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0일(목).

인왕산 : 서울시 종로구.

 

산행코스 : 세검정삼거리-석파정별당-홍지문-기차바위-인왕산-범바위-해골바위-선바위-국사당-서대문형무소-독립문.

산행시작 : 세검정삼거리  12시 06분.

산행종료 : 독립문  15시 10분.

전체거리 : 약5.74km.

전체시간 : 03시간 03분.

운동시간 : 02시간 29분.

휴식시간 : 00시간 34분.

 

12 : 06  세검정삼거리.

12 : 08  석파정별당.

12 : 15  홍지문.

13 : 06  기차바위.

13 : 52  인왕산.

14 : 13  범바위.

14 : 31  해골바위.

14 : 36  선바위.

14 : 38  국사당.

14 : 56  서대문형무소역사관.

15 : 10  독립문.

 

 12시 06분 : 세검정삼거리..

백호트레킹의 오늘 일정은.. 북촌한옥마을~경복궁~인사동문화거리다..

얼마전에 둘러본 곳이기에 생략하고..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 인왕산을 오랜만에 올라보고자 하여 일행과 둘이서

택시를 타고 세검정삼거리에 내려서.. 인왕산 들머리로 바로 갈려다가 가까운곳에 있는 석파정 별당을 찾아간다.

 

 12시 08분 : 석파정별당(관람객들이 있는집).. 아래쪽 석파랑 한식당(옛이름은 문서루다).

석파정별당은.. 여기서 도보로 약10분정도의 거리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더 알려진 "석파정"에 딸린 사랑채였다.

 

1958년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서 작품 활동을 하는 장소로 활용하였다..

손재형(孫在馨)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이며... 일본에 건너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온 인물이다.

석파랑은 소전의 집념이 지어낸 건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집을 짓기 위해 30년동안 전국 곳곳을 수소문해 목재와 기와

등을 모았다. 운현궁.. 선희궁.. 칠궁.. 이완용의 별장 등의 자재들이다. 덕수궁 돌담이 철거될 때는 트럭 30대 분을 옮겨

오기도 했다. 그 자취들을 모아 1963년부터 6년에 걸쳐 건축했다.

 

아래쪽 석파랑 한식당(옛이름은 문서루다).

문서루(석파랑) 또한 예사 한옥이 아니다. 순정효황후 윤 씨의 옥인동 생가를 옮겨왔다. 당시 중국에서 들여온 호벽(胡壁)

재현했고 입구에는 신라와 백제의 와당을 붙여 품위를 더했다. 덕분에 옛 한옥의 기품이 그대로 살았다.

 

1981년에 손재형이 세상을 뜨고 석파랑은 1993년 새로운 주인을 만나 한정식집으로 문을 열었다. 내부는 음식점으로 쓰기

위해 최소한만 바꿨다. 주로 궁중요리와 전통 한정식을 낸다. 우리나라의 전통주도 맛볼 수 있다. 원래 문서루와 석파정

별당 그리고 맞은편 한옥의 세 채로 이루어졌다. 현재는 음식점으로 쓰이는 석파랑(문서루)과 석파정 별당 두채만 석파랑

의 소유다... 맞은편 한옥은 소유주가 다르다.

 

▲ 부암동 부침바위.

종로구 부암동 134번지 길 가에 있던 높이 2m의 큰 바위로서, 이 바위에 돌을 붙이면 옥동자를 얻는다는 전설로 수많은

여인들이 정성껏 돌을 붙여놓고 절을 하였다고 전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부암동의 유래가 되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바위는 없어졌다.

 

▲ 인왕산 들머리로 가는 길 건너에 홍지문이 보인다..

 

▲ 홍지문.

홍지문은 서울의 북서쪽 방어를 위한 탕춘대성의 출입문으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하며 홍지문에 연결된 탕춘대성은

서쪽에 있어서 서성(西城)이라고도 한다. 원래 탕춘대성이 있는 세검정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군사상 중요한지역이었다.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은 숙종의 친필로 문루에 달았는데.. 1921년에 주저앉아 방치되었던 것을 1977년 7월에 서울

특별시 도성복원위원회에서 홍지문과 오간대수문, 그리고 주변 성곽 280m를 포함하여 복원하였으며..

이때 홍지문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새겨졌다.

 

12시 15분 : 인왕산 들머리.

 

▲ 탕춘대성.

홍지문들머리에서 약 1분가량 올라온곳에서 탕춘대성벽과 만난다..

 

탕춘대성은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이후 수도 방위를 위하여 1719년에 완성한 성곽으로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

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1715년(숙종 41)에 서울의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홍지문(弘智門),

오간수문(五間水門), 탕춘대성(蕩春臺城)을 건립하였다. 홍지문은 서울의 북서쪽 방어를 위한 탕춘대성의 출입문으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하며 홍지문에 연결된 탕춘대성은 서쪽에 있어서 서성(西城)이라고도 한다.

이 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으로 약 100 여m가 되는 산봉우리에 연산군의 놀이터였던

탕춘대가 있었으므로 그 이름을 딴 것이다.

 

▲ 향로봉에서 문수봉으로 이어지는비봉능선.

 

▲ 오래전 산매화가 고울때 올랐던 족두리봉에서의 봄날을 되돌아 본다.

 

▲ 시원하게 달려가는 내부순환로 아래에 옥천암 보도각 지붕이 보인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7호인 마애보살좌상(磨崖菩薩坐像)으로...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이 존상

앞에서 기원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아들 고종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말이 전해 오는 서울의 이름난 불교 존상이다.

 

▲ 다시 걷고싶어지는 비봉능선이다.

올가을이 가기전에 수유동 빨래골에서 칼바위능선을 경유하여 비봉에서 이북5도청으로 내려올 계획을 세워본다..

 

▲ 시대의 산물.. 일개소대는 들어갈만한 벙커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 홍지문쪽 등산로는 상대적으로 등산객이 적어서 그런지 설치한지 꽤나 오래된 계단의 난간기둥이 5개중에 하나는

흔들거리고 잘못 짚어면 낙상일것 같아서 난간대를 잡지 않고 조심조심 올라간다.

 

▲ 청와대 개방으로 연계하여 한번 더 올랐던 북악산..

 

▲ 인왕산 산불..

2023년 4월 2일 11시 53분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인왕산에서 산불이 발생했다.

이어서 12시 10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북악산에서도 연쇄적으로 화재가 발생했었다.

 

▲ 불에탄 나무들 사이로 기차바위가 보인다. 기차바위는 일명 백련봉이라고도 불리운다.

 

▲ 산불의 흔적은 여기까지..

 

▲ 기차바위 입구..

 

13시 06분 : 기차바위.

 

▲ 기차바위에서...

인왕산은 서울의 중심에 솟아있으며 높지는 않지만 산세는 웅장하다.

북쪽자락에 있는 부암동은 무계동이라 불리던 곳으로 중국의 무릉도원에 버금갈정도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던 곳이다.

1968년 북한의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인왕산 옆 산길로 질러왔다. 그 사건 뒤로 인왕산은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2월 24일부터오를 수 있게 됐다.

 

13시 09분 : 기차바위 정수리..

 

▲ 기차바위 내림길에 만난 해골바위..

 

13시 14분 : 기차바위 아래에서.. 백호트레킹에서 마련해주신 찰밥도시락으로 늦은 점찍기..

 

▲ 낙월봉 오름..

 

▲ 낙월봉에서 바라본 기차바위와 그 너머로 비봉능선..

 

13시 45분 : 낙월봉..

낙월봉은..현 지도에는 표기되지 않고 고지도에만 표기되어 있다.

 

▲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이후의 일이다. 반정을 일으킨 공신들은 신씨왕비를 몰아내고 인왕산계곡으로 내쫓았다.

폐비의 친정아버지인 신수근이 정적이라는 이유로 그 딸 역시 국모로 모실 수 없다는 뜻에서다. 당시 신씨의 나이는 겨우

스무살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열세살 어린 나이에 진성대군의 아내가 되어 7년 만에 폐비가 되었으니 그 여린 마음에

상처가 얼마나 깊었겠는가.

 

▲ 중종과 폐비 신씨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중종을 왕위에 앉힌 자들은 자신들이 살해한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의 보복이 두려워서 중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경

왕후를 폐위시켰다. 왕후는 인왕산 아래에 있는 옛 거처로 쫓겨났다. 단경왕후는 궁을 나오면서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왕산 바위에 붉은 치마를 걸어두겠다는 약속을 중종에게 남겼고, 이를 죽을 때까지 지켰다.

 

아침이면 인왕산 바위에 치마를 널어놓고 저녁이면 걷는 일을 51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중종 또한 부인을 잊지 못해

경회루에 올라 부인이 있는 인왕산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인왕산 치마바위에 전해지는 슬프고도 애잔한 전설은 단순히

큰 바위로만 보일 수 있는 치마바위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 인왕산 정상으로..

 

13시 52분 : 인왕산 정상 표지목.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 인왕산 삼각점이 있는 실질적인 정상 바위.

"인왕산을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조선 시대에는 호랑이로 매우 유명한 산이었다.

지리산이나 금강산이 훨씬 더 웅장해서 호랑이도 많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야산 격인 이 인왕산의 호랑이가 더 유명하다.

 

정조 대왕 때만 해도 호랑이가 서울에 흔했고, 이들 호랑이가 민가는 물론 궁궐까지 난장판으로 만들었기 때문인 듯...

1868년, 북악산 등에서 잡은 호랑이 다섯 마리를 마지막으로 도성 내 호랑이는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인왕산(仁王山)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있는 해발고도 338.2 m의 바위산이다.

한양도성의 산으로는 북악산(백악산)보다 3.8 m 낮은 2위이며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에서 "우백호"를 담당하는

산이다. 이는 경복궁 정전에서 남쪽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 인왕산이 있기에 붙여진 것이다.

 

▲ 인왕산(仁王山) 경계점.

 

▲ 내려다 본 치마바위..

 

▲ 남산타워..

 

▲ 하산은 독립문공원방향으로..

 

▲ 옥개석.

성곽의 최상단에 놓이며 유사시에 적병이 올라오면 떨어뜨려서 적군을 막는 역할도 하였다.

 

▲ 인왕산의 형제산격인 안산..

 

▲ 인왕산 범바위와 곡장 전경.. 곡장은 둥글게 구부러진 성곽을 일컽는 말로 곡성이라고도 한다.

 

 

▲ 범바위 가는길에 뒤돌아 본 인왕산..

 

14시 12분 : 인왕산 범바위.

 

▲ 범바위에서 바라본 곡장.. 지금은 군인들이 철수를 하여 시설물만 흉물스헙게 그냥 남아 있다.

 

▲ 인왕산 치마바위..

 

▲ 국사당과 선바위 가는길.. 성벽을 넘는다. 성벽을따라 바로 내려가면 사직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 모자바위..

 

▲ 얼굴바위.

 

▲ 당겨 본 얼굴바위.

 

▲ 국사당 가는길은 무속행위가 일반화 되어 있다..

 

▲ 해골바위(장군바위).

 

▲ 해골바위로 올라가 본다..

 

▲ 모자바위와 달팽이바위.

 

▲ 여기서보니 얼굴바위가 아니다.

 

▲ 이정표가 가르키는 선바위 쪽으로...

 

▲ 선 바위 뒤쪽.

 

▲ 선 바위.

선바위의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長衫)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 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불렀다.

 

▲ 선 바위에 관한 전설..

옛 문헌에는 조선 태조 때 한양 천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한양 도성을 쌓을 때 선바위를 무학대사는 도성 안에 포함하자고 하고, 정도전은 성 밖에 두자고 하였다.

이때 정도전이 말하기를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성하고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 하니 태조가 정도전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였다.. 라는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가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다." 라고 탄식 하였다고 한다.

 

▲ 14시 38분 : 국사당은...서울의 신을 모시는 신당이다.

인왕사와 인접해 있어서 불당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으나, 국사당의 분류는 불교가 아닌 민간신앙으로 등록되어 있다.

1973년 중요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인왕산 국사당(仁王山國師堂)이다.

 

한국 무속신앙에서 신을 모셔놓고 굿을 하는 데 편하도록 민가와 좀 떨어진 곳에 짓는 굿당 중 하나로, 중요민속문화재

제28호(1973년 7월 16일 지정)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국사당(國師堂)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왕산 국사당(仁王山 國師堂)은 원래 남산(南山)의 산신(山神)인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는 산신당(山神堂)인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신사(神士)를 지으면서 국사당을 인왕산 현재 장소로 옮겨왔다.

 

본래 국사당은 서울 남산 꼭대기(지금은 팔각정이 위치)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국사당이 자기들의 신사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면서

결국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그곳에서 기도하던

자리라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얘기에는 이성계가 젊었을때 비가 내려 노모와 딸이 사는 한 허름한 집에 잠시 신세

를 졌다. 잠을 자는데 대들보 세개가 등에 얹히는(무학대사가 해몽해준 꿈) 그 꿈을 꾸었다. 집주인 할머니가 그 꿈을 듣고

왕이 될 것이라는 해몽을 해주었다. 그때 마침 옆에 자고 있던 딸이 그것을 듣고 깨 이 손님이 왕이 되냐고 떠들었다.

당황한 이성계에게 노파가 딸의 뺨을 때리라 시켰고 이성계는 엉겁결에 따귀를 쳤는데 딸은 죽고 말았다.

 

그리고 노모가 하는 말이 액땜했으니 오늘 일은 발설하지 말라며 내보냈다. 훗날 이성계가 그 집을 찾아보니 흔적도 없고,

노모와 딸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운게 지금의 국사당이라고 한다.

 

국사당 주차장을 지나서..

 

▲ 인왕사 일주문..

인왕사는 조선 개국과 함께 1393년에 무학대사가 세운 사찰이며.. 봉은사에서 갈라져 나온 말사로 규정하고 있다.

절의 체계도 복잡한데 지주가 4명이며 해마다 번갈아가면서 맡고 있다. 1910년대 이래로 여러 암자가 통합되지 않고..

제각기 독자적으로 활동하는것으로 보고 있다.

 

▲ 독립문역 쪽으로..

 

▲ 계단을 내려가서 골목길을 빠져 나가서 대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 지하철 독립문역이 보이는 지점에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간다.

 

▲ 뉴스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붉은 담장이다.

 

1908년 조선통감부가 의병 등 반일세력을 탄압. 수용할 목적으로 만든 감옥이다. 건물은 본래 아연판을 붙인 판자로

두른 허술한 형태였다. 건립비용은 약 5만원이었고, 규모는 청사 및 부속건물 80평, 감방 및 부속건물 480평이었다.

원래 수용인원은 500여 명이었는데, 이후 증. 개축을 반복하여 1938년의 수용인원은 2,763명이었다.

1988년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 아직도 찾고있는 끝나지 않은 아픈 역사의 발굴현장이다.

 

▲ 3.1독립선언기념탑.

 

▲ 독립문(사적 제32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다. 높이 14.28m, 너비 11.48m. 모화관 정문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1896년(건양 1) 독립협회 발의로 3,825원을 모금해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다.


45×30㎝크기의 화강암 1,850개를 쌓아 만든 이 문은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내부 왼쪽에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렀다. 이맛돌 위에 앞뒤로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 쓰고 그 좌우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다.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했으며, 당시 서양건축의 조영경험이 있던 목수 심의석이 공사감독을 맡아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만들었다.

 

▲ 인왕산 산행을 마치고.. 경복궁주차장으로..

 

▲ 광화문쪽으로..

 

서울의 랜드마크중의 하나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어면서 가장 많이 오욕의 역사로 점철된 건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광화문으로 들어가서..

 

▲ 홍례문(사적 제117호)과 북악산..

 

▲ 홍례문은..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1912년 철거되었다가, 문민 정부에서 옛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복원 공사를 시작

하여 2001년 10월 26일에 완공했다.

 

▲ 용성문과 인왕산..

 

▲ 협생문을 나서면.. 바로 경복궁주차장이다.

 

15시 52분 : 경복궁주차장.

 

18시 01분 : 천안시 목천IC에서 멀지 않은 무지개식당.

 

▲ 된장찌개정식.. 제육볶음..

음식은 본인 입맛에 맞으면 딱이다.. 내입에 완전맞춤이다.

백호 회장님.. 총무님 끝내줍니다.

2024년 10월 06일(일).

고하도해상데크길 : 전남 목포시.

 

산행코스 : 고하도주차장-고하도전망대-해안동굴전망대-용머리-고하도승강장-유달산승강장-북항승강장-고하도주차장.

산행시작 : 고하도주차장  11시 52분.

산행종료 : 고하도주차장  15시 23분.

전체거리 : 약13.2km.

전체시간 : 03시간 33분.

운동시간 : 02시간 42분.

휴식시간 : 00시간 51분.

 

11 : 52  고하도주차장.

11 : 56  고하도승강장.

12 : 08  고하도전망대.

12 : 12  해상데크.

12 : 24  해안동굴전망대.

12 : 36  토끼와 소녀.

12 : 43  이순신장군동상쉼터.

12 : 57  용머리쉼터.

14 : 00  고하도승강장.

14 : 30  유달산승강장.

14 : 55  북항승강장.

15 : 23  고하도주차장.

 

 목포대교...

전라남도 목포시에 있는 자동차 전용도로다. 2012년 6월 29일에 개통되었다.

총 연장 4.129㎞로 목포 북항과 고하도를 잇는 해상교량이다. 도로명은 고하대로이다.

 

목포대교는 기본적으로 사장교 형식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된 3웨이 케이블공법이라는 고난도 공법을 사용하였다.

일반적인 사장교는 상판 좌우측에 각각 케이블 2쌍으로 지탱하지만, 3웨이 케이블공법은 좌우측의 케이블을 1쌍으로 줄이

고 이를 상판의 중앙에 옮겨 상판을 고정하는 방식이기에 설계나 시공 등에서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다.

 

케이블을 중앙에 배치함으로써 사장교 좌우측의 경관을 살릴 수 있음이 장점이다.. 또한 목포는 태풍이나 강풍이 잦은 지역

이기 때문에 다리의 상판은 초속 67.4m, 주탑은 초속 74.9m 강풍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다. 왕복 4차로로 공사비는 3346억 원을 투입하였고, 길이 167.5 m짜리 주탑 2개, 교각 36개, 상판 슬라브 36경간이 시공됐다. 경간장 최대 길이는 500m이다... 최대 5만 톤급 선박이 통행할 수 있도록 목포대교 교량에서 바다 수면까지 높이를 53m로 설계되었다.

 

 11시 50분 : 고하도주차장..

고하도(高下島)는.. 목포 앞바다에서 약 2㎞ 지점에 있고... 목포항의 중요한 방파제 역할을 한다.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며.. 높은 산인 유달산 아래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 영사인 와카마쓰 도사부로가 고하도에서 최초로 시험 재배에 성공하면서 육지면 재배 10주년 때 기념으로 세운

"조선육지면발상지비(朝鮮陸地綿發祥之碑)" 비에 1904년 고하도에서 최초로 육지면이 재배되었다고 적혀있다.

목포항은 고하도에서 육지면 재배를 성공하면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 3대항 6대 도시로 발전했다.

육지면은 고려 말 문익점이 중국에서 들여온 아시아면(재래종)과는 다른 품종이다. 미국에서 들여온 육지면은 아시아면에

비해 솜털이 종자에서 잘 떨어지며 백색으로 섬유가 길고 잘 꼬여져 방직원료로 뛰어났다. 

 

주차장을 나와서 오른쪽 도로를 따라 약300m쯤 올라가면...

 

목포해상케이블카 고하도승강장을 만나고..

 

해상데크로 가는 들머리가 보인다...

 

해상데크길을 걷고 난후에 유달산으로가는 케이블카의 예약관계로... 14시 50분까지 고하도승강장으로 돌아와야 된다.

 

 본격적인 트레킹을 하기전에 안내도를 살펴본다.

고하도전망대에서 해상데크로 내려가서 해안석굴쪽으로 먼저 갔다가 용머리를 돌아서 올것이다.

이 안내도를 보고 갔더라면 제대로 진행을 하였을텐데 일부회원님들이 해안석굴쪽은 안가고 거의가 용머리쪽으로 갔다.

 

 해상데크 들머리..

 

계단마다 나이가 적혀있는... 150세힐링건강 계단길이다..

 

150세 목표를 향해 계단을 오르며..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건강한 삶의 가치를 설계하라는 의미의 계단길이다.

 

용의 허리에 올라서면 해상케이블카 고하도 주탑이 서있다..

 

고하도는..

용이 하늘로 오르기 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용오름’이라고도 부르며 이순신 장군이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명량해전 이후 이 섬에 머물며 수군재건을 이뤄내 왜란을 끝낼 수 있었던 매우 의미 있는 장소로.. 크고 강하고 곧은 기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12시 09분 : 고하도전망대..

독특한 건물 디자인은.. 13척의 판옥선 모형을 격자형으로 쌓아 올린 모습을 하고 있다... 고하도는 이순신장군이 13척의

판옥선으로 명량대첩 승리 후에 머물렀던 동안 전열을 가다듬었던 곳으로 충무공의 얼을 담았다고 한다.

 

고하도전망대에서 해상데크로 내려가는계단..

 

12시 11분 : 해상데크 갈림길에서.. 오른쪽의 해안동굴전망대로 먼저 다녀 오기로 한다.

 

▲ 솔잎님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더니.. 처음으로 만난 이고문님..

 

 해안동굴전망대로 가는길은 계속 이어지는 길이 없고 데크 끝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야 된다..

 

해상데크 쉼터.. 무슨 글자 같기도 해서.. 다시 자세히 보니 "항구"를 눞혀 놓았다.. 그래서 목포는 하~앙구~다..

 

다시 돌아와서 가야할 용머리쪽을 뒤 돌아본다..

 

고하도(高下島)에서 바라보는 유달산..

목포 앞바다에서 약 2㎞ 지점에 있고... 목포항의 중요한 방파제 역할을 한다.

 

일등바위와 이등바위는 옛날부터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유달산 일등바위에서 심판을 받은 뒤 이등바위로 옮겨져 대기하다

극락세계로 가게 되면 3마리의 학이나 고하도 용머리의 용에 실러 떠나게 되고.. 용궁으로 가게 되면 거북섬으로 가 거북이

등에 실려 떠난다는 전설이 있다.

 

 경사형 엘리베이트가 있다.

장애인.. 보행 약자 전용시설이며.. 이용료는 무료다.

이 엘리베이트는 1대가 내려갔다 올라오는데 10분 소요되고.. 1시간에 3번 왕복하므로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12시 23분 : 해안동굴끝지점 전망대.

일제강점기 말기에 특공정을 감추기 위한 위장 벙커용으로 뚫은 인공 해안동굴 2개가 등장한다. 일제가 태평양전쟁 때

연합군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시설로 고하도에는 이런 동굴이 14개나 있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하도를 후대가 지키지 못하고 이런 흔적을 남겼다니 안타깝다.

 

"낭만" 이다.. 재미있는 쉼터에서 반가웠습니다.

 

 용머리방향으로 돌아가는길..

 

▲ 줄을 서있던 많은 사람들이 전부다 엘리베이트를 타고 올라간 모양이다.

 

▲ 사랑과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토끼와 소녀..

 

▲ 바위에 부딪히며 부서지는 포말이 얼굴에까지 튀어 오른다... 역시나 파도는 역동적이어서 좋다..

 

 

▲ 해상데크와 목포대교.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조형물도..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릴때는.. 그림이 된다.

 

▲ 헐!~.. 이럴수가.. 백주 대낮에... 그것도 첨단의 21세기에.. 길을 막은 해적님들이.. 통행세를 내라고한다..ㅎㅎ

 

12시 43분 : 이순신장군동상 쉼터.

이순신장군은 1597년 12월 7일부터 이듬해인 2월 16일 진을 옮길 때까지 107일을 이곳 고하도에 머물렀다고 한다.

 

▲ 명량해전에서 13척으로 일본 함대 133척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은 고하도에 통제영을 설치하고 107일 동안 머물며 전열

을 가다듬었다.. 군선 40척을 건조해 모두 53척으로 늘렸고 1000명에 불과하던 병사도 8000명으로 늘려서 수군재건의

토대를 마련하여 왜란을 끝내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순신장군은 난중일기에서 고하도는 서북풍을 막음직하고 전선을 감추기에 아주 적합하다. 섬 안을

둘러보니 지형이 대단히 좋으므로 머물 것을 작정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용의 비상..

풍수지리적으로 지형이 용을 닮아서 '용섬"이라 불리기도 하는 고하도 목포의 희망을 담아 하늘에 오르다.

 

그런데 이런이런~..

목포대교 교각꼭대기를 자르지말고 다 나오게 해달라 했더니.. 또 잘라버렸다.. 우짜건노.. 그래도 한장은 건졌다.ㅎㅎ~.

  

▲ 용머리 올라가는길..

 

13시 06분 : 용의 머리에 올라섰다.

 

13시 22분 : 다시 고하도전망대에서..

 

▲ 고하도전망대를 뒤로하고..

 

▲ 고하도승강장으로..

 

빈센트 반 고흐가 왜? 여기서 나와~.. 좌측 아래글자가 재미있다.. 고흐도스테이션.. 반 고흐=고흐도..ㅎㅎ..

 

14시 02분 : 유달산을 오르기 위해 케이블카탑승 대기..

 

▲ 솔잎회장님이 설명하는 케이블카이용 및 유달산산행후 시간내 원점회귀 요령을 경청 숙지하고..

 

▲ 유달산으로..

 

▲ 이기머꼬.. 유달산을 향해 가는데.. 진행방향으로 비가 내린다.

 

▲ 밖에는 못된 비가 내려도 케이블카 안은 미소가 넘친다.

 

▲ 멀어지는 고하도..

 

14시 22분 : 유달산승강장에 내릴건데.. 빗방울은 더욱굵어졌다..

 

▲ 유달산승강장을 나와서 정상을 항해 출발 하려는데.. 회장님으로부터 불순한 일기로 하산하라는 특명이 내려 왔단다..

유달산은 일주등산을 하였기에 미련은 없다마는 유리창으로 유달산 일등바위를 올려다보고 돌아선다.

 

유달산은..목포 9경 중에 1경으로 손꼽히는 유달산은 높이 228.3m로 높은 편에 속하진 않지만 노령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끝자락인 산이다.

또한..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잠시 거쳐 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으로도 불린다.

 

▲ 목포의 가수.. 이난영님의 애잔한 노래가사속의 삼학도를 내려다 보니... "사공의 뱃노래" 는 영산강에 묻혀버렸고...

삼학도의 3개의 섬들은 하나가 되어 삼학도공원이 되어 있다.

 

▲ 산행도 못하고 유달산승강장에서 고하도승강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바로 돌아갈수는 없고 반대쪽의 북항승강장까지

갔다가 고하도로 가라고 한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이해가 안가는 운영방식이다.

 

▲ 유달산의 일등바위가 빗속에 흔들리고 있다.

 

▲ 북항승강장에서 내리고 다시 타고..

 

▲ 고하도로 돌아가는길의 유달산삼등바위를 넘어간다.

 

▲ 중간 기착지인 유달산승강장도 지나가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심청이가 몸을 던진 인당수보다 더 검푸른 빛이다.

 

 15시 19분 : 우여곡절끝에 고하도로 다시 무사히 돌아왔다.

 

▲ 북항승강장에서 엘리베이트를 타는데 아가씨들이 카메라를 들이댄다.. 난또..홍보용이라도 찍는건가 했더니..

고하도승강장을 나오는데 사진을 들이민다.. ㅎㅎ~ 장당 5천원.. 액자에 넣어면 2만원이란다.. 교영님이 오처넌 투자..

원본 사진은 잘 나왔는데.. 사진을 사진찍었더니.. 별로다.. 원본 파일(file)을 전송해달라고 할껄.. 깜빡했다..ㅠㅠ.

 

▲ 고하도주차장 트레킹종료..

 

▲ 트랭글 정리..

 

16시 04분 : 남도정식..

와서보니 주변의 거리가 눈에 익다.. 바로 옆에 노적봉공원이 있고 국도1. 2호선의 시작기점이 되는 거리다.

 

▲ 남도음식의 상차림..

수육과 한두가지 반찬 외에는 별로 특이할만한 것도 없는 음식 가지수다..

 

먼길 원정 트레킹.. 

기획하고 준비하고 진행하느라

회장님 이하 임원진님들 수고했습니다.

2024년 10월 03일(목).

고군산군도 구불8길 : 전북 군산시.

 

산행코스 : 물양장공영주차장-해변데크-선유봉-장자도-대장봉-오룡묘-대봉전망대-물양장공영주차장.

산행시작 : 물양장공영주차장  10시 19분.

산행종료 : 물양장공영주차장  14시 45분.

전체거리 : 약13km.

전체시간 : 04시간 27분.

운동시간 : 04시간 06분.

휴식시간 : 00시간 21분.

 

10 : 19  물양장공영주차장.

10 : 30  해변데크.

11 : 03  선유봉.

11 : 25  장자도.

11 : 58  대장봉.

12 : 27  인도교.

12 : 40  선유해수욕장(점심).

13 : 15  오룡묘.

13 : 49  대봉전망대.

14 : 48  선유도선착장.

14 : 45  물양장공영주차장.

 

고군산도(古群山島)란 이름의 유래는..

군산시 남서쪽 약 50km에 위치한 군도(群島)로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신시도 등 16개의 유인도와 47개의 무인도 등

6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산도라 불리었던 선유도(仙遊島)에 조선 태조가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만호영(수군부대)

을 설치하였었는데.. 세종 때에 이를 진포(현 군산)로 옮기면서 새 군산진(群山鎭)이 되자.. 군산도는 옛 군산이란 뜻으로

고군산(古群山)이 된데서 유래한다.

 

10시 20분 : 물양장주차장에서 홧팅!~...

 

고군산 군도에는 "선유8경"이 있다..

1경 명사십리(明沙十里).. 2경 평사낙안(平沙落雁).. 3경 망주폭포(望主瀑布).. 4경 무산십이봉(舞山十二峰)..

5경 삼도귀범(三島歸帆).. 5경 선유낙조(仙遊落照).. 7경 장자어화 (壯子漁火).. 8경 월영단풍(月影丹楓) 등이다.

 

개천날에 신선들의 놀이터를 찾아..

대구에서 열심히 달려온 화랑맨들의  단체인증샷을 마치고...하나하나 찾아보고 즐겨보자..

 

 선유대교.

 

지금은 썰물로 물이 낮아지고 있다.

이곳 바닷가는 외지인들이 밤중에 바다에 들어와  "해루질"로 이것저것 마구 잡아들이고 바다를 어질러 놓는 바람에 동네

주민들의 생계를 위한 벌이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동네 주민들이 밤새 지키고 있다고 한다.

 

 물량장주차장 화장실건물 뒤쪽에 선유항으로 가는 데크길 입구가 있다...

 

▲ 물량장주차장에서 선유봉까지는 고군산 구불8길 "B"코스에 해당하며... 선유봉에서부터는 구불8길 "A"코스 시작이다.

 

선유8경중에 5경인 삼도귀범(三島歸帆).

 

선유항과 무녀도 사이에 나란히 떠있는 섬들의 모습이 마치.. 세척의 돛배가 귀항하는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중에 주삼섬은 이순신장군께서 명량해전 승리후 12일 간 쉬면서 선조에게 장계를 올린 곳이라는 "장계터"다.

장계터에는 백의종군한 이순신 장군이 명랑해전 이후 12일간 머믈었다는 표식이 있다.

장계터에 대해서는 조금후 선유봉 정상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 선유봉과 선유항 전경..

 

▲ 선유도 연리목..

천년약속의 사랑나무라고 하는 연리목인데 안타깝게도 한쪽이 죽어 있다..

아마도 도로를 개설하면서 관리소홀로 생태환경이 문제였던것 같다.

 

▲ 선유항에서 옥돌해변으로 이어지는 데크길 입구.

 

▲ 옥돌해변 가는길에..

 

▲ 선유도 주민인듯한 아낙이 갯벌에서 무언가를 캐고 있는데.. 그릇이 비어있는걸 보니 아마도 조금전에 나온듯..

 

▲ 선유봉을 바라기하며 옥돌해변을 지나 펜션까지 가서..

 

▲ 옥돌슈퍼와 어부민박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들어 가야 선유봉 오름길과 이어진다.. 자칫 지나치면 알바다.

 

▲ 시그널을 따라 언덕 끝까지 오르면...

 

▲ 절개지가 나오고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다.

 

▲ 선유터널 위로 선유봉 오름길이다.

 

▲ 선유봉 오름길 역시 전형적인 섬산답게.. 급오름이지만 거리는 짧다.

 

▲ 선유봉 진행방향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면.. 선유도의 대표격인 망주봉과 그 아래 명사십리 해수욕장이다.

 

▲ 뒤돌아 서서.. 출발지인 선유대교를 보며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멈추었다가...

 

▲ 다시 선유봉으로..

 

▲ 2019년에 다녀 갔던 선유봉 달팽이 바위가 생각나서 찾아가 본다..

 

▲ 다시 만난 선유봉 달팽이바위..

 

11시 03분 : 선유봉..

 

▲ 장계터와 이순신 장군의 일화.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 5일 후인 1597년 9월 21일부터 10월 3일까지 고군산 군도 선유도에 상륙했다.

 

명량해전 직전 당시 극심했던 당파 간 다툼으로 희생돼 파직된 후 감옥에 갇혀 있다가 한 달여 만에 특사로 폴려나 도원수

밑에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통제사 원균이 대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됐다. 하지만 이순신은 남아있던 전함 12척에

한척을 추가해 겨우 13척을 이끌고 9월 16일 명량해전 울돌목(해남과 진도를 있는 진도대교 아래) 전투에 나선다.

 

전적으로 불리한 여건에서 왜장 마다시가 이끄는 133척의 대규모 왜선과 맞선 이순신 장군은 지형을 이용한 전투를 벌여

승리를 이룬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그 유명한 울돌목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한후 서해안

으로 들어와 북으로 전진하던 이순신 장군은 부안 위도를 거쳐 전투 5일 후 선유도에서 닻을 내린다.

 

그러나 아산 본가가 왜적들로부터 분탕질 당해 잿더미가 됐고, 아들 면이 왜적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비통해 했으며, 아들 회를 올려 보낸 후 잘 도착했는지를 걱정했다는 내용이다.

장군의 고뇌가 짙푸른 바다 색과 같이 다가 온다.

 

▲ 역시나 아름다운 금수강산이다.. 

스케일만 큰 외국산들에 비해 작지만 아기자기한 맛에 외국인들도 한국의 산하를 보고 원더풀을 연발 하는 것이다.

 

▲ 장자도는 선유7경 "장자어화(壯子漁火)"다.

고군산도민의 자랑이었다. 바로 황금어장을 뜻하는 것으로 조기잡이 어선이 밤바다에 수를 놓았던 과거를 말한다.

 

▲ 선유봉에서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가면 장자대교 인도와 만나고 구불8길 "A"코스 시작이다.

 

▲ 장자대교 인도에 올라서자말자 태풍끝자락의 영향인지 가랑비가 내린다.

"어느 구름에 비 들었는지 모른다" 라는 말이 있다. 하늘을 쳐다보면 흐렸으나 비가 내릴 구름은 아닌듯 한데도 내린다...

 

▲ 내려온 선유봉..

 

▲ 장자도를 경유하여 대장봉으로..

 

11시 25분 : 장자도 회차장..

여기서 왼쪽도로를 따라 가면 장자도 둘레길이고.. 대장봉은 오른쪽으로 진행한다.

 

▲ 관리도와 부교... 5년전에는 부교를 건너 바위섬까지 들어 갔었는데.. 리모델링을 하는 모양이다.

 

▲ 대장봉 가는길의 천년나무 조형물..

장자할매 바위가 되어버린 할머니가 천년나무 아래서 과거를 보러간 남편을 위해 기도를 한 곳이라고 한다.

 

대장도는..

어느 도사가 나타나 섬을 한 바퀴 돌아보고 이 섬은 훗날에 크고 긴 다리가 생길 것이라고 말한 후 사라져버리자..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대장도라 불렀으며 현재는 장자도와 대장도를 잇는 33m의 대장교가 있고.. 현재 공사중이다.

 

▲ 대장봉 가는길..

 

▲ 좌측바위봉은 가는길이 없고 오른쪽 바위봉은 올라가본적이 있어서 기억을 더듬어 찾아갔더니.. 길을 막아놓았다..

 

▲ 산에갈련다님이 보내주신 작품.. 감사합니다.

 

▲ 산에갈련다님이 보내주신 작품.. 감사합니다.

 

11시 58분 : 대장봉..

 

▲ 내려다 본 선유봉과 장자도...장자도(壯子島)는 힘이 센 장자가 나왔다 하여 장자섬이라 불리워진다.

 

▲ 관리도...

 

▲ 30배 줌으로 당겨본 선유봉 인어등대.. "흰몸 인어 전설"..

옛날, 깊은 바다에 용왕님의 사랑스런 딸 흰 몸 인어가 있었다. 흰색 몸을 한 인어는 눈에 잘 띄어 수면 위로 외출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어느 날 흰 몸 인어는 사람들 눈을 피해 신선이 노닌다는 선유도 바다를 유영 중이었는데 그때 어디선가 슬픈

곡조의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흰 몸 인어는 피리 소리를 따라갔고 그곳에서 덕배총각에게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눈부시게 하얀 인어공주에게 덕배는 반해버렸고 이들은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그 바위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어느 날 고기잡이 나간 덕배가 풍랑을 만나 헤매다 다음 날에야 돌아왔다. 덕배를 기다리던 흰 몸 인어는 새벽이 지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쓰러졌다. 덕배의 극진한 간호에도 흰 몸 인어는 살아나지 못했다.

 

덕배는 인어공주를 묻어주고 그 자리에 등대를 설치, 매년 정월 대보름에 흰 몸 인어공주를 위한 제사를 지냈다.

인어공주 전설이 내 나라에도 있었다니 새로운 발견이다. 선유도 무녀도 등 고군산도는 섬 이름들에서 무속의 냄새가

물씬 난다. 그래서일까.. 인어공주 등대 전설이 그럴싸하게 들린다.

 

▲ 멀리 신시도의 대각산과 월영산과 고군산대교..

월영산(月影山)은 고군산 군도의 주봉으로 신령한 하늘 가운데 자리에 월영봉이 솟아 최치원 선생이 단을 쌓고 공부하던

곳으로 글을 읽고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중국까지 들렸다고 하니. 선생의 고매한 정신이 진동하였음을 은유한다.

 

▲ 당겨 본 고군산대교(古群山大橋).. 돗단배 형상의 모습이다.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고군산군도에 있는 길이 400m의 다리로, 세계에서 가장 긴 외팔 현수교이다.

무녀도의 동쪽 부속섬인 남끝섬과 신시도의 서쪽 부속섬인 단등도를 연결하고 있다.

 

▲ 장자할매바위.

 

그 옛날 장자 할머니는 장자 할아버지가 글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에 전력을 다했다.

그래도 장자 할머니가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할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늘 그렇듯 혹여 배고플까

하여 밥상을 차려 들고 마중을 나가던 할머니는 할아버지 뒤에 소첩을 보고 그만 기가막혀 몸을 돌려버렸고 서운한 마음에

그대로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할아버지와 함께 따라온 무리들도 굳어져 바위가 돼버렸다.

사실 할머니가 본 소첩은 여인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서울서 데려온 역졸들이였던 것이다.

 

그 후 바위가 된 할매는 섬의 수호신이자 사랑을 약속하는  메신저가 되었다.

그 바위를 보면서 사랑을 약속하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배반하면 돌이 된다고 하는 전설따라 삼천리다.

 

▲ 어화대(漁火臺)는.. 부자의 꿈을 빌었던 장소로, 조업하기 전 어부들은 어화대에 올라 물 위로 튀어 오르는 조기무리를

살피며 만선의 꿈을 품고 바다로 나갔다고 한다.

 

▲ 누리장나무..

꽃말은.. 치유.. 운명.. 친애.. 깨끗한 사랑이다.

 

▲ 장자도 식당가를 지나고...

 

▲ 박대...

 

▲ 선유리 고군산탐방지원센터에서 망주봉쪽으로..

 

▲ 선유도의 지킴이 대표 신선님이시다..

 

▲ 오늘의 계획은 일기관계로 망주봉 오름이 여의치 않으면 망주봉오름을 대신해줄 대봉전망대까지 다녀올 예정이다.

 

 12시 40분 : 선유도 특설무대에서 마음점찍기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 선유도스카이썬라인 솔섬..

 

▲ 망주봉(望主峰)쪽으로...

 

높이는 152m로, 선유도의 북쪽 끝에 우뚝 솟은 산으로, 2개의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망부석과 같은 형식의 설화가

전한다. 선유도에 유배된 한 선비가 이곳 바위산인 망주봉에 올라가서 한양 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하여 망주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가 많이오면 망주봉을 타고 흐르는 폭포가 장관이라고 하여.. 선유3경 망주폭포라고 한다.

 

▲ 망주봉(望主峰)들머리 앞에서 잠시 망서리다가 한번 올라가본 곳이기에 미련없이 포기다.

습기머금은 날의 바위산은 오름이 문제가 아니라 내림이 문제가 될수있다.. 한발만 삐끗해도 중상아니면..꼴까닥이다.

 

▲ 큰 망주봉(望主峰)과 작은망주봉 사이의 숭산행궁터.

 

고군산군도는 고려시대에는 고려와 송나라간의 무역로의 기항지였고.. 옛날 중국 송나라 사신들이 고려를 방문할 때 이곳

을 거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고려도경(高麗圖經)은 인종 1년인 1123년에 송나라의 사신단 200여

명이 몇 척의 배에 나눠 타고 고려를 방문했는데 고려 왕실 환영단이 마중 나온 곳이 이곳 선유도 망주봉이다.

당시 환영단의 대표로 선유도까지 왔던 사람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서긍의 고려도경이 한국 역사서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해 보면 한민족 역사를 구성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두 사람이 만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서긍이 돌아갈때쯤에 풍랑을 만나 이곳에서만 20여일을 묵었다.

 

▲ 오룡묘 가는길..

 

13시 15분 : 오룡묘..

 

작은 망주봉(望主峰) 기슭에 있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소개되어 있으며 고려시대 이후 영험한 기도처로 알려진 곳으로 여겨진다.

선유도 연안을 항해하던 뱃사람들이 해로의 안전을 기원하고 어로생활을 하던 도서민들은 풍어를 빌었던 곳이다.

 

고려시대에 강진에서 청기와를 싣고 개경으로 가던 배가 선유도 근해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오룡묘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을 때, 오룡묘의 용신이 꿈에 나타나 청기와 다섯 장을 오룡묘 지붕 위에 올려놓으면 풍랑이 가라앉을 것이라 하므로,

그대로 하자 풍랑이 멎어 항해를 계속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 청기와는 8ㆍ15광복 이후에 도난당하여 지금은 없다.

과거에는 매년 당산제(堂山祭)와 3년마다 별신제(別神祭)를 지냈으나, 지금은 모두 중단되었다.

 

▲ 오룡묘 금줄너머로 작은망주봉을 올라가보았기에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니 지금도 다닌흔적이 있다.

 

▲ 16시까지의 하산시간이 여유가 있어 대봉전망대를 다녀오기로 한다.

 

군산 구불길의 시작은...

군산시청의 어느 말단 공무원의 깨달음에서 비롯하였다. 2008년 10월 "산티아고 가는 길" 을 걸은 한 여행작가의 강연이

있었다. 그 강연을 듣고 감동한 청중 중에 군산시청 관광진흥과 임현(39)씨도 있었다. 그는 군산 관광 진흥의 희망을 도보

여행에서 발견했다. 화려한 해수욕장도 없고, 유서 깊은 온천도 없고, 웅장한 산세의 국립공원도 없는 군산에서 관광객을

불러모을 수 있는 방법은 도보여행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마침 제주올레가 개장한 직후였다.

 

13시 48분 : 대봉 정상..

 

▲ 오늘 산대장님이 제시한 코스에 남악산도 들어 있다.. 하지만 남악산은 포기다.. 별로 메리트(merit)가 없는 코스다..

남악산 뒤로 말도.. 보농도.. 명도.. 방축도.. 소횡경도.. 황경도가 길게 누워있다.. 말도에서 방축도까지 섬을 연결하는

트레킹 일주코스가 내년(2025년 6월경)에 개통된다고 한다.. 그때는 방축도 독립문 바위를 가볼 것이다..

 

13시 49분 : 대봉전망대.

 

▲ 망주봉정상에 못 올라간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조금은 약하지만 그래도 꿩대신 닭의 역할로는 충분하다.

 

▲ 망주봉에서 내려다보는 선유2경 평사낙안은 가히 환상적이다.

 

▲ 신시도의 대각산과 월영산..

선유8경 "월영단풍(月影丹楓)"은 신시도의 월영봉 단풍을 가리킨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이곳의 월영단풍에 반해 바다를 건너와 잠시 머물었다고 해서 유명해졌다.

 

▲ 선유8경 위치도.

여기서 잠시 고군산군도의 선유8경의 위치를 알아보자. 망주봉에 오르면 1경 명사십리.. 2경 평사낙안.. 3경 망주폭포..

6경 선유낙조를 즐길수가 있다.. 그중에 낙조와 낙안 풍경은 압권이다.

 

▲ 고군산군도에도 거창의 미녀산과 자매인 미인봉이 있다..

천계의 선녀가 계율을 어기고 머스마를 만나.. 임신을 하여 천계에서 쫏겨나 이곳에 누워 선녀봉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신선이 노닐다 갔다고해서 선유도(仙遊島)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 대봉전망대를 내려가기전에 망주봉에 올랐던 인증과..

 

▲ 망주봉에서 내려다 보았던 선유 2경 평사낙안이다.. 잠시 회상해 보고 대봉전망대를 내려간다.

 

▲ 선유도에 1박 하면서 담았던 선유1경 선유낙조다.

 

▲ 선유도 광장에서 좌측으로..

 

14시 38분 : 선유도유람선선착장.

 

▲ 선유대교입구에서..

 

▲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14시 45분 : 물량장공영주차장.

 

▲ 트랭글 정리..

운동거리 13km.. 평균속도 3.2km.. 소요시간 4시간 27분... 아주 양호한 성적이다.

 

▲ 군산시로 가는길에.. 개천날의 하늘이 열렸다..

 

<새만금>이라는 명칭은 오래전부터 옥토로 유명한 만경평야와 김제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히 일구어 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난 1991년 11월 착공되어 19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2010년 4월 27일에 준공한 새만금방조제는 모두

2조 9, 000 억원이 투입된 국내 최대의 토목공사로, 연간 237 만명의 인력과 91 만대의 건설장비가 동원됐고, 방조제 건설

에는 모두 1억2,300만㎥의 토사가 투입됐다. 이는 경부고속도로 4 차선을 13m높이로 쌓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량이다.

 

▲ 군산시 대식가한식뷔페..

 

▲ 화랑의 산대장님..

이유가 없이.. 그냥 좋은사람이 있다.. 산대장님이 그런 사람입니다.

 

▲ 화랑의 회장님..

본인은 겸손하게.. 항상 작다고 말 하지만..

당신은 산보다 더 큰사람입니다..

 

환인.. 환웅.. 단군.. 이화세계(理化世界)의 의미는 접어두고..

그 천년의 시공을 넘어온 2024년 10월 3일의 오늘은.. 하늘이 열린다는 개천(開天)의 날인데..

호랑이가 장가라도 가는지.. 해도나고 비오고 바람불고 변덕이 죽끓는 날이다.

그럼에도 한사람의 낙오도 없고 불상사도 없고 불평도 없다..

 

논어(論語)의 옹야편(雍也篇)에.. 

지지자(知之者)는 불여호지자(不如好之者)요..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호지자(好之者)는 불여락지자(不如樂之者)니라..하였다.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라는 말이다.

 

오로지.. 즐기며..

갈길을 가는 사람들.. 화랑인들이다.

2024년 9월 22일 오늘의 동선이다.

 

오늘의 향기나번개팀은 경북 경주시 외동읍 아기봉산(236m)에 올랐다가 감포읍 전촌항의 사룡굴과 단룡굴을 보고 감포항

수협활어직판장에서 회를 구매하여 대구로 오면서 물좋고 정자 좋은곳에서 하산식을 할 예정이다.

 

2024년 09월 22일(일).

아기봉산/전촌용굴 : 경북 경주시 외동읍/감포읍.

 

산행코스 : 수곡사주차장-아기봉산-아암-건국사-수곡사주차장.

산행시작 : 수곡사주차장  09시 25분.

산행종료 : 수곡사주차장  11시 07분.

전체거리 : 약2.52km.

전체시간 : 01시간 42분.

운동시간 : 01시간 42분.

휴식시간 : 00시간 00분.

 

09 : 25  수곡사주차장.

09 : 56  아기봉산.

09 : 58  아암쉼터.

10 : 15  아암정상.

10 : 49  건국사.

11 : 07  수곡사주차장.

 

09시 25분 : 수곡사주차장.

 

대구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오다가 경주IC를 빠져 나오니 14호 태풍 "풀라산"의 영향으로 "는개비"가 내리더니 수곡사

에 도착하여서는 이슬비로 바뀐다...

 

아가봉산은 등산로 정비도 잘되어 있고 전체 산행거리도 짧은 산이라서 우산을 쓰고서라도 올라가자는 쪽으로 일치...

그런데 등산로 입구에 커다란 거울이 설치되어 있다.. 어떠한 용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으로 추측컨데 바른 마음과

단정한 산행복장인지를 비춰보고 올라갔다가 내려와서는 다시 거울앞에 서서 오늘의 걸음이 자연에 부끄럽지 않은 산행을

하였는지를 반성해 보라는게 아닐까... 라는 의미를 부여해 본다.

 

수곡사주차장에서 원점회귀산행을 하는 소요시간이 2시간도 채 되지 않는 산인데도 갈림길 요소요소에 이정표 하나는

아주 잘 만들어 놓았다...

 

아담싸이즈의 앙징스런 꼬마 이정표도 안내를 거들고 있다...

 

▲ 기암(권총바위)...

바위는 바라보는 각도와... 보는 사람마다의 느낌이 각기 다르다..

 

▲ 지능선에 올라서니... 비 멎은 싱그런 숲속공기가 너무 상큼하다..

 

▲ 등산화 바닥으로 전해지는 촉촉한 마사토흙을 밟는 촉감도 좋고..

 

▲ 안개가 자욱하지만 솔바람에 묻어오는 피톤치드향에 머리도 맑아지는 느낌이다.

 

아기봉산의 아기가 사용하던 요강바위일까.. 아니면.. 아기장수의 태를 담은 신주단지 일까..

 

 09시 56분 : 아기봉산(236m) 정상인데 아무런 표시가 없다.

여기서 화살표를 따라 가면 커다란 방구돌들이 있는데 습기를 머금은 이끼가 미끄러워서 통과다.

 

 09시 58분 : 아기봉산의 아기바위(兒巖) 쉼터.

 

아기바위 쉼터에서 아기봉전설을 알리는 안내판을 읽어보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 아이가 죽임을 당한 뒤 포대기에 싸여 줄로 묶였다는 형상의 바위다.

 

앞쪽에 있는 아기봉 전설을 보면..

옛날에 하늘나라 선녀가 한 남자와 연애를 하다가 임신을 하게 되어 하늘나라에서 쫓겨나서 이곳 바위에서 아기를 낳았고그 아기는 너무 똑똑하여 삼칠일(21일)만에 일어나 걸으며 말을 하고.. 힘이 장사여서 석굴 앞에 있는 바윗돌(지름 50cm..

길이 1m)을 밧줄로 묶어지고 이웃 동몽산 꼭대기에 갖다 놓기를 반복하였다고 한다.

 

이 내용이 소문이 나서 임금님 귀에까지 들어갔는데 장차 왕의 자리가 위협이 될 듯하여 아이를 죽이라고 했다.

이에 군사들이 선녀가 잠자는 틈을 타서 아이를 죽여서 끈으로 묶고 포대기에 싸서 시체를 들고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고 한다.

 

군사들은 놀라서 아이 시체를 버려두고 모두 도망쳤는데 이때 잠에서 깬 선녀는 돌로 변한 아이의 시체 위에 엎드린 채

죽고 말았다. 그 뒤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 봉우리를 아기봉이라 불렀고 집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이 바위에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 그런데.. 난데 없는 한국풍수선양재단 성지라는 비석이 서있다.. 자장율사.. 원효대사.. 의상대사 까지..

 

▲ 아기봉산 제1석문..

우리나라 에서 가장 석문이 많은 곳이 이곳 아기봉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곳곳에 석문이 형성되어 있다.

 

▲ 아래쪽에 쫏겨난 선녀가 기거했던 곳이 아닐까 싶은 커다란 굴이있다..  누군가가 관리를 하는것 같은 흔적이 보인다.

 

▲ 아기봉 암릉.. 사진 찍기 정말 멋진 장소다.

 

▲ 향기나 팀.. 참 보기좋은 팀이다.

 

▲ 이암릉에도 올라서면.. 사진 찍기가 좋은곳인데 이끼가 미끄럽다.

 

▲ 역시나 향기나산대장님이다.. 나도 일주일만 젊었어면 올라갔을텐데 ㅠㅠ~.. 오늘은 참는다.

 

▲ 차~암 보기 좋다.

 

▲ 다들 협곡건너 아기봉암릉 아래 포토존에서 향기나 모드(1)로...

 

향기나 모드(2) 기차놀이로...ㅎㅎ~.

 

▲ 이번에는 향기나 모드(3) 아이돌 자세로...

내가 카메라를 놓지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키는 자세로 다 한다ㅋㅋ~.

 

▲ 누가 더 오늘의 향기나 아이돌인지 당겨 본다...ㅎㅎ~.

 

우리는 향기나~야...

우리는 아기봉에 올랐어~...

우리는 어른돌이 아니야.. 향기나는 아이돌이야~.. 오~예..

 

▲ 아기봉산 제2석문..

 

▲ 차~~~ 암.. 더더욱 보기 좋다.

 

▲ 저 멀리 기암 전시장같았던 마석산마루에 구름이 쉬고 있다.

 

▲ 아기봉산 제3석문..

 

▲ 아기봉산 제4석문..

 

▲ 아기장사가 괴나리봇짐처럼 등에 지고 다녔다는 돌이다.. 줄을 맨 흔적이 뚜렷하다..

 

▲ 외동읍 전경.. 국제신문에서 소개한 봉서산.. 삼태봉이 오라고 손짓한다.

외동읍이라는 지명은.. 경주에서 동쪽 끝에 가장 멀리 있는 동네라서 외동이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 아기를 씻겼다는 돌 대야가 보이고 물이 흐른자국이다.

 

▲ 아기장수가 향기나팀을 따라 왔는지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위를 밀고 있다.

 

▲ 수많은 시간과 사연이 켜켜히 쌓여있는 아기바위에서 천상선녀의 마음으로 하늘의 소리를 들어 보려고 하였으나

잔뜩 흐린 하늘을 뒤로하고 툭툭 털고 일어 난다.

 

▲ 아기봉산 제5석문을 통하여 쉼터로 내려 간다... 5석문외에도 더 있지만.. 바위가 미끄러워 찾아다니지를 못했다.

 

▲ 아기봉산 쉼터 내려가는길이 매우 미끄럽다 조심조심..

 

▲ 아기봉산 쉼터에서 양맥에 막걸리까지..

 

▲ 하산은 건국사쪽으로..

 

▲ 바위에 붙어서 힘겹게 살아가는 생명에게 악착같이 살아남아라는 응원을 보낸다..

 

▲ 과거에 석봉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자연인의 집처럼 되었다.

 

▲ 건국사 극락보전..

절간같이 조용하다.. 라는 말처럼 정말 적막강산이다..

 

▲ 사찰에서는 처음보는 성사전이다... 건물 뒤쪽의 바위가 아미타불을 닮은것 같다.

 

▲ 건국사주차장이 제법 넓은것으로 보아서는 한때는 잘나갔던 사찰이었던 모양이다.

주차장에서 아래로 바로 내려가면 수곡사주차장까지는 한참을 돌아서 가야 되기에...

 

▲ 주차장 윗쪽에 있는 철계단을 타고 숲으로 가면 지름길이고 수곡사 경내로 연결 된다.

▲ 수곡사 뒷길로 들어가면...

 

▲ 수곡사 장돗대... 규모를 보니 꽤나 많은 신도들이 다녀가는가 보다..

 

▲ 수곡사 대웅전...

 

수곡사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일제시대.. 일본 미쓰비시사에 강제징용 되었던 징용자들이 해방을 맞이하여 1945년 10월 11일 귀국선을 타고 돌아오다가

큐슈섬과 대마도 사이에 있는 이끼섬 부근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침몰하며 탑승했던 징용자 168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

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 일을 가엾게 여긴 이끼섬 아시베항에 위치한 천덕사 주지 니시다니 도구린 스님께서 사고 이듬해부터 매년 11월 18일에

위령제를 모셔왔다고 한다. 1987년 수곡사 주지스님이 이 소식을 듣고 감사패 전달 후 위령패를 외동 수곡사에 옮겨와서

지금까지 격년제로 위령제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 수곡사 경내가 잘 정돈되어 있고 정갈하다...

 

11시 07분 : 수곡사 주차장 산행종료.

 

11시 10분 : 수곡사를 뒤로 하고 전촌항의 용굴을 찾아 간다...

 

 12시 02분 : 전촌항..

평생을 바다의 삶을 살아오신듯한 노어부가 그물 손질을 하고 있다.

 

태풍 "풀라산"이 동해로 빠져 나갔는지 하늘이 열리기 시작한다.

 

▲ 전촌용굴 가는길은 해파랑길 11구간의 일부다..

 

▲ 사룡굴이 내려다 보이는데... 그런데 소나무가 이상하다.

 

▲ 산불이 났었나? 하고 자세히보니 아니다.

 

▲ 재선충이다.

 

▲ 당국에서 사전 예방이나 막을수는 없었는지.. 안타깝다.

 

▲ 사룡굴 가는길을 지나서.. 단룡굴부터 먼저 다녀오기로 한다.

 

▲ 단룡굴은... 감포마을을 지키는 용이 한마리 살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파도와 갯바위 접근이 상당히 까다롭고 위험하여 가까이는 갈수가 없다..

 

▲ 2022년 8월 15일 광복절에 다녀왔던 단룡굴 내부 인증샷이다...겨울날 아침에 이곳에서 보는 일출이 아름답다고 한다.

 

▲ 파도가 발밑까지 튕긴다... 이크!~~ 깜짝이야... ㅎㅎ.

 

▲ 역시나 바다는 파도다.. 강한 에너지에 살아 있음을 느낀다..

 

▲ 파도를 뒤집어쓴 갯바위에 폭포가 생겼다.

 

▲ 사룡굴 내려 가는길...

 

▲ 사룡굴...

파도와 시간이 만들어낸 자연 조각품으로... 해식동굴인 "용굴" 이다..

사룡굴에는 동서남북의 각 방위를 지키는 네 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한다.

 

▲ 사룡굴위에... 용보다 더 용같은 용송이었는데 재선충으로 말라버렀다..

 

▲ 사룡굴앞에서...

젊은 아가씨에게 인증샷 부탁하였더니 파도가 칠때 타이밍을 잘 잡았다..

 

앞으로 7~80년 후쯤이면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가 이땅에서 사라진다고 한다...

우리나라 산수에 가장 잘 어울리는 소나무가 사라지면 어떤 수종이 그 멋진 그림을 만들어 줄까..

 

▲ 전촌항으로 돌아가는길..

 

▲ 절묘한 순간 포착..ㅎㅎ.

바다를 바라보는 두사람의 뒷모습을 찍으려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 획~ 돌아선다.. 오히려 기가막힌 타이밍이 되었다..

 

12시 58분 : 전촌항에서..

 

▲ 전촌항 길냥이가.. 이동네 터줏대감을 몰라본다며 괘씸하다고 노려본다..

 

▲ 용의 마을답게 전촌항 방파제에도 온통 용이다..

 

14시 07분 : 감포항활어직판장..

전촌항에서 출발 할때는 쾌청했던 날씨가 감포항에 도착하자 말자 빗방울이 굵어 진다..

 

▲ 태풍으로 조업을 못해 어종이 다양하지 못하다.. 전어는 아예 없다. 그래도 여성향기나님들이 횟감을 사고..

 

▲ 먹을곳을 찾아야 된다...

여기서 7~8분이면 가는 송대말등대로 가다가 방파제에서 자리를 펴면 되는데..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진다..

 

▲ 비내리는 감포항을 바라보다가 송대말등대는 포기하고 대구로 가다가 적당한 장소를 찾기로 하고 출발..

 

▲ 감포항에서 토함산을 넘고 불국사를 지나고 경주보문단지도 건너뛰고 경주IC 직전에서 농로로 접어드니.. 오는 내내

따라다니던 비도 그치고.. 그야말로 물좋고 정자좋은곳을 만났다. 마치 우리를 위해 일부러 만들어 놓은것 같은 장소다.

 

▲ 싱싱한 횟감으로 하산식 잔치다.. 홍여사님이 바리바리 준비한 깻잎 고추 된장.. 그리고 쐬주 한잔..

오늘의 향기나팀들의 컨셉은 무조건 무조건이야~~ 짜라짜라 짠짠이다.

 

▲ 푸짐한 회와 쐬주로 기분좋게 먹고 마시고..

누렇게 익어가는 벼처럼 풍성한 마음으로 마실을 둘러본다. 바로 건너보이는 기와집은 경주IC건물이다.

 

▲ 대천 상류쪽을 보니 경주 서면의 인내산에서 흘러내리는 대천을 사이에 두고 벽도산과 선도산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선도산은 태종무열왕릉이 있는 산이다.

 

대천 하류쪽은 형산강으로 합류된다.

 

▲ 서울방향의 경산휴게소에서 평소에 보기만하고 가보지는 못했던 신상리고분군에 올라가 본다.

 

▲ 초례봉.. 환성산.. 무학산너머로 하루가 넘어간다.

 

▲ 향기나 아이돌 놀이에 재미가 붙었다..ㅎㅎ.

 

▲ 오며가며 하루종일 핸들잡느라 고생많았습니다.

 

▲ 태풍따라 갔다가 태풍을 동해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하늘에서 가을이가 보인다.

 

오늘도 그렇게..

더더욱 항기나는 하루였다..

2024년 09월 19일(목).

박월산 문암산 쪼록바위 : 강원 태백시/경북 봉화군.

 

산행코스 : 장성터널입구-체육공원-박월산1-박월산2-애경바위-문암산-화성재-평천삼거리-쪼록바위봉-현불사주차장.

산행시작 : 장성터널입구  10시 28분.

산행종료 : 현불사주차장  17시 35분.

전체거리 : 약9.12km.

전체시간 : 07시간 07분.

운동시간 : 04시간 54분.

휴식시간 : 02시간 12분.

 

10 : 28  장성터널입구.

10 : 41  대명사.

10 : 47  샘터.

10 : 49  장성체육공원.

11 : 29  박월산1.

11 : 48  박월산2.

12 : 08  애경바위.

12 : 24  문암산.

14 : 25  화성재.

14 : 34  평천삼거리.

15 : 50  쪼록바위봉.

17 : 35  현불사주차장 종료.

 

 10시 28분 : 장성터널입구 로터리.

 

태백산 안내표지판 밑으로... 노견이 없는 도로를 따라 조심조심 3분가량 진행하여...

 

장성터널입구에서 좌측임도를 따른다.

 

절골을 향하여...

오늘 산행은 강원 태백시와 경북 봉화군이 경계를 이루는 산간 오지에 속하는 박월산과 문암산을 거쳐 경북 봉화의

쪼록바위봉을 오르는 오지산행이다..

 

길가에 잘 가꾼 토란이 보여서...

 

 나도송이풀...

꽃말은... "욕심" 이다..

 

대명사라고 하는데.. 사찰이라기 보다는 일반 기도원 같은 분위기다..

 

 대명사에서 1분 가량 진행하면 만나는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누군가가.. 도랑치고 가재라도 잡았는지.. 물길을 잘 다듬어 놓았다.

 

 물길을 올라서니.. 반듯한 등산로가 설치되어 있다.

조금전의 사방댐 진입로에서 7~80m만 더 진행하였더라면 저 다리로 건너오게 된다.

 

10시 47분 : 샘터..

안내문에 관리를 하고 있는 약수터라고 되어 있어서.. 마셔보니 달고 시원하다.

 

 10시 49분 : 장성체육공원.

 

이끼 낀 돌탑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습도가 80%가 넘는 느낌이다..

 

높은 습도에 양치식물군들이 좋아하는 환경에 "관중"들은 초록의 생기가 넘친다..

 

박월산 안부능선까지는 500m도 채 안되는 거리인데.. 바람 한점 없는 급경사에 지그재그도 아닌 직선구간에 마사토

길이라 체력소모가 많다.. 가파른 급경사 오르막을 앞사람 발뒤꿈치를 보고 따라가며 뒷사람 숨소리에 쫒기는 기분으로

급하게 오르다 보니 땀이 아닌 물이 이마에서 뚝뚝 떨어진다. 모두가 상의는 땀으로 흥건하다..

 

 11시 23분 : 박월산 안부능선에서 좌측의 박월산<1>정상에 다녀 온다..

 

배낭을 내려 놓고 박월산<1>으로...

 

 11시 29분 : 박월산<1>...

김문암님의 정상 표지목을 확인하고 톡으로 사진 전송..ㅎ~..

 

배낭을 놓아둔 박월산 능선 안부로 돌아와서...

장성체육공원에서 올라왔던 길을 째려 보며.. 너는 어찌 그리도 못됐노?.. 하는 눈으로 흘겨주고 박월산<2>로 향한다~..

 

박월산<2> 오름길...

 

▲ 깊이를 알수 없는 싱크홀 같은 수직굴이 악마의 입처럼 벌리고 있다.

 

 11시 48분 : 박월산<2>.

 

두개의 박월산 중에 지역주민들은 박월산<2>를 인정한다고...

 

편한 우회길로만 가다보니.. 용바위로 가는 길을 지나쳐 버리고...

 

두번째 암릉길 부터는 놓치지 않으려고 올라간다.

 

문암산 공룡능선...

 

남쪽으로 달바위봉이 보여서...

 

당겨 본 달바위봉..

 

 12시 08분 : 애경바위.

 

2014년 5월에 강원 태백시 장성동 기관장들의 모임인 장수회는 관내 문암산 일대 문화자원조사를 통해 애경바위에서

터번을 쓴 인물상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염라대왕이 망인의 죄를 비쳐보는 업경(業鏡)처럼 바라보는 이의 선악이 비쳐진다

는 애경(崖鏡)바위가 절벽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전설에따라 이번에 발견된 터번을 쓴 인물상은 문암산(960m)에서 박월산

(915m)방면, 용 바위 이전의 커다란 암벽 아래쪽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인물상은 마치 녹슨 청동거울 마냥 푸르게 산화되어 있고 박월산으로 가는 등반객들을 공손히 맞이하는 형상으로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니라 오랜 풍화작용에 의해 자연스럽게 만들어 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번 가보고 싶어서 아래로 내려 가는 길을 찾아 보았지만 워낙 발걸음이 뜸한 산이라.. 찾을수가 없다.

 

 태백시의 기라성같은 산군들..

 

12시 24분 : 문암산 정상.

 

문암산 정상... 940M(2008년 태백경찰서 산악팀)으로 소문자 m이 아닌 대문자 M 으로 표기되어 있다..

 

 안원덕 산대장님이 톡으로 보내주신 작품.. 감사합니다.

 

안원덕 산대장님이 톡으로 보내주신 작품.. 감사합니다.

 

사통팔달.. 일망무제의 막힘없는 풍경 맛집인 문암산에서 바라본 태백산 문수봉능선.. 좌측으로는 백두대간이 흐른다..

 

 동북쪽으로는... 우금산 아래 장성광업소가 보이고.. 그 너머로는 태백의 진산 백병산이다.

 

 북쪽으로는 연화산과 바람의 언덕으로 유명한 매봉산 사이에 태백시가 살짝 보인다..

 

 박월산에서 지나온 능선..

박월산(896m)과 문암산(940m)은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 동점동에 위치한 산이다. '태백금강'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경관이 수려한 산이다. 두 산은 태고적부터 사이에 구슬을 놓고 용쟁호투를 벌이고 있는 형세로 문암산은 용에 박월산은

호랑이에 비유 된다.

 

 동쪽으로는 삼방산 연화봉이 우뚝하고...

 

남쪽으로는.. 가야할 쪼록바위봉이 산넘어 산으로 갈길이 멀다.

 

내려온 문암산 암괴..

 

참나무 그루터기에서 기생하는 버섯..

 

문암산에서 화성재로 가는길은 오르내림의 기복이 심하고.. 바람이 잠깐만 멎어도 숲의 열기가 대단하다.

 

13시 13분 : 콧구멍재.

잘록한 안부가 콧구멍처럼 작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철탑봉에서 가야할 화성재 방향을 가늠해 본다.

 

14시 25분 : 화성재에서..

뒤로 넘어가면 강원도 태백시 금천동으로 가는 길이고.. 좌회전하면 경북 봉화군 석포면 평천 마을이다.

 

강원도 땅에서 경상북도로 넘어 왔다.

 

평천마을의 고랭지 배추.. 그런데 예년같지 않은 폭염으로 배추가 물러 졌다.. 농심도 얼마나 무너졌을까..

 

쪼록바위능선 아래 평천마을..

평천(坪川)은 300여년 전 강원 정선에서 이주해 온 강릉김씨(江陵金氏)와 강원 삼척에서 이주해 온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정착하여 오다가.. 그 후 진주강씨(晋州姜氏)가 이곳 평천에 온 후 땅을 일구어 주로 옥수수, 감자 등의 밭농사를 지어 현재

드르네라는 마을을 이루었다. 고지대의 평지로서 마을 한가운데로 연화봉에서 비롯된 내가 흐르고 있었으나 평천마을

입구에 1961년 2월 1일 영풍산업 (주) 연화광업소가 건립되면서 평지에 사원사택을 지어 5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 후 1993년 9월 연화광업소 휴광으로 인구가 급속히 감소되었고 대현리 주민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평천 입구 상류지점에 위치한 소천석회광업주식회사는 연간 석회를 4만2천톤을 생산하여 우수 철강생산업체인

동국철강 외 3사에 납품하였으며 농한기에는 이 곳 주민들의 유휴노동력을 활용 하였으나 지금은 폐업된 상태이다.

 

참 살기좋은 마을.. 도르네(평천)

오지에서도 웃음 잃지 않고 행복을 키워가는 주민들 속에도 애환(哀歡)은 누구나 있을 것인데...  마냥 평화스러워 보이는 마을 풍경에 마구 웃으며 지나간 우리들의 존재가 도르네의 꿈을 방해하지는 않았는지 조금은 염려스럽기도 한다.

 

▲ 드르네(坪川)는 자연부락으로 들(坪)과 내(川)를 합쳐서 그렇게 부른다는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14시 34분 : 드르네(坪川)삼거리에서 우회전...

 

▲ 축대가 끝나는 지점에서... 희미한 족적을 따라 올라가면..

 

▲ 비교적 뚜렷한 길이 나타났다가..

예상치 못한 산판길이 가로막으면서 약간의 알바가 시작되었지만.. 금방 주등산로와 다시 만난다.

 

▲ 여기서부터 쪼록바위봉까지는 태백산국립공원구역이란다...

 

▲ 국립공원 표시에서 부터는 오름이 가팔라진다...

 

▲ 14시 34분 : 쪼록바위봉...

여기에도 해발고도 1087M으로 표기되어 있다. 해발고도를 표기할때는 대문자 M이 아니라 소문자 m을 써야 한다.

쪼록바위의 소속은 태백산국립공원이지만.. 국공에서도 변방의 마을산으로 치부하고 별다른 관리는 없는것 같다.

 

이제라도 국공에서 바른 표기로 새로 세운다면 모르겠지만.. 1998년 4월에 지방산악회인 대현청년회에서 표기법이 정립

되어 있지 않았던 26년전에 힘들게 세운것이니 여기에서 잘 잘못을 따지는 것은 아니다.. 바른 표기법이 그렇다는 얘기다.

 

▲ 김더덕님이 톡으로 보내준 작품... 감사합니다.

 

▲ 당겨본 현불사...

현불사는 불승종(佛乘宗)의 총본산으로 1990년도에 창건되었으며 설송(雪松) 종정스님이 창건 했다는 사찰이다.

설송 스님은 1990년 되던 해 속랍(俗臘) 40대 중반에 설송(雪松)이라는 법명을 받고 수원의 모 사찰에서 법화경을 깨쳤다

는 스님이다.. 스님은 속랍(俗臘) 91세 되던 해인 2009년 5월에 이곳 현불사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설송 스님은 총선이나 대선을 앞둔 대선 후보들의 승패를 점쳐많은 정치인들이 찾아와 유명세를 탔던 스님이다.

그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을 예언했던 적이 있어서 세간의 화젯거리가 된 일도 있었다. 이 외에도 80~90년대의 많은

청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현불사를 다녀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현불사(1980년 창건)에는 임진왜란, 관동 대진재(關東大震災), 을미사변, 제2차 세계대전 때 목숨을 잃은 5만 8000

여 명의 넋을 기리는 영령 위로 탑이 세워져 있다.

 

▲ 쪼록바위봉...

쪼록바위봉을 바위에 붙은 이끼들이 푸르게 보인다하여 초록바위봉 또는 조록바위봉으로 또는.. 졸암봉으로 부르기도

하고 있으나 원래의 이름은 수반 위에 올려놓은 산수경석 같은 암봉들이 올망졸망 쪼로록 연이어져 있다하여 쪼록바위다.

 

쫄병바위, 졸병바위라는 이름도 이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이 마을 대현청년회에서 1998년 4월에 세운 정상석에도

"쪼록바위" 라 음각되어 있다. 해서.. 나도 지역민들의 뜻에 따라 쪼록바위봉이라 표기하였다.

 

▲ 쪼록바위봉... 바로 아래 쉼터에서 한숨을 돌리며 쉬고 있는데.. 머리위에서 누군가 내려다 보고 있는 느낌이다..

육구당님의 시그널이 지켜보고 있었다..ㅎㅎ~

 

▲ 쪼록바위봉에서 바라본 달바위봉과 진대봉.. 오늘의 최고의 뷰(view)다...

 

▲ 다시 당겨 본 달바위봉.. 2021년 11월의 감동이 되살아 난다.

 

▲ 쪼록바위봉 내림길.. 아차하면.. 저차되는 좁은 이끼 길이다.

 

▲ 절벽의 저 이끼길을 건너왔다.. 꺼져 버릴까 전전긍긍이다.. 그러면서 아슬아슬 건너왔다.

위험구간을 지날 때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속된 마음은 나도 모르게 내려놓게 된다.

 

▲ 오늘의 하산길중에 최고의 감사한 시간이다.. 박수 보냅니다..

안대장님이 발붙이기도 힘든 미끄러운 바위길에 간이밧줄을 걸고 회원님들을 안전하게 내려주고서야 내려온다..

 

그 어렵고 힘든 내리막 길에 아무런 사고하나 없이 무사하게 내려온 내 자신에게 감사하고 어렵게 간이밧줄을 매어가며

길 안내에 수고하신 산대장님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 쪼록바위봉에서 백천계곡까지의 하산길.. 한치의 부더러움과 온정은 1도 없는 급경사 내림길이다.

그래서 자연은 어머니의 품속처럼 편히 쉬게 해 주는 곳이지만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도 주기도 하는 곳이다.

 

▲ 산악앱으로 검색해보니.. 다행히 쪼록바위봉에서 흘러내리는 병오천 지계곡이  국립공원구역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유독 많이 흘린 땀으로 흥건한 상의를 벗고... 환복..

 

▲ 약300m 상류에 있는 현불사 주차장으로..

 

▲ 산은 멀리서 보라 했다..

여기서 올려다 보이는 쪼록바위봉이.. 마치.. 수반 위에 올려놓은 산수경석 같은 암봉들이 올망졸망 쪼로록 연이어져 있다.

 

17시 35분 : 현불사주차장 산행종료...

 

▲ 트랭글을 정리해보니... 9.12km에 휴식시간이 2시간을 넘었다..

부실(?)해진 체력 탓을 하기전에.. 날씨탓을 하고 싶은 그런... 오늘이다..

 

▲ 18시 13분 : 봉화 다덕약수의 식당에서...

 

▲ 산이좋아회장님의 건배...

 

▲ 먹고.. 마시고...

 

▲ 박월산에서 쪼록바위봉까지...

높은 습도에 오지게도 오르내린 오지산행이었지만..

 

때 묻지 않은 원시 숲에서 나오는 천연향료같은 피톤치드로 인해 달고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갈 때는

제아무리 산행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 고통은 쉽게 잊어지며 수행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노력하는 것만큼 볼 수 있고 느낄 수도 있는 법이다.

덕분에 오늘도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2024년 09월 08일(일).

농다리. 초평호둘레길 : 충북 진천군.

 

산행코스 : 농다리주차장-농다리-야외음악당-초롱길-하늘다리-둘레길-미르309출렁다리-용고개-농다리주차장.

산행시작 : 농다리주차장  11시 19분.

산행종료 : 농다리주차장  14시 58분.

전체거리 : 약4.8km.

전체시간 : 03시간 39분.

운동시간 : 02시간 27분.

휴식시간 : 01시간 12분.

 

11 : 19  농다리주차장.

11 : 28  농다리.

11 : 36  용고개.

11 : 38  야외음악당.

11 : 43  초롱길.

11 : 57  하늘다리.

12 : 07  둘레길.

13 : 03  미르309출렁다리.

13 : 34  야외음악당.

14 : 10  농다리.

14 : 58  농다리주차장 종료.

 

 11시 19분 : 농다리 소형차주차장.

 

농다리 대형차 주차장.

소형차주차장과 길 하나를 사이로 마주하고 있는 대형차주차장이 매우 협소해서 전국에서 모인 차들로 이미 만차가 되어..

여기서 하차하고 버스는 다른곳에 가 있다가 다시 태우러 온다고 한다.

 

 농다리주차장에서 초평호둘레길 입구인 농다리까지는 약 550m를 걸어가야 한다.

 

구산동 마을 표시석.

진천군 문백면 구산동은 고려초 개국공신 상산 임씨의 천년 세거지다...상산(常山)은 진천(鎭川)의 옛 지명이다.

상산(진천) 임씨의 시조 임희(林曦)는 고려 혜종비 의화왕후(義和王后)의 아버지로서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진 것을 연유로

상산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농다리 스토리움(Nongdari Storium)..

스토리움은 스토리(Story)와 공간(Rium)의 합성어다. 이야기가 있는 공간, 역사문화관 등의 전시관이다.

 

▲ 중부고속도로 밑을 지나가면...

 

▲ 미호강 건너편에 인공폭포가 시원하게 흐른다... 폭포 위에 "생거진천" 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2009년에 설치되었고 높이 80m, 폭 24m 이다.

 

▲ 이곳 충북 진천에는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속담으로..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

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살아서는 진천에서 살고 죽어서는 용인에 묻힌다는 뜻이다.

이 속담은 단순히 살아있는 곳과 죽은 후에 묻히는 곳을 구분하는 의미뿐 아니라, 효도와 선조를 존경하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 부교와 농다리.

농다리에 관해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전설에 가깝다. 임장군 임연은 매일 아침 세금천(현 미호강)에서 세수를 했는데,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하천 건너편에서 젊은 부인이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듣고 친정에 가기 위해 내를 건너려 하고 있었다.

임장군은 여인의 지극한 효성을 배려해 즉시 용마로 돌을 실어 날라 하루아침에 다리를 놓아 부인이 무사히 건너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진다.

 

▲ 농다리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에 위치한 길이 93.6m, 너비 3.6m, 높이 1.2m의 옛 돌다리이다.

고려 초에 권신과 임장군이 축조했다는 천년이 넘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돌다리인데 생김새 또한 특이한 게

자랑이다. 하늘의 28수 별자리를 따라 28칸 돌 교각으로 조성되어 있었으나. 오랜기간 일부 교각이 유실로 25칸만 남아

있다가.. 2008년 28칸으로 원형 복원을 완료하였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 작은 돌을 물고기비늘처럼 쌓아올린후 지네모양을 본떠 만들어진 모양으로 인해 "지네다리"라고도 불리기도한다.

 

미호강은 충북 음성에서 발원하여 진천, 청주를 거쳐 세종시에서 금강에 합수되며 길이는 89km이다.

 

▲ 뜻밖에도 10수년전에 같이 산악회 활동을 하던 회원님(남자)을 만났다.

 

▲ 오랜만에 만나는 추억의 아이스께끼~..

 

▲ 용고개의 청룡..

 

▲ 초평저수지가 조성되기전에 화산리라는 마을이 있었고..마을로 넘어 다니던 "용고개"에 얽힌 전설따라 삼천리 이다.

 

▲ 고개너머에는 황룡이다.

 

11시 38분 : 현대모비스 야외음악당.

2015년 미르숲 개장 이후 야외음악당에서 양희은.. 이은미.. 박미경 등 유명 가수들이 공연을 펼치면서 미르숲 음악회는

힐링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고... 미르숲은 진천 대표 관광지인 농다리, 초롱길, 하늘다리와 연결하면서 전국적인 생태

명소로 떠올랐다.

 

▲ 초평저수지 전경.

충북 진천군은 현대모비스의 사회공헌사업인 미르숲 조성을 하면서 현대모비스는 2010년 공모사업에 진천군을 선정해

사회공헌사업비 100억원을 기부하였고... 진천군은 초평면 화산리 산 7-1 일대 군유림 108㏊를 사업 대상지로 제공했다.

사업은 자연환경국민신탁이 맡아 2012년부터 10년간 숲 조성과 관리를 담당하였고... 2021년 12월 28일 진천군에 관리가

전환 되었다.

 

▲ 초롱길 진입..

먼저 미르309출렁다리로 가서 시계 역순으로 한바퀴 돌려다가 미르309출렁다리쪽은 관람객이 너무 많아서 피하고..

시계 순방향인 초롱길에서 부터 시작 한다.

 

▲ 코로나가 다시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요즘에는 가급적 사람 많은곳을 피하는게 좋다.. 호젓해서 좋다..

 

▲ 이쪽은 초롱길이고 건너편은 초평저수지 둘레길이다.

 

▲ 쏘가리를 닮은 바위 주둥이에 미끼를 끼워 놓았다..

 

▲ 초평저수지 어업권을 가진 어부가 어로활동을 하는지 한가롭다...

 

▲ 짚라인도 있는가 보다.

 

12시 21분 : 바람길이 좋은 초평저수지 둘레길에서... 조촐하고 오분순한 점찍기다..

 

잭 다니엘에.. 오징어 초장.. 환상적인 조합이다.

 

▲ 미르309출렁다리에서 회장님을 만난다.

 

▲ 미르309출렁다리.. 미르는 용(龍)의 순 우리말이다. 

진천군이 80억원을 들여 금년 2024년 4월 12일에 국내 주탑 (主塔·주 케이블의 최고점을 지지하는 탑)이 없는 출렁다리 중

가장 긴 진천군 “초평호 미르309 출렁다리”가 개통했다. 폭 1.6m이며, 일반적인 교량과 달리 주탑과 중간 교각이 없어

짜릿함을 느낄수 있을 뿐 아니라 탁 트인 초평호의 전경을 만끽할 수 있으며 초평호 둘레길인 초롱길 초입에 있는 “미르숲”

과 주변 산의 등산로와 연결 되어 있다.

 

▲ ㅎㅎㅎ~

용의 입에 여의주 대신 머리를... 초평저수지 용에게 용용 죽겠지 하고 눌리는 겁니까?..ㅎㅎ

 

▲ 웃음으로 더위를 날려 버리는 멋진 퍼포먼스(performance) 였습니다..ㅎㅎ~.

 

▲ 발밑에 초평저수지가 선물하는 보석같은 "윤슬" 이다.

 

▲ 농다리 처럼 발이 많이 달린 지네다리다.. 70kg 성인 1650명이 동시에 건너갈수 있는 안전한 다리로 설계 되었다.

 

▲ 하늘에서 내려다본 초평저수지다.. 한반도 지형을 둘러싼 용의 모습처럼 보인다.

 

▲ 아래쪽의 황토길을 가기위해 내려가는데...

 

▲ 119구급대가 떳다... 70대라고 하는데 더위에 지쳤나 했더니.. 심장병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 여기서 청봉의 핵심 임원님들을 만난다.

 

▲ 황토 맨발숲길로 진입하려는데.. 관리인이 신발을 신고는 못간다고 한다.... 벗고 씻고 귀찮아서 안갈랍니다..ㅎㅎ~.

 

▲ 현대모비스 야외음악당에서.. 물멍~..

중심봉에서 내려 오면 한반도 전망대가 있다. 거기에서 보는 초평저수지가 가히 선경의 경지다.

 

▲ 용고개..

 

▲ 다시 중부고속도로 밑을 지나오니..

 

▲ 농다리문화공간에..

 

▲ 진천군 출신들의 명사들과 소개글을 새겨 놓은 동판을 길바닥에 설치해 놓았다..

 

▲ 진천 만뢰산 아래에 김유신 생가가 있다.

 

▲ 물봉선화.

꽃말은... "나를 건더리지 마세요" 이다.

 

▲ 대형버스주차장은 아직도 만원이다.

 

▲ 진천을 다녀간 지방수령들의 공적비.

 

▲ 임수전부자 충신문.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충신 임수전.. 임현 부자의 정려각이다.

임수전은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아들 임현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죽산 봉성에서 격전

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아들 임현은 만주의 부차성 전투에서 명의 원군으로 나가 싸우다 전사하였다.

임수전 부자 충신문은 임수전 부자가 나라를 위해 순국한 뜻을 기리는 정려각이다.

 

▲ 15시가 다 되어 청봉의 애마가 오고.. 하산식 장소로 이동한다.

 

▲ 상호가 농민 쉐프의 묵은지 화련이다... 하산주 장소인데.. 상호가 이쁘다.

 

▲ 가게로 들어서니 주인장의 취향을 짐작할수 있는 진열장이다..

 

▲ 살아서는 진천에 살으리랐다 했는데.. 살고 있지는 못할지언정... 객의 발길이 인연따라 여기까지 왔으니 인심 좋고

푸짐한 진천의 밥 한상을.. 배 두드리며 먹어 보기나 하자..

 

▲ 좋은땅에 오니 기운이 솟는가 봅니다.

 

▲ 직전 회장님의 익살에... 회장님도 웃지요.. 청봉님들도 마냥 웃지요.. ㅎㅎㅎ~.. 이런 웃음이 평범한 일상의 행복입니다.

 

▲ 곳간에서 인심 난다 라는 말처럼... 커다란 가마솥에서도 살기좋은 진천의 넉넉한 인심이 묻어나는것 같다.

 

▲ 생거진천의 땅에서... 미르(용)의 기운까지 받았는데.. 천하대장군.. 여장군도 함박웃음으로 배웅해 준다..

그리고.. 한결같은 청봉님들의 환대에 감사합니다..

2024년 09월 05일(목).

지리산국립공원 대성골 : 경남 산청군/하동군.

 

산행코스 : 거림계곡주차장-거림탐방지원센터-천팔교-세석고원갈림길-음양수샘터-대성골-의신마을.

산행시작 : 거림계곡주차장  10시 20분.

산행종료 : 의신마을 선학정  17시 14분.

전체거리 : 약14.3km.

전체시간 : 06시간 43분.

운동시간 : 05시간 52분.

휴식시간 : 00시간 51분.

 

10 : 20  거림계곡주차장.

10 : 28  거림탐방지원센터.

11 : 30  천팔교.

11 : 38  북해도교.

13 : 02  세석교.

13 : 24  세석고원갈림길.

13 : 38  음양수샘터.

14 : 07  대성골갈림길.

16 : 09  대성골.

17 : 14  의신마을선학정 종료.

 

 10시 20분 : 거림계곡주차장.

 

거림계곡상가지역.

 

 길상암 갈림길.

 

 길상암을 품고있는 도장골의 시천천은 촛대봉에서 발원하여 와룡폭포를 만들고 거림의 내대천과 합류한다..

 

 거림탐방지원센터 앞의 상가.

약 40년전에 다녀 간곳이라.. 그때도 상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가물가물한 기억을 소환해 보아도 아리송하다.

거림계곡길은 분명 그자리인데 환경은 많이 낯설게 변했다.

 

탐방로를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 건물뒤로 돌아 가면..

 

10시 28분 : 거림탐방지원센터를 지나.

 

 거림탐방로 대문을 들어서서 데크계단을 1~2분 올라서면...

 

 노송아래 쉼터가 있다.

 

거림(巨林)이라는 마을이름처럼 과거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하게 계곡을 메우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군수용

으로 많이 베어졌고.. 8·15광복 후에는 땔감으로 마구 베어져 한때 벌거숭이 계곡이 되기도 했다.

 

 거림(巨林)계곡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에 있는 계곡으로 지리산 주능을 제일 편안하게 오를수 있는 코스 중에 하나이다.

 

 오름길은.. 여전히 착하게 이어지지만.. 이곳 경남 산청의 낮기온이 33도로.. 여름 더위가 식을줄 모른다..

 

그나마.. 거림계곡을 타고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가 있어 다소 위안을 삼으며.. 쉬엄쉬엄 진행한다.

 

11시 17분 : 거림탐방로 대문을 통과한지 1시간이 되어 간다... 아주 이상적인 산행속도다.

 

 11시 30분 : 천팔교 도착.

불교에는 백팔번뇌가 있고 지리산은 산이 넓어니 천팔번뇌가 있어서 천팔교일까?ㅎㅎ~.

그러나.. 알고 보니... 천팔교라는 이름은 여기가 해발고도 1008미터라서 천팔교라고 이름 지어 졌다고 한다.

 

천팔교를 지나서 약간의 오름을 치고나면 다시 편안한 산죽길로 이어지고..

 

충분한 수량도 아니고 요란한 굉음도 아니지만 물보라를 튀기며 떨어지는 소리는 더위를 잊기에는 충분하다.

 

다시.. 살짝 고도를 올리면...

 

 11시 38분 : 북해도교 도착...

왜? 하필 북해도(홋카이도)교 라고 이름 지었을까..

북해도교라는 명칭은 거림에서 산행을 시작해서 현 위치에 도착과 동시에 피부에 찬 기운이 느껴져 추운지방을 연상케

하는데에서 유래되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추운것을 연상하는것이 일제강점기시절 일본의 북해도를 아주 추운곳이라 여겨

이름을 북해도교라고 지었다고 한다.

온 나라가 일본 잔재의 흔적지우기를 하고 있는 마당에 아름다운 명칭으로 바꾸면 어떨까..

 

북해도교를 지나면... 거대한 방구돌이 버티고 선 이곳에서 부터..

 

능선을 타고 오르는 된비알의 시작이다...

 

여기까지 오는동안은 그래도 잊을만 하면... 간간히 불어주던 바람도 된비알 오름에서는 조용하다.

 

힘든구간임을 국공에서도 아는지...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여기서 물도 마시고 화랑 총무님이 정성의 손길로 담아주신

삶은계란 두알과.. 두유 한팩.. 바나나 하나... 그 중에 바나나로 더위에 힘들어 하는 몸을 달랜다.

 

쉼터에서 4~5분 올라서니... 된비알은 끝나고..

 

난간없는 데크길이 나오고...

 

 길가에 벌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옆에서 보니 "뽀뽀바위"처럼 보인다...

 

꽃며느리밥풀.

꽃말은... "질투" 다..

 

무명다리.

 

12시 32분 : 두번째 쉼터..

 

쉼터 저 멀리 남부능선 끄트머리에 흰구름이 넘실거리고 있는 삼신봉이 까마득하게 다가온다. 여기서 점찍기를 한다.

 

지리고들빼기..

꽃말은... "순박함" 이다.

 

13시 02분 : 세석교..

 

흔히들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라고 한다. 해발고도 1400m가 넘는 곳에서 생명의 젖줄인 맑은물이 흐른다..

 

해발 1500m대의 세석고원에서 물을 품었다가 내어주는 소중한 물이다.

 

13시 24분 : 세석고원갈림길..

세석산장까지는 약 500m이지만.. 왕복1km다.. 오늘은 의신마을 하산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울 같아서 통과하기로 한다.

 

과남풀..

꽃말은... “당신의 슬픔을 함께 합니다.” 이다.

 

과남풀은 우리의 이름으로는 "칼잎용담"이라는 아주 좋은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남풀이라고 불리운다.

용담’은 뿌리가 용의 쓸개처럼 아주 쓰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칼잎용담은 그런 용담을 닮았고, 잎이 칼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과남풀이라고 불리우는것은 한이름에 근거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관음초(觀音草)라고 하는데.. 관음초가 음이 변하면서

‘관음’이 ‘과남’이 되고 ‘초’가 ‘풀’로 쓰이면서 과남풀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다른.. 자료에서는 꽃잎의 색깔이 지나치게 남색이라고 해서 과남풀이라고 명명했다는 주장도 있다.

 

음양수 너럭바위..

1953년 여름, 여성 빨치산 김점분이 자기대원 15명과 함께 여기서 포위당하자 모두 권총으로 자결했다는 곳이다.

그 옛날 깊은 상처는 이제 다 아물었을까.. 뭇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여기 앉아 노닥거리고 밥도 먹고 쉬었다 간다.

 

음양수 너럭바위에 있는 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 선생의 기도제단(좌선대)..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을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의 이야기가 있다.

이 글은 중산리 법계교 부근에 있는 우천 허만수 추모비(宇天 許萬壽 追慕碑)뒷면에 새겨진 전문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산이 좋아 처자식도 버리고 홀로 지리산에 들어간 우천선생은 세석고원 음양수샘 아래 초막을 짓고 30여 년간 산짐승처럼

살면서 지리산 곳곳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샘터를 개발, 보수하는가 하면 숱한 사람을 안내하고 구조하는데 한평생을 바친

전형적인 산악인이자 지리산을 가장 사랑했던 산사람이다. 그래서 산악인들은 그를 "지리산 산신령"으로 부른다.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선생은 1916년 진주 옥봉동에서 태어났다.

열 살 무렵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입명관(立命館) 중학교시절 ‘동정(童貞)클럽’이라는 등산반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했다. 동정클럽이란 이름은 산을 즐기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공부보다 산을 더 좋아하는 아들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부모는 그를 일시 귀국시켜 강제로 혼인시켰는데 선생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다시 부인(전경림)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광복을 맞아 부인과 세 딸을 데리고 귀국

해 진주에서 대동서점을 열었지만 몸과 마음은 늘 산에 있었다. 결국 2년 만에 서점 문을 닫고 산으로 떠났다.

 

자굴산에서 땅굴을 파고 원시인처럼 2년여를 보내고 지리산에 들어가 오직 지리산을 위해 여생을 받쳤다.

그러다 그가 회갑 년이 되던 해 1976년 6월에 정든 세석의 철쭉을 뒤로 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칠선계곡, 거림골,

도장골 또는 신선너덜에서 아무도 모르게 숨을 거두었으리라는 말만 무성할 뿐 그의 최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평소에 칠선계곡에서 영면 할것이라고 자주 시사했다고 한다.

 

 너럭바위 아래에 있는 음양수 샘.

오른쪽에서 나오는 하나는 음이요 왼쪽위에서 나오는 하나는 양이요, 두 물줄기가 합쳐 샘을 이룬다는 음양수 샘이다.

이곳이 이상향이라 믿었던 일단의 사람들이 여기 들어와 살다가 아래로 강제 철수되어 청학동에 정착했다는 말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음수"라 하고..

 

 좌측 위쪽에 "양수" 있다.

 

 음양수샘에서 0.5l 페트병에 담아서 마셔보니.. 거부감이 없고 시원하다.

 

▲ 산오이풀꽃.

꽃말은... "애교" 다...

 

▲ 비만 오면 물길이 되는 하산길이라 발목 부상을 조심조심....

 

▲ 돌확.. 돌절구.. 사람이 거주하였다는 증거다.

 

▲ 동자꽃.

꽃말은... "기지".. "정열".. "기다림" 이다.

 

▲ 거림옛길로 내려가면 북해도교와 만나고... 우천 허만수 선생이 거처하던 초막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 이 길은 쌍계사길과 청학동으로 이어지는 삼신봉까지의 남부능선을 따라가는 길이다..

의신마을은 조금더 가다가 오른쪽으로 탈출이다.

 

13시 54분 : 조망바위에서.. 촛대봉과 시루봉. 그 사이에 청학연못이 있다.

 

촛대봉과 시루봉(장군봉) 능선 중간 서쪽 아래 해발고도가 1500m도 넘는 세석고원에 신비한 연못이 있다.

자연 상태의 연못이 아니고 청학동의 이상향을 완성시키는 의도에서 옛 선인들이 의도적으로 지형을 갖추려는 듯 인공

으로 조성된 연못이다. 대슬랩이 앞 물을 막아주고 둥글게 돌조각을 세워 뒷물 길을 막았다.

 

청학연못의 길이는 대략 10~15m 넓이는 대략 6~7m 정도 되며 깊이는 대략 1m 내외로 짐작되는 타원형의 연못이며

대슬랩에 새겨진 몇 개의 파자(破字)가 있는데 정확한 해석은 아직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청학연못의 조성시기는 사람에 따라 다소 엇갈리는데 대략 150년 전 쯤 됐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인들의 기록을 기초로 하여 고려조까지 거슬러 말하는 사람도 있다.

 

▲ 촛대봉 아래의 청학연못.

청학(靑鶴)은 날개가 여덟이고 다리가 하나이며 얼굴이 사람같이 생겼다는 상상의 길조(吉鳥)로서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전설의 새라고 한다. 이 새가 울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하여 옛 사람들은 청학이 사는 청학동을 신선의 고장이라 여겼다.

이상향의 청학동 위치는 지금의 삼신봉 아래 청학동과는 다른 개념이라고 한다.

 

▲ 당겨 본 세석고원.

지리산은 1967년 12월 20일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483㎢로서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있는 국내 최대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지리의 웅장함과 광활함을 보여주는 곳이며 지리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말해주는 곳이기도 한 세석평전은 고원지형을

형성하고 있어 세석고원으로 지칭되기도 하는 곳이다. 세석(細石)이란, 잔돌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뜻으로 불리는 것이

라고 한다. 세석고원은 예전에는 세석평전이라고 하였는데.. 일본의 잔재라고 하여 고원이라고 바뀌어 지고 있다.

 

▲ 지리 주능선상의 영신봉과 창불대.

창불대는 부처님을 찬양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 좌측으로는 지리 주능선의 칠선봉.. 덕평봉이 성삼재 방향으로 달려 간다.

 

▲ 남부능선의 암릉을..

 

넘고 넘어서..

 

14시 07분 : 의신마을 갈림길... 5시까지 하산이라 마음이 바쁘다.. 6.9km밖에 안남았다..ㅎㅎ~

 

▲ 화랑 대성골...뫼들.. 군대에서 챠트 글씨 깨나 써본 솜씨다.. 멋집니다.

 

▲ 조망바위가 있어 올라가 보니.. 저 멀리 하동의 진산 형제봉이 아스라히 보인다.

 

▲ 발아래로 길게 뻗어나간 하산길의 대성골.. 어디가 그 계곡의 끝인지 전혀 가늠 할 수가 없다.

 

14시 44분 : 큰세개골 도착.

 

▲ 여기서부터 대성골까지는 거의 너덜길이다.

 

▲ 대성골이 의신마을까지 중간지점이다.

 

▲ 이곳 무명폭포를 지나면서 부터.. 미구에 닥쳐올 자연 재난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갑자기 앞서가는 여성 회원님들이 고함을 지른다.. 말벌이다!~~ 라는 비상 싸이렌을 울린다.

뒤에 따라가던 우리 다섯명.. 가운데 선 나를 뺀 앞뒤 두명에게 벌들의 총공격이다. 모르긴 몰라도 기관총은 총도 아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가운데에 선 나는 벌들의 공격이 전혀 없다.

아마도 벌들이 그랬을 것이다.. 우리 말벌 보다 더 지독한 넘을 만났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공격을 안한다ㅎㅎ..

 

벌이 공격해 오면 당황하지말고 침착하게 빨리 그곳을 벗어 나는게 상책이다.

앞뒤 모두가 벌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고함을 치며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두팔을 마구 휘젓는다..

그런 행동을 하면 벌들이 공격해 오는줄 알고 더 달려 든다.. 침착하라는 내말은 이미 귓등이다..

내가 벌에 쏘이지 않은 것은 침착하게 조용한 행동으로 걸음을 빨리하여 지나왔기 때문이다.

 

▲ 한바탕 소동이 있고서야 위험지대를 벗어 난다.

 

▲ 백금녀..오천평보다도 더 펑퍼짐한 엉덩짝으로 바위를 뭉개버렸다.. 얼마나 숨통이 막히랴!~ㅋ..

저 방구돌은 전생에 무슨 업보를 받고 태어났을꼬?..ㅎㅎ..

 

▲ 작은세개교.

 

▲ 작은세개골.

 

▲ 드디어 대성골 진입.

지리산 대성골..하면.. 빨치산 토벌이야기를 빼놓을수가 없다.

57사단을 결성한지 1개월도 안된 52년 12월 2일, 군경의 제1차 대토벌작전이 시작된다. 먼저 남부군 직속 81사단, 92사단

과 합동작전인 경남 하동군 악양지서 습격사건인 악양전투는, 대토벌작전 하루전날 대공세 준비중인 수도사단의 아가리에

뛰어 들어가는 대실패였다. 같은 달에는 경남 함양군 법화산에서 수도사단의 공세에서 수백명의 빨치산이 몰살당했고,

 

52년 1월 17일경 지리산 천왕봉 근처 대성골 전투에서 경남도당과 남부군 57사단은 군경의 포위에 결정적으로 괴멸된다.

당시 전투는 소설 <남부군>에서 이태가 ‘남부군 최후의 날’이라는 소제목으로 묘사하며, 자신이 소속된 81사단만 포위되어

작살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92사단은 물론 경남도당과 57사단, 그리고 전남도당과 전북도당 일부 부대

까지 군경의 포위공세에 토끼몰이 식으로 밀려 대성골에 총집결했다가 싸그리 괴멸한 전투였다.

 

<실록 정순덕>에서 정순덕은 1만명의 빨치산이 대성골에 빽빽이 들어찼다고 했지만, 그건 남한내 총 빨치산의 숫자에

가깝고, <빨치산의 딸>에 의하면 그 1/10인 대략 1천명 남짓이 포위된 상태였다. <이현상 평전>, <전남유격투쟁사> 등

여러책을 종합해 봤을 때 전남도당에서 ‘투쟁인민’이라고 하는 후방의 노약자들만 1천명이고 전투병은 수백명 수준으로

추정된다.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들은 이 대성골 전투로 결정적인 손실을 입는다.

 

특히 경남도당 지휘부는 부위원장 김삼홍을 제외하고 아예 전멸해버렸는데, 정순덕은 이때 경남도당 위원장 남경우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다. 토벌대측에서는 항공기로 소이탄을 떨어뜨려 대성골 일대를 불태웠는데 불길이 얼마나 강한지

한겨울에도 무려 5일간 타들어 갔다. 정순덕은 좁은 바위틈새에 숨어 선채로 최소 5일 이상 버티며 살아남는다.

그러나 남편 석성조는 이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며칠후 생존자에게 듣는다.

 

▲ 정순덕의 증언에 의하면 2천명(?)이나 되었다는 57사단은 대성골 전투로 불과 60여명 남았다. 

잔존 병력은 2개 중대로 편성되었고 부대장 이영회는 부상으로 그때까지 복귀하지 못해 참모장 박창선이 대신 이끌었다.

정순덕의 중대장은 삼천포 출신의 임학주였다. 정순덕은 중대부(본부) 소속으로 간병, 취사, 환경정리를 담당하였다.

 

1952년 1월 17일, 각지에서 쫓기던 빨치산들이 이 대성골로 밀리고 밀려 집결하던 날 토벌군은 의신에서 종일 야포로 이곳

을 때렸고 이후 미군 비행기는 휘발유통을 떨어뜨려 이곳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한다.

그 이후 남부군은 급격한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급기야는 완전 토벌되고 말았다.

 

▲ 원 대성동마을.. 집터가 있었던 축대가 보인다.

지리산 전투 중 가장 처절했다는 대성골전투, 그 대성동마을에 드디어 도착했다.

1968년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전국 모든 화전민들을 산 아래로 강제 이주시켰고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1970년 저 아래 대성마을로 내려갔다고 전한다.

 

▲ 원 대성동마을 쉼터.

 

▲ 대성동마을 2.1km 지점에서부터...

 

▲ 시작된 너덜겅은 마음까지도 완전히 너덜거리게 만든다.

 

▲ 대성동마을에 사람들이 쓰던 물건 흔적을 만난다..

 

▲ 재만 남은 대성동마을... 지리산 대성동휴게소, 일명 ‘대성주막’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한때는 산꾼들에게 막걸리한잔으로 피로를 풀었던 곳인데...ㅠㅠ~

 

▲ 불에 탄 흔적들... 2023년 3월에 발생한 산불로 대성계곡 일대가 모두 타버린 상태다.

 

▲ 지금도 혼자 거주 중인 임현종씨가 밭일을 하고 있다.

그는 4대째 여기서 살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집 근처에 후박나무 수백 그루를 심어 유명한 지리산 산림왕 고 임봉출씨다.

 

산사면에 있는 집들은 다 타서 무너졌고 계곡 쪽 가옥 한 채만 멀쩡했다.

 

▲ 개집 같기도 하고..

 

▲ 대성동 동구밖에 노송만이 그날의 아픔을 알고 있겠지..

 

▲ 벌때 습격사건으로 출동한 소방대원들.. 회원들 중에 누군가가 119에 신고를 하였다고 한다.

아무런 탈이 없어야 될텐데..

 

▲ 두번째 팀..

7방인가 9방인가 쏘였다는 분과 사고경위 청취..

 

16시 30분 : 의신마을 1.8km.

 

▲ 산불에 탄 흔적들..

그나마 다행인것은 소나무는 타버렸지만 활엽수는 1여년만에 자연적으로 회복된 듯 하고..

소나무림이 적고 활엽수의 밀도가 높아 숲 내부에는 바람이 세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축구장 170개에 달하는 면적이

불탔다고 알려졌는데 그당시 산불 진화 과정에서 진화대원 1명이 숨지기도 했다는데 다행히도 산불 발생 하루만에  비가

내리면서 진화가 되었다고 한다.

 

▲ 길은 착한 오솔길이지만.. 지친 발걸음 때문인지 가도가도 줄어들지 않는 느낌이다.

 

▲ 세번째 소방대원팀..

 

▲ 꽃무릇..

지금 전남 영광 불갑산에는 꽃무릇축제가 한창이다.

 

▲ 세석탐방로 입구까지 구급차가 올라 와 있다.

 

 

▲ 항일투사 30인 의총(義塚).

한일 강제병합이 있기 2년전 1908년 2월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온 몸으로 저항하며 결사항전하다 최후를 맞이

한 항일 무명 영웅 30인이 이곳 지리산 화개면 의신마을 공동산에 잠들었다.

 

이곳에 묻힌 항일의병은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맹활약하다 1908년 1월말 의신마을에 도착했다.

의병들은 마을 서당에 본부를 두고 배명고지(지리산역사관 뒤 능선)에 초병(哨兵)을 세우고 벽소령 길목을 경계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게 베 한 조각을 나누어 주면서 토시와 발등덮개를 만들게 하고 음력설을 쇠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 2일(음력 설날) 아침 승려로 가장한 일본군이 절골(용화정사 터)에 있는 마을 주막으로 오는 것을 발견하고

발포하였으나 일본군의 유인작전이었다. 일본군(변장대)은 마을에 침투하여 의병을 향해 기습공격을 하였다.

항일의병 80여명은 일본군에 맞서 이틀간 격렬히 저항했지만 일제의 막강한 화력 앞에 의병 50여명이 전사하고 생존자는

산청쪽으로 몸을 피했다. 이후 의신마을 주민들은 항일 의병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제 등, 진평전 및 계곡 산허리에 묻어

주었으며 이곳 30명의 무명 항일영웅들의 묘는 그 중의 하나이다.

 

▲ 의신마을에서 세석까지 9.1km 오름길은 추천 하고 싶지 않은 길이다.

 

▲ 마을길따라 바로 올라가면 서산대사가 출가하였다는 원통암가는 길이다.

 

▲ 마을에도 구급차가 3대가 와 있다..

 

▲ 서산대사길..

편하고 힐링의 길이다. 2017년에 서산대사길과 원통암을 다녀왔었다.

 

▲ 의신(義信)마을 유래.

선인들의 말씀과 기록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 길지(吉地)로 십승지지(十勝之地)가 있는데, 지리산(智異山)에는 청학동

(靑鶴洞)이 있다. 지리학자들의 기록이나 구전에 의하면 지리산 덕평봉(德平峰) 회포(回包) 40여리라고 하니 오늘날 대성리

전역이 청학동 범위에 위치하는데.. 그 중에 의신마을은 가장 길지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 의신동천..

 

17시 14분 : 의신(義信)마을 선학정 산행 종료.

의신마을로 하산이 전부 완료되면 약800m 거리에 있는 의신마을 아래쪽 주차장에서 버스가 올라오기로 함..

 

▲ 후미팀이 내려 올동안 트랭글을 정리하고..

후미에 섰던 산대장님도 내려 오고 벌에 쏘인분들도 다행히 말벌이 아니어서 위급한 상황은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소방대원들도 전부 철수하면서 벌쏘임 사건은 일단락 되고.. 하산주장소로 이동.

 

▲ 덕장 회장님의 배려로 씻지도 못하고 하산한 회원님들을 위해서 물 좋은곳에서 잠시 정차.. 역시나 덕장다운 배려다.

▲ 18시 09분 : 화개장터 인근 식당..

 

▲ 산대장님의 건배..

 

▲ 이어서 회장님의 건배..

용장(勇將)밑에는 약졸이 없고.. 덕장(德將)밑에는 배신자가 없고.. 지장(智將)밑에는 잔꾀 부리는 사람이 없다" 라는

말이 있다.. 한데.. 용(勇)과 덕(德).. 그리고 지(智) 까지 갖추었으니 화랑산악회의 홍복이라면 홍복이다.

 

모든 회원님들의 무사무탈..

산악회 회장으로서는 최고의 하루일 것이다.

2024년 09월 01일(일).

속리산국립공원 도명산 : 충북 괴산군.

 

산행코스 : 화양동주차장-운영담-화양3교-첨성대-515봉-도명산-마애불-학소대-와룡암-능운대-만동묘-화양동주차장.

산행시작 : 화양동주차장  10시 59분.

산행종료 : 화양동주차장  15시 57분.

전체거리 : 약8.93km.

전체시간 : 04시간 57분.

운동시간 : 04시간 01분.

휴식시간 : 00시간 56분.

 

10 : 59  화양동주차장.

11 : 16  운영담.

11 : 25  화양3교.

11 : 28  첨성대.

12 : 24  515봉.

13 : 52  도명산.

14 : 10  마애불.

14 : 55  학소대.

15 : 02  와룡암.

15 : 12  능운대.

15 : 25  만동묘.

15 : 57  화양동주차장 종료.

 

 10시 59분 : 속리산국립공원 화양동주차장... 2009년 10월에 왔어니 15년만에 이자리에 다시 왔다.

 

 주차장휴게소도 15년전보다 깔끔하게 단장 되어 있다.

 

도명산탐방지원센터앞을 통과하여 화양구곡쪽으로..

 

기암이 약250m지점의 그자리에 옛모습 그대로 앉아 있다.

 

우리의 솔잎님들이 지나간 길가에.. 가을이가 한점.. 내려 왔다.

 

화양천을 건너는 화양2교에서 바라본 상류쪽의 운영담 방향.

화양구곡은 조선 영조가 "송자(宋子)"로 칭한 우암 송시열(1607~1689)이 1666년부터 1688년까지 머물면서 산수를

즐기며 제자에게 강학했던 곳이다.

 

 11시 16분 : 화양구곡중에 제2곡인 운영담(雲影潭).

 

10배 줌으로 당겨온 운영담(雲影潭) 각자(刻字).

운영담(雲影潭)은...화양천 계곡에서 빠르게 흘러내려온 맑은 물이 잠시 고여 구름의 그림자를 맑게 비추며 숨을 가다듬은

후에 다시 흘러간다는.. 주자(朱子)의 시(詩)인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의 뜻을 따온 ‘운영담’이라는 글씨

바위에 새겨져 있다.

 

화양구곡중에 제3곡인 읍궁암(泣弓岩).

계곡을 향해 누운 펑퍼짐한 이 바위 위에서 우암 송시열이 효종임금이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41세 젊은 나이에 승하

하신것을 슬퍼 하며 한양을 향하여 활처럼 엎드려 통곡하였다고 하는 곳이다..

효종 임금을 기리며 매일 새벽과 효종의 제삿날인 5월 4일에 엎드려 곡을 했다고 한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외로운 충정만 하늘에 닿았도다.

새벽이 되도록 통곡만 하다가..

또 다시 엎드려 무릎 끌어안고 탄식하노라~.

 

권상하(權尙夏)의 시(詩)...

읍궁암(泣弓岩)..

 

하마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젊었을때 이곳을 지나는 길에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하여 만동묘지기(혹은 지역 유생)에게 패대기를

당하고 얻어맞는 등의 고초를 당했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화양동서원과 만동묘..

하마비 오른쪽에 있어며... 하산길에 들러볼 생각이다.

 

 화양동서원 묘정비(廟庭碑).

묘정비는 서원에 세우는 비로.. 사원을 건립하게 된 동기와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해 두는 비석이다.

영조 23년(1747)에 세웠으며.. 이재가 글을 짓고.. 유척기가 글씨를 썼다. 묘정비는 서원철폐령이 내려진 후 일본인들이

고의로 글자를 지우고 땅에 묻어버렸다. 일본인들이 글자를 모두 쪼아 없애 버렸기에 해석은 불가능하다.

이후 만동묘와 함께 복원되었다.

 

 화양천 건너편의 암서재(巖棲齊)와.. 화양구곡중의 제4곡인 금사담(金沙潭).

금사담(金沙潭)은 맑은 물과 깨끗한 모래가 금싸라기 같이 보이는 게곡속의 못이라는 의미이다.. 암서재 아래 붉은 타원형

점선안에 "금사담"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암서재 아래 화살표에..

 

금사담(金沙潭)이라는 각자(刻字)가 뚜렷하다.

 

 금사담(金沙潭)오른쪽 석벽에는...

 

창오운단(蒼梧雲斷).. 명나라의 황제가 살던 시대의 구름이 끊기고..

무이산공(武夷山空)...주자(朱子)가 살던 무이산은 비어 있다는 뜻으로 주자학의 본산인 명이 사라지고 없음을 의미한다.

 

 화양천 건너편의 암서재(巖棲齊)는..

금사담(金沙潭) 물가의 큰 반석위에 있는 서재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송시열(宋時烈)이 정계에서 은퇴한 후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화양구곡(華陽九曲)에서..

화양(華陽)이란 '중국 문화의 햇빛'이라는 뜻이다.  송시열은 이 골짜기에 작은 중화(中華:중국의 문화)를 이루려고 했다.

송시열은 이곳에 들어온 후 일상생활도 되도록 중국의 생활방식을 따르기 위해 옷도 명나라 옷과 평정건(平頂巾)을 썼다.

 

11시 25분 : 화양3교... 도명산 들머리.

 

 11시 28분 : 일행들을 먼저 보내고 화양구곡 중에 제 5곡인 첨성대(瞻星臺)를 둘러본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황하가 만 번을 굽이쳐 흘러도 반드시 동쪽을 향해 흘러간다(충신의 절개는 꺾을수 없다)는 뜻이다.

 

첨성대.

 

가운데 글씨는...비례부동(非禮不動)으로...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뜻이다.

 

대명천지(大明天地)는..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 것이고..

숭정일월(崇禎日月)은.. 조선의 해와 달도 숭정 황제의 것이라는 의미로...극치의 사대주의를 보여주는 씁쓸한 글들이고.

송시열의 숭명(崇明)사상이 고스란히 새겨진 글씨다

참고로.. 숭정(崇禎)은 북경의 경산공원에서 1644년에 자살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다.

 

지리산 상내봉의 안락문 같은 분위기다.. 반쯤 들어가다가 일행들과 너무 떨어진것 같아서 부지런히 올라간다.

 

드디어.. 계단위에 솔잎의 꼬랑자가 보인다..

 

 간식거리로 정나눔을 하는 팀들과도 만나고..

 

오늘의 괴산 날씨도 32도를 오르내린다.

도명산 2.2km남은 지점까지 올라와도 바람끼가 없다... 에어컨이 꺼진걸 보니 괴산의 전기사정이 좋지 않은가 보다..ㅎ~

 

무리하지 말자.. 다시 너럭바위에서..

 

 재충전을 하고..

 

 발 딛기가 까탈스런 너덜겅을 만나는데.. 다행히 직등이 아니고 사면으로 수평이동이다.

 

 약간의 오름을 치고올라.. 도명산에서 오른쪽의 갈미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 올라선다.

 

 515봉 된비알 오름의 시작이다.

 

 발아래 화양계곡따라 멀리 우리가 출발하였던 화양동 주차장이 보여서...

 

 줌으로 한껏 당겨 보니 산악회 차들이 제법 보인다. 화양계곡은 여름산으로 많이들 찾는 곳이다.

 

 도명산 정상이 눈높이로 다가오고..

 

 12시 34분 : 515봉 도착..

 

13시 00분 : 간간히 불어주는 그늘에서.. 점찍기가 늦었다고 아우성치는 속 달래기... 먹고 마시고..

 

 도명산 정상이 지척이다.

 

 도명산 통천문..

 

영암 월출산 천황봉의 통천문 보다는 길이가 짧지만.. 들어서니 시원한 통바람이다.

 

 최고의 연리목이 있는 사랑산과 남군자산.. 그너머로는 군자산이 버티고 섰다...

 

 솔잎의 히어로.. 윤회장님..점점 일취월장에.. 플러스 알파로 잘하고 있습니다.

 

 카페 서핑으로 솔잎을 찾아 왔다는데.. 산꾼의 포스(force)가 묻어난다.. 매달 함께 산행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산행을 해보시면.. 참~ 좋은 언니들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겁니다.

 

도명산은 국립공원 속리산에 속하여 있으며 그 중에 예로부터, 천하 절승지로 이름난 화양동계곡 남쪽을 가로 막고

서있는 명산으로 화강암의 바위봉과 기암석벽이 어울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도명산에서 마애불로 가는 내림길이 장난 아니게 가파르다..

 

14시 09분 : 도명산 낙영산 갈림길..

 

▲ 14시 11분 : 마애 삼존불.

 

 왼쪽 동떨어진 암벽에 새겨진 또하나의 불상은 5.4m로 다른 불상과 달리 돋을새김 기법으로 곡선미를 잘 보여준다.

.

석벽엔 마치 밑그림 처럼 불상이 선각(線刻)되어 있다.

삼존불 중 오른쪽 불상은 9.1m 높이에 안면 길이만 2m에 이른다. 가운데 불상은 더욱 커 높이가 14m나 된다.

 

▲ 마애불 앞의 거대한 통바위..

이 바위로 팔공산 갓바위처럼 입체형 불상을 조각하였다면.. 완전 도명산의 유명한 불상이 되었을 것이다.

 

▲ 상류에 낙영폭포가 있는 사지목골에는 매미소리도 더위에 지친듯 고요하다...

 

14시 52분 : 학소대교.

 

화양천 상류..

 

화양천 하류쪽.

화양구곡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있는 경승지로... 1974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84년 속리산국립

공원에 포함되었다. 조선 중기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은거하며 이곳의 경치가 중국의 무이구곡에 버금간다고 보고 아홉

개의 구비마다 이름을 붙이면서 화양구곡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2014년 대한민국 명승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화양구곡 중에 제8곡인 학소대(鶴巢臺).

청학이 바위 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학소대(鶴巢臺).

 

 상류에는 퇴계 이황이 거닐었다는 선유구곡이 있다..

 

▲ 화양구곡 중에 제 7곡인 와룡암 (臥龍岩).

비스듬히 계곡을 질러 뻗은 바위가 용이 꿈틀거리는 듯하여 와룡암이다.

 

▲ 와룡암 (臥龍岩).

 

▲ 화양구곡중에 제 6곡인 능운대(凌雲臺).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능운대라 한다.

 

▲ 첨성대..

 

▲ 아침에 지나쳤던 화양서원으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은... 조선 후기의 정통 성리학자로 본관은 은진으로.. 주자(朱子) 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으며,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명나라를 존중하고 청나라를 경계하는 것이 국가정책

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1689년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서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 만동묘로 들어가는 양추문..

 

▲ 송시열은 숙종15년(1689)에 사약을 받고 죽게될 지경에 처하자 제자 권상하(1641-1721)에게 명나라가 멸망한지 50년

이 지났건만,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와 의종 숭정제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라고 유언을 내리자 제자 권상하가 숙종

30년(1704) 인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화양서원내에 만동묘를 창건하고 스승의 유언대로 만력제와 숭정제의 신위를 봉안

하여 제사를 올렸다. 이후 조선 임금들도 만동묘를 융숭하게 대우하였다. 영조 2년(1726) 나라에서 만동묘에 제전과 노비

를 내려주었고 그 후에도 예조에서 90명이 돌아가며 묘우를 지키게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지원을 했다. 정조는 직접 사필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만동묘는 이후 서원 폐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받았다.

지역의 백성들에게 노역을 빼주겠다고 강요하여 돈을 받아내고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케 하고..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만행이 심했다. 심지어 거슬리는 백성을 멋대로 사형시켜도 처벌받지

않을 지경이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으니 횡포가 대단했었던 모양이다.

 

결국 고종 2년(1865)에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할때 동시에 만동묘를 철폐하고 만동묘에 소속된 재산을 국가와 지방

관청에 귀속시켰다.

 

▲ 만동묘 계단..

만동묘의 계단은 발디딤의 폭이 매우 좁고 단이 높은데, 명나라 황제가 계신 곳을 무엄하게 그냥 걷지 말고 기어서 올라

가라는 의미가 있다...실제로 올라가 보니 단은 높고 폭은 좁아서 바짝 긴장하고 조심해서 올라야 된다. 내려올때 위험하다.

 

▲ 만동묘..

만동묘라는 이름의 유래는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긴 선조의 어필 만절필동(萬折必東)을 모본하여

화양리 첨성대 바위에 새겼는데, 그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서 "만동묘"라고 하였다..

 

▲ 만동묘 시당..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화양계곡 내에 위치한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만력제)과 명나라

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숭정제)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만동묘는 사적 제417호, 만동묘정비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화양서원(화양동서원) 내부에 있던 시설로 화양서원은 서원 철폐 이후 터만 남았다가 1999년 사적

으로 지정 후 2001년부터 04년까지 만동묘와 승삼문, 송자사등 일부 건물을 복원하였다.

 

화양서원.

1695년(숙종 21)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해 권상하(權尙夏).. 정호(鄭澔) 등 노론이 건립을 주도했으며, 1696년 창건

하고 사액을 받았다. 1716년(숙종 42)에는 어필로 편액을 받았다. 서원의 명칭인 '화양'의 뜻은 중화의 정신을 널리 알린다.

라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주차장으로 가는길에 부회장님의 삼인방..

 

 15시 57분 : 화양동주차장 산행종료.

 

 

16시 50분 : 산막이옛길의 맛집.. 지난 7월에 하산식을 했던 집이다.

 

 순두부전골...

 

 회장님의 건배에 이어...

 

 직전회장님의 건배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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