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2월 28일(수).

어깨산/망덕산 : 충북 옥천군.

 

산행코스 : 옥천옻문화단지주차장-금강전망대-어깨산-호랑이굴-망덕산-조령1리정류장-옥천옻문화단지주차장.

산행시작 : 옥천옻문화단지주차장   10시 51분.

산행종료 : 옥천옻문화단지주차장   14시 41분.

전체거리 : 약 6.25km.

전체시간 : 03시간 49분.

운동시간 : 03시간 25분.

휴식시간 : 00시간 24분.

 

10 : 51  옥천옻문화단지주차장 출발.

10 : 55  느라골전망대.

11 : 29  금강전망대.

11 : 52  어깨정.

11 : 58  어깨산.

12 : 19  하늘전망대.

12 : 50  호랑이굴.

12 : 19  지우대갈림길.

13 : 33  망덕산.

14 : 00  참옻다리.

14 : 23  지우대마을.

14 : 27  조령1리정류장.

14 : 41  옥천옻문화단지주차장.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요금소를 빠져나와서..

옥천쪽으로 2~3분 가량 진행하면 왼쪽에 "옥천옻문화단지입구"라는 대형 글씨가 보인다.

 

▲ 10시 51분 : 옥천옻문화단지주차장.

옥천군은 건강식품으로 새롭게 떠오른 옻을 지역특산물로 육성하기 위해 2005년 옻산업특구 지정을 받았고...

2008년부터 매년 5월 옻순 축제를 열고 있다. 현재 옥천에서는 230여 농가가 17만 그루의 옻나무를 재배하고 있다.

 

옥천옻문화단지주차장에도 새봄맞이 단장을 하는지... 새로만든 화장실은 아직 내부공사로 사용금지다.

 

▲ 어깨산 들머리는 옥천옻문화단지안내도에서 좌측으로 가면...

 

▲ 차량통제선을 비켜서 임도를 따라가다가 좌측 머리위로 보이는 전망대로 올라간다.

 

▲ 느라골전망대로 올라가다가 내려다 본 옥천옻문화단지주차장.

 

▲ 느라골전망대.

 

▲ 느라골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경부고속도로와 금강..

 

▲ 어깨산등산로는 작은 능선으로 올라 선다.

 

▲ 400m대의 어깨산등산로는.. 작은산들이 그러하듯이 초반부터 가파르게 오르다가..

 

▲ 조금은 허리를 숙이고 착해지는척 하다가..

 

▲ 다시 산허리를 감아돌며 봉우리를 향해 고개를 치켜 들더니...

 

▲ 작은 봉우리를 넘어서고는..

 

▲ 짧은 내림의 안부로 내려 갔다가..

 

▲ 다시 고도를 높여 간다.

 

▲ 128계단..

 

▲ 급한오름이라 128개의 계단을 단숨에 오르기에는 버거워서 한숨 쉬어주고 나서야..

 

▲ 해발 250m대의 무명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 무명봉에서 올려다 본 441m의 어깨산이다.. 아직 200m정도의 고도를 더 높여야만 저곳에 오를수 있다.

 

▲ 평지에 시공되어 있는.. 이유를 알수 없는 수평 데크길이다.

 

▲ 해맞이산이라는 별칭이 있는 고수봉이 금강을 내려다 보고 있다.

금강(錦江)은 전북 장수군 신무산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충북으로 거슬러 올라간 뒤 다시 충남을 거쳐 군산시 군산만에서

서해로 흘러 드는데 우리나라에서 낙동강 한강에 이어서 세번째로 긴 강으로 길이가 무려 395km 이며 감입곡류(嵌入曲流)

하는 물길이 너무 아름다워 "비단내"로 부르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11시 29분 : 금강전망대.

 

▲ 전망은 나무에 가려서 별로이고.. 여름날 금강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쉬어가기에는 좋은 장소다.

 

11시 33분 : 어깨갈림길.

여기서부터 된비알의 시작이다.

 

▲ 산불 피해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 이곳은 2016년 5월 22일에 발생한 산불로..

 

▲ 어깨산 일대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벌거숭이의 처참한 모습이다.

 

▲ 옥천군에서는 산불피해의 위험성과 심긱성을 일깨우기 위해 피해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

산불의 화마속에서도 척박한 바위틈에서도 악착같이 살아낸 못난 소나무가 산을 지킨다.

 

중국 송나라 시대에 도가의 대표적 사상가인 장자(莊子)에게 한 선비가 찾아왔다.

이 선비는 장자를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장자의 사상이 크고 높은 줄은 알지만 이상적으로 치우쳐서 그다지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선비가 장자에게 말했다.

"선생님의 말씀은 크고 높지만 현실적으로는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 마치 저 앞에 있는 나무와 같습니다. 저 앞의 나무는

크긴 하지만 온통 구부러지고 울퉁불퉁하여 목수들이 쳐다보지도 않거든요. 재목감으로는 별로인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장자가 대답했다.

"그럼 거꾸로 생각해 보게. 그 볼품없이 보이는 나무가 구부러지고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오히려 목수들한테 잘리지도

않고 그토록 오래 살아 큰 나무가 된 것이 아닌가?"

"그래도 쓸모가 없는 것 아닙니까?"

장자가 대답했다.

"여보시게... 왜 쓸모가 없나. 햇빛이 쨍쨍한 날 그 나무의 그늘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원하게 편히 쉴 수 있지 않나.

비바람과 눈보라가 치면 막아주고, 보잘 것 없는 나무가 산을 보다 푸르게 해준다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 무척

고마운 존재가 아닌가?... 아니 그런가?" 

그러자.. 선비는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

 

11시 52분 : 어깨정.

 

▲ 어깨산에는.. 70년대의 산물 예비군 참호가 많이도 보인다.

 

▲ 어깨정에서의 조망을 마치고.. 어깨산으로..

 

11시 58분 : 어깨산 정상.

 

▲ 어깨산의 지명유래는... 금강 건너편 멀리 동이면 우산마을 방향에서 어깨산과 망덕산을 바라보면 사람의 어깨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하며 순수 우리말 산 이름이라고 한다.

 

▲ 가야 할 망덕산..

 

▲ 산불재고(山不在高) 유망즉명(有望即名)이라 했다..

산은 낮아도 조망좋으면 명산이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사방이 막힘이 없는 조망이 아름다운 최고의 맛집이다.

 

▲ 동쪽으로 뻗어나간 능선끝에 하늘전망대가 둥지를 틀고 있다..

 

▲ 하늘전망대는... 아찔한 벼랑위에 걸터 앉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가 보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금강의 자태는 자못 빼어났다. 휘돌아가는 물굽이가 만들어놓은 모래사장과 고요하게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는.. 잘 그려진 한 폭의 풍경화다..

 

▲ 하늘전망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충청북도의 차곡차곡 쌓인 나지막한 산들과.. 그리고 금강물줄기를 따라 들어앉은 마을의 풍경들이 그림이다.

 

 

▲ 하늘전망대에서 다시 어깨산으로..

 

▲ 망덕산으로 가는 하산길..

 

▲ 매조망대의 풍경도 일품이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 했듯이... 산을 넘지 못한 금강의 물줄기가 산자락 끝을 휘돌아 흘러간다.

 

12시 47분 : 송골쉼터.

 

▲ 호랑이굴에 다녀 온다.

 

12시 50분 : 호랑이굴.

 

▲ 오리걸음으로 들어가 본다.

 

▲ 호랑이굴 안쪽..

 

▲ 안쪽에서 바깥을 보니..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은 굴은 크지도.. 깊지도 않고 호랑이 일가족이 살기에는 안성마춤이다.

 

▲ 다시 송골 갈림길로 올라와서..

 

▲ 망덕산 방향으로..

 

▲ 망덕산 가는길도 너울춤을 춘다.. 오르락 내리락...

 

▲ 건너다 보이는 봉우리가 망덕산인데... 지우대갈림길 안부까지 바닥을 친다.

산은 굴곡진 인생과 같아 오르내림이 반복된다고 했다. 그러니 쉬운 산이 어디 있으랴. 조금 편한 산은 있을지라도

쉬운 산은 결코 없다는 얘기가 있는 것이다.

 

▲ 내려다 보이는 지우대 갈림길.

 

13시 14분 : 지우대 갈림길.

 

▲ 지우대전망대.. 조망은 1도 없고 그냥 쉼터다.

 

13시 33분 : 망덕산.

 

▲ 인적 드문 산길에 인기척이 나니... 반갑다며 개아우성으로 짖어 댄다.

 

▲ 산불초소의 초소장님이 돌탑을 쌓다가 올라 온다. 건장한 체격에 산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

덕분에 주변의 산들의 이름과 위치를 알게 되었다.

 

▲ 지나온 어깨산..

 

▲ 금강휴게소가 바로 발아래다.

초창기에 많은 운전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곳이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경부고속도로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게소로도

꼽힌다. 하지만 지금은 고속도로 곳곳에 휴게소가 많이 생겨나면서 많이 한산한 편이다.

 

▲ 건너편의 철봉산과 약사사..

 

▲ 당겨본 약사사..

 

▲ 망덕산에서의 조망도 일망무제로 일품이다.

 

▲ 금강너머로 충청지역의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펼쳐진다.

 

▲ 산불초소장에게 한컷 부탁...

 

▲ 산불초소장이 탑을 쌓기위해 기초를 잡았다.

 

▲ 생뚱맞은 늑대굴... 선답자들의 말에 의하면.. 찾을수가 없다고...

 

▲ 늑대굴 표시목을 지나자 말자 매우 급하게 떨어지는 급경사 내림길이다..

 

▲ 88세의 김선생님.. 팔팔하게 잘도 내려 오신다..

평균수명 연장의 시간을 비례한다면.. 내가 90이 될때에는 더 팔팔해야 되지 않을까?..ㅎㅎㅎ~~

 

14시 00분 : 참옻다리..

여기서 다리를 건너지 말고 오른쪽으로 내려 간다.

 

옻 산업특구를 조성하면서 내놓은 임도 절개지 위를 연결한 다리다.

 

▲ 지우대(芝牛垈) 마을(조령1리)..400년 전.. 함양박씨와 옥천전씨, 영양천씨가 터를 잡은 마을로

소가 풀을 뜯어 먹는 모습에서 유래했다 하며.. 인근에 소에 관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 과거 젊어서 뻔질나게 다니던 출장길에 가끔씩 들렀던 집이다.

조령1리(지우대 마을)의 대표 메뉴는 "쏘기리 매운탕"과 "도리뱅뱅이"가 유명하다.

1980년대에 이 마을로 들어온 배창윤씨로부터 시작된 음식인데 처음에는 피라미로 만든 생선튀김에 불과했단다.

그러다가 이게 별미로 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늘어났고, 또한 프라이팬에 빙 둘러 구우는 조형미까지 갖추면서

"도리뱅뱅이" 라는 구수한 이름까지 얻게 되었다고 한다.

 

▲ 금강휴게소굴다리를 지나쳐서 화살표 방향으로..

 

▲ 레저스포츠1길을 따라가면...

 

▲ 지방도에 올라서게 되고..

 

14시 27분 : 조령1리정류장을 지나 도로를 따라간다.

 

▲ 통행량이 많지 않은 지방도이지만..그래도 노견으로 조심조심..

 

14시 41분 : 주차장 도착..

 

▲ 어깨산 망덕산은.. 금강의 비경을 보는 전망대 같은 산이다

겹겹이 포개지는 금강의 물줄기는 어깨산과 망덕산을 휘감으며 굽이굽이 돌아가는 조망맛집으로 최고의 하루였다.

2024년 02월 17일(토).

문암산 : 대구시 동구.

 

산행코스 : 미대동2정류장-등산로입구-바위지대-문암산-비일재-깔딱재-백안삼거리2정류장.

산행시작 : 미대동2정류장  09시 35분.

산행종료 : 백안삼거리2정류장  15시 34분.

전체거리 : 약 6.3km.

전체시간 : 05시간 59분.

운동시간 : 03시간 41분.

휴식시간 : 02시간 18분.

 

09 : 35  미대동2정류장 출발.

09 : 49  등산로입구.

10 : 06  바위지대.

10 : 56  문암산.

14 : 27  비일재.

14 : 58  깔딱재.

15 : 34  백안삼거리2정류장.

 

09시 15분 : 미대동2정류장 도착.

2020년 2월 23일 대구 청룡산을 시작으로 출발한 야등팀 <코로나19 극복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현재까지 대구 근교산을

모두 섭렵하고.. 미답산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던 문암산을 오르기로 한다.

 

▲ 미대동 선현현양비(先賢顯揚碑).

옛 선현들의 삶을 통해 내일을 열어가는 지혜와 정신을 본받자는 차원에서 충절. 효행. 청렴의 상징으로 이지역 출신의

효자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선생(1705-1786)과... 청백리 괘편당(掛鞭堂) 이영(李榮)선생(1494-1563)과...

위국충절의 양전헌(兩傳軒) 채선견(蔡先見)선생(1574~1644)등.. 세분을 기리는 현양비이다.

오늘 마침.. 이곳이 문암산 산행들머리여서 동료들과의 미팅시간까지 15분 정도 남아서 기념비들을 살펴보았다.

 

▲ 미대동 3.1운동 기념비.

"채경식"은 1896년 11월 24일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미대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113번지)에서 아버지 채승원

(蔡昇源, 1867 ~ 1906. 10. 21)과 어머니 진주 강씨(1864 ~ ?)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과 조선 각 지방에서 발발한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격문을 살포,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해 4월 26일 밤 10시에는 권재갑 · 채갑원 · 채명원 · 채봉식 · 채송대 · 채학기 · 채희각 등 7명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의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그날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루고..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50년 11월 6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 미대동 6. 25및 월남참전 유공자 기념비.

 

▲ 이름모를 산하에 묻힌 주인 잃은 군화..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이땅에 총성은 멎었지만..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전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휴전중인 나라에 살고 있다.

 

▲ 청백리 이영(李榮, 1494~1563)...본관은 영천으로 자는 현보(顯父), 호는 괘편당(掛鞭堂)이다.

1514년(중종 9) 21세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1545년(인종 1) 정평 부사로 치적(治績)이 크게 드러나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

하여 통정대부가 되었다. 1551년(명종 6)에 가선대부에 올라 회령 부사가 되었는데 치성(治聲)이 임금에게 들리게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 청렴한 관리 33인을 선발하였는데 퇴계 이황과 함께 이영도 포함되었다.

1553년(명종 8)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듬해인 1554년(명종 9)에 북병사(北兵使)로 여진족을 잘 다스렸다.

1555년(명종 10)에 병조참판으로 내직으로 들어올 때 명종 임금이 선전관을 보내어 행장(行裝)을 점검하게 하였는데

다만 헤진 이불 한 채만 있을 뿐이었다. 임금께서 “그대의 청백(淸白)은 가히 일월(日月)과 빛을 다투도다”라고 하였다.

1558년(명종 13)에 제주 목사가 되어 청렴하고 공평하게 잘 다스려 칭송을 받았다. 돌아올때 손에 들고 있던 말채찍 하나도

관(官)의 물건이라 하고 관청의 벽에 걸어두고 돌아왔다.이로써 괘편당(掛鞭堂)이라는 호(號)를 얻게 되었다.

저술로 『괘편당실기(掛鞭堂實紀)』가 있으며 1729년(영조 5) 백안동에 청백사에 제향 되었으나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고 복구되지 못했다.

 

09시 27분 :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와서 오늘 함께 할 회원님들과 미팅..

 

09시 35분 : 문암산을 향해서 출발..

 

▲ 동화천을 건너며 마주하는 문암산..

 

▲ 오늘 오르는 문암산은 야등팀 대구근교산 오르기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산으로.. 오늘을 끝으로 근교산 쫑~파티산행

이나 다름 없는 날이다..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에 이루어진 산행이라서 참석이 저조하여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지만..

그래도 화창한 날씨 만큼이나.. 발걸음은 가볍다.

 

▲ 미대동 넓은들 너머로.. 2023년 12월 31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자랑스런 팔공의 지맥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 반사경이 달려 있는 농로 끝지점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09시 48분 : 구암생수농장앞..

 

▲ 얼마전까지만 해도 문암산 들머리가 구암생수농장 마당을 가로질러 가도록 되었지만 지금은 막아놓아서 돌아간다.

 

▲ 구암생수농장에서 8~90m를 무량사쪽으로 이동하면..

 

09시 49분 : 좌측으로 문암산 들머리가 있다.

 

▲ 임도 비슷한 길을 따라서 구암농장마당 뒷지점까지 가서.. 철탑이 보이는 오른쪽 능선으로 진행하면..

 

▲ 초반부터 오름을 꽤나 가파르게 오르면.. 바위지대 능선이다..

 

▲ 짧은 바위구간을 지나면..

 

▲ 전형적인 육산으로 바뀌고.. 비교적 등산객이 잘 찾지 않는 코스라.. 멧돼지들이 마음놓고 헤집고 다니며 뒤집어 놓은

낙엽으로 길의 윤곽이 희미하지만..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면.. 흔적은 보인다..

 

▲ 주능선에 올라서면.. 길의 윤곽도 뚜렷하고 생각보다 가시숲길이 아닌.. 난이도 중급수준의 오름이 이어 진다.

 

▲ 급한 오름을 한차례 치고 오르면.. 쉼터 역할을 하는 전망바위를 만난다.

 

▲ 차를 타고 다닐때는 좁은 골짜기로 보였던 미대동 들판이 위에서 내려다 보니 꽤나 너르고.. 맞은편으로는 팔공산의

비로봉과 마주하지만.. 나무들에 가려 조망은 별로다.

 

▲ 오늘도 홍여사님의 매직배낭에서 설 다과와 먹거리가 침샘을 자극한다. 쌍화차 완전 굿~...이었습니다.

 

10시 56분 : 조망은 없지만 잘 정리된 문암산..

 

▲ 세월이 묻어나는 김문암님의 정상 표지판..

문암산(文巖山)은 공산댐 우측의 절벽 바위가 흡사 대문처럼 생겼다하여 문암산으로 전해지고 공산과 마주하고 있는

산으로 돌산으로 전체적으로 암석으로 되어 있지만 산림이 매우 울창한 편이다.

문암산을 기산(箕山)이라고도 부르며 문암산의 숲은 경상북도 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다.문암산은 인천채씨 종산이다.

문암산에 숲이 울창하게 된 유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인천채씨 집안에서는 소년 참사(少年慘死)가 자주 일어났다.

동화사 승려가 인천채씨 집안 사람들에게 문암산에 나무를 심으면 참사를 면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고,

이때부터 인천채씨 40여 세대가 가마니.. 보따리.. 봉지 등에 흙을 담아암산(巖山)에 깔고 그 위에다 나무를 심었다.

그 후에 나무가 잘 자라나 문암산에는 산림이 울창해졌으며 소년참사도 없어졌다고 한다.

 

▲ 김문암님에게 보낼 인증샷..ㅎㅎ~

 

▲ 문암산에서 깔딱재로 가는 내림길이 급하게 내려 꽂힌다.

 

11시 43분 : 야등팀의 밥자리는 언제나 옳다.. 조고문님의 35도 데낄라가 "대끼리"다..

 

▲ 하산길의 햇볕좋은 곳에서.. 칼슘대사 촉진을 위해 비타민D를 피부로 섭취.. 거기에 웃음 한바가지는 덤이다.

 

14시 27분 : 비일재..

문암산길은 조망이 거의 없는 길이다.. 유일하게 조망이 되는 곳이다.

 

14시 58분 : 깔딱재..

여기서 직진하면 환성산 길이다. 하산은 좌측으로..

 

▲ 2021년 5월 2일.. 야등팀이 올라 왔던 길을 오늘은 내려간다. 그때는 소나무에 한입버섯이 많이 보였는데 오늘은 없다.

 

▲ 마을길에 내려서고..

 

▲ 동화천 건너에는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나들이를 나온 젊은 청춘들의 차들이 주차장을 가득 메운다.

 

▲ 한옥 카페 "브리니" 젊은이들로 완전 호황이다. 요즘 말로 "핫" 한 곳이다.

 

15시 34분 : 백안삼거리 산행종료..

다른 지역의 국립공원에 가면.. 우리지역에는 없기에 언제나 부러웠던 국립공원 명판.. 이제는 자랑스럽다.

 

▲ 화창한 날씨가 좋았고...

조망은 없었지만 울창한 소나무 숲과 햇살이 좋았고...

그 무엇보다.. 사람이 좋았기에... 모든게 좋았던 행복의 하루였던것 같다.

2024년 02월 09일(금).

팔공산 : 대구시 동구.

 

산행코스 : 팔공산분수광장-염불암-철탑사거리-동봉-염불봉갈림길-팔공분수대광장.

산행시작 : 팔공산분수광장  08시 50분.

산행종료 : 팔공산분수광장  14시 18분.

 

2024년 02월 04일(일).

천암산 : 경남 통영시.

 

산행코스 : 갈목마을정류장-전망바위-천암산-명정고개-북포루-세병관-명정-충렬사-주차장.

산행시작 : 갈목마을정류장  10시 36분.

산행종료 : 충렬사주차장  14시 55분.

전체거리 : 약 8.78km.

전체시간 : 05시간 18분.

운동시간 : 03시간 54분.

휴식시간 : 00시간 24분.

 

10 : 36  갈목마을정류장 출발.

10 : 39  전망데크.

11 : 08  전망바위.

11 : 45  돌탑.

11 : 55  237봉.

13 : 09  명정고개.

13 : 35  북포루.

14 : 08  세병관.

14 : 39  명정.

14 : 43  충렬사.

14 : 55  충렬사주차장.

 

▲ 10시 32분 : 갈목마을정류장 도착.

 

▲ 길건너의 갈목마을 입구...

 

▲ 천암산 들머리에서 산행채비를 하고...

 

▲ 10시 36분 : 천암산 1.9km를 향해 출발..

 

▲ 갈목마을 들머리에는 조경숲을 조성해 놓았다..

 

▲ 숲 안내도의 2번.. 힐링숲(대나무숲).

 

▲ 천암산 진행방향으로 왼쪽에 있는 숲 안내도의 5번.. 전망데크2.

 

▲ 2019년 3월 24일에 올랐던 제석봉 발암산이 마주보인다.. 발암산에서의 조망도 뛰어나다..

 

 천암산 진행방향으로 오른쪽에 있는 숲 안내도의 3번.. 전망데크1.

 

▲ 갈목마을 너머로.. 그림같은 한려해상의 "사량도" 가 길게 누워있다.

 

▲ 좁은 물길의 통영해협 너머로는 해안 일주도로가 아름다운 미륵도 다.

 

▲ 다시 주 등산로에 올라서서 천암산으로...

 

▲ 천암산 진행방향으로 좌측으로는 통영시 도산면의 봉화산이 자리하고 그 아래쪽에는 사량도로 가는 가오치항이 있다.

 

▲ 통영시 인평동 민양마을 포구에는...

배들이 옹기종기 이마를 맞대고 모여 있고 방파제 역할을 하는 상항도를 잇는 아치형 다리가 보여서..

 

▲ 한껏 당겨 보니 운치가 있다. 차량통행은 불가한 도보용이다.

 

▲ 부엉이 바위에게 1..

마을에서 바라보면 부엉이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부엉이 바위에게 2..

 

▲ 부엉이 바위에게 3..

 

11시 36분 : 천암산..

천암산(天岩山)은.. 통영의 주산인 여항산에서 서쪽에 있어 통영의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하는 산이라고 한다.. "통영지"에

"통제영의 서쪽 5리 지점에 있어며 크고 작은 괴석이 많이 있어 농암(籠巖)이라 부른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 천암산에서 바라본 통영시..

한국의 나포리라 불리는 통영은 유..무인도 합해 570여 개의 섬(유인도 44개)을 거느리고 있다.

 

▲ 전원주택같은 아담싸이즈의 천암산 산불감시초소.

 

11시 45분 : 돌탑봉..

 

준.희 님의 238.6봉에서..

통영지맥(統營枝脈)이란?... 지리산 영신봉에서 부산쪽으로 가는 낙남정맥의 대곡산(大谷山.545m)에서남쪽으로 가지를쳐

고성반도 끝으로 가는 산줄기로 고성읍내를 관통하여 고성, 통영일대에서 가장높은 벽방산(碧芳山.651m)을 넘어 통영

시가지를 감싸안고 서쪽으로 돌아가 통영시 길목마을에서 그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40여 km되는 산줄기로 호미, 땅끝,

고흥, 여수지맥 처럼 반도의 끝으로 가는 능선이라 지맥의 이름도 지역명을 따서 통영지맥(統營枝脈) 이라 칭한다.

 

선두팀들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우리팀도 착한길을 따라 조금더 진행하여..

 

통영시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데크에서..

 

12시 14분 : 먹거리 정나눔을 한다.

 

옆동네도 같이.. 브라보..

 

이정표의 명정고개길을 따른다.

 

두번째 산불초소를 지나고..

 

13시 05분 : 약수암 갈림길에서.. 명정고개로.. 약수암쪽으로 직진하면 충렬사쪽이다.

 

약수암 갈림길에서 4~5분가량 진행하면.. 운동시설이 나오고..

 

▲ 곧 이어.. 명정고개에 내려선다.

 

명정고개 장승.. 옛날에는 원문 아래의 해안에서 나룻배로 북신만을 건너 여기 명정동 고갯길을 통하여 이 고장 옛

두룡포(지금의 통영항)로 왕래하였다. 그러다가 1604년(선조 37년) 통제영을 설치한 수십년 후에야 원문 안에 길을 내여

나루를 건너는 폐단을 없게 하였다.

이 장승은 육로를 개설하기 이전에 아주 오래된 유적으로 원래는 큰 돌탑과 함께 한 쌍이 세워져 있었다.

그후 1970년경 도로확장 공사 때 돌탑과 장승 1기가 매몰되었으며 1993년 장승 1기를 발굴했으나 머리부분이 손상되어

동일 모양의 장승을 제작하여 나란히 세웠다.

 

 길은 임도와 산길로 갈라지지만.. 어느곳으로 가던 위에서 만난다.

 

 산 주변에 주요 유적이 많아서인지.. 비상시에 대비하여 헬기장이 잘 관리되고 있다.

 

 산수국이 피는 4~5월에 이길을 걸어면 좋을듯 하다...

 

 원문항..

 

 북포루 갈림길..

여기서 명계수협쪽으로 직진하면 장골산 가는 길인데.. 장골산은 조망이 없어 통과하여 북포루로 향한다.

 

 길이 좋은 북포루 가는길...

 

 미륵산과 대숲..

 

 여기를 지나가는데.. 작년 여름에 휴가차 갔던 강원도 삼척의 "이끼폭포" 가는길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난다.

 

 장골산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고...

 

 예향의 도시답게... 숲속 도서관이 돋보인다.

 

 북포루가 자리한 여황산..

여황산은 중국의 고사에서 따 온 산 이름이고, 북포루는 통제영의 북측 경비 초소였다.

고대 중국 오(吳)나라의 한 임금이 호화로운 장식이 된 "여황"이라는 배를 무척 아꼈지만 전투 중 적국인 초(楚)나라에

넘어가고 말았다. 절치부심하던 오 왕은 다시 전쟁을 일으켜 기어코 여황을 되찾았다.

여황은 "호화롭게 장식한 배"라는 뜻도 있지만 제대로 진용을 갖춘 전함(戰艦)을 상징한다.

 

13시 35분 : 북포루..포루(舖樓)는 치성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인데 이것을 포(舖)라고 한다.

통제영에는 당시 세병관을 중심으로 동쪽 동피랑에는 동포루, 서쪽 서피랑에는 서포루, 북쪽에는 북포루가 있었다.

남쪽은 바다이니 별도의 산상 초소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

 

 북포루와 마주하는.. 건너편의 미륵산과 통영시가지..

 

 북포루에서 바라보이는 한산도와 거제의 노자산과 가라산..

임진왜란 다음해인 1593년(선조 26)에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일본이 남해와 서해로 향하는 길목인 한산도

에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을 설치하였고, 이를 줄여서 "통제영(統制營)"이라 불렀던 것이 통영(統營)이

된 것이다.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이 통합되면서 오늘의 통영시를 이루었고, 청마, 윤이상, 박경리를 비롯한 이름난

예술인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북포루 투어를 마치고..

 

"세병관"으로 가기위해 이정표의 문화빌라쪽으로 하산이다.

 

중국 황산의 대숲과 비슷한 분위기다.

 

서피랑 공원의 서포루를 당겨 본다.."피랑"은 통영 말로 벼랑 혹은 비탈을 뜻한다.

동피랑마을은 대부분 10평 내외의 작은 주택들로 이루어진 대표적 달동네였다.

처음 터만 남은 동포루를 복원한 뒤 공원을 꾸밀려고 하다가 벽화마을로 재탄생되었다.

 

황단보도를 건너서 화살표의 세병관으로 간다.

 

덩이괭이밥..

 

"열기" 생선 말리기..

 

세병관 가는길...

 

황금측백나무..

 

세병관 매표소..

 

▲ 세병관의 외삼문인 망일루(望日樓)..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은 1604년에 설치되어 1895년에 폐영이 될때까지 경상, 전라, 충청의 삼도수군 본부였다.

임진왜란때 제1대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설치했던 본부가 최초의 통제영이었다.

망일루는 광해군3년(1611년) 우치적(10대)통제사가 세웠으며 영조45년(1769년) 이국현(128대) 통제사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세웠다. 일명 세병문이라고도 하며 통행금지를 알리는 큰종이 있어서 종루라고도 하였다.

소실된 것을 다시 2000년에 중건하였다.

 

▲ 수항루..

2층 누각으로 통영성 남문 밖에 위치 하였는데, 임진왜란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숙종 3년(1677년) 제58대 윤천뢰

통제사가 건립하였다. 수항루는 봄가을 군점(수조) 때 모여  왜군에게 항복받는 행사를 거행 하였다.

해안 매립으로 인해 선착장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려 1986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 중건하였다.

 

▲ 좌청(左廳)..

군관과 사병이 대기하는 건물로 대변좌청(待變)이라고도 하여 제 54대 신여철 통제사가 1689년에 "좌청"과 "우청" 으로

분청했다고 한다.

 

▲ 산성청(山城廳)...

통영성을 지키는 산성중군 등이 근무했던 곳으로 숙종44년(1718년) 오중주(83대) 통제사 때 건립했으나 소실되었던 것을

발굴하여 유구와 문안에 의하여 최근에 건립하였다.

 

지과문(止戈門)은..

지과(止戈)는... 중지한다는 "지(止)"와, 창 "과(戈)"이다.

전쟁을 중지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두 글자를 합치면 "무(武)" 자가 되므로, 전쟁을 준비한다는 상반된 뜻이 있다.

글쓴이는 청남 오제봉(菁南 吳濟峯 1908~1991) 선생이다.

 

14시 08분 : 세병관(洗兵館 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로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한산도의 통제영을 이곳으로 이동해온 이듬해인 1605년에 처음 세웠다.

제35대 통제사 김응해가 1646년에 규모를 크게하여 다시 지었으며, 제 194대 통제사 채동건이 1872년에 다시 고처 지은

것이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9량 구조 단층 팔각집으로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지금 남아있는 조선시대

건축물 중 바닥 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 중 하나이다.  장대석 기단, 50개의 민홀림 기둥, 2익공 양식에 벽체나 창호도 없이

통칸으로 트여 있으며, 질박하면서도 웅장한 위용이 통제영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세병이란 만하세병에서 따온 말로

우리말은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 라는 뜻이다. 크게 걸어 놓은 현판은 제137대 통제사인 서유대가 쓴 글이다.

 

▲ 문화해설사가 설명을해 주고 있다.

 

▲ 세병관 내부 마루..

경회루. 진남관과 더불어 조선건축물 중 바닥이 가장 넓은 건축물이다.

 

▲ 세병관 뒷모습..

해설을 듣는 동안 나는 한바퀴 둘러 본다.

 

▲ 12공방으로 가는 문..

 

▲ 백화당(百和堂)은...

선조36년(1603년) 이경준(6대)통제사가 건립하였다.  중국사신 등의 손님들을 맞이하는 통제사의 접견실이자 비장청인데

비장은 지방장관 및 중국사신을 수행하던 무관으로 민정의 염탐과 같은 업무를 맡았고 지방장관이 임명했다.

 

▲ 공내헌(工內軒)은..공방을 관리하던 공감의 집무실을 말한다.

12공방은 제반군기와 진상품을 생산하던 곳으로 백화당 서쪽에 자리하며 조직적인 분업의 군영공방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1593년 이순신이 한산진에서 시작했으나 임란후 통제영이 창성하자 크게 번창하여 다양한 생활용품을 생산하였다.

 

▲ 공내헌 마루에 전시되어 있는 판옥선.

 

▲ 총방(총房)과 입자방(笠子房)..

총방(총房)은 말총을 엮어 망건.탕건.유건 등을 만들던 곳이며...

입자방(笠子房)은 흑립이나 벙거지... 삿갓... 패랭이 등을 만들던 곳이다.

 

▲ 화원방(畵員房)은...

각종지도 및 군사적 목적의 의장용 장식화를 그렸던 곳이다.

 

▲ 선자방은 단오절에 임금이 하사하던 부채를 제작하던 공방이다.

 

▲ 우물터..

 

기삽석통..

세병관 앞뜰에 영기와 장군기를 세우기 위해 깃대를 고정하는 돌기둥...

 

▲ 해설사님이 담아준 세병관 인증..

 

▲ 통제사 비군..

역대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시내 일원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 위치에 모아서 동향으로 58기를 4줄로 나란히

세워 놓은 것을 말한다.. 일종의 송덕비인데... 송덕비, 추사비, 거사비, 사적비, 불망비, 타루비, 유애비, 선정비 등이다.

 

▲ 내아..

 

▲ 운주당(運籌堂)은..

인조23(1645년) 이완(21대)통제사 때 경무당과 함께 창건하였다. 운주 (運籌 )는 운주유악지 중에서 나온 말로 군막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말이니 즉 통제사가 통제영에서 군무를 보는 집무실이다.

 

▲ 운주당 주련..

만호생가춘기난(萬戶笙歌春氣暖)/ 집집마다 젓대소리에 봄기운 따뜻한데...

일정시화우성심(一旌詩話雨聲深)/ 한 깃발아래서 공부하는 소리 빗소리에 잠기네~..

 

▲ 통제사 집무의자..

 

▲ 경무당(景武堂)은...

인조 23년(1645년) 이완통제사 때 지은 통제사의 작은 집무실로 이충무공의 뜻을 우러러 본다는 뜻에서 연유한 것이다.

 

▲ 209명의 역대 삼도수군통제사 명단.

 

▲ 내아(內衙)는...

통제사가 거처했던 곳으로 지방관청의 안채에 해당된다. 현재 안방, 대청, 부엌, 찬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병고(兵庫)는...

선조 37년(1604년) 제 6대 이경준 통제사 때 통제영 설치와 함께 세워졌다.

통제영 병무를 관장하던 곳으로 현재 대포, 창, 무기류를 전시하고 있다.

 

▲ 측면에서 본 세병관..

 

▲ 석인(石人)..

숙종 27년(1701년) 에 제 77대 류성추 통제사 때 세병관 뜰에 액막이로 만든 석인으로 추정되며.. 세병관 앞 장대석 석축

해체 과정에서 석인 5기가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에 설치 하였다.

 

▲ 오늘 처음으로 단독 출연을 해본다..

 

▲ 신궁의 솜씨로 적장의 심장을 향해...

 

▲ 충렬사주차장을 지나가며.. 버스를 확인하고.. "명정"과 "충렬사"를 보고 돌아올 것이다.

 

▲ 충렬사 광장 사거리에서 대각선으로 마주한 "명정"을 보려고 건너 간다.. 화살표의 열린문으로 들어 간다.

 

14시 39분 : 명정(明井:경상남도의 기념물 제273호)..

통영시 명정동에 위치한 통영 충렬사(사적 제 236호) 아래의 2기의 우물을 일컫는다. 

위쪽 샘을 일정(日井), 아래쪽 샘을 월정(月井)이라 불렀다고하며 이를 합쳐 "명정(明井)"이라 일컫는다. 일정의 물은

이(李) 충무공의 향사에 이용하고 월정의 물은 일반 민가에서 사용했다고 하며, 1670년 제 51대 김 경(金鏡) 통제사 때

이 우물을 팠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처음에는 우물을 하나만 팠더니 물이 탁하고 수량이 적어 하나 더 팠더니 비로소 물이

맑고 수량(水量)도 많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전의 기록에 명정리(明井里), 명정동(明井洞) 등 이 우물과 관련한 기록

이 나타나고 있어 최초 우물의 설치는 더 이전으로 추정되며 대대로 이 샘에서 솟아나는 물로서 충렬사의 제향에 사용하고

있는 신성한 우물로 취급받고 있다. 문학적 공간으로서 명정을 살펴보면, 한국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박경리 선생의

"김약국의 딸들"에서도 명정에 대한 묘사가 되어 있다.

 

▲ 명정을 나와서..

 

▲ 충렬사로...

 

▲ 통영 충렬(사적 제236호)는

이충무공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있다.

1606년(선조 39)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왕명으로 세웠으며, 1663년(현종 4) 사액(賜額)되었다.

그 후에는 역대의 수군 통제사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왔다.

 

▲ 매표소 통과..

 

▲ 강한루(江漢樓)..

강한(江漢)은 군사요충이며 장강(長江 양자강)과 한수(漢水)가 만나는 곳으로, 이름난 중국 호북성의 경승지라고 한다.

1840년에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李升權)이, 여기 경남 통영시 통제영 내에 누각을 지을 때 추금(秋琴) 강위(姜瑋)가 

충무공의 위업을 강한과 관련된 고사에 연관 지어 강한루(江漢樓)라 명명했다.

현 누각은 전형적인 조선의 팔각지붕 양식으로 1988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 솟을 삼문인 내삼문(內三門)...

안으로 들어가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올리는 정당(正堂)이다.

 

▲ 충무공의 영정.. 경건히 묵념을 올리고 조용히 돌아 선다.

 

▲ 영정의 좌측 병풍..

 

▲ 영정의 우측 병풍..

 

▲ 충렬사 비각...

 

▲ 들어 올때의 강한루가 나갈때는 영모문이다...

 

▲ 충렬사 동백나무(기념물 재 74호)...

 

▲ 충렬사 홍살문...

 

▲ 충렬사 담장을 따라서 주차장 가는길..

 

14시 55분 : 충렬사 주차장..

 

 

▲ 감자탕...

 

▲ 소맥.. 1대1.. 칵테일전문가의 솜씨다.

산행 잘 하고 볼것 다보고.. 먹고 마시고.. 기분 좋은 하루다.

2024년 02월 01일(목).

무이산/수태산/향로봉 : 경남 고성군.

 

산행코스 : 문수암주차장-문수암-무이산-약사전-수태산-학동치-향로봉-신선대-낙서암-운흥사주차장.

산행시작 : 문수암주차장  10시 21분.

산행종료 : 운흥사주차장  15시 44분.

전체거리 : 약 10.52km.

전체시간 : 05시간 22분.

운동시간 : 05시간 00분.

휴식시간 : 00시간 23분.

 

10 : 21  문수암주차장  출발.

10 : 29  문수암.

10 : 40  무이산.

11 : 08  약사전.

11 : 46  수태산.

12 : 10  수태재.

13 : 02  학동치.

13 : 52  평평바위(백암산갈림길).

14 : 10  향로봉.

14 : 53  신선대.

15 : 09  낙서암.

15 : 36  운흥사.

15 : 44  운흥사주차장.

 

▲ 10시 16분 : 문수암주차장 도착.

오늘의 산행 컨셉(concept)은.. 삼산삼사(三山三寺)다..

 

첫째.. "무이산=문수암 문수보살"..

둘째.. "수태산=보현암 약사여래불"..

셋째.. "향로봉=호국의 천년고찰 운흥사"..

세개의 산과 사찰이 제각각의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오늘 천년암자와 명산에서 최고의 하루를 만들어 보자..

 

▲ 먼저... 올라야할 문수암과 무이산을 가늠해 보고..

 

▲ 덕장(김경진)회장님의 취임 첫달에 만차로 출발하심을 축하합니다.

 

▲ 10시 21분 : 문수암을 향해 출발..

이곳 문수암은 예전에 전두환 전대통령의 칩거 장소를 물색할 때 허문도가 자신의 고향인 이 곳 문수암을 추천했지만

경호상의 문제로 설악산 백담사로 최종 결정되었다고 하는 곳이다.

 

▲ 10배 줌으로 당겨본 약사여래불..

 

▲ 청담대종사사리탑비.

청담스님은 진주사람으로 1902년생이다. 진주농고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후 고성 옥천사에서 출가했다.

1954년 조계종 초대 종무원장을 역임했다. 선승답지 않게 털털한 경상도 사투리와 작은 명분에 얽매이지 않는 성품을

지녔다고 한다. "고은"이 소개한 일화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비구승단의 종권장악이 한동안 순조롭지 못할 때

청담스님과 함께 종로 4가의 "백운학 관상소"에 가서 장차 조계종단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어본 적도 있다.

그만큼 종단이 여기저기서 나타난 협잡에 에워싸여 부채가 늘어나고 종단 운영 자체의 난맥상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세속사람들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앞길을 묻는 것은 몰라도 우리가 가서 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웃음거리가 아닐까 하고

따졌지만 청담스님의 대답은 당당한 것이었다.  돌멩이한테 물으면 어떻고 제석천(帝釋天)에 물으면 어떤가. 가보자.

제정신 핑 돈 사람이 뜻밖에 길일(吉日)을 택하기도 하는 법이 아닌가?.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종권장악이 제대로 안되자 민간이 애용하는 관상에 찾아가 방안을 물어봤다는 황당한 이야기지만, 그게 어떠랴?

돌멩이 한테 물으면 어떻고 제석에게 물으면 어떤가?.. 라고 당당해 했다는 일화는 그의 성품을 보여준다.

 

▲ 청담대종사사리탑.

 

▲ 오늘의 무이산 산행들머리로 정했던 무선리의 무선저수지가 보인다.. 화랑집행부의 판단하에 무선리를 통과하여

문수암주차장을 들머리로 변경한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무선리코스는 1시간가량 소요되는 급오름에 매우 힘든 코스다.

 

선(武仙)마을은 약 100년 전에 진보 이씨(李氏)가 입촌(入村)하여 마을 이름을 "무리산"이라고 불렀는데 1930년에

선동(仙洞)과 분동 되면서 "무선"마을로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시 29분 : 문수암 대웅전..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706년(성덕왕 5)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고 있다. 의상이 남해 보광산(普光山 : 지금의 錦山)으로 기도하러 가던 길에 무선리의

민가에 묵게 되었다. 꿈속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내일 아침에 걸인을 따라서 보광산보다 무이산을 먼저 가보라고 하였다.

날이 새자, 걸인을 따라 무이산으로 가서 보니 눈앞에 수많은 섬들이 떠 있고, 남대·북대·동대·서대는 웅장한 바가 있어

마치 오대산의 중대(中臺)를 연상하게 하였다. 이 때 한 걸인이 또 나타나서 두 걸인은 서로 손을 잡으며 바위 틈새로

사라져버렸다. 의상이 석벽 사이를 살펴보았으나, 걸인은 보이지 않고 문수보살상만이 나타나 있었다. 꿈속의 노승은

관세음보살이고 두 걸인이 문수와 보현보살임을 깨달은 의상은 이곳에 문수암을 세웠는데, 지금도 석벽 사이에는 천연의

문수상이 뚜렷이 나타나 보인다. 창건 이후 이 암자는 수도도량으로서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중창 및 중건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암자는 사라호 태풍 때 건물이 붕괴된 뒤에 지은 현대식

건물이며, 이 절에서 수도한 청담(靑潭)의 사리를 봉안하여 1973년에 세운 청담대종사 사리탑이 있다.

 

▲ 문수암 대웅전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 문수보살이 사라졌다는 암굴이 있다..

 

▲ 자연이 빚어낸 문수보살상이다.. 맞는지 모르겠지만...

착한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는데.. 문수보살상이 맞다면... 불자가 아닌 내눈에 보여짐은 나는 착한 쪽인가 보다..ㅎㅎ~

 

▲ 다시 법당을 돌아 나오면 청담대선사사리탑과 마주하게 되고

 

▲ 무이산 등산로는.. 물품을 실어 올리는 모노레일 플랫폼을 지나서...

 

▲ 오른쪽으로 등산로가 열려 있다.

 

10시 40분 : 무이산 정상의 산불초소..

 

▲ 한려수도.. 자란만과 사량도가 해무속에 졸고있다.

오늘 고성의 날씨는 흐리고 오전 한때 비.. 강수량은 -1mm/h.. 기온은 -1도~7도... 풍속은 3~4m/s이다..

그런데.. 다행히 비는 현재 소강상태다..

 

▲ 동북쪽... 산너머 어디쯤에 연화산이 있을 터인데.. 흐려서 감이 오지 않는다.

 

무이산(武夷山·545.6m)은 통영 미륵산, 남해금산과 더불어 남해안 3대 절경중 하나이며...

삼국 시대부터 해동의 명승지로서 화랑들의 수련장으로도 널리 알려 졌다. 한려수도의 절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함은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이곳의 명코스이며 바로 앞 자란만에는 사량도가 떠 있는데 점점이 박힌

조그만 섬들 사이로 멀리 욕지도까지 뚜렷하게 눈에 잡히는 산인데 오늘은 아쉽기만 하다.

 

▲ 적당히 습기 머금은 길은.. 먼지도 일지 않아 걷기에는 너무 좋다.

 

10시 54분 : 피톤치드가 왕성한 시간에.. 편백숲을 지나면..

 

▲ 조금전 버스로 지나갔던 문수암길에 내려서고..

 

▲ 임도 삼거리에서..

 

▲ 수태산 오름길을 버리고..

 

▲ 좌측 도로를 따라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을 알현하러 간다.

 

▲ 도로를 따라 6~7분 정도 진행하면 약사전이 보인다.. 여래불을 알현하고 주차장에서 오른쪽의 수태산으로 갈것이다.

 

▲ 해동제일약사도량.. 일주문..

참고로...한자로 도장(道場)이라고 쓰여 있지만 불도를 수행하는 사찰의 경내를 가리킬 때는 도량(道場)으로 읽는다.

 

▲ 보현암 약사전은.. 청담스님의 제자이시고 문수암 주지 스님이셨던 정천 스님께서

1983년에 창건하셔서 약사전과 약사여래대불을 조성하신 기도도량이다. 

 

▲ 휴암당 정천 대사의 영정..

문수암 주지로 계시면서 보현암을 창건하셨고, 이어서 약사전과 약사여래대불을 조성하셨다.

 

▲ 보현암 약사여래불.

바다를 등지고 있는 고성군 하일면 수태산에 있는 약사여래불은 동양 최대의 거대한 약사여래불이며..

문수암이 있는 상일면 무이산(武夷山)을 바라 보고 계신다.

 

▲ 여래불 뒤쪽으로 돌아가다가 올려다 뵈니.. 어마어마한 크기다..

 

▲ 티베트 사원의 경전을 돌리는 분위기다.

 

▲ 옥상위에 또다른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 올라가 본다.

 

▲ 용의 등줄기 위로 지나온 무이산과 문수암이 보인다.

 

▲ 옥상에 올라서니 여래불과 눈높이가 같아 진다..

약사여래에 대한 민간신앙에 따르면 어떤 병은 그의 상을 만지거나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기만 해도 치료된다고 한다.

 

▲ 무이산과 문수암..

 

바닷가 사찰의 불상은 대체로 망망대해를 향하는데 이 불상은 바다를 등지고 앉았다.

이 땅에 살아가는 아픈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으로 좋게 해석하면 그만이지만, 내막은 좀 다르다고 한다.

불상 아래는 가파른 산자락이어서 공간을 확보하기 힘든 지형이다. 부처의 등에 대고 기도를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이 바다를 등지고 세웠다고 한다......  -- 한국일보 발췌 --

 

수태산 아래의 보현암.. 약사여래볼은 보현암 소속이라고 한다.

 

▲ 향로봉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 오른쪽의 좌이산(左耳山)은 용의 왼쪽 귀에 해당된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산이다.

 

▲ 약사여래불 알현을 마치고..

 

▲ 다시 수태산을 오르기 위해 일주문을 나선다.

 

수태산 들머리.. 향로봉 5.4km 멀다.

 

▲ 수태산 보현암..

 

▲ 보현암 조망바위에서... 수태산을 향해 15분정도 오르면..

 

▲ 오른쪽에 문수암을 조망할수 있는 넓은 마당바위를 만난다.

 

▲ 당겨본 문수암과 무이산.

 

▲ 길은 다시 착해지고..

 

▲ 봄이면 진달래 터널을 만들어주는 능선이다.

 

11시 36분 : 약사전 갈림길..

 

▲ 무슨용도로 쓰였던 건물인고?... 안쪽에 부엌하나에 온돌방 하나다..

 

▲ 수태산 정상이 가까워지는지 우람한 방구돌 사이를 빠져 나가면..

 

11시 45분 : 척번정 갈림길..

수태산 북쪽 아래에 있는 마을의 지명이 척번정리라 한다. 씻을 척(滌), 번뇌 번(煩), 정자 정(亭)자를 따서 지었는데..

보기에는 평평하지만 비가 오면 빗물이 깨끗이 씻은 듯이 없어지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 11시 46분 : 수태산 정상.

 

▲ 수태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한려수도 자란만..

고성에도 사량도의 지리산 등산로 못지않은 한국의 아름다운 등산로가 있다. “고성에 그런 등산로가 있었단 말인가?”하고

다들 놀라거나 궁금해 할지 몰라도 사실이다. 발아래 펼쳐진 한려수도의 바다 풍광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산행 내내 이런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래서 이 코스를 "한국의 아름다운 등산로"라 하는 것이다.

 

▲ 수태산 정상에서 약사여래불을 당겨 본다.

 

▲ 조망대에서..

 

▲ 가야할 향로봉은 여전히 그자리에 있고.. 수태재에서부터는 능선이 벌목되어 벌거숭이다.

 

12시 09분 : 수태재..

 

 12시 11분 : 수태재에서... 민생고 해결의 맛점 시간..

 

 12시 34분 : 20여분간의 빠른 점찍기를 마치고... 나를 포함한 일부는 능선으로 고고하고. 일부는 임도를 따른다.

 

▲ 뒤돌아본 수태산 능선...

 

▲ 경남 고성군 상리면 동산마을..

이 아름다운 산하의 골골마다에는..우리들의 인생이 있고 사람사는 이야기가 배여 있다.

 

12시 43분 : 준.희님의 와룡지맥 415.2m봉..

와룡지맥(臥龍枝脈)은 백두대간 지리산 영신봉(1651.2m)에서 분기하는 낙남정맥이 삼신봉(1284m)을 거쳐 남강과 경남

남해안을 가르며 낙동강으로 이어가다.. 고성군 대곡산(무량산) 에 이르러 다시 4개(와룡, 통영, 화개, 무척)의 산줄기로

갈라진다. 대곡산(무량산)에서 시작되는 와룡지맥은  감치재, 수태산.. 향로봉.. 봉암산.. 민재봉.. 와룡산.. 천왕산.. 망산..

각산.. 영복항으로 이어지는 실거리 37.6km 인 산줄기이다.

 

▲ 415.2m봉에서 급격하게 고개를 떨구고..

 

▲ 임도와 눈높이를 낮춘다.. 지금쯤 능선으로 올라와야 되는데.. 학동치까지 임도를 고수 하겠단다..

 

▲ 고개를 살짝 낮추었던 능선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 준.희님의 354.8m 와룡지맥 표지.

 산악인 최남준님의 표지기는.. 2005년부터 표지기를 달기 시작했다. 명산이건 근교산이건 산깨나 탄 분이라면 산행 도중

'준·희, 그대와 가고 싶은 산'이라고 적힌 주황색 리본을 한 번쯤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준. 희'라고 쓴 표지기의 주인공 최남준씨는 부산 국제신문 취재산행팀의 안내를 맡았고.. 2001년 남한의 대간과 정맥을

모두 완주하였으며.. 그의 산사랑과 가족사랑은 지역 산악계에서도 훈훈한 사례로 회자된다.
리본에 적힌 '준·희'는 최 씨와 20여 년 전 유명을 달리한 
그의 부인 김숙희 여사의 이름의 끝글자 이니셜이다.

"월간 산" 2022년 4월호 기사를 보면... 지금 현재는 암으로부터 회복중이라고 한다...

 

▲ 이 바위에서 부터 354.8m봉은 ":학동치"까지 급내림으로 떨어지며.. 물기머금은 바위가 미끄럽다. 조심조심..

 

▲ 산복도로개설 공사로 잘려나간 절개지가 매우 가파르다.

 

13시 02분 : 학동치고개...

고성군 하일면과 상리면을 이어주는 도로다.

 

▲ 기억도 가물거리는 오래전에 화살표쪽으로 올라간 기억만은 생생하다... 지금도 그때의 길 흔적은 남아 있다.

 

▲ 임도를 따라 7~8분 가량 진행하면 오른쪽으로 주등산로와 접속이 된다.

 

▲ 진행방향으로 내내 따라 다니는 좌이산은 작지만 예쁜 산으로 해마다 각 산악회에서 시산제 행사를 많이 하는 산이다.

 

13시 08분 : 우측의 주능선이.. 사막의 낙타처럼 등을 낮추어 준다.

 

▲ 향로봉 1.8km.. 많이도 줄였다... 하지만 여기서 부터 무명봉까지의 오름이 장난이 아니다..

 

▲ 힘든 급오름에 잠시 철탑속 세상을 엿보고 가자..

이제 곧.. 최대의 명절 "설날" 이 다가 온다.. 민초들의 무수한 이야기들이 대한민국 전역으로 이어질 것이다.

 

▲ 쉬엄쉬엄 무명봉에 다다르고..

 

▲ 남북으로 관통하는 임도를 만난다.

 

▲ 임도를 건너며 뒤를 돌아보니.. 수태산이 어느새 먼 발치로 까마득하게 멀어 졌다.

 

▲ 백암산 삼거리에 있는 평평바위 오름길도 만만치 않다..

 

▲ "산길이 힘들면 소처럼 걸어가라"..라는 말이 생각나서 우직하게 땅만보고 걷는데.. 커다란 방구돌이 쉬어 가라한다.

 

▲ 족적을 따라 내려 가니.. 적석산 쉼터바위 같은 곳이 나온다.

 

▲ 바로 위에가 마당바위다.

 

▲ 왔던길을 되돌아서 올라가니 국가지리정보원에도 등록되어 있는 "마당바위"다.

 

▲ 조망한번 쥑이는 곳인데.. 쩝쩝 이다..

 

▲ 오른쪽이 향로봉 길이지만... 평평바위를 경유하기위해 절벽과 한판 씨름이다.

 

▲ 수직절벽구간.. 차분하게 자세히 보면 길이 보인다..

 

13시 52분 : 평평바위..

여기서 좌측으로 가면 백암산 능선길이다...

 

▲ 평평바위에서 바라본 향로봉과 상두바위..

 

▲ 당겨 본.. 상두바위..

 

▲ 향로봉으로..

 

▲ 평평바위에 내림길이 쉽지않다.

 

▲ 오른쪽으로 가면 와룡지맥길이다..

 

▲ 전에 없던 육각정자도 있고.. 그런데 건물이 가분수같이 아랫도리가 부실해 보인다.

 

14시 10분 : 향로봉 정상.

향로봉(579m)의 당초 이름은 와룡산이었다. 예부터 와룡산이란 이름은 둘이었다. 하나가 지금 향로봉이라 불리는 고성군

하이면에 있는 와룡산으로 산 밑에는 와룡동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고문헌에도 그렇게 기록돼 있다.

와룡산을 지칭할 때 사천 와룡산과 고성 와룡산으로 구분하여 불러왔으나 어느 날 갑자기 고성 와룡산이 향로봉으로

바뀌에 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토지측량사업을 하면서 조선총독부에서 1918년(대정7년 3월30일 발행)에 발행한

축척5만분의1 지도에 사천 와룡산과 와룡동은 그대로 두고 고성 와룡산을 향로봉으로 표기해 버려 지금까지 향로봉으로

불리어 오고 있다.

 

14시 30분 : 애향교(愛鄕橋)...

고성군 하이면의 "하이애향회"에서 자체기금과 노력으로 건설하였다고 한다.. 애향심이 대단하다.

 

▲ 상두바위..

 

▲ 새바위(일명 : 까마귀 바위).

마치 돛단배의 돛대를 닮은 듯한 역삼각형 바위는 눈을 부릅뜬 사람의 얼굴 같가도 하다.

 

▲ 비로봉에서 바라본 향로봉..

 

▲ 사천의 와룡산..

 

▲ 당겨본 운흥사 주차장.. 화랑의 애마가 보인다.

 

▲ 신선대의 명품송 신선송이다.

 

▲ 신선대 바위..

 

▲ 한폭의 산수화처럼 천길 단애에 걸린 노송의 품새가 당당하다...

 

▲ 낙서암..

 

▲ 낙서암(樂西庵) 으로..

용머리가 있던곳은 과거 일주문이 있던 곳인데... 세월앞에 주저 앉아버린 모양이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로 주변에 보리수가 많이 자생한다. 보리수는 염주를 만드는 나무로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나무

이기도 하여 보리수가 많이 자생하는 이곳은 정진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용머리에 꽂아놓은 세월묵은 관솔에 훈훈한 미소가 번진다...

 

▲ 용머리 뿔이 자연 친화적이다...

 

▲ 낙서암은 낙서 도인이 수도하였다고 하는 곳인데,  현재는 버려진 절간처럼 적막강산이다. 조용히 돌아 선다..

 

▲ 풍경의 고리가 돌로 만든 고기다..

낙서암에서 나오는 물은 세어서(强).. 이 물로 술을 빚으면 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 낙서암에서 내려가는 거친길을 조심조심 15분여를 내려가면..

▲ 천진암.. 단촐하고 고즈넉하다.

숙종 18년 응화선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 다리를 건너면 운흥사 경내다.

 

▲ 그런데 운흥사라 하지 않고 이정표에는 화장실로 달아 놓았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돌아서 운흥사로 간다.

 

▲ 전남 순천 조계산 선암사 뒷간 같다... 뒷간을 지나 가면...

 

▲ 운흥사 범종루..

운흥사 장독대를 보기위해 위로 올라간다..

 

▲ 운흥사 선화당..

 

운흥사 대웅전..

운흥사(雲興寺)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임진왜란 때는 승병 활동의 근거지였다.

사명대사가 승병 6,0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웠고, 이순신 장군이 수륙양면 작전을 숙의하려 세 차례나 찾은 호국

사찰이다. 임란 때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들은 불태워졌고, 폐허가 된 운흥사는 방치되다가 1651년에 법성 스님에

의해 중창됐다.  운흥사에는 "운흥사 괘불탱" 을 비롯한 문화재가 다수 있다.

괘불은 일제강점기 때 세번이나 일본으로 반출하려다 실패한 문화재이다.

 

▲ 운흥사 영산전..

운흥사에서는 숙종 임금(재위: 1675~1720) 때부터 매년 음력 2월 8일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는 영산제를 여는데,

이 날은 임진왜란 때 승병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가장 많은 수의 승병이 전사한 날이다. 영산제에 사용하는 괘불탱 및

괘는 1730년에 의겸 스님과 그 문하생들이 그렸으며..  2001년 8월 3일 보물 제1317호로 지정되었다.

 

▲ 운흥사 장독대.. 드디어 찾았다.. 가장 한국적인 장독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 운흥사 보제루 밑으로 나간다.

보제루(普濟樓) 글씨는..삼신산인 고산서(三神山人 杲山書).. 쌍계사 방장이신 고산(杲山) 스님의 글씨다.

 

▲ 보제루(普濟樓)는 법당 대신 설법을 하기 위하여 지은 누각으로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다.

 

▲ 운흥사 불이문(不二門)

불이문은 절로 들어가는 3문(三門) 중 절의 본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을 말한다. "불이"는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한다.

글씨는 고산(杲山) 스님의 글씨다.

 

15시 44분 : 운흥사 주차장.

 

▲ 트랭글을 정리하고..

 

17시 01분 : 고성군 하이면의 한식뷔페..

 

역시나 마음가는대로 보인다 하였고...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고 했다.

무언가 변화를 시도해 보고자 애쓰는 덕장 회장님의 마음이 보이고..

회장취임.. 첫 산행의 만차출발이 좋다.

 

한려수도의 풍광은 조금 아쉬웠지만

삼산삼사(三山三寺)의 서로 다른 세가지 독특한 만남이 어우러진.. 멋진산행이었다.

2024년 01월 28일(일).

대견봉/조화봉 : 대구시 달성군.

 

산행코스 : 호텔아젤리아주차장-소재사-염불암삼층석탑-대견봉-조화봉-호텔아젤리아주차장.

산행시작 : 호텔아젤리아주차장  10시 03분.

산행종료 : 호텔아젤리아주차장  15시 56분.

전체거리 : 약 5.76km.

전체시간 : 05시간 52분.

운동시간 : 04시간 58분.

휴식시간 : 00시간 54분.

 

10 : 03  호텔아젤리아주차장  출발.

10 : 14  소재사.

11 : 00  염불암삼층석탑.

12 : 11  대견봉.

12 : 54  조화봉.

15 : 56  호텔아젤리아주차장.

 

09시 54분 : 대구시 달성군 유가읍 호텔아젤리아주차장에서 시원한 재첩국으로 미팅.

 

▲ 깜짝 한파가 많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바람이 차다.. 따끈하고 시원한 재첩국에 속을 풀고..

 

▲ 10시 03분 : 대견봉을 향하여 출발..

 

▲ 10시 14분 : 소재사.

 

▲ 10시 39분 : 대견봉 들머리..

 

▲ 11시 00분 : 염불암지.

 

▲ 오늘도 야회장님이 감동의 수제버거를 짊어지고 왔다...

회원 사랑의 정성으로 빚어내려고 귀한 시간에 밤잠도 설쳤을 것이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감사합니다..

 

▲ 수제버거만큼이나 달콤한 휴식시간이다.

 

▲ 대견봉 900m를 가리키는 이정표.

소재사에서 염불암터를 경유하는 이 코스가 급경사의 난이도가 있지만 대견봉에 가장 빠르게 오를수 있는 코스다.

 

▲ 대견봉 주능선 도착.

 

▲ 주능선 접속후에.. 3~400m를 지날때 까지는..

 

▲ 비교적 완만하고 순하게 이어지다가..

 

▲ 대견봉까지 500m 정도 남은 지점부터는..

 

▲ 암릉과 된비알이 시작된다.

 

▲ 비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숨한번 추스린다...

 

▲ 야등팀이 지나간 바위인데 벌써 4년전이다..

 

▲ 2020년 6월 21일.. 같은 장소에서..

 

▲ 10배줌으로 당겨본 칼바위..

 

▲ 뜻밖의 대박 눈꽃이다....

 

▲ 비슬산 천왕봉..

 

▲ 야대장님의 작품 1..

 

▲ 야대장님의 작품 2..

 

▲ 야대장님의 작품 3..

 

▲ "뽀뽀바위" 라고 해서 안내판 사진과 똑같은 방향에서 찍었는데.. 글쎄 올시다..

 

▲ 비슬산 참꽃군락지..

 

▲ 상감모자 바위..

 

▲ 형제바위..

 

▲ 좌선바위..

 

▲ 기바위..

 

▲ 톱바위..

 

12시 54분 : 조화봉..

 

▲ 오늘의 야등팀 최상의 밥자리다..

 

▲ 관기봉 능선..

 

▲ 경북 청도쪽...

 

▲ 마지막 잎새가 아닌... 눈송이..

 

15시 56분 : 호텔아젤리아주차장...

 

▲ 산행을 종료하고...

 

▲ 뒷풀이장소로...가기위해 콜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송해님" 도 만나 보고...

바쁘게 살다가신 "송해님".. 이제는 저쪽나라에서 편히 쉬셔야 할 때인데..

지자체에서 이렇게 또..불러내어.. 지역 홍보 일을 시키고 있다..

 

▲ 금수암전망대도 당겨 보고...

 

▲ 대견봉도 올려다 보는데... 콜택시가 온다.

거북이 동네로..

 

▲ 구름나그네님의 작품 1..

 

▲ 구름나그네님의 작품 2..

2024년 01월 25일(목).

황산 : 전북 남원시.

 

산행코스 : 동편제마을주차장-황산대첩비-송흥록생가-국악성지-황산-피바위-부층탑-동편제마을주차장.

산행시작 : 동편제마을주차장 10시 43분.

산행종료 : 동편제마을주차장 13시 43분.

전체거리 : 약 7.21km.

전체시간 : 03시간 00분.

운동시간 : 02시간 30분.

휴식시간 : 00시간 30분.

 

10 : 43  동편제마을주차장 출발.

10 : 50  황산대첩비.

10 : 54  송흥록생가.

11 : 07  국악성지.

11 : 54  황산.

12 : 45  서무마을이정표.

13 : 07  피바위.

13 : 17  부층탑.

13 : 43  동편제마을주차장.

 

 10시 43분 :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동편제마을주차장.

 

▲ 북모양의 동편제마을 표시.

 

▲ 초기에는 동편제마을 방문자센터였었는데.. 지금은 베이커리 카페 개업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 국창 박초월선생.

 

▲ 람천을 건너는 대첩교.

 

▲ 람천의 대첩교위에서 바라본 황산..

람천은 운봉읍 세걸산 아래 금샘에서 발원하여.. 황산의 피바위를 지나 경남 산청에서 남강이라는 이름으로 흘러가다가

진주 진양호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 대첩교를 건너면 바로 보이는 황산대첩비 전경.

황산대첩은..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9월 이성계가 사령관으로 있던 고려군이 현 전라북도 남원인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

에서 기세가 절정에 오른 왜구 무리와 싸워 압도적인 대승을 거둔 황산전투는 같은 해 8월 진포대첩, 1376년 홍산대첩과

함께 고려 말 왜구를 격퇴시킨 3대 대첩으로 불린다..

 

황산대첩비로 가기전에 먼저 황산대첩에 대해 알아보고 가자.

1380년 경신년(庚申年). 고려 신우(우왕) 6년 음력 9월. 호남평야에 추수가 막 끝났을 무렵. 일본열도와 대마도, 고려 남해

바다에 산재해 있던 왜구는 500여 척의 대규모 전선(戰船)을 이끌고 군산 앞바다에 이르렀다. 그리고 금강 하구 진포(鎭浦)

에 배를 대고 참혹한 약탈에 들어갔다. 왜구들이 배로 실어 나르다가 흘린 알곡들이 길바닥에 한자나 쌓여 길이 푹신할

정도였다고 한다. 곡창이 유린당하자 고려 황실에서는 급히 최무선을 파견하였다. 최무선은 세계 최초로 기록된 함포사격

을 통해 왜군의 대장선을 비롯하여 수백여 척을 침몰시켰다. 이른바 진포대첩(鎭浦大捷)이다.

진포대첩에서 최무선(崔茂宣)에 의해 격퇴당한 수만의 왜구의 잔당들이 훔친 말을 타고 재빨리 금강을 거슬러 부여와 공주

를 거쳐 지금의 옥천을 유린(蹂躪)하고, 화령(化寧)을 넘어 경상도 상주까지 진출했다. 상주를 점령한 왜군은 승리에 도취

하여 6일 동안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이들은 상주를 떠나 낙동강을 따라 남하했다. 그리고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성주)를

지나 사근내역(沙斤乃驛)과 함양(咸陽)에서 고려 정규군과 큰 전투를 벌였는데 이 치열한 전투에서 고려를 대표하는 9원수

중 2명의 원수와 수백여 명의 군사들이 전사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고려의 남부지역이 초토화 되었다.

그리고 그 왜구를 이끌던 15세의 장군 아지발도(阿只拔都, 아기바트루, 몽골어로 ‘아기 영웅’ 혹은 ‘어린 영웅’이란 뜻)는

백마를 타고 다니며 긴 창을 휘둘러 고려군을 죽음과 공포에 떨게 했다고 한다.

피해 소식을 접한 고려조정은 북방에 있던 이성계의 기마부대를 남원으로 급파한다. 왜구들이 함양에서 인월을 지나 운봉

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운봉에서 남원으로 내려오면 섬진강이고, 다시 함양으로 가면 낙동강을 거쳐 김해까지 당할 형편이

었다. 북방에서 태어나 30여 년간 만주 벌판에서 거란과 여진 그리고 몽골을 상대하느라 잔뼈가 굵은 이성계의 당시 나이

마흔다섯... 이성계의 수천 기마부대는 여원치를 단숨에 넘어 왜구들을 맞아 운봉과 인월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고려군은 기마부대의 특성인 기동력과 활을 이용해 먼저 적당한 거리를 두고 황산 아래 벌판에서 적을 상대했다.

그러던 중 왜장 아지발도가 백마를 타고 내려와 전장을 휘젓고 고려군을 급습하기를 수차례. 전세가 왜구 쪽으로 기울고

아군의 피해가 점점 커졌다.

이성계와 의형제인 이지란은 지금 전적비가 있는 작은 숲을 방패 삼아 황산 중턱에 진을 치고 있던 아지발도를 유인했다.

그리고, 이성계가 먼저 아지발도의 투구 끈을 화살로 맞춰 투구를 떨어트리고, 이지란이 재빨리 활로 아지발도의 머리에

화살을 명중시켰다. 아지발도의 낙마와 전사로 인해 일본군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후퇴하다가 고려의 추격군에 의해

지금의 피바위 인근에서 궤멸당하면서 적군이 통곡하니 "그 소리가 만 마리의 소 울음소리와 같았다" 라고 한다.

이로써 이성계는 황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역성혁명의 발판이 되었다.

 

▲ 황산대첩비로 가기전에 조금 떨어진 "어휘각"을 먼저 찾는다.

 

▲ 어휘각.

어휘각의 바위에는 황산대첩때 왜구를 격멸한 것을 기리고자 태조대왕 이성계를 비롯해 함께 싸운 8원수(元帥)들의 이름

이 새겨졌다고 한다.

 

▲ 어휘각에 새겨진 내용은...

조선 태조 이성계장군이 황산대첩이 본인 혼자만의 공이라기 보다는 여러 사람의 공으로 큰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알리

기 위하여 성지를 내렸고 그 내용을 자연석벽에 새긴 유적인데.. 1945년 1월 17일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일제에 의해서

황산대첩비를 폭파하고 파괴 하였을때.. 이곳의 석벽도 함께 폭파하고 남은 글씨를 정으로 쪼아버려 현재는 잔영만이 남아

있던 것을 1973년에 어휘각을 건립하여 보호 하고 있다.

 

▲ 어휘각내역이 적힌 액자를 당겨 보았다.

춘풍추우가 565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뚜렸했던 글씨가 1945년 1월 17일 새벽에 왜정의 독수로 폭파하고 철정으로 쪼아서

현재 그 잔영만이 남아 있다는 내용이다.. 얼마나 악랄한 놈들인가...

 

▲ 어휘각에서 황산대첩비쪽으로..

 

10시 50분 : 황산대첩비로 들어가는 삼문..

황산대첩비는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그 자리에 세우고 비바람에 보호하기 위하여 1973년에 보호각을 세웠고 1963년

1월21일 유적건조물.. 인물사건.. 역사사건으로 분류되어 28,593㎡ 면적이 국가사적 제104호 남원 황산대첩비지라는 명칭

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는 곳이다.

 

▲ 황산대첩기념비.

황산대첩비가 일제에 의해서 부셔져서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던 것을 한국전쟁이 끝난후 황산대첩비 탁본을 그대로 복원

하여 1957년에 비문은 김귀영이 짓고 송인이 글을 쓰고 남응운이 전액을 만들고박광옥이 세우면서 황산대첩에 관한

사실과 비문을 세우게 된 목적을 새겼다.

 

▲ 파비각.

일제의 만행에 의해서 부서진 황산대첩비 원본은 1977년에 보호각을 세우고 파비각 이라는 현판을 써서 보호하고 있어서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침탈하고 일제강점기에 또한번 조선을 침탈하면서 자신들의 치욕과 관련된 흔적을 지우고자 했던

일제의 만행을 보여주고 있다.

 

▲ 황산대첩비는 일제강정기에 우리나라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다양한 조선의 유적들을 파괴하면서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황산대첩비도 파괴하도록 명령이 하달되었고 황산대첩비는 글씨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정으로 쪼아지고 대형망치로

파괴하여 황산 람천변에 버려지게 되었다.

 

▲ 황산대첩비각.

지금의 대첩비 비석은 1957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1973년에 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비전.. 홍살문.. 삼문.. 담장.. 그리고 부속건물들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 복원된 황산대첩비.

다행히 원본을 세웠을 당시 탁본을 하여 보관을 잘해 놓았기 때문에 이것을 바탕으로 1957년 다시 복원할 수 있었다.

복원한 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 모양의 좌대는 원본 그대로인데 그 늠름한 모습만 보아도 이 비석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옆에 가만히 서 있어도 그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고.. 위엄이 있는 좌대다.

 

▲ 황산대첩사적비각.

고종19년 1882년에 운봉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비각비가 황산대첩비와 함께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황상대첩비

를 복원하고 그다음해인 1958년에 황산대첩비사적비 라는 명칭으로 복원되어 있다.

 

▲ 황산대첩비와 가까운 동편제 마을의 가왕 송흥록의 생가를 찾는다..

 

10시 53분가왕 송흥록의 생가 입구.

 

▲ 동편제의 가락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 가왕 송흥록..

그는 200년 판소리 역사 속의 허리 역할을 단단하게 해낸 인물로 꼽힌다.

남원 운봉 비전마을이 배출한 가왕.. 송흥록(宋興祿. 1801~1863)선생이 어떤 분이고,어떤 위상을 가지는가 말하면..

그는 조선 8대 명창 중 한분으로 꼽히는데.. 소리로는 그중에서도 최고라고들 한다.

판소리의 주요 유파 중 하나인 동편제를 창시하였고, 판소리계의 중시조(中始祖)라고 불린다.

 

▲ 가왕 송흥록의 생가.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비전마을에는 동편제의 태자리가 있다.

서편제와 더불어 판소리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동편제가 이곳에서 첫 소리를 냈다. 동편제 창시자로서 판소리계에서 최고의

칭호인 가왕으로 불리는 송흥록 명창이 이곳 비전마을에서 태어났다.

 

▲ 국창 박초월(朴初月,1917~1983)의 생가.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남원에서 성장하며 판소리를 익힌곳이기에.. 아마도 순천의 생가를 재현해 놓은듯...

국창 박초월 여사는 17세의 나이로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우승하며 판소리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그분의 스승이

명창 송만갑(宋萬甲,1866~1939)선생이었다. 송만갑 명창의 경우.. 그는 동편제를 이끄는 판소리 명문가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가왕 송흥록 선생의 아우되시는 명창 송광록 선생이시고, 아버지되시는 분이 또 명창 송우룡

선생이었다.

 

판소리에 대해 잘은 몰라도.. 판소리의 유파는 크게 동편제와 서편제, 중고제로 나뉜다.

중고제의 경우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을 기반으로 했고..

동편제와 서편제는 전라도 지역.. 섬진강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으로 경계짓는다.

동편제가 남성적이고 호방하다면.. 서편제는 여성적이고, 애절하고 한(恨)서린 목소리라고 하고..

중고제는 동편제와 서편제 사이 중간이라고들 한다.

 

▲ 가왕 송흥록선생과 국창 박초월선생을 배출한 비전마을을 나와서...

 

▲ 마을길을 따라 황산을 찾아 간다.

 

▲ 비전마을 동구밖의 마을수호목과 정자 뒤쪽으로 보이는 황산과 마주하며 간다..

 

▲ 며칠사이에 영하로 뚝 떨어지더니 오늘 낮부터 조금씩 풀린다고 한다..

영하 6도~2도/c.. 날씨는 맑고.. 바람은 3~4m/s 다.

 

▲ 황산의 등산로는.. 국악의 성지를 경유하게 된다..

 

11시 03분 : 국악의 성지 입구에서 안내도를 살펴보고..

 

▲ 가야금 형상의 가로등이 이쁘다.

 

▲ 국악한마당 광장.

 

▲ 운상문(외삼문).. 운상원은.. 운봉의 옛 이름이다.

 

▲ 낙성사.

국악은 세계가 인정한 문화유산이며, 우리민족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동편제 소리의 발상지이며 춘향가 흥부가의 배경지로서 국악의 역사가 보존 전승되어 온 국악 본고장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판소리의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록에 따른 국악의 보존.. 전승..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여 전통문화의

세계화를 도모하기 위해 바로 이곳 남원 운봉에 "국악의 성지"가 설립된 것이다...  -- 국악의 성지 홈피에서 발췌...--

 

▲ 납골묘..

 

▲ 가왕 송흥록선생의 묘..

 

▲ 악성 옥보고선생의 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운상원)은 신라 말 악성 옥보고가 50년 동안 거문고를 배워 익히고 스스로 거문고를 위한 새로운

가락 30곡을 지었으며 신라 땅에 거문고의 전통을 뿌리내리도록 큰 공헌을 하였다.

 

▲ 내려다 본 운봉읍 전경..

멀리 백두대간상의 고리봉 수정봉이 이어진다.

 

▲ 참으로 아름다운곳에 자리 잡았다..

 

▲ 국악한마당 광장..

 

▲ 국악 공연을 할때... 한번쯤은 와볼만한 곳이다..

 

▲ 소리길 표시판을 따라서..

 

▲ 국악의 성지 전시관..국악성지는 판소리와 농악 등 국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곳으로 판소리, 농악, 기악, 전통

무용 등 4개 전시관에 400여점의 유품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며.. 국악 체험장, 수련장을 비롯, 소리꾼들의 득음을 돕기

위해 동굴 모양으로 지어진 독공장(3개)도 마련되어 있다.

 

11시 15분 : 국악의 성지를 지나.. 본격적인 황산 산행 들머리..

 

▲ 미산정...

 

국창 박초월 선생의 묘..

그녀의 아드님 되시는 분이 명창 조통달 선생이시고..

손자는 팔세토 창법의 대가, 가성의 명인.. 가수 조관우씨로 문화예술계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 고남산.. 백두대간이 지나간다.

고남산은 태조봉(太祖峯). 고조봉(高祖峯). 제왕봉(帝王峯). 적산(赤山). 일광산(日光山) 등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태조봉..고조봉..제왕봉 등으로 불리는 것은 모두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성계는 이번 싸움이 고려의 국운을 좌우하는 만큼, 고남산 정상에 올라 석축으로 제단을 쌓고 팔도 산신을 불러 경건하게

필승의 산신제를 올렸다. 지금도 그 때 쌓았던 석축 제단의 흔적이 지금도 분명하게 남아 있다.

고남산 아래 마을을 권포리 라고 부른다. 이 역시 황산대첩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당시 전승 기도를 올릴 때 이곳에 주둔

하던 병마의 식수로 쓰기 위해 큰 샘을 조성하였는데, 대첩이 끝나자 샘 주변에 자연스럽게 마을을 이루었다.

태조가 조선의 왕업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고남산을 일명 제왕봉이라 하고, 마을 이름은 권력을 편다는 의미로 권포리

(權佈里)라 지었다고 한다.

 

▲ 가왕 송흥록 생가의 비전마을이 보이고 황산대첩비가 화수산 숲에 가려져 있다.

 

▲ 서릿발이 얼마나 깊은지 잘못 밟으면 10cm정도는 푹푹 빠진다.

 

▲ 등산로 정비를 최근에 한것 같이 쌩쌩한 통나무계단이다..

 

▲ 솔숲사이로 덕두산 바래봉이 그림이다.

 

▲ 이정표도 새것이다..

 

▲ 등산로 정비를 잘해 놓았다 했더니..겨우  20m지나온 지점에 이정표가 또 나타난다..

 

▲ 황산 정상쪽 진행방향으로 서북간 쪽으로 조망이 시원하다.

 

남서쪽의 운봉읍 방향..

 

▲ 바위 협곡같은 안부를 넘어서고..

 

11시 46분 : 군화동 갈림길..

군화동은 1961년 대홍수때 소멸된 화수리 이재민들의 가옥을 군인들이 지었는데...

마을 이름을 "군인들이 만들어준 화수마을"이라는 뜻으로 "군화동" 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덕두산과 바래봉..

 

11시 54분 : 황산 정상..

 

▲ 바래봉 아래의 옥계저수지에 윤슬이 보석처럼 아름답다.

 

▲ 운봉읍 방향의 백두대간 수정봉..

운봉읍내와 들판이 보인다. 500m대의 고원지대로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지 이다.

 

▲ 당겨 본 지리산 천왕봉.. 황산에서의 조망이 너무 좋다.

 

▲ 서룡산 아래 인월면...

남원시 인월면은 고려 우왕6년(1380년) 삼도 도원수 이성계 장군이 그믐날 기도를 통해 보름달을 끌어올려(引月) 훤한

달빛아래서 왜장 아지발도를 격퇴한 황산대첩 전승지로서의 자긍심을 가진 곳이다.

 

▲ 조망이 너무 좋은 황산에서..

 

▲ 등산로 정비는 잘 되어 있는데.. 찾는이가 없는지 발자욱이 없다..

 

▲ 무슨동물인지 모르지만.. 발자국만 남겨놓고... 좌측 계곡으로 사라진다.

 

▲ 흔적 없는 능선길을 따라 가는데..

 

▲ 조금전 같은 과의 동물인지..

 

▲ 한참을 앞서가던 발자욱은 어디선가 다시 사라지고..

 

12시 27분 : 바람끼 없고 햇살만 가득한 작은 봉우리에서.. 민생고의 점찍기를 하고..

 

▲ 대봉산 천왕봉과 백운산이 구비구비 골짜기마다 민초들의 삶을 보듬고 있다..

 

12시 45분 : 서무마을 갈림길..

 

▲ 직진하면 정봉이 나오는데.. 일행중에 발이 불편한 사람이 있어.. 여기서 하산이다.

"정봉"은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 인월역에 진을 치고 있던 아지발도의 왜구와 접전을 벌일 때, 이셩계가 이끄는

고려 토벌군이 먼저 이곳 봉우리에 올라 적정을 살피며 군사들에게 솥(정鼎)을 걸어 밥을 짓도록 했다는데서 유래한다.

지금도 땅을 파면 검정 숯이 나온다고 한다.

 

▲ 동물생태 감지카메라..

지리산권역이라 반달곰의 활동범위를 관찰하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 왼쪽으로 가면 서무마을로 가는 길인데.. 우리는 차량 회수를 위해 오른쪽으로 간다..

 

▲ 24번 국도를 따라서 오른쪽으로..

 

13시 07분 : 람천의 피바위..

이곳은 이성계가 활을 쏘아 "달을 끌어당겨 놓고 싸웠다"고 해서 인월면(引月面)이다.

달을 끌어다 환하게 밝혀놓고 이성계는 화살로 아지발도의 투구끈을 맞히고 이지란은 아지발도의 머리를 쏘았다..

아지발도는 개울가에서 피를 흘리다 죽었다. 그 핏자국이 아직도 개울가 바위에 남아 있어서 그 바위 이름이 "피바위" 다.

당시 전사한 왜구의 피로 냇물이 붉게 물들어 6~7일 동안이나 핏빛이 가시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릇에 물을 담아 맑아지길 기다렸다가 한참만에야 물을 마실 정도였다.

당초 왜구의 숫자가 고려군보다 열 배나 많았으나, 살아서 지리산으로 도망간 왜구는 70여 명에 불과했다.

고려군은 왜구의 말 1,600여 필과 엄청난 수의 병기를 포획했다.

 

▲ 가까이 당겨 본 람천의 피바위.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이쪽지역의 바위들이 철분 성질이 있어서 바위가 붉게 물들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건 저렇건.. 이성계가 적의 장수 아지발도를 죽임으로써 승리를 한 곳임에 초점을두고 보아야 할것 같다.

 

▲ 동경대(同庚坮)..

생뚱맞게 길가의 바위에 각자되어 있는 글이 보여서 읽어 본다.. 

동경(同庚)은 같은 해에 태어난 같은 나이라는 뜻으로 흔히 동갑(同甲)을 말한다. 보통 인연이 아니다.

내용을 읽어보면 단기4224년(서기1891년) 신묘년 3월 26일 오시 생(午時 生)인 <고영환>과 <정래순>이

단기 4294년(서기1961년) 신축년 3월 26일에 글을 새겼다.. 다시 말하면... 같은 해의 한날 한시에 태어난 두사람이

나이 70살이 되던 해에 바위에 글을 새겼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돈대 대(坮)는 성벽위의 망루같은 곳을 말하는데...

두사람이 같이 이 바위 위에 올라서서 피바위를 보았던 것을 기념하여 바위에 새긴 모양이다..

 

▲ 황산대첩 피바위가.. 도로 건너에 있다고 가리키고 있다.

 

▲ 피바위를 보려면 길을 무단횡단해야 되는데.. 이곳을 지나는 차들이 완전 아우토반 무제한 질주다..

노견으로 걷는 내가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속도를 낸다... 위험하다..

 

▲ 그래서 조심조심 잘보고 잽싸게 건너 갔다가 건너 온다..안전제일...ㅎㅎ~~

 

▲ 무얼하는 건물인고?..

남원뜰 노인복지센터라고 하는데.. 휴업중인것 같다..

 

▲ 24번 국도에서 황산정(국궁장)이 있는 군화동 마을로 간다..

 

▲ 여기서부터 지리산 둘레길 2구간과 접속 된다.. 버스대기장이 마치 케이블카를 닮았다.

 

13시 17분 : 부층탑(원명대선사 부도탑).

원명(圓明, 1911-1992)스님의 속명은 종범(終範)으로 1911년 경북 청도에서 김해 김씨 재순거사와 방봉선 보살의 슬하

에서 태어났다.  14세 되던 해에 1925년 청도보통학교 졸업 후 출가하고 지리산 실상사에서 당대의 대선사였던 

수월(水月)스님의 상좌인 지담(智潭)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29년 춘담(春潭)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이어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이후 원명스님은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 등에서 수행정진하다 비로봉에 올라 10년 동안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10년정진을 거듭한 끝에 대오를 이루었다.

6.25동란으로 금강산을 하산해 제주도 한라산과 거제도 실상사에서 안거하다가.. 1954년 전북 남원 청룡사에서 포교에 

힘썼고.. 1960년 현 원명사의 전신인 금불암(金佛庵)을 인수해 개명하고 수행에 힘썼다.

1965년 상좌인 영봉스님에게 원명사를 맡기고 다시 남원에서 정진하다가 봉림선원을 세워 안거했다. 

평생 쌀가루에 솔잎을 섞어 생식으로 일관하였으며 바랑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바람처럼 주유하며 오로지 참선과 중생

교화에 진력했다. 1992년 11월 11일, “고요한 즉 죽은 시체요, 움직인 즉 망상이라. 고요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이 물건이

무엇인고?”라는 열반송을 남기고 좌탈입망했다. 세수 82세, 법납 68세. 법구는 황산벌에서 숨을 거둔 넋을 위로하고자

오랫동안 수행처로 삼아온 남원 인월땅에 안치되었다.

 

▲ 부층탑(원명대선사 = 부처님 부도탑).

부층탑안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등신불이 안치되어 있다.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세계 불교계에서 72번째로

부처님으로 공인받으신 분이다. 좌탈입망하셨고남겨진 육신에 금박을 입혀 탑안에 안치했다. 그분을 존경하는 수행자들과

신도들이 지나 가다가 향을 피우고 참배를 하고 간다.기감이 예민하신 분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해보면 맑고 강한

기운이 몸에 들어오는 걸 느낄수 있다고 한다..

 

▲ 앞면에는.. 남무대각세존석가모니불.. 부처님이라는 말이다.

 

▲ 뒷면에는 어렵고도 난해한 망상게다. 이 뭣고???~..

 

▲ 지리산 둘레길2구간 쉼터.

 

▲ 오덕준 장군 공적기념비.

오덕준(吳德俊)은 1921년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소덕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 간사이대학(關西大學)에서 주경야독하여 1944년에 수료하였다.

학도병으로 일본 본토 주둔 부대인 제48 부대에 배치되어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해방을 맞이 하였다.

해방 후 초창기 국군에 입대하였다. 1948년 10월에 광주 주둔 제5 여단 참모장으로 재직하면서 여순 사건 가담자들을 색출

하는 데 힘을 쏟았다.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오덕준은 전주.. 임실.. 남원 지구 전투, 거창 지구 전투, 양양-서림 지구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제9 사단장, 제11 사단장으로 복무하였다.

 

▲ 군화동 마을.

군인들이 만든 마을이라 하여 군화(軍花)마을이다.

 

▲ 람천을 따라가는 지리산둘레길 2구간...

 

▲ 이 구간은 여름에는 피해야 할듯.. 그늘이 적어서 힘들것 같다.

 

▲ 람천 벚꽃길은..

이곳 남원읍 북천마을이 고향인 육군 간호장교 출신의 박말순여사님이 지리산둘레길2구간이 지나가는 람천 뚝방길에

기증했다는 125그루의 왕벗꽃 나무다... 벚꽃이 피는 봄날이면 좋을것 같다.

 

▲ 다시 비전마을을 지나고..

 

▲ 황산대첩비 가는길..

아침에 그냥 건너뛴 동료에게 소개하고자.. 다시 간다.

 

▲ 황산대첩비를 나서며..

역사의 현장에 와서 <한국사에서의 왜구> 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고 가자.

왜구(倭寇)는 전근대에 활동했던 일본에 근거지를 둔 해적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바다를 따라 가까운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에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다.

왜구가 주변국에 약탈을 하는 해적국에 된데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째.. 고대 일본은 농사지을 땅이 적은데 도래인으로

인한 인구증가는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할 약탈 경제가 발달했다는 설이다… 둘째는 지진해일로 인해 경제기반이

무너지자 해안가에 거주하던 이들이 약탈에 뛰어들면서 왜구가 발생했다는 견해도 있다.

왜구(倭寇)라는 한자어 표현은 414년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에서 '왜구대궤(倭寇大潰, 왜구를 크게 궤멸시켰다)'

라는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고려사에서는 고종 10년(1223년) '왜가 김해(금주)를 침략했다'는 '왜구금주(倭寇金州)'라

는 표현이 나온다. 한반도는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땅이기에 왜구가 한국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신라 박혁거세 즉위 8년에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유구하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0년이다

서기 11년 남해 차차웅 때에도 왜구의 침입 기록이 있는 등 고대부터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음을 알수 있다.

신라 역대 왕들의 삼국사기 기록을 뒤져보면, 왜구의 침략에 대한 기록이 없는 왕보다 있는 왕이 더 많을 정도다. 게다가

신라의 수도 경주시가 동해 바다와 그 건너 일본 열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지리적 조건상 일단 상륙을 허용하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소지가 컸고, 실제로 왜군에게 수도가 포위당한 적도 적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왜구의 침입 기록에 의하면… 신라 초대 혁거세 거서간 8년(기원전 50년) - 왜인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라는 기록을 시작으로

21대 소지 마립간 22년(500년)까지 - 22년 봄 3월,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라는 기록까지 29년동안 한해도

침략을 당하지 않은 해가 없을 정도다. 이후 통일신라가 되면서 정세가 안정된 뒤에는 왜구의 침략이 줄었다.

 

▲ 고려 말부터는 왜구들이 특히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였는데 한반도 해안 지역은 동서남을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이 약탈

대상이었다.  심지어는 해안가 근처가 아닌 충주, 청주, 단양같은 완전히 내륙에 있는 곳도 왜구에게 털린 기록이 있었을

정도로 상황이 매우 좋지 못했다. 약탈이 극에 달했을 때는 관료들의 녹봉도 못줬을 정도. 그래서 이러한 왜구들을 토벌

하기 위해 고려군은 지속적으로 전투를 치렀으나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며 사실상 무장 해제 상태에 놓였던 고려군으로서

는 대응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고려 말부터 시작된 왜구는 이미 해적을 넘어서 갑주를 갖추고 정확한 지휘 계통을

갖춘 군대 수준이었다. 공민왕 20년동안에만 100여회 넘게 침략했으며 우왕 14년동안에는 378회나 쳐들어 왔다.

 

▲ 1350년 이후 왜구의 고려 침입 상황도.

1350년~1392년까지 40여년동안 무려 591회나 침략을 일삼았던 것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이때 수도를 강원도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1392년 조선건국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노략질)은 계속 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건국한 후에도 왜구들의 침입과 약탈은 끊이지 않았다.

1396년 문하우정승 김사형의 지휘 아래 대마도 정벌이 진행되었고, 1419년 세종 초에 상왕 태종과 이종무의 지휘 하에

다시 대마도 정벌이 이뤄져 왜구에게 큰 타격을 주었지만, 왜구들의 반격이 거세 완전히 토벌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 공격은 제법 효과를 봐서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통상을 요청하자 조선 조정은 왜구를 회유하려는 목적으로

삼포(부산포, 내이포, 염포)를 개방하고 왜관을 설치했다. 그리고 명나라에 간 왜구들도 몰살당한데다 일본 내부에서도

무로마치 막부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면서 해적인 왜구들을 토벌하며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약 50여년 간에 걸친 왜구의

활동은 잠잠해진다. 1589년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태합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구에 대한 전격적인 금지령

을 내렸다. 물론 이 규정은 지켜지지 않았고..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일본 수군에 편입되어 조선을 노략질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 사령관이었던 구키 요시타카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고, 에도 막부 수립 이후 다시 금했다. 또한 천주교 박해의 일환으로 쇄국정책을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당연히 왜구도 혹독한 탄압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 왜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3시 43분 : 동편제마을 주차장...

 

▲ 역사탐방.. 황산대첩비.. 피바위 길..

길따라 소리따라 걸었던 동편제 길.. 우리나라 공인 부처님의 길...

짧았지만 황산 정상에서의 일망무제한 지리산 조망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2024년 01월 18일(목).

태백산국립공원 : 강원 태백시.

 

산행코스 : 유일사주차장-유일사쉼터-장군봉-천제단-문수봉-소문수봉-당골제1주차장.

산행시작 : 유일사주차장 09시 50분.

산행종료 : 당골 1주차장 14시 34분.

전체거리 : 약 10.89km.

전체시간 : 04시간 43분.

운동시간 : 04시간 16분.

휴식시간 : 00시간 27분.

 

09 : 50  유일사주차장 출발.

10 : 51  유일사 쉼터.

11 : 36  장군봉.

11 : 46  천제단.

12 : 58  문수봉.

13 : 12  소문수봉.

14 : 34  당골1주차장.

 

09시 44분 : 태백시 유일사주차장 도착... 그런데.. 눈(雪)이 안보인다..

겨울에 찾아 온 태백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새하얀 설국(雪國)을 보여 주었기에 오늘도 기대를 잔뜩하고 왔는데..

장군봉과 문수봉은 어떤 모습을 보여 주실지.. 

 

09시 50분 : 유일사 탐방로 출발.

민족의 영산 태백산.. 그 신비로움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산이좋아산악회 회장님.. 산꾼의 포스(force)가 멋지십니다.

 

▲ 오늘의 태백산의 날씨는 종일 흐리거나 눈소식이 있고...

기온은 2도~6도/c로 영상이지만.. 바람이 3~4m/s로 정상쪽의 체감온도는 낮아질것으로 예상된다.

 

▲ 태백산 들머리인 혈동마을 전경..

 

▲ 바닥은 얼어 있지만.. 아직까지는 바람끼 1도 없기에 춥지 않아서 걷기에 좋은 임도를 따라..

 

▲ 태백사를 지나서..

 

▲ 만나게 되는 이정표에서 유일사 쉼터까지의 편안한 임도길을 버리고.. 사길령길을 따른다...

 

▲ 사길령길은 초반에는 전나무숲길이 완만하게 이어지다가...

 

능선에 가까워 질수록 지그재그의 된비알을 쉬엄쉬엄 오르면 백두대간 주능선에 올라선다.

 

10시 30분 : 백두대간 주능선.. 오른쪽은 사길령.. 왼쪽은 천제단 길이다.

여기서부터 부쇠봉까지가 백두대간 구간이다.

 

▲ 유일사로 가는 백두대간 주능선의 안개구름은 더욱 짙어지고.. 영상의 날씨에 일부는 녹아 내린다.

 

▲ 겨울산에 다니다 보면.. 나무의 밑둥치 부근에는 눈이 녹아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이유가 뭘까..

나무꼭대기에 쌓인 눈이 햇빛을 받아 녹으면서 물이 되어 줄기를 타고 내려와서 주위보다 더욱 빨리 녹게 되는 것이다.

 

▲ 유일사 뒷산으로 추측되는 봉우리를 올라가다가..

 

▲ 바위봉우리에 석탑이 보여서 올라갔더니 철책안으로 삼층석탑이 서있다.

기단은 시멘트로 되어 있고.. 석탑부는 석공이 부처님의 정성으로 한땀한땀 정을 쪼아 만든게 아니고..

기계가공으로 매끈하게 가공되어 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석탑이다..

 

10시 51분 : 유일사 쉼터.

 

▲ 바로 아래가 유일사다.

태백지역에서 유일한 비구니 사찰이기도 하다.

 

▲ 사찰순례는 생략하고.. 입구에 세워진 안내문을 살펴본다.

신령스러운 태백산에 1935년경 비구니 순일이라는 스님이 기도를 하면서 지내다가, 지리적으로 너무 험준하고 열악하여 떠나고, 터만 남은 자리에 1959년 한 불자(李小仙)가 영산의 정기를 받고 백일기도 중 꿈에 원효대사와 의상 스님이 바위

밑에 앉아 수도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이곳에 다시 불사를 일으켜 유일사라 하였다...라는 내용이다.

 

한데... 내용중에..

원효는 "대사"라 하고.. 의상은 "스님"이라 하였다.. 두분다 유명하신분들이 아니신가?.. 왜그렇게 표현하였을까?..

 

▲ 불자가 아니니.. 접어두고.. 다시 천제단길을 따라 간다.

 

▲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몽환적인 연출이 이어진다..

 

▲ 눈을 쓰고 있어야할 주목인데.. 아쉽지만..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다..

 

▲ 눈꽃을 안주시려면 시원한 조망을 주시던지..

 

▲ 몽환적인 분위기속에서 인증샷을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오늘 태백산행의 컨셉은 "심안(心眼)"이다. 가까운곳에 있는 소중함을 찾는 하루를 만들자..

 

▲ 언제나 큰 나무만 보려고 했다.. 스스로 천년의 큰 나무로 키우기위해 그속의 작은 아픔이 있음은 보지 못했다.

 

▲ 반생 반사..

 

▲ 살아 천년.. 죽어 천년..

 

11시 36분 : 태백산 장군봉의 천제단(장군단). 네모로 쌓은 제단이다.

 

▲ 장군봉의 장군단..

태백산은 옛부터 "한밝뫼" 라고 불리며 신령시 되어 왔던 산이다.

장군단 안에는 3개의 입석이 있는데.. 환인(桓因)과 그 아들 환웅(桓雄), 그리고 환웅의 아들인 단군(檀君)이 아닐런지..

 

▲ 조금 아래쪽에 있는 장군봉 정상석을 찾아간다.

 

▲ 천제단(천왕단) 가는길..

 

▲ 사통팔달.. 거침없는 조망을 할수있는 곳인데.. 마음의 눈으로 주변을 머리속에 떠올려본다.

 

▲ 천제단(천왕단) 가는길..

 

11시 46분 : 천제단(천왕단).. 둥글게 쌓은 제단이다.

 

▲ 태백산 영봉의 천제단(천왕단).

태백산 천제단은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제단이다.

천제단은 태백산 정상에 있는 천왕단을 중심으로 한 줄로 놓여 있다. 천왕단의 북쪽에 장군단이 있고 천왕단의 남쪽에 하단

이 있다.  이 세개를 합쳐서 "태백산 천제단" 이라고 한다.

제단을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태백산은 예로부터 신령한 산으로 섬겨져 제천의식의 장소가 되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사료에서 부족국가 시대로부터 이곳에서 천제를 지냈다고 기록하는 것으로 미루어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개천절에 나라의 태평과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 해마다 열리는 강원도민체전의 성화에 불을 붙이는 장소이기도 하다.

 

▲ 태백산 영봉의 천제단(천왕단). 한배검은 단군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 태백산 영봉 천제단(천왕단)은..

"환단고기"에 의하면.. 태백산정의 천제단(天祭壇)은 ‘5세 단군 구을(丘乙) 임술 원년에 태백산에 천제단을 축조하라

명하고 사자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에는 ‘일성왕 5년 10월에 왕이 친히 태백산에

올라 천제를 올렸다’라는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도 ‘태백산은 신라 때 북악으로, 중사(中祀)의 제를 올리던 곳’

이라 되어 있다. 여러 기록이 전할 정도로 예로부터 신령스럽게 받들던 곳이다. 정상부에 장군단, 천왕단, 하단으로 나뉜

제단과, 단종비각, 망경사(망경대) 등이 모두 무속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들이다.

 

▲ 태백산 정상석.

태백산은 1989년 5월 13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6년 우리나라 2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전체면적은 70.052㎢이며 천제단이 있는 영봉(1,560m)을 중심으로 북쪽에 장군봉.. 동쪽에 문수봉.. 부쇠봉.. 등으로

이뤄져 있으며, 최고봉은 함백산(1,572m)이다. 태백산은 수천 년간 제천의식을 지내던 천제단과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

등 풍부한 문화자원과 야생화 군락지인 금대봉~대덕산 구간, 만항재, 장군봉 주변의 주목 군락지, 세계 최남단 열목어

서식지인 백천계곡 등 다양하고 뛰어난 생태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 태백산 천제단과 묘한 대조를 이루는 눈사람과 작별을 하고...

 

▲ 망경대 갈림길... 여기서 문수봉을 경유하여 하산할 것이다.

여기서 만경대를 경유하는 당골 하산길은 4.4km.. 문수봉을 경유하는 당골 하산길은 5.4km다.. 1km차이다..

 

▲ 3개의 천제단중에 하나인 제일 아래쪽의 하단.

 

12시 13분 : 백두대간 갈림길...

 

태백의 주목중에 최상의 주목이다..

살아 천년을 살고 죽어서도 천년을 버틴다는 주목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생과 사를 같이 하며.. 조용히 붙박이로 지키고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오고가는 사람들을 보았을까?..

 

▲ 속을 내어주고도 어찌 저리도 푸른잎을 피워 내는지.. 경이롭다.

 

▲ 부쇠봉 갈림길.. 100m다.. 당근 올라갈려고 보니..

 

▲ 선답자의 발자국이 없다.. 딱 1년전에 올라 갔던곳이라 그냥 통과다..

 

▲ 그래도 아쉬움에 작년.. 2023년 1월 8일에 올랐던 부쇠봉이다.

부쇠봉은 주변에 부싯돌로 쓰이는 돌이 많아서 부쇠봉으로 불린다 하고.. 또다른 일설에는 부쇠봉의 또다른 이름은 단군의

아들 부소왕자의 이름을 따서 부소봉이라고도 한다. 부소왕자는 형벌을 주관하는 관직을 맡았었다고 한다.

 

▲ 그리고...부쇠봉에서 바라본.. 달바위봉 조망은 완전 압권이었다...

 

▲ 부쇠봉에서 문수봉으로 가는 내림길에 그토록 아쉬워 했던 눈꽃 상고대가 피기 시작한다..

 

▲ 자작나무과의 사스레숲이 몽환적이고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12시 44분 : 당골광장 탈출로...

문수봉에서도 당골 하산길을 만나게 되기에 문수봉으로 직진이다.

 

▲ 바로 이어서 현월사가 있는 백천계곡 갈림길에서.. 계속 직진이다.

 

▲ 돌의자..

어디에 쓰였던 물건인고...

 

▲ 이끼에 붙은 얼음이 올챙이처럼 보인다...

 

12시 58분 : 문수봉 안착...

 

▲ "문수보살"은 불교에서 지혜와 깨달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보살이다.

 

눈꽃을 보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인간의 작은 간사함을 어여삐 여기시고.. 문수봉 오는길에 상고대를 보여주신 것은

지혜와 깨달음을 깨우쳐 주신 문수보살님의 은혜로움이다.. 불자는 아니지만 두손모아 합장 합니다~~..

 

▲ 이제.. 500m의 소문수봉으로...

 

▲ 13시 10분 : 당골 탈출로..

소문수봉을 100m 놓아두고 탈출은 아니다.. 소문수봉을 지나서 탈출할 것이다.

 

13시 12분 : 소문수봉..

 

▲ 소문수봉의 너덜겅도 문수봉 못지 않다.

 

▲ 소문수봉에서 3.5km의 당골방향으로..

 

▲ 소문수봉 내림길에도 사스레숲이 동화나라를 만든다.

 

13시 27분 : 당골광장으로..

 

▲ 소문수봉에서 거제수나무의 사열을 받는 내림길은 다소 편안한 내림이다..

 

▲ 인생에 질곡이 없는 삶이 어디 있으리오만..

약해진 다리를 버팅기다가 봄이면.. 새삶의 물오름짓을 할것이다.. 대단하다 못해 경외스럽다.

 

▲ 문수봉 하산길과 소문수봉 하산길이 만나는 곳이다.. 두코스 다 1.8km로 똑같다..

 

▲ 얼음폭포 밑으로 물흐름소리가 들린다.. 소살소살~~..

"소살소살"은 소설 "혼불" 을 쓴 작가 최명희선생께서 3일 밤낮으로 고심하여 표현한 의성어 라고 한다.

겨우내 얼어 붙었던 계곡물이 녹아 얼음장 밑을 흘러가는 소리... 라고 한다.

 

소살~소살~..

봄이 오는 소리..

새싹이 돋는 소리..

희망이 재잘 거리는 소리다..

 

▲ 무속인들의 기도터가 아닐까..

 

▲ 쭉쭉빵빵.. 늘씬 날씬..

 

14시 15분 : 당골광장의 눈 블록..

31회 태백눈축제가 2024년 01월 20일(토) 당골광장에서 전국 대학생 눈조각 경연대회를 시작으로 2월 4일까지 다양한

체험을 겸한 각종행사가 개최된다.

 

▲ 당골광장에서 주차장으로..

 

▲ 스카이로드.

 

▲ 당골제1주차장.

 

▲ 14시 34분 : 당골탐방지원센터 산행 종료.

 

▲ 태백산등로중에 가장 편하게 오를수있는 코스가 유일사 코스다.. 10.89km거리를 평균속도 2.5km/h로 걸었다.

 

15시 38분 : 태백시 황지못 인근의 물닭갈비 집...

 

▲ 물닭갈비는..

양념한 닭고기와 각종 야채를 육수에 넣고 끓여서 먹는 태백식 닭갈비다.

 

▲ 이렇게 물을 넣어 끓이는 방식은 태백에서 유래된 것으로, 옛날 탄광산업이 번창할 때 광부들이 하루의 피로를 풀고

향수를 달래던 음식으로 얼큰하고 담백한 국물과 쫄깃한 닭갈비를 즐겨 먹었던 전통이 태백의 전통음식이 되었다.

 

▲ 산이좋아산악회 회장님의 건배..

 

▲ 이어서.. 김고문님의 건배..

 

선창.. 고문님 : 이기머꼬!~~..

후창.. 단체로 : 술이다!~~..

 

선창.. 고문님 : 아이다.. 보약이다!~~..ㅋㅋ

후창.. 단체로 : 마시자!~~... ㅎㅎㅎ~...

 

▲ 웃음주신 김 고문님..

이렇게 웃어서 즐겁고.. 즐거워서 웃는 "산이좋아" 인것 같습니다.

 

가시거리가 50m도 안되는 몽환적인 길을.. 믿음으로 걸었던 장군봉 문수봉의 종주길 위에서.

인생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듯이.. 오늘 걸었던 길은 내가 선택한 나만의 긍정의 길이었고..

내가 나에게 박수 쳐주고 싶은 길을 걸었고..

덕분에.. 너무나 좋은 하루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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