삼전.. 화엄사 주지스님의 거소라고 한다.

 

▲ 정면의 각황전과 우측의 화엄사 대웅전을 보며.. 나가는데..

 

▲ 화엄사 대웅전앞 계단에서 스님의 설법을 경청하고 있다.. 단체복인걸 보니.. 탬플스테이 인가보다.

 

▲ 화엄사 화산학림.

 

▲ 화엄사 성보전(박물관)에 잠시 들른다..

 

▲ 화엄사 성보전 마당의 사자상.

돌사자상은 일본 도쿄 영친왕의 신축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화엄사 4사자 삼층석탑의 사자를 모방하여

일본 조각가가 제작하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화엄사에서 위탁관리 하게 되었다고 한다.

 

▲ 지리산 화엄사 탐방을 마치고 일주문을 나선다.

 

▲ 화엄사 주차장까지 무료로 태워다주는 셔틀버스를 타면 5분이면 가지만.. 줄서기가 귀찮아서 걸어간다.. 약30분 예상..

 

▲ 화엄사 방장교에서 걷기 시작..

 

▲ 화엄석경관을 새로 조성하는 모양이다.

 

▲ 화엄사 부도탑.

 

 

▲ 화엄사 일주문.

안쪽(좌측사진)에는 "해동선종대가람"이라 되어 있고.. 바깥쪽(우측사진)에는 "지리산대화엄사"라 되어 있다.

 

▲ 화엄사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올라가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14시 00분 : 화엄사 주차장을 출발하여 산수유축제장으로 가는길이 엄청 밀린다...

 

▲ 15시 03분 : 화엄사 주차장에서 산수유축제장까지 평일같으면 20여분이면 올거리인데 길이 막혀 가다서다를 반복한다.

내려서 걷기로 한다..

 

▲ 차와 상춘객들이 서로 엉켜 완전 북새통이다.

 

▲ 그런 와중에도 사브작사브작 걷다가 보니..

 

▲ 메인 축제행사장이 보인다.

 

▲ 어떤가수인지는 몰라도.. 산수유 같은 노랑치마 저고리가 이쁘다..

 

▲ 전망대가 있어 올라가 본다..

사람에게 이리저리 치이고 북적대는것 보다는 위에서 휘들러 보는게 상책이다.

 

▲ 지리산 종석대가 올려다 보이는 구례군 산동면의 마을 전체가 온통 노랑의 물결이다.

 

▲ 메인행사장쪽...

 

▲ 지나왔던 분수연못.. 완전 개화는 다음 주중쯤이 절정일것 같다..

 

▲ 칭얼대지 않고 혼자서도 잘 노는 착한 나도 인증샷 해주고...

 

▲ 사랑공원이라는 곳을 찾아서..

 

▲ 사랑공원의 산수유꽃 조형물..

 

▲ 사랑공원 제일 높은곳에 전망대가 있다..

 

▲ 언젠가 산행중에 만복대 아래 상위마을로 내려왔던 케케묵은 추억도 소환해 보고...

 

▲ 성삼재~고리봉~만복대~정령치를 이어가던 산행의 추억도..

 

▲ 방호정 입구..

 

▲ 방호정은..

일제강점기에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을 시로 달래는 시 모임을 위해 지리산 자락에 지은 작은 정자이다. 구례 운조루를

건립한 유이주의 후손 유형업이 1935년 지인들과 뜻을모아 세웠으며 방호산의 이름을 따 방호정이라 하였다.

 

▲ 구산공원에서 계곡의 물을 찾아 내려오는 거북이들을 보며 봄나들이를 마친다...

 

많은 수량의 사진과 긴글 보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4년 01월 25일(목).

황산 : 전북 남원시.

 

산행코스 : 동편제마을주차장-황산대첩비-송흥록생가-국악성지-황산-피바위-부층탑-동편제마을주차장.

산행시작 : 동편제마을주차장 10시 43분.

산행종료 : 동편제마을주차장 13시 43분.

전체거리 : 약 7.21km.

전체시간 : 03시간 00분.

운동시간 : 02시간 30분.

휴식시간 : 00시간 30분.

 

10 : 43  동편제마을주차장 출발.

10 : 50  황산대첩비.

10 : 54  송흥록생가.

11 : 07  국악성지.

11 : 54  황산.

12 : 45  서무마을이정표.

13 : 07  피바위.

13 : 17  부층탑.

13 : 43  동편제마을주차장.

 

 10시 43분 :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동편제마을주차장.

 

▲ 북모양의 동편제마을 표시.

 

▲ 초기에는 동편제마을 방문자센터였었는데.. 지금은 베이커리 카페 개업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 국창 박초월선생.

 

▲ 람천을 건너는 대첩교.

 

▲ 람천의 대첩교위에서 바라본 황산..

람천은 운봉읍 세걸산 아래 금샘에서 발원하여.. 황산의 피바위를 지나 경남 산청에서 남강이라는 이름으로 흘러가다가

진주 진양호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 대첩교를 건너면 바로 보이는 황산대첩비 전경.

황산대첩은..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9월 이성계가 사령관으로 있던 고려군이 현 전라북도 남원인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

에서 기세가 절정에 오른 왜구 무리와 싸워 압도적인 대승을 거둔 황산전투는 같은 해 8월 진포대첩, 1376년 홍산대첩과

함께 고려 말 왜구를 격퇴시킨 3대 대첩으로 불린다..

 

황산대첩비로 가기전에 먼저 황산대첩에 대해 알아보고 가자.

1380년 경신년(庚申年). 고려 신우(우왕) 6년 음력 9월. 호남평야에 추수가 막 끝났을 무렵. 일본열도와 대마도, 고려 남해

바다에 산재해 있던 왜구는 500여 척의 대규모 전선(戰船)을 이끌고 군산 앞바다에 이르렀다. 그리고 금강 하구 진포(鎭浦)

에 배를 대고 참혹한 약탈에 들어갔다. 왜구들이 배로 실어 나르다가 흘린 알곡들이 길바닥에 한자나 쌓여 길이 푹신할

정도였다고 한다. 곡창이 유린당하자 고려 황실에서는 급히 최무선을 파견하였다. 최무선은 세계 최초로 기록된 함포사격

을 통해 왜군의 대장선을 비롯하여 수백여 척을 침몰시켰다. 이른바 진포대첩(鎭浦大捷)이다.

진포대첩에서 최무선(崔茂宣)에 의해 격퇴당한 수만의 왜구의 잔당들이 훔친 말을 타고 재빨리 금강을 거슬러 부여와 공주

를 거쳐 지금의 옥천을 유린(蹂躪)하고, 화령(化寧)을 넘어 경상도 상주까지 진출했다. 상주를 점령한 왜군은 승리에 도취

하여 6일 동안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이들은 상주를 떠나 낙동강을 따라 남하했다. 그리고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성주)를

지나 사근내역(沙斤乃驛)과 함양(咸陽)에서 고려 정규군과 큰 전투를 벌였는데 이 치열한 전투에서 고려를 대표하는 9원수

중 2명의 원수와 수백여 명의 군사들이 전사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고려의 남부지역이 초토화 되었다.

그리고 그 왜구를 이끌던 15세의 장군 아지발도(阿只拔都, 아기바트루, 몽골어로 ‘아기 영웅’ 혹은 ‘어린 영웅’이란 뜻)는

백마를 타고 다니며 긴 창을 휘둘러 고려군을 죽음과 공포에 떨게 했다고 한다.

피해 소식을 접한 고려조정은 북방에 있던 이성계의 기마부대를 남원으로 급파한다. 왜구들이 함양에서 인월을 지나 운봉

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운봉에서 남원으로 내려오면 섬진강이고, 다시 함양으로 가면 낙동강을 거쳐 김해까지 당할 형편이

었다. 북방에서 태어나 30여 년간 만주 벌판에서 거란과 여진 그리고 몽골을 상대하느라 잔뼈가 굵은 이성계의 당시 나이

마흔다섯... 이성계의 수천 기마부대는 여원치를 단숨에 넘어 왜구들을 맞아 운봉과 인월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고려군은 기마부대의 특성인 기동력과 활을 이용해 먼저 적당한 거리를 두고 황산 아래 벌판에서 적을 상대했다.

그러던 중 왜장 아지발도가 백마를 타고 내려와 전장을 휘젓고 고려군을 급습하기를 수차례. 전세가 왜구 쪽으로 기울고

아군의 피해가 점점 커졌다.

이성계와 의형제인 이지란은 지금 전적비가 있는 작은 숲을 방패 삼아 황산 중턱에 진을 치고 있던 아지발도를 유인했다.

그리고, 이성계가 먼저 아지발도의 투구 끈을 화살로 맞춰 투구를 떨어트리고, 이지란이 재빨리 활로 아지발도의 머리에

화살을 명중시켰다. 아지발도의 낙마와 전사로 인해 일본군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후퇴하다가 고려의 추격군에 의해

지금의 피바위 인근에서 궤멸당하면서 적군이 통곡하니 "그 소리가 만 마리의 소 울음소리와 같았다" 라고 한다.

이로써 이성계는 황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역성혁명의 발판이 되었다.

 

▲ 황산대첩비로 가기전에 조금 떨어진 "어휘각"을 먼저 찾는다.

 

▲ 어휘각.

어휘각의 바위에는 황산대첩때 왜구를 격멸한 것을 기리고자 태조대왕 이성계를 비롯해 함께 싸운 8원수(元帥)들의 이름

이 새겨졌다고 한다.

 

▲ 어휘각에 새겨진 내용은...

조선 태조 이성계장군이 황산대첩이 본인 혼자만의 공이라기 보다는 여러 사람의 공으로 큰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알리

기 위하여 성지를 내렸고 그 내용을 자연석벽에 새긴 유적인데.. 1945년 1월 17일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일제에 의해서

황산대첩비를 폭파하고 파괴 하였을때.. 이곳의 석벽도 함께 폭파하고 남은 글씨를 정으로 쪼아버려 현재는 잔영만이 남아

있던 것을 1973년에 어휘각을 건립하여 보호 하고 있다.

 

▲ 어휘각내역이 적힌 액자를 당겨 보았다.

춘풍추우가 565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뚜렸했던 글씨가 1945년 1월 17일 새벽에 왜정의 독수로 폭파하고 철정으로 쪼아서

현재 그 잔영만이 남아 있다는 내용이다.. 얼마나 악랄한 놈들인가...

 

▲ 어휘각에서 황산대첩비쪽으로..

 

10시 50분 : 황산대첩비로 들어가는 삼문..

황산대첩비는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그 자리에 세우고 비바람에 보호하기 위하여 1973년에 보호각을 세웠고 1963년

1월21일 유적건조물.. 인물사건.. 역사사건으로 분류되어 28,593㎡ 면적이 국가사적 제104호 남원 황산대첩비지라는 명칭

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는 곳이다.

 

▲ 황산대첩기념비.

황산대첩비가 일제에 의해서 부셔져서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던 것을 한국전쟁이 끝난후 황산대첩비 탁본을 그대로 복원

하여 1957년에 비문은 김귀영이 짓고 송인이 글을 쓰고 남응운이 전액을 만들고박광옥이 세우면서 황산대첩에 관한

사실과 비문을 세우게 된 목적을 새겼다.

 

▲ 파비각.

일제의 만행에 의해서 부서진 황산대첩비 원본은 1977년에 보호각을 세우고 파비각 이라는 현판을 써서 보호하고 있어서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침탈하고 일제강점기에 또한번 조선을 침탈하면서 자신들의 치욕과 관련된 흔적을 지우고자 했던

일제의 만행을 보여주고 있다.

 

▲ 황산대첩비는 일제강정기에 우리나라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다양한 조선의 유적들을 파괴하면서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황산대첩비도 파괴하도록 명령이 하달되었고 황산대첩비는 글씨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정으로 쪼아지고 대형망치로

파괴하여 황산 람천변에 버려지게 되었다.

 

▲ 황산대첩비각.

지금의 대첩비 비석은 1957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1973년에 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비전.. 홍살문.. 삼문.. 담장.. 그리고 부속건물들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 복원된 황산대첩비.

다행히 원본을 세웠을 당시 탁본을 하여 보관을 잘해 놓았기 때문에 이것을 바탕으로 1957년 다시 복원할 수 있었다.

복원한 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 모양의 좌대는 원본 그대로인데 그 늠름한 모습만 보아도 이 비석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옆에 가만히 서 있어도 그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고.. 위엄이 있는 좌대다.

 

▲ 황산대첩사적비각.

고종19년 1882년에 운봉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비각비가 황산대첩비와 함께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황상대첩비

를 복원하고 그다음해인 1958년에 황산대첩비사적비 라는 명칭으로 복원되어 있다.

 

▲ 황산대첩비와 가까운 동편제 마을의 가왕 송흥록의 생가를 찾는다..

 

10시 53분가왕 송흥록의 생가 입구.

 

▲ 동편제의 가락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 가왕 송흥록..

그는 200년 판소리 역사 속의 허리 역할을 단단하게 해낸 인물로 꼽힌다.

남원 운봉 비전마을이 배출한 가왕.. 송흥록(宋興祿. 1801~1863)선생이 어떤 분이고,어떤 위상을 가지는가 말하면..

그는 조선 8대 명창 중 한분으로 꼽히는데.. 소리로는 그중에서도 최고라고들 한다.

판소리의 주요 유파 중 하나인 동편제를 창시하였고, 판소리계의 중시조(中始祖)라고 불린다.

 

▲ 가왕 송흥록의 생가.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비전마을에는 동편제의 태자리가 있다.

서편제와 더불어 판소리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동편제가 이곳에서 첫 소리를 냈다. 동편제 창시자로서 판소리계에서 최고의

칭호인 가왕으로 불리는 송흥록 명창이 이곳 비전마을에서 태어났다.

 

▲ 국창 박초월(朴初月,1917~1983)의 생가.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남원에서 성장하며 판소리를 익힌곳이기에.. 아마도 순천의 생가를 재현해 놓은듯...

국창 박초월 여사는 17세의 나이로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우승하며 판소리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그분의 스승이

명창 송만갑(宋萬甲,1866~1939)선생이었다. 송만갑 명창의 경우.. 그는 동편제를 이끄는 판소리 명문가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가왕 송흥록 선생의 아우되시는 명창 송광록 선생이시고, 아버지되시는 분이 또 명창 송우룡

선생이었다.

 

판소리에 대해 잘은 몰라도.. 판소리의 유파는 크게 동편제와 서편제, 중고제로 나뉜다.

중고제의 경우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을 기반으로 했고..

동편제와 서편제는 전라도 지역.. 섬진강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으로 경계짓는다.

동편제가 남성적이고 호방하다면.. 서편제는 여성적이고, 애절하고 한(恨)서린 목소리라고 하고..

중고제는 동편제와 서편제 사이 중간이라고들 한다.

 

▲ 가왕 송흥록선생과 국창 박초월선생을 배출한 비전마을을 나와서...

 

▲ 마을길을 따라 황산을 찾아 간다.

 

▲ 비전마을 동구밖의 마을수호목과 정자 뒤쪽으로 보이는 황산과 마주하며 간다..

 

▲ 며칠사이에 영하로 뚝 떨어지더니 오늘 낮부터 조금씩 풀린다고 한다..

영하 6도~2도/c.. 날씨는 맑고.. 바람은 3~4m/s 다.

 

▲ 황산의 등산로는.. 국악의 성지를 경유하게 된다..

 

11시 03분 : 국악의 성지 입구에서 안내도를 살펴보고..

 

▲ 가야금 형상의 가로등이 이쁘다.

 

▲ 국악한마당 광장.

 

▲ 운상문(외삼문).. 운상원은.. 운봉의 옛 이름이다.

 

▲ 낙성사.

국악은 세계가 인정한 문화유산이며, 우리민족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동편제 소리의 발상지이며 춘향가 흥부가의 배경지로서 국악의 역사가 보존 전승되어 온 국악 본고장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판소리의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록에 따른 국악의 보존.. 전승..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여 전통문화의

세계화를 도모하기 위해 바로 이곳 남원 운봉에 "국악의 성지"가 설립된 것이다...  -- 국악의 성지 홈피에서 발췌...--

 

▲ 납골묘..

 

▲ 가왕 송흥록선생의 묘..

 

▲ 악성 옥보고선생의 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운상원)은 신라 말 악성 옥보고가 50년 동안 거문고를 배워 익히고 스스로 거문고를 위한 새로운

가락 30곡을 지었으며 신라 땅에 거문고의 전통을 뿌리내리도록 큰 공헌을 하였다.

 

▲ 내려다 본 운봉읍 전경..

멀리 백두대간상의 고리봉 수정봉이 이어진다.

 

▲ 참으로 아름다운곳에 자리 잡았다..

 

▲ 국악한마당 광장..

 

▲ 국악 공연을 할때... 한번쯤은 와볼만한 곳이다..

 

▲ 소리길 표시판을 따라서..

 

▲ 국악의 성지 전시관..국악성지는 판소리와 농악 등 국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곳으로 판소리, 농악, 기악, 전통

무용 등 4개 전시관에 400여점의 유품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며.. 국악 체험장, 수련장을 비롯, 소리꾼들의 득음을 돕기

위해 동굴 모양으로 지어진 독공장(3개)도 마련되어 있다.

 

11시 15분 : 국악의 성지를 지나.. 본격적인 황산 산행 들머리..

 

▲ 미산정...

 

국창 박초월 선생의 묘..

그녀의 아드님 되시는 분이 명창 조통달 선생이시고..

손자는 팔세토 창법의 대가, 가성의 명인.. 가수 조관우씨로 문화예술계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 고남산.. 백두대간이 지나간다.

고남산은 태조봉(太祖峯). 고조봉(高祖峯). 제왕봉(帝王峯). 적산(赤山). 일광산(日光山) 등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태조봉..고조봉..제왕봉 등으로 불리는 것은 모두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성계는 이번 싸움이 고려의 국운을 좌우하는 만큼, 고남산 정상에 올라 석축으로 제단을 쌓고 팔도 산신을 불러 경건하게

필승의 산신제를 올렸다. 지금도 그 때 쌓았던 석축 제단의 흔적이 지금도 분명하게 남아 있다.

고남산 아래 마을을 권포리 라고 부른다. 이 역시 황산대첩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당시 전승 기도를 올릴 때 이곳에 주둔

하던 병마의 식수로 쓰기 위해 큰 샘을 조성하였는데, 대첩이 끝나자 샘 주변에 자연스럽게 마을을 이루었다.

태조가 조선의 왕업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고남산을 일명 제왕봉이라 하고, 마을 이름은 권력을 편다는 의미로 권포리

(權佈里)라 지었다고 한다.

 

▲ 가왕 송흥록 생가의 비전마을이 보이고 황산대첩비가 화수산 숲에 가려져 있다.

 

▲ 서릿발이 얼마나 깊은지 잘못 밟으면 10cm정도는 푹푹 빠진다.

 

▲ 등산로 정비를 최근에 한것 같이 쌩쌩한 통나무계단이다..

 

▲ 솔숲사이로 덕두산 바래봉이 그림이다.

 

▲ 이정표도 새것이다..

 

▲ 등산로 정비를 잘해 놓았다 했더니..겨우  20m지나온 지점에 이정표가 또 나타난다..

 

▲ 황산 정상쪽 진행방향으로 서북간 쪽으로 조망이 시원하다.

 

남서쪽의 운봉읍 방향..

 

▲ 바위 협곡같은 안부를 넘어서고..

 

11시 46분 : 군화동 갈림길..

군화동은 1961년 대홍수때 소멸된 화수리 이재민들의 가옥을 군인들이 지었는데...

마을 이름을 "군인들이 만들어준 화수마을"이라는 뜻으로 "군화동" 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덕두산과 바래봉..

 

11시 54분 : 황산 정상..

 

▲ 바래봉 아래의 옥계저수지에 윤슬이 보석처럼 아름답다.

 

▲ 운봉읍 방향의 백두대간 수정봉..

운봉읍내와 들판이 보인다. 500m대의 고원지대로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지 이다.

 

▲ 당겨 본 지리산 천왕봉.. 황산에서의 조망이 너무 좋다.

 

▲ 서룡산 아래 인월면...

남원시 인월면은 고려 우왕6년(1380년) 삼도 도원수 이성계 장군이 그믐날 기도를 통해 보름달을 끌어올려(引月) 훤한

달빛아래서 왜장 아지발도를 격퇴한 황산대첩 전승지로서의 자긍심을 가진 곳이다.

 

▲ 조망이 너무 좋은 황산에서..

 

▲ 등산로 정비는 잘 되어 있는데.. 찾는이가 없는지 발자욱이 없다..

 

▲ 무슨동물인지 모르지만.. 발자국만 남겨놓고... 좌측 계곡으로 사라진다.

 

▲ 흔적 없는 능선길을 따라 가는데..

 

▲ 조금전 같은 과의 동물인지..

 

▲ 한참을 앞서가던 발자욱은 어디선가 다시 사라지고..

 

12시 27분 : 바람끼 없고 햇살만 가득한 작은 봉우리에서.. 민생고의 점찍기를 하고..

 

▲ 대봉산 천왕봉과 백운산이 구비구비 골짜기마다 민초들의 삶을 보듬고 있다..

 

12시 45분 : 서무마을 갈림길..

 

▲ 직진하면 정봉이 나오는데.. 일행중에 발이 불편한 사람이 있어.. 여기서 하산이다.

"정봉"은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 인월역에 진을 치고 있던 아지발도의 왜구와 접전을 벌일 때, 이셩계가 이끄는

고려 토벌군이 먼저 이곳 봉우리에 올라 적정을 살피며 군사들에게 솥(정鼎)을 걸어 밥을 짓도록 했다는데서 유래한다.

지금도 땅을 파면 검정 숯이 나온다고 한다.

 

▲ 동물생태 감지카메라..

지리산권역이라 반달곰의 활동범위를 관찰하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 왼쪽으로 가면 서무마을로 가는 길인데.. 우리는 차량 회수를 위해 오른쪽으로 간다..

 

▲ 24번 국도를 따라서 오른쪽으로..

 

13시 07분 : 람천의 피바위..

이곳은 이성계가 활을 쏘아 "달을 끌어당겨 놓고 싸웠다"고 해서 인월면(引月面)이다.

달을 끌어다 환하게 밝혀놓고 이성계는 화살로 아지발도의 투구끈을 맞히고 이지란은 아지발도의 머리를 쏘았다..

아지발도는 개울가에서 피를 흘리다 죽었다. 그 핏자국이 아직도 개울가 바위에 남아 있어서 그 바위 이름이 "피바위" 다.

당시 전사한 왜구의 피로 냇물이 붉게 물들어 6~7일 동안이나 핏빛이 가시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릇에 물을 담아 맑아지길 기다렸다가 한참만에야 물을 마실 정도였다.

당초 왜구의 숫자가 고려군보다 열 배나 많았으나, 살아서 지리산으로 도망간 왜구는 70여 명에 불과했다.

고려군은 왜구의 말 1,600여 필과 엄청난 수의 병기를 포획했다.

 

▲ 가까이 당겨 본 람천의 피바위.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이쪽지역의 바위들이 철분 성질이 있어서 바위가 붉게 물들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건 저렇건.. 이성계가 적의 장수 아지발도를 죽임으로써 승리를 한 곳임에 초점을두고 보아야 할것 같다.

 

▲ 동경대(同庚坮)..

생뚱맞게 길가의 바위에 각자되어 있는 글이 보여서 읽어 본다.. 

동경(同庚)은 같은 해에 태어난 같은 나이라는 뜻으로 흔히 동갑(同甲)을 말한다. 보통 인연이 아니다.

내용을 읽어보면 단기4224년(서기1891년) 신묘년 3월 26일 오시 생(午時 生)인 <고영환>과 <정래순>이

단기 4294년(서기1961년) 신축년 3월 26일에 글을 새겼다.. 다시 말하면... 같은 해의 한날 한시에 태어난 두사람이

나이 70살이 되던 해에 바위에 글을 새겼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돈대 대(坮)는 성벽위의 망루같은 곳을 말하는데...

두사람이 같이 이 바위 위에 올라서서 피바위를 보았던 것을 기념하여 바위에 새긴 모양이다..

 

▲ 황산대첩 피바위가.. 도로 건너에 있다고 가리키고 있다.

 

▲ 피바위를 보려면 길을 무단횡단해야 되는데.. 이곳을 지나는 차들이 완전 아우토반 무제한 질주다..

노견으로 걷는 내가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속도를 낸다... 위험하다..

 

▲ 그래서 조심조심 잘보고 잽싸게 건너 갔다가 건너 온다..안전제일...ㅎㅎ~~

 

▲ 무얼하는 건물인고?..

남원뜰 노인복지센터라고 하는데.. 휴업중인것 같다..

 

▲ 24번 국도에서 황산정(국궁장)이 있는 군화동 마을로 간다..

 

▲ 여기서부터 지리산 둘레길 2구간과 접속 된다.. 버스대기장이 마치 케이블카를 닮았다.

 

13시 17분 : 부층탑(원명대선사 부도탑).

원명(圓明, 1911-1992)스님의 속명은 종범(終範)으로 1911년 경북 청도에서 김해 김씨 재순거사와 방봉선 보살의 슬하

에서 태어났다.  14세 되던 해에 1925년 청도보통학교 졸업 후 출가하고 지리산 실상사에서 당대의 대선사였던 

수월(水月)스님의 상좌인 지담(智潭)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29년 춘담(春潭)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이어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이후 원명스님은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 등에서 수행정진하다 비로봉에 올라 10년 동안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10년정진을 거듭한 끝에 대오를 이루었다.

6.25동란으로 금강산을 하산해 제주도 한라산과 거제도 실상사에서 안거하다가.. 1954년 전북 남원 청룡사에서 포교에 

힘썼고.. 1960년 현 원명사의 전신인 금불암(金佛庵)을 인수해 개명하고 수행에 힘썼다.

1965년 상좌인 영봉스님에게 원명사를 맡기고 다시 남원에서 정진하다가 봉림선원을 세워 안거했다. 

평생 쌀가루에 솔잎을 섞어 생식으로 일관하였으며 바랑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바람처럼 주유하며 오로지 참선과 중생

교화에 진력했다. 1992년 11월 11일, “고요한 즉 죽은 시체요, 움직인 즉 망상이라. 고요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이 물건이

무엇인고?”라는 열반송을 남기고 좌탈입망했다. 세수 82세, 법납 68세. 법구는 황산벌에서 숨을 거둔 넋을 위로하고자

오랫동안 수행처로 삼아온 남원 인월땅에 안치되었다.

 

▲ 부층탑(원명대선사 = 부처님 부도탑).

부층탑안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등신불이 안치되어 있다.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세계 불교계에서 72번째로

부처님으로 공인받으신 분이다. 좌탈입망하셨고남겨진 육신에 금박을 입혀 탑안에 안치했다. 그분을 존경하는 수행자들과

신도들이 지나 가다가 향을 피우고 참배를 하고 간다.기감이 예민하신 분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해보면 맑고 강한

기운이 몸에 들어오는 걸 느낄수 있다고 한다..

 

▲ 앞면에는.. 남무대각세존석가모니불.. 부처님이라는 말이다.

 

▲ 뒷면에는 어렵고도 난해한 망상게다. 이 뭣고???~..

 

▲ 지리산 둘레길2구간 쉼터.

 

▲ 오덕준 장군 공적기념비.

오덕준(吳德俊)은 1921년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소덕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 간사이대학(關西大學)에서 주경야독하여 1944년에 수료하였다.

학도병으로 일본 본토 주둔 부대인 제48 부대에 배치되어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해방을 맞이 하였다.

해방 후 초창기 국군에 입대하였다. 1948년 10월에 광주 주둔 제5 여단 참모장으로 재직하면서 여순 사건 가담자들을 색출

하는 데 힘을 쏟았다.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오덕준은 전주.. 임실.. 남원 지구 전투, 거창 지구 전투, 양양-서림 지구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제9 사단장, 제11 사단장으로 복무하였다.

 

▲ 군화동 마을.

군인들이 만든 마을이라 하여 군화(軍花)마을이다.

 

▲ 람천을 따라가는 지리산둘레길 2구간...

 

▲ 이 구간은 여름에는 피해야 할듯.. 그늘이 적어서 힘들것 같다.

 

▲ 람천 벚꽃길은..

이곳 남원읍 북천마을이 고향인 육군 간호장교 출신의 박말순여사님이 지리산둘레길2구간이 지나가는 람천 뚝방길에

기증했다는 125그루의 왕벗꽃 나무다... 벚꽃이 피는 봄날이면 좋을것 같다.

 

▲ 다시 비전마을을 지나고..

 

▲ 황산대첩비 가는길..

아침에 그냥 건너뛴 동료에게 소개하고자.. 다시 간다.

 

▲ 황산대첩비를 나서며..

역사의 현장에 와서 <한국사에서의 왜구> 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고 가자.

왜구(倭寇)는 전근대에 활동했던 일본에 근거지를 둔 해적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바다를 따라 가까운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다.

왜구가 주변국에 약탈을 하는 해적국에 된데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째.. 고대 일본은 농사지을 땅이 적은데 도래인으로

인한 인구증가는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할 약탈 경제가 발달했다는 설이다… 둘째는 지진해일로 인해 경제기반이

무너지자 해안가에 거주하던 이들이 약탈에 뛰어들면서 왜구가 발생했다는 견해도 있다.

왜구(倭寇)라는 한자어 표현은 414년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에서 '왜구대궤(倭寇大潰, 왜구를 크게 궤멸시켰다)'

라는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고려사에서는 고종 10년(1223년) '왜가 김해(금주)를 침략했다'는 '왜구금주(倭寇金州)'라

는 표현이 나온다. 한반도는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땅이기에 왜구가 한국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신라 박혁거세 즉위 8년에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유구하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0년이다

서기 11년 남해 차차웅 때에도 왜구의 침입 기록이 있는 등 고대부터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음을 알수 있다.

신라 역대 왕들의 삼국사기 기록을 뒤져보면, 왜구의 침략에 대한 기록이 없는 왕보다 있는 왕이 더 많을 정도다. 게다가

신라의 수도 경주시가 동해 바다와 그 건너 일본 열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지리적 조건상 일단 상륙을 허용하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소지가 컸고, 실제로 왜군에게 수도가 포위당한 적도 적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왜구의 침입 기록에 의하면… 신라 초대 혁거세 거서간 8년(기원전 50년) - 왜인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라는 기록을 시작으로

21대 소지 마립간 22년(500년)까지 - 22년 봄 3월,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라는 기록까지 29년동안 한해도

침략을 당하지 않은 해가 없을 정도다. 이후 통일신라가 되면서 정세가 안정된 뒤에는 왜구의 침략이 줄었다.

 

▲ 고려 말부터는 왜구들이 특히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였는데 한반도 해안 지역은 동서남을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이 약탈

대상이었다.  심지어는 해안가 근처가 아닌 충주, 청주, 단양같은 완전히 내륙에 있는 곳도 왜구에게 털린 기록이 있었을

정도로 상황이 매우 좋지 못했다. 약탈이 극에 달했을 때는 관료들의 녹봉도 못줬을 정도. 그래서 이러한 왜구들을 토벌

하기 위해 고려군은 지속적으로 전투를 치렀으나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며 사실상 무장 해제 상태에 놓였던 고려군으로서

는 대응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고려 말부터 시작된 왜구는 이미 해적을 넘어서 갑주를 갖추고 정확한 지휘 계통을

갖춘 군대 수준이었다. 공민왕 20년동안에만 100여회 넘게 침략했으며 우왕 14년동안에는 378회나 쳐들어 왔다.

 

▲ 1350년 이후 왜구의 고려 침입 상황도.

1350년~1392년까지 40여년동안 무려 591회나 침략을 일삼았던 것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이때 수도를 강원도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1392년 조선건국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노략질)은 계속 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건국한 후에도 왜구들의 침입과 약탈은 끊이지 않았다.

1396년 문하우정승 김사형의 지휘 아래 대마도 정벌이 진행되었고, 1419년 세종 초에 상왕 태종과 이종무의 지휘 하에

다시 대마도 정벌이 이뤄져 왜구에게 큰 타격을 주었지만, 왜구들의 반격이 거세 완전히 토벌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 공격은 제법 효과를 봐서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통상을 요청하자 조선 조정은 왜구를 회유하려는 목적으로

삼포(부산포, 내이포, 염포)를 개방하고 왜관을 설치했다. 그리고 명나라에 간 왜구들도 몰살당한데다 일본 내부에서도

무로마치 막부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면서 해적인 왜구들을 토벌하며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약 50여년 간에 걸친 왜구의

활동은 잠잠해진다. 1589년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태합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구에 대한 전격적인 금지령

을 내렸다. 물론 이 규정은 지켜지지 않았고..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일본 수군에 편입되어 조선을 노략질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 사령관이었던 구키 요시타카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고, 에도 막부 수립 이후 다시 금했다. 또한 천주교 박해의 일환으로 쇄국정책을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당연히 왜구도 혹독한 탄압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 왜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3시 43분 : 동편제마을 주차장...

 

▲ 역사탐방.. 황산대첩비.. 피바위 길..

길따라 소리따라 걸었던 동편제 길.. 우리나라 공인 부처님의 길...

짧았지만 황산 정상에서의 일망무제한 지리산 조망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2024년 01월 07일(일).

대덕산 / 초점산 : 전북 무주군.

 

산행코스 : 소사고개-초점산-대덕산-얼음폭포-덕산재.

산행시작 : 소사고개 09시 58분.

산행종료 : 덕산재 15시 22분.

전체거리 : 약 8.46km.

전체시간 : 05시간 23분.

운동시간 : 04시간 18분.

휴식시간 : 01시간 05분.

 

09 : 58 소사고개 출발.

12 : 09  초점산.

13 : 58  대덕산.

14 : 45  얼음폭포.

15 : 22  덕산재.

 

09시 55분 :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고제리의 소사마을 도착..

소사라는 마을이름은 연중 미풍이 불어 집 마루에 모래가 쌓일 틈이 없다고 하여.. 기쁜 마음에 웃음이 나온다는 뜻으로

"소사현(笑沙峴)" 으로 불렀다고 한다.

 

▲ 탑선슈퍼.

백두대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며 먹거리나 식수를 보충할 수 있다.

 

 09시 58분 : 소사고개 출발.

 

▲ 등로에 올라서자 말자 바람이 세차다..

오늘 대덕산의 날씨는 맑음에 낮최고 1도.. 풍속 6m/s 다. 산마루에 올라서면 체감온도는 더 낮아질 것이다.

 

▲ 뒤 돌아본 삼봉산..

 

▲ 소사고개에서 출발하는 백두대간길에는 개인사유지가 많아서 농장을 경유하는구간이 많다..

 

▲ 최소한의 등산로만 남겨놓고 양쪽이 경작지로 개간되어 있다...

 

농로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경남 거창군과 전북 무주군이 경계인 지점에 있는 지경부락..

지경부락은 작년 23년 1월 1일 야등팀이 하산하였을때 이 마을분께서 덕산재까지 태워다 주었던 고마운 추억의 마을이다.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전경... 무풍동은 남사고의 십승지지중 하나로 알려진 고장이기도 하다.

 

▲ "산은 멀리서 보라".. 라는 말처럼 멀리서 보는 삼봉산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 멀리 대덕산과 초점산이 낮은 구름에 잠겨있다.

 

▲ 지경부락을 가까이 지나가니..

도움을 주셨던분의 집마당에.. 그때 보았던 승합차와 1톤화물이 1년전 그모습 그대로 주차되어 있다..

 

▲ 대덕산에 눈이 올라나.. 검은 구름이 몰려온다.

 

▲ 개인농장을 경유하는 곳이라 농장마당으로 올라간다.

 

▲ 등산로는 농장에 진입하자말자 좌측의 야산으로 이어진다.

 

▲ 개인농장주가 천막에 등산로라고 표시해 두었다.

 

▲ 어느새... 대덕산의 먹구름은 강풍에 실려가고 깨끗한 백운으로 바뀌더니..

 

▲ 개인농장에 밀려난 이정표를 확인하는 사이에..

 

▲ 순식간에.. 대덕산은 구름모자를 벗어 버렸다..

 

▲ 다시 작은 동산하나를 넘어 가면..

 

▲ 급경사의 농로로 내려간다.

 

▲ 눈속에 얼음이 미끄럽다.. 조심조심.. 엄마엄마 어마어마!~~... 오늘따라 집에 계신 엄마는 왜그리도 호출하는지...ㅎㅎ..

 

▲ 천덕꾸러기인 이 구간의 이정표보다 백배나은 명품송에서..

 

▲ 솔잎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신임회장님과 젊은 일꾼들이다..

 

▲ 대덕산 오름은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된다.

 

▲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뒤돌아 보니.. 삼봉산이 눈아래로 낮아지고..우측으로 덕유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 벌목사업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소나무..

 

▲ 전임회장님.. 수고많았습니다..

 

▲ 초점산으로 오르는 된비알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 청춘이 부럽지 않은 열정에 박수보냅니다..

 

▲ 전망이 확~ 트이는 곳에서 삼봉산과 덕유산을 핑계로 허리를 쭈~욱.. 편다..

 

▲ 당겨본 덕유산..

지금쯤.. 설천봉의 눈꽃이 파란 하늘과 절묘한 조화를 이룰것 같다.

 

▲ 작년에 내려올때 가장 힘들었던 구간인데 오늘은 기를 쓰고 올라간다.

 

▲ 전임회장님과 서로 카메라를 들이대며.. 설원의 한판승부를 펼친다.

 

▲ 남쪽 멀리 지리산이 보이고..

 

▲ 서남방향으로는 기백산 금원산...

 

▲ 서북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선인봉 거칠봉 쳥량산이 달려 간다.. 일곱 신선(神仙)이 있던 곳이라 하여 거칠봉이라 한다..특히.. 거칠봉은... 사생아.. 결손 가정의 출신.. 날라리 출신... 건달.. 거짓말쟁이.. 농아 출신.. 등등등 저마다

"죽어도 말하지 못할' 비밀과 아픔을 간직한 일곱 명의 이야기를 그린 "굿바이 솔로"라는 드라마를 촬영했던 곳이다.

 

11시 49분 : 국사봉 갈림길..

 

▲ 강풍속에서도.. 햇살이 잘드는 따뜻한 곳에는 눈이 녹고..

 

▲ 응달에는 바람에 날려온 눈이 쌓여 스틱하나가 다들어 간다.

 

▲ 수리봉을 찍고 덕산2리로 내려 가는길..

 

▲ 갑진년 청룡의 기운을 듬뿍 받고 더욱 발전하는 솔잎이 되기를.. 홧팅!~~..

 

▲ 마지막으로 나도 한컷..

초점산(1,249m) 삼도봉(三道峯)은..

전북 무주군 무풍면, 경남 거창군 고제면, 경북 김천시 대덕면의 3개 도에 걸쳐 있는 봉우리다.

남한에 삼도봉이란 이름을 가진 봉우리는 3개다. 모두 백두대간 줄기이다.

1) 지리산의 서부능선에 위치한 삼도봉(1550m) 은 경남(하동)과 전남(구례) 전북(남원)의 경계지점이고..

2) 충북(영동) 경북(김천) 전북(무주)의 경계점에 위치한 민주지산의 삼도봉(1177m)은 경계를 가르는

도(道)가 완전히 달라서 "오리지널 삼도봉"이라고 한다. 정상엔 3개 도 주민들이 세운 대화합기념탑이 있다.

3) 이곳의 삼도봉(三道峯 초점산 1,249m)은 경북 김천, 전북 무주, 경남 거창을 구분짓는 봉우리다.

 

▲ 세개의 봉우리로 형성된 대덕산..

 

▲ 지나온 초점산..

 

13시 20분 : 대덕산헬기장에서 먹거리 나눔..

 

▲ 바로 옆에는 작년에 학꽁치회를 달게 먹었던 장소다..

 

▲ 김천 지례방면..

 

▲ 전북 무주군 무풍면계곡..

무풍은 남사고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전쟁, 전염병, 흉년이 없는 피난하기 알맞은 땅 열 곳.. 즉 십승지지(十勝之地)

꼽히던 곳이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큰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곳으로 피난 왔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무풍에서는 무풍승지(勝地)라는 말을 지역브랜드처럼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또한 무풍에는 임금이 유사시 피난하기 위해 만든 명례궁이라는 행궁(行宮)이 있었다.

조선말 민비의 친척인 민병석이 건립한 궁실인데 난세의 피난처로 삼기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지는데

지금은 흔적도 찾기 어렵게 됐다.

 

▲ 대덕산은 투구봉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옛날 한 도인이 이 산에서 백일기도 후에 공덕을 쌓고 도가 통하였다고 하여

부르게 된 이름 이라고도 하며.. 대덕산의 옛 이름은 "다락산" "다악산"으로 불리어 졌으며 선조 31년(1598년)정유재란 때

전라병사 이광악이 왜적을 물리쳤고 영조4년(1728년)이인좌 난 때는 이 고장의 의병들이 반란군을 물리쳐 국난이 있을

때마다 고장을 지켜 주었던 명산으로 알려져 왔다.

 

산 이름이 대덕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곳으로 살러오는 사람들마다 모두 큰 재산을 모음에 따라 산의 덕을 입었다는데서

연유됐다.  옛날에는 기우단이 있었다고 전하며.. 영. 호남 지방의 분수령으로 금강의 지류인 무풍천과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甘川)이 발원하는 산이다.

 

장쾌한 덕유산과 사방이 일망무제로 조망이 좋은 산인데.. 강풍과 추위로 아쉽지만 하산을 서두른다.

 

13시 59분 : 하산시작..

대덕산에서 덕산재 하산길은 응달에 눈이 많고 급경사다..

 

14시 45분 : 대덕산 얼음폭포.. 제법 많은 물이 흘러 내린다.

 

15시 12분 : 마지막 고지를 통과하여..

 

▲ 덕산재 내림길이다..

 

▲ 솔잎의 애마가 기다리고 있는 덕산재..

 

15시 22분 : 산행종료.

 

 

16시 02분 : 경북 김천시 지례면 장터에 소재한 칼국시집에서 하산식...

 

▲ 30년 전통의 솔잎산악회의 갑진년 첫츨발의 느낌이 좋다.

새 집행부에 거는 기대감도 크다.

2024년 01월 04일(목).

아미산 : 전북 순창군.

 

산행코스 : 송정지하도-송정고개쉼터-전망바위-아미산-신선바위-배미산-못토고개-가산-무수1지-탄금정.

산행시작 : 송정지하도 10시 14분.

산행종료 : 탄금정 14시 48분.

전체거리 : 약 9.04km.

전체시간 : 04시간 34분.

운동시간 : 04시간 05분.

휴식시간 : 00시간 29분.

 

10 : 14  송정지하도 출발.

10 : 42  송정고개쉼터.

10 : 49  전망바위.

11 : 00  아미산.

11 : 08  철계단.

11 : 29  신선바위.

11 : 42  배미산.

12 : 43  못토고개.

13 : 35  가산.

14 : 19  무수1지.

14 : 48  탄금정.

 

▲ 화랑산악회 갑진년 새해 첫산행으로.. 전북 순창군 아미산 가는길에..

 

2024년도 새 임원진 발표..

신임회장 : 덕장 김경현..

신임산대장 : 신라초기의 6부촌장 제도 방식을 도입하여 5~6명이 번갈아가며 산행대장역할을 수행.

총무 : 유임.

 

전임회장님과 산대장님의 고별인사후..

전임회장님의 23년도 개근회원에 대한 포상을 함.

 

▲ 내 짝꿍 도창기님... 짝짝짝~..ㅎ

 

▲ 조여사님도.. 짝짝짝~..

 

▲ 조여사님.. 추카 합니다...

 

▲ 신임회장님 인사..

 

▲ 그리고... 신임회장님의 선물...로또다..

월요일에 사면 1주일이 즐겁다고 했다.. 목요일에 받았으니 적어도 3일은 즐거울 것이다..ㅎ~..

아니다... 3일이 아니라 평생이 행복해지는 벼락을 맞을지는 아무도 모른다...ㅋㅋ~..

 

10시 06분 : 전북 순창군 금과면 방축리 송정지하도 도착.

 

▲ 신임회장님의 새로운 모색으로 분위기 쇄신용 현수막을 펼치고 단체 인증후 산행 출발..

 

▲ 좌측의 광주 대구간 고속도로와 나란히 하며.. 아미산으로 향한다.

 

▲ 차에서 내리자마자 산을 향해 냅다 달리던 예전의 모습과는 확실히 다르다..

같은 차를 타고 와서 함께 걷는 모습이 참 좋아 보인다.

 

10시 16분 : 김해김씨세장산 비... 실질적인 아미산 산행들머리 이다.

 

▲ 정상까지 1.42km... 어느 블로그에서 순창 아미산에 대해.. 읽은 글이 생각난다.

아미산이란.. 산은 <아>름다운데 산행거리가 너무 짧아서..  <미>운산이라서 아미산이라고 했다나..

 

▲ 작은 계곡을 따라 능선으로 치고 오르고..

 

▲ 능선에 올라서면 좌측은 덕천농원이고... 등로는 유순한 편이다..

 

▲ 아직은 쌩쌩해 보이는 이정표가 하체가 부실했던지.. 나무에 기대어 있다. 그래도 방향은 똑바로 가리키고 있다.

 

▲ 밤새내린 싸락눈 위에 한줌 빛내림이 너무나 기분 좋은 길이다.

 

10시 42분 : 안부 쉼터..

 

 10시 48분 : 전망바위에서 서북쪽 방향..

시루봉 너머로는 담양의 추월산이 보일터인데.. 짙은 황사로 희미하다.

 

▲ 남쪽으로는 옥과면의 설산 괘일산이 그립다... 무등산쪽으로도 황사가 심하다.

 

▲ 화랑의 히어로 산대장님 그동안 수고 하셨습니다.

 

▲ 마지막으로 나도 한컷..

 

 광주 대구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는데.. 차량통행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런데.. 달구벌 빛고을 달빛고속철도 건설이랍시고.. 나랏일 하시는 일부 님들이 바쁘다..ㅉㅉㅉ~..

 

10시 59분 : 내동리 갈림길... 내려가는 길이 뚜렷한걸 보니.. 내동리에서도 많이 다니는듯 하다.

 

11시 : 00분 : 아미산 정상... 데크전망대는 최근에 설치한것 같다.

 

▲ 정상석도 종전의 자그마한 대리석에서 크다란 자연석으로 바뀌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산이 높고 험하다는 의미로 정상을 아미산(峨嵋山), 서남쪽 금과로 뻗어 나온 산줄기에 있는 다섯봉우리

중 414봉은 중아미산.. 끝 봉은 소아미산으로 기록됐다. 또한 다섯 봉우리가 첨예하게 솟아 있는 것을 다섯 재상이 태어날

명당이라고 했다. 그 산줄기 아래에 400년 전 부터 부자들이 집성촌을 이루는 대장리(大場里)가 있고..

일본인들이 다섯명의 재상이 나올 것을 우려해 마을 위 오상재에 쇠말뚝을 박고 배맨산으로 왜곡했다고 한다.

 

▲ 우리나라에는 아미산(峨嵋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많다.

순창 아미산을 비롯해 군위 아미산.. 홍천 아미산.. 부여 아미산.. 당진 아미산.. 부산 아미산..곡성 아미산 등이 있으며..

경복궁 경회루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을 이용해 쌓은 교태전 뒤뜰의 이름도 아미산이다.

순창 아미산은 순창 방면에서 바라보면 살찐 양처럼 보이지만 금과면에서 바라보면 우뚝 솟은 단일 화강암봉의 웅장함을

자랑해 감탄을 자아내게 된다.

 

고인돌 뒷모습..

 

앞에서 본 고인돌인데.. 내눈에는 물범을 올려 놓은것 처럼 보인다.

 

머리 부분을 보니 눈도 있고... 코도 있고.. 고향의 바다가 그리운 모양이다..ㅎ~

 

 내려다 보이는 순창군 순창읍시가지 전경... 황사가 완전 스모그 수준이다..

희미하게나마 용궐산이 보이고 무량산 바위 위에 있는 명품송.. 앉은뱅이 소나무는 잘 있는지..

 

▲ 순창읍 오른쪽의 남산대에는..

우리나라 전통지리서인 산경표(山經表)를 편찬한 여암 신경준의 유지와.. 순창 강천사9剛泉寺) 의 복원을 위하여

“권선문(勸善文 : 보물 제728호)” 을 지은 당대의 뛰어난 여류 문장가이자 서화가인 설씨부인의 유지가 있는 곳이다..

 

여암 신경준 선생은...

조선시대 영. 정조 시기의 실학자로 국어와 지리는 물론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실학자이자 행정관료였다.

여암은 동국문헌비고 중의 "여지고".. "강계지".. "사연고".. "도로고" "산수경" 등의 지리서를 편찬했고 동국여지도,

팔도지도 등의 지도도 편찬했다. 그리고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지편람"을 편찬했으며, 여지편람의 일부가

"산경표" 이다. 산경표는 정확히 얘기하면 지도가 아니라 지리서이다.

산줄기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 아니고 마치 사람의 족보처럼 대간과 정맥은 종으로, 정맥에서 갈라진 기맥은 횡으로 정리한

지리서이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쉽고 과학적이며 오래된 산줄기와 지리체계가 안타깝게도 일제의 산맥도에

의해 오랫동안 잊혀졌던 것은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만약 1980년 이우형이라는 지도제작자가 고책방에서 산경표를

우연히 찾아내지 못했다면 아마도 산경표와 백두대간 등 우리고유의 산줄기 인식은 사라졌을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지리서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태어난 실학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데 자긍심을 가진다.

 

산을 탄다는 사람으로써...

전통지리서인 산경표을 편찬한 여암 신경준 선생의 생가와 귀래정을 답사 하는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 아미산에서 배미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 배미산을 지나.. 가산 너머로 남원의 문덕봉 고리봉이 훤걸차게 이어지고 동악산 최악산도 보인다.

 

▲ 아미산의 하일라이트 철계단의 시작이다...

 

▲ 아미산의 전설을 사바세계에 전하고자 함인가..

어미거북이가 아기 거북이를 업고 인간사 혼탁한 우물에 금방이라도 뛰어들것 같은 자세다.

 

▲ 대둔산의 삼선철계단 보다.. 경사도가 더 심한 것 같다..

 

▲ 경사각을 가늠해 보기위해 측면에서 담아 보았다... 급한 내림이다.. 조심조심..

 

▲ 아미산 최고의 뷰(view)... 북한산 인수봉 축소판이라들 하는 곳이다..

 

▲ 최고의 뷰(view)를 보여준 처진 소나무 가지...

 

▲ 전망대가 있어 올라가 본다..

 

▲ 나무에 가리어 순창읍쪽만 조망 된다.

 

11시 29분 : 신선바위.

 

▲ 배미산에서 뒤 돌아본 아미산...

 

▲ 당겨본 아미산.

 

11시 42분 : 배미산 정상의 햇살 좋은 곳에서... 하산시간이 짧을것 같아서 여기서 마음점을 찍는다.

 

▲ 하산길에 가산으로 가는 길목인 못토고개를 확인하고...

 

▲ 조금후에 올라갈 가산이다..

 

▲ 배미산 내림계단도 장난이 아니다.

 

▲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다.

 

▲ 바위와 노송.. 여름철 바람길이 너무 좋을것 같다.

 

▲ 균열된 바위... 많이 벌어져 있다.. 봄날 해빙기에는 조심해야할 바위다..

 

▲ 산아래로 굽은 소나무인데 아래쪽에 서서 올려다 보니.. 내머리에 어사화를 꽂은것 같다.

 

▲ 농촌형 바이크를 타고 오는 주민도 만나고..

 

▲ 좌측 계단을 타고 도로까지 내려가서 못토고개로 가려면 돌아가게 된다..

 

▲ 자연생태로위를 건너 간다.

 

▲ 못토고개 가는 길..

 

▲ 가야할 가산을 올려다 보니 쉽지만은 않을것 같다.

 

▲ 못토고개길은 온통 두릅밭이다... 보이는 산은 옥녀봉이다..

 

12시 43분 : 못토고개...

못토재는 옛적에 순창으로 통하는 큰 고개였다고 한다.

 

▲ 댓잎으로 만든 부케 같아서..

 

▲ 비교적 무난한 임도를 따라가다가 언덕에서 좌틀하여 능선을 향한다.

 

▲ 오름길에 바라 본 가산 암장..

 

▲ 조금 더 당겨 본다.

 

▲ 이제 본격적으로 고난의 행군 시작이다... 칡넝쿨과 청미래 가시.. 그나마 녹음기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 일단 능선에 올라서니 가시덤불은 없다..

 

▲ 앞서간 선답자들의 흙묻은 신발에서 떨어진 흔적을 보고 올라간다.

 

▲ 다듬어지지 않은 돌들과 이끼로.. 한발 한발 조심조심...

 

▲ 드디어 상주 성주봉의 암반 같은 넓은 바위를 만나고... 좌측으로 우회한다..

 

▲ 여기서 부터는 희미하나마 족적이 보인다..

 

▲ 통천문도 있고..

 

▲ 사람이 잘 찾지 않는 곳에.. 올라온 이방인이 신기했는지.. 바위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내려다보고 있다.

 

▲ 밧줄... 선뜻 잡기가 꺼려진다..

 

선두주자가 먼저 잡고 당겨서 확인하고 올라 간다.

 

▲ 꽤나 오랫동안 묶여져 있었던 모양이다.. 밧줄이 소나무 속으로 파고 들었다.. 저 정도면 10년 이상은 되었을것 같다.

 

▲ 암릉위에 올라서서 지나온 아미산을 조망한다.

 

▲ 조망바위에서 가산 정상까지는 순탄하게 이어 진다..

 

▲ 동산도 확인하고..

 

13시 35분 : 가산.. 

 

▲ 가산에서의 내림길이 가시도 많고 힘들다고 하던데... 우리가 가는길에는..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 다만.. 낙엽과 급경사가 다소 힘들게는 하지만 내려갈만 하다..

 

▲ 방향을 찾기위해 동산을 확인하고.. 뫼들님의 산행기를 떠 올리며..

동산과 작은아미산 사이의 계곡을 겨냥하고 내려 간다.. 계곡아래에는 저수지가 분명히 있을 거니까..

▲ 계곡에 거의 내려왔는지.. 화전민터 같은 축대도 보인다..

여기서 일부는 작은 아미산을 향해 올라가고.. 나와 3명은 마을을 찾아 하산키로 한다.

 

▲ 계곡을따라 내려 오니... 역시나 예상은 적중이다.. 아래쪽에 저수지가 보인다.. 무수1지가 틀림없으렸다.

 

▲ 길도 없는 곳에서.. 임도를 만나니.. 묵은 임도지만.. 완전 아우토반이다..

 

14시 19분 : 무수1지의 반영..

 

▲ 이어서 경운기가 다닌 임도를 따라 내려 가니..

 

▲ 무수마을과 연결 된다..

 

▲ 가산과 작은아미산을 돌아보고.. 갓댐!~.. 빠이빠이다~..

 

▲ (주)참주가는...

무슨회사일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전통주를 제조 생산하는 농업회사 법인이다..

 

▲ 아미산 오기전에 미리 공부해두었던 마을길이어서 인지.. 처음와본 마을인데도 낯설지 않게 탄금정을 찾아간다.

 

▲ 27번국도와 나란히 가는.. 구27번 도로를 따라서...

 

14시 48분 : 탄금정 산행종료.

 

▲ 탄금마을의 탄금정..

옛날..이 마을에 선녀가 춤을 추고 내려올때 이곳에서 가야금으로 장단을 맞춘 곳이라 하여 탄금(彈琴)마을이라 하였다고..

 

 

16시 04분 : 남원시 광한루앞 광성식당..

 

▲ 갑진년 청룡의 기운을 받고.. 정말 값지고도 값진 화랑산악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 광한루에 동학농민의 아픔이 있었다는 건.. 비문을 읽어보고 처음 알았다.

 

▲ 2024년의 첫산행과...

새로운 운영방식에 따른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며..

2023년 11월 05일(일).

망덕산(197m) : 광양시.

 

산행코스 : 태인동수변공원주차장-배알도-정병옥가옥-망덕산-약수터-출렁다리-배알도-수변공원주차장산행종료.

산행시작 : 태인동수변공원주차장   10시 10분.

산행종료 : 태인동수변공원주차장   14시 40분.

전체거리 : 약 7.48km.

전체시간 : 04시간 28분.

운동시간 : 03시간 02분.

휴식시간 : 01시간 26분.

 

10 : 10  태인동수변공원주차장  출발.

10 : 30  배알도.

11 : 04  정병옥가옥.

11 : 58  망덕산.

13 : 24  약수터.

13 : 39  출렁다리.

14 : 29  배알도.

14 : 40  태인동수변공원주차장  산행종료.

 

10시 10분 : 전남 광양시 태인동 수변공원 출발.

솔잎산악회 11월의 산행지는 전남 장흥의 "천관산"이었으나 오늘은 전국이 비 예보다.. 산대장님의 재량에 따라..

타지역에 비해 비교적  강수예보가 적은 광양의 망덕산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목적지인 태인동에 도착하니 비는

소강상태를 보이며 오히려.. 구름사이로 기분좋은 햇살이 내려 온다.

 

▲ 전우치(田禹治)와 태인동..

전우치(田禹治)는 조선전기 서울 출신의 선비로 환술과 기예에 능하고 귀신을 잘 부렸다고 하는 전설같은 실존인물인데

주된 활동무대가 담양.. 순창등지로 알고 있었는데 이곳 광양에서도 활동하였던가 보다.

 

▲ 남해의 어느 사찰에서 하는 "관음방생기도" 행사인듯 하다.

 

▲ 태인도 해안가로 잘 조성되어 있는 자전거길을 따라 배알도로 간다..

 

▲ 솔바람 선임자문님의 작품 1...

배알도로 가는 길에 솔바람선임자문님의 작품 2컷을 올린다...

 

▲ 솔바람 선임자문님의 작품 2...

 

▲ 오늘의 산행코스는 배알도를 경유하여 망덕산을 시계방향 역순으로 한바퀴 돌아오는 코스다.

배알도는 550리를 달려온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마침표를 찍듯이 점처럼 덩그라니 떠 있는 조그만 섬이다.

 

▲ 배알도로 건너가는 첫번째 다리는 "해맞이 다리" 다. 뒤에보이는 다리는 "별을 헤는 다리" 다.. 둘다 이름이 예쁘다.

"해맞이 다리" 의 길이는 295m 이다.

 

▲ 앞에 보이는 모래사장이 여름이면 피서객들로 붐비는 배알도해수욕장이고..

작년10월에 올랐던 광양의 구봉산이 반갑다... 구봉산에서의 광양만 조망은 아주 좋다.

 

▲ 요즘에 만드는 해상보도교의 기술수준은 완전 예술급이다.

다리 중간 지점에 둥그렇게 뚫려 있는 부분이 있다. 광양(光陽)의 한자 이름은 빛과 볕이라는 뜻으로 태양을 의미한다.

이런 지역 상징에 맞춰 태양을 형상화한 형태로 보인다. 해맞이다리는 일출 명소이기도 하다.

 

 

▲ 애술적 감각의 "별을 헤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먼저 배알도 정상(?)으로 올라 간다.

 

▲ 배알도 해변데크에서 바라보는 경남 하동..

 

▲ 모서리를 돌아가니 건너편에 망덕포구가 그림이다.

 

10시 30분 : 배알도 "해운정" 도착.

 

▲ 1940년 당시 진월 면장이었던 안상선에 의해 건립한 정자인데.. 평소 친분이 있던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휘호를 받아 "해운정" 이란 현판을 걸었지만 안타깝게도 태풍 사라호때에 해운정이 무너지면서 유실되었다는 내용이다.

 

▲ 배알도 전망대..

배알도는 대동여지도 등에 사도(蛇島)로 표기되어 뱀섬으로 불리어 오다가 망덕리 외망마을 산정에 있다는 천자를 배알

하는 형국에서 배알도라는 이름을 얻은 신비의 공간이라 더니..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해상그림도 비경이다.

 

▲ 섬진강 물길을 사이애 두고 좌측은 전남 광양이고 우측은 경남 하동이다..

섬진강과 광양만이 합수되는 지점인데.. 너무나 잔잔한 호수같다.

 

▲ 배알도에서 내려다 보이는 해맞이 다리.. 아름답다..

 

▲ 배알도에서 망덕포구로 이어지는 "별 헤는다리" 다. 두 교각사이를 캐이블로 지지하는 타입의 "현수교" 다..

건너편의 망덕포구와 배알도를 잇는 "별 헤는다리"는...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서 따온 이름이다.

 

▲ 길이 275m의 "별헤는다리" 는... LED 조명이 설치되어 야간에는 멋쟁이 다리가 된다.

 

와우!~.. 멋지다.. 그런데... 언냐도 거침없이 날개짓을 하는데.. 막내가 붙박이다..ㅋㅋㅋ~~

 

울릉도 여행때 도동항 방파제의 일이 생각나서.. 다시 도전해 보자..

 

하나..둘.. 셋!~~.. 부회장님 수퍼우먼처럼 날아 올랐다..ㅎㅎ.. 그러나.. 막내는 여전히 붙박이다...ㅋㅋㅋ~..

 

 인간이 만든 조형물도 자연과 하나가 될때.. 예술이 된다.

 

 망덕포구..

망덕포구는 광양만을 한 눈에 파수를 할 수 있는 위치라고 해서 "망뎅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자음을 빌려서 표기하면서 망뎅이가 망덕(望德)이 되었다고 한다.

 

 비가 올거라던 날씨는 어디로 가고... 늦봄 같은 햇살에 등짝이 뜨거워도 아름다운 풍경에 셔터 누르기가 바쁘다..

 

망덕포구 해변 데크길은 윤동주 거리로 꾸며져 있다.

"별보다 빛나는 이야기를 품은 '나'를 찾아 걷는 길"이라고 해서 '별빛나길'이라고 한다.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라는 정병욱 교수의 말이 새겨져 있다.

 

 윤동주와.. 정병욱..

정병욱은 윤동주의 연희전문 2년 후배이지만 나이는 5살이 적다. 

윤동주는 만주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현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룽징시 즈신진 밍둥촌)에서 태어나 용정의 

은진중학교와 광명중학교,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다녔다. 정병욱은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동래고보를 졸업했다.

 

망덕포구는 가을 별미인 전어 산지로도 유명하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전어 요리를 개발한 곳이라고 한다.

 

▲ 시인 윤동주의 유고가 정병욱에 의해 보존된 마을이기에.. 데크 난간에도 "서시"가 적혀 있다..

 

 ㅎㅎㅎ~ 모자를 삐딱하게 쓴걸 보니..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 은.. 아닌것 같고.. 최백호의 옛날식 그다방의 마담도

아닌것 같고.. 그러면.. 망덕포구에서.. "좀.. 노는 아지매" 인가유?..ㅎㅎ~!

 

"연연히 바람에 스치우다" 라는 제목의 조형물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시구를 떠올리게 한다.

철의 도시 광양을 상징하는 금속 재질의 조형물 철판 조각들에 윤동주의 시가 새겨져 있다.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의 뒤편 옹벽에 윤동주의 대표시인 '서시'의 육필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윤동주는 이곳에 한번도 온 적이 없지만 이 집 덕분에 그의 시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두사람의 기이한 인연을 맺은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정병욱 선생의 호 '백영'은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 제목을 그대로 한자로 옮긴 것이다.

 

 

 

 윤동주 육필 원고;

1941년말 졸업을 앞두고 자신의 시 중에서 18편을 엄선한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

하는 서시(序詩, 시집의 맨 앞에 서문처럼 쓴 시라는 뜻이다)를 써서 붙여 모두 19편의 육필 시집을 만들었다.

원래는 출판할 계획이었는데 한글 시집 발간으로 그가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을 우려한 스승이 만류했다고 한다.

윤동주는 이 시집을 3부 만들어 하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고 2부는 스승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에게 주었다.

 

정병욱은 1944년 학병으로 징집돼 일본으로 떠나기 전 모친에게 윤동주의 원고를 맡기며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니 

잘 간직해달라"고 당부했다. 정병욱의 부모는 시집을 쌀독에 숨겨서 보관했다. 윤동주가 원고지를 엮어서 만든 시집 3부중

이것만이 무사히 보존돼 해방 이후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원고 덕분에 사후에나마 윤동주의 대표시들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고, 그가 국민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시인이 될 수 있었다.

 

11시 10분 : 망덕산 등산로 입구.

 

 쥐꼬리망초..

꽃말은... "가련미의 극치" 다..

 

화장실에 간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망덕산이 호남정맥이 멈춘곳이라는 것도 알고..

 

 섬진강 상류도 보고..

 

 강건너의 경남 하동땅에 섬진강하류의 모래 사구언덕도 보고..

 

 마삭줄...

 

 출렁다리 갈림길.. 약수터외 이어진다..

 

11시 26분 : 두번째 갈림길..

 

 200m도 안되는 산이 할것은 다할려고 한다.. 오름길이 예사롭지 않다..

 

 만만치 않은 오름과 후텁지근한 날씨에 등줄기에 육수가 주루룩이다..

 

 고비군락지.

 

11시 41분 : 망덕포구 전망대.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배알도가 한점이 되어 동동 떠 있다.

 

 여기서 막내 백여사의 작품 몇장.. 1..

 

백여사의 작품 2..

 

백여사의 작품 3..

 

 백여사의 작품 4..

 

 백여사의 작품 5..

 

 11시 45분 : 사선대..

 

▲ 떠있는 바위라 해서 부석(浮石)이라 한다는데.. 내눈에는 가오리가 너울춤을추며 유영하는것 같다.

 

▲ 섬진강은 진안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전북..경남..전남의 3개도 550리를 구비돌아 망덕포구에서 그 여정을 마무리하여

남해로 흘러든다.

 

 여기서 보니 섬진강휴게소가 바로 발밑이다... 그리고 하동의 진산 금오산이 눈인사를 한다..

 

 사선대..

 

 무접 섬 광장..

광양의 대표 축제인.. 가을 전어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올해는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열렸었다.

 

 광양의 대표산 인 백운산에서 남쪽으로 억불봉을 거쳐 흘러 내린 깃대봉과.. 동쪽으로 흘러내린 산줄기는 쫏비산과

불암산을 솟구친다... 그 아래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하동 최참판댁의 평사리는 쫏비산 너머에 있다.

 

 망덕산 정상까지는150m다...

 

11시 58분 : 망덕산 정상...

 

 어허!~~ 이회장님이 의자왕이라도 되는지..

 

궁중에 이쁜 궁녀는...

 

죄다 차출 한다.. ㅎㅎ~

 

앞서간 일행들을 찾아서 내려 가니..

 

갈림길에서..

 

길라잡이에게 최대의 예우로 배꼽인사를 한다.. 의자왕보다 더 기분이 괜찮다.. ㅎㅎ..

 

누구의 발상인지 참으로 기특한 신하로세!~.. 내.. 후히 포상을 하리라..ㅎㅎ~

 

13시 23분 : 약수터..

 

200m도 안되는 고지의 샘에 물이 있다..

배알도가 망덕산 정상의 천자에게 배알하는 형국이라더니.. 이곳 망덕산이 명당은 명당인가 보다.

 

▲ 예사롭지 않은 포스(force)가 느껴지는 아름드리 나무다.

 

▲ 밑둥치를 눈대중 해보니 장정 두세사람의 팔둘레다.

 

▲ 좌측으로 가면 망덕포구.. 우측으로 가면 출렁다리다... 우측으로 가자..

 

▲ 현재 진행형의 작업중인 개간지를 지나서..

 

▲ 모퉁이를 돌아서니 출렁다리 교각이 보인다.

 

▲ 폐기물 수거업체인듯한 곳을 지나..

 

▲ 대로가 나오면.. 오른쪽 임도를 따라서.. 120m 정도 진행하면..

 

13시 39분 : 출렁다리를 만난다.

 

▲ 들머리가 있는 태인동 방면..

 

▲ 출령다리에서 오른쪽은 남해 고속도로와 만나는 길이다.

 

▲ 다시 폐기물 수거업체 입구로 나와서.. 도로를 따라간다.

 

▲ 200m정도를 갓길을 따라가야 하기에 조심스럽다.

 

▲ 칼텍스주유소 앞에서 망덕포구쪽으로..

 

 도로보수공사중이라는 금줄을 넘는다.

 

태인대교.

 

태인동으로 가는 태인대교.

삼봉산아래에는 "김시식지(海衣始殖地)"로 해은(海隱) 김여익(金汝瀷, 1606-1660)을 기리는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태인도는 "김(海衣始殖地)"로 김여익(金汝瀷)이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에 해의(海衣=해태)가 착생한 것을 보고 개펄에

감나무가지를 꽂아 양식한 곳으로.. 김양식의 시초다. 해태는 일본식표현이다.

김여익은 영암군 학산면 몽해(夢海)에서 태어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자 의병을 일으키고 활동하였으나..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을 하게 되자 고향을 떠나 1640년에 광양 태인도(太仁島)로 들어와 김을 시식(始殖)하였다.

오늘날 "김"이라고 이름지어진 것은 조선의 인조대왕이 진상품으로 올라온 김을 먹어보고 김여익의 성을 따서 "김"이라

명명하였고 하동장(河東場)에서는 태인도의 김가(金家)가 기른 것이라 해서 “김”이라 했다고 한다.

 

▲ 팥배나무..

 

▲ 털머위..

꽃말은... "한결 같은 마음"... "다시찾은 사랑" 이다..

 

▲ 망덕산을 돌아보고...

 

▲ 태인동수변공원으로..

 

14시 40분 : 산행 종료...

 

 

14시 56분 : 하산식 장소...

 

산대님의 작품 1...

 

산대님의 작품 2...

 

산대님의 작품 3...

 

산대님의 작품 4...

 

▲ 회장님의 건배에 이어...

 

▲ 24년도 차기 대권당선자인 산대장님의... 기분좋은 멘트로 건배..

 

15시 58분 : 하산식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솔잎을 위해 은총을 베푸사 산행내내 참아주셨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천자에게 배알하는 섬 배알도의 아름다운 풍광과..

해맞이 다리... 별 헤는 다리를 건너 시인의 길도 걸어보고

낮지만 천자의 명당을 품은 망덕산의 사선대는 잔잔한 감동이었다..

어떠한 미사려구도 필요없는 대어를 낚은 기분의 하루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