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9월 05일(목).
지리산국립공원 대성골 : 경남 산청군/하동군.
▣산행코스 : 거림계곡주차장-거림탐방지원센터-천팔교-세석고원갈림길-음양수샘터-대성골-의신마을.
▣산행시작 : 거림계곡주차장 10시 20분.
▣산행종료 : 의신마을 선학정 17시 14분.
▣전체거리 : 약14.3km.
▣전체시간 : 06시간 43분.
▣운동시간 : 05시간 52분.
▣휴식시간 : 00시간 51분.
10 : 20 거림계곡주차장.
10 : 28 거림탐방지원센터.
11 : 30 천팔교.
11 : 38 북해도교.
13 : 02 세석교.
13 : 24 세석고원갈림길.
13 : 38 음양수샘터.
14 : 07 대성골갈림길.
16 : 09 대성골.
17 : 14 의신마을선학정 종료.
▲ 10시 20분 : 거림계곡주차장.
▲ 거림계곡상가지역.
▲ 길상암 갈림길.
▲ 길상암을 품고있는 도장골의 시천천은 촛대봉에서 발원하여 와룡폭포를 만들고 거림의 내대천과 합류한다..
▲ 거림탐방지원센터 앞의 상가.
약 40년전에 다녀 간곳이라.. 그때도 상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가물가물한 기억을 소환해 보아도 아리송하다.
거림계곡길은 분명 그자리인데 환경은 많이 낯설게 변했다.
▲ 탐방로를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 건물뒤로 돌아 가면..
▲ 10시 28분 : 거림탐방지원센터를 지나.
▲ 거림탐방로 대문을 들어서서 데크계단을 1~2분 올라서면...
▲ 노송아래 쉼터가 있다.
▲ 거림(巨林)이라는 마을이름처럼 과거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하게 계곡을 메우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군수용
으로 많이 베어졌고.. 8·15광복 후에는 땔감으로 마구 베어져 한때 벌거숭이 계곡이 되기도 했다.
▲ 거림(巨林)계곡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에 있는 계곡으로 지리산 주능을 제일 편안하게 오를수 있는 코스 중에 하나이다.
▲ 오름길은.. 여전히 착하게 이어지지만.. 이곳 경남 산청의 낮기온이 33도로.. 여름 더위가 식을줄 모른다..
▲ 그나마.. 거림계곡을 타고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가 있어 다소 위안을 삼으며.. 쉬엄쉬엄 진행한다.
▲ 11시 17분 : 거림탐방로 대문을 통과한지 1시간이 되어 간다... 아주 이상적인 산행속도다.
▲ 11시 30분 : 천팔교 도착.
불교에는 백팔번뇌가 있고 지리산은 산이 넓어니 천팔번뇌가 있어서 천팔교일까?ㅎㅎ~.
그러나.. 알고 보니... 천팔교라는 이름은 여기가 해발고도 1008미터라서 천팔교라고 이름 지어 졌다고 한다.
▲ 천팔교를 지나서 약간의 오름을 치고나면 다시 편안한 산죽길로 이어지고..
▲ 충분한 수량도 아니고 요란한 굉음도 아니지만 물보라를 튀기며 떨어지는 소리는 더위를 잊기에는 충분하다.
▲ 다시.. 살짝 고도를 올리면...
▲ 11시 38분 : 북해도교 도착...
왜? 하필 북해도(홋카이도)교 라고 이름 지었을까..
북해도교라는 명칭은 거림에서 산행을 시작해서 현 위치에 도착과 동시에 피부에 찬 기운이 느껴져 추운지방을 연상케
하는데에서 유래되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추운것을 연상하는것이 일제강점기시절 일본의 북해도를 아주 추운곳이라 여겨
이름을 북해도교라고 지었다고 한다.
온 나라가 일본 잔재의 흔적지우기를 하고 있는 마당에 아름다운 명칭으로 바꾸면 어떨까..
▲ 북해도교를 지나면... 거대한 방구돌이 버티고 선 이곳에서 부터..
▲ 능선을 타고 오르는 된비알의 시작이다...
▲ 여기까지 오는동안은 그래도 잊을만 하면... 간간히 불어주던 바람도 된비알 오름에서는 조용하다.
▲ 힘든구간임을 국공에서도 아는지...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여기서 물도 마시고 화랑 총무님이 정성의 손길로 담아주신
삶은계란 두알과.. 두유 한팩.. 바나나 하나... 그 중에 바나나로 더위에 힘들어 하는 몸을 달랜다.
▲ 쉼터에서 4~5분 올라서니... 된비알은 끝나고..
▲ 난간없는 데크길이 나오고...
▲ 길가에 벌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 옆에서 보니 "뽀뽀바위"처럼 보인다...
▲ 꽃며느리밥풀.
꽃말은... "질투" 다..
▲ 무명다리.
▲ 12시 32분 : 두번째 쉼터..
▲ 쉼터 저 멀리 남부능선 끄트머리에 흰구름이 넘실거리고 있는 삼신봉이 까마득하게 다가온다. 여기서 점찍기를 한다.
▲ 지리고들빼기..
꽃말은... "순박함" 이다.
▲ 13시 02분 : 세석교..
▲ 흔히들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라고 한다. 해발고도 1400m가 넘는 곳에서 생명의 젖줄인 맑은물이 흐른다..
▲ 해발 1500m대의 세석고원에서 물을 품었다가 내어주는 소중한 물이다.
▲ 13시 24분 : 세석고원갈림길..
세석산장까지는 약 500m이지만.. 왕복1km다.. 오늘은 의신마을 하산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울 같아서 통과하기로 한다.
▲ 과남풀..
꽃말은... “당신의 슬픔을 함께 합니다.” 이다.
과남풀은 우리의 이름으로는 "칼잎용담"이라는 아주 좋은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남풀이라고 불리운다.
용담’은 뿌리가 용의 쓸개처럼 아주 쓰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칼잎용담은 그런 용담을 닮았고, 잎이 칼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과남풀이라고 불리우는것은 한이름에 근거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관음초(觀音草)라고 하는데.. 관음초가 음이 변하면서
‘관음’이 ‘과남’이 되고 ‘초’가 ‘풀’로 쓰이면서 과남풀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다른.. 자료에서는 꽃잎의 색깔이 지나치게 남색이라고 해서 과남풀이라고 명명했다는 주장도 있다.
▲ 음양수 너럭바위..
1953년 여름, 여성 빨치산 김점분이 자기대원 15명과 함께 여기서 포위당하자 모두 권총으로 자결했다는 곳이다.
그 옛날 깊은 상처는 이제 다 아물었을까.. 뭇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여기 앉아 노닥거리고 밥도 먹고 쉬었다 간다.
▲ 음양수 너럭바위에 있는 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 선생의 기도제단(좌선대)..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을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의 이야기가 있다.
이 글은 중산리 법계교 부근에 있는 우천 허만수 추모비(宇天 許萬壽 追慕碑)뒷면에 새겨진 전문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산이 좋아 처자식도 버리고 홀로 지리산에 들어간 우천선생은 세석고원 음양수샘 아래 초막을 짓고 30여 년간 산짐승처럼
살면서 지리산 곳곳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샘터를 개발, 보수하는가 하면 숱한 사람을 안내하고 구조하는데 한평생을 바친
전형적인 산악인이자 지리산을 가장 사랑했던 산사람이다. 그래서 산악인들은 그를 "지리산 산신령"으로 부른다.
▲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선생은 1916년 진주 옥봉동에서 태어났다.
열 살 무렵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입명관(立命館) 중학교시절 ‘동정(童貞)클럽’이라는 등산반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했다. 동정클럽이란 이름은 산을 즐기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공부보다 산을 더 좋아하는 아들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부모는 그를 일시 귀국시켜 강제로 혼인시켰는데 선생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다시 부인(전경림)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광복을 맞아 부인과 세 딸을 데리고 귀국
해 진주에서 대동서점을 열었지만 몸과 마음은 늘 산에 있었다. 결국 2년 만에 서점 문을 닫고 산으로 떠났다.
자굴산에서 땅굴을 파고 원시인처럼 2년여를 보내고 지리산에 들어가 오직 지리산을 위해 여생을 받쳤다.
그러다 그가 회갑 년이 되던 해 1976년 6월에 정든 세석의 철쭉을 뒤로 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칠선계곡, 거림골,
도장골 또는 신선너덜에서 아무도 모르게 숨을 거두었으리라는 말만 무성할 뿐 그의 최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평소에 칠선계곡에서 영면 할것이라고 자주 시사했다고 한다.
▲ 너럭바위 아래에 있는 음양수 샘.
오른쪽에서 나오는 하나는 음이요 왼쪽위에서 나오는 하나는 양이요, 두 물줄기가 합쳐 샘을 이룬다는 음양수 샘이다.
이곳이 이상향이라 믿었던 일단의 사람들이 여기 들어와 살다가 아래로 강제 철수되어 청학동에 정착했다는 말도 있다.
▲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음수"라 하고..
▲ 좌측 위쪽에 "양수" 있다.
▲ 음양수샘에서 0.5l 페트병에 담아서 마셔보니.. 거부감이 없고 시원하다.
▲ 산오이풀꽃.
꽃말은... "애교" 다...
▲ 비만 오면 물길이 되는 하산길이라 발목 부상을 조심조심....
▲ 돌확.. 돌절구.. 사람이 거주하였다는 증거다.
▲ 동자꽃.
꽃말은... "기지".. "정열".. "기다림" 이다.
▲ 거림옛길로 내려가면 북해도교와 만나고... 우천 허만수 선생이 거처하던 초막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 이 길은 쌍계사길과 청학동으로 이어지는 삼신봉까지의 남부능선을 따라가는 길이다..
의신마을은 조금더 가다가 오른쪽으로 탈출이다.
▲ 13시 54분 : 조망바위에서.. 촛대봉과 시루봉. 그 사이에 청학연못이 있다.
촛대봉과 시루봉(장군봉) 능선 중간 서쪽 아래 해발고도가 1500m도 넘는 세석고원에 신비한 연못이 있다.
자연 상태의 연못이 아니고 청학동의 이상향을 완성시키는 의도에서 옛 선인들이 의도적으로 지형을 갖추려는 듯 인공
으로 조성된 연못이다. 대슬랩이 앞 물을 막아주고 둥글게 돌조각을 세워 뒷물 길을 막았다.
청학연못의 길이는 대략 10~15m 넓이는 대략 6~7m 정도 되며 깊이는 대략 1m 내외로 짐작되는 타원형의 연못이며
대슬랩에 새겨진 몇 개의 파자(破字)가 있는데 정확한 해석은 아직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청학연못의 조성시기는 사람에 따라 다소 엇갈리는데 대략 150년 전 쯤 됐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인들의 기록을 기초로 하여 고려조까지 거슬러 말하는 사람도 있다.
▲ 촛대봉 아래의 청학연못.
청학(靑鶴)은 날개가 여덟이고 다리가 하나이며 얼굴이 사람같이 생겼다는 상상의 길조(吉鳥)로서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전설의 새라고 한다. 이 새가 울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하여 옛 사람들은 청학이 사는 청학동을 신선의 고장이라 여겼다.
이상향의 청학동 위치는 지금의 삼신봉 아래 청학동과는 다른 개념이라고 한다.
▲ 당겨 본 세석고원.
지리산은 1967년 12월 20일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483㎢로서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있는 국내 최대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지리의 웅장함과 광활함을 보여주는 곳이며 지리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말해주는 곳이기도 한 세석평전은 고원지형을
형성하고 있어 세석고원으로 지칭되기도 하는 곳이다. 세석(細石)이란, 잔돌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뜻으로 불리는 것이
라고 한다. 세석고원은 예전에는 세석평전이라고 하였는데.. 일본의 잔재라고 하여 고원이라고 바뀌어 지고 있다.
▲ 지리 주능선상의 영신봉과 창불대.
창불대는 부처님을 찬양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 좌측으로는 지리 주능선의 칠선봉.. 덕평봉이 성삼재 방향으로 달려 간다.
▲ 남부능선의 암릉을..
▲ 넘고 넘어서..
▲ 14시 07분 : 의신마을 갈림길... 5시까지 하산이라 마음이 바쁘다.. 6.9km밖에 안남았다..ㅎㅎ~
▲ 화랑 대성골...뫼들.. 군대에서 챠트 글씨 깨나 써본 솜씨다.. 멋집니다.
▲ 조망바위가 있어 올라가 보니.. 저 멀리 하동의 진산 형제봉이 아스라히 보인다.
▲ 발아래로 길게 뻗어나간 하산길의 대성골.. 어디가 그 계곡의 끝인지 전혀 가늠 할 수가 없다.
▲ 14시 44분 : 큰세개골 도착.
▲ 여기서부터 대성골까지는 거의 너덜길이다.
▲ 대성골이 의신마을까지 중간지점이다.
▲ 이곳 무명폭포를 지나면서 부터.. 미구에 닥쳐올 자연 재난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갑자기 앞서가는 여성 회원님들이 고함을 지른다.. 말벌이다!~~ 라는 비상 싸이렌을 울린다.
뒤에 따라가던 우리 다섯명.. 가운데 선 나를 뺀 앞뒤 두명에게 벌들의 총공격이다. 모르긴 몰라도 기관총은 총도 아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가운데에 선 나는 벌들의 공격이 전혀 없다.
아마도 벌들이 그랬을 것이다.. 우리 말벌 보다 더 지독한 넘을 만났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공격을 안한다ㅎㅎ..
벌이 공격해 오면 당황하지말고 침착하게 빨리 그곳을 벗어 나는게 상책이다.
앞뒤 모두가 벌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고함을 치며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두팔을 마구 휘젓는다..
그런 행동을 하면 벌들이 공격해 오는줄 알고 더 달려 든다.. 침착하라는 내말은 이미 귓등이다..
내가 벌에 쏘이지 않은 것은 침착하게 조용한 행동으로 걸음을 빨리하여 지나왔기 때문이다.
▲ 한바탕 소동이 있고서야 위험지대를 벗어 난다.
▲ 백금녀..오천평보다도 더 펑퍼짐한 엉덩짝으로 바위를 뭉개버렸다.. 얼마나 숨통이 막히랴!~ㅋ..
저 방구돌은 전생에 무슨 업보를 받고 태어났을꼬?..ㅎㅎ..
▲ 작은세개교.
▲ 작은세개골.
▲ 드디어 대성골 진입.
지리산 대성골..하면.. 빨치산 토벌이야기를 빼놓을수가 없다.
57사단을 결성한지 1개월도 안된 52년 12월 2일, 군경의 제1차 대토벌작전이 시작된다. 먼저 남부군 직속 81사단, 92사단
과 합동작전인 경남 하동군 악양지서 습격사건인 악양전투는, 대토벌작전 하루전날 대공세 준비중인 수도사단의 아가리에
뛰어 들어가는 대실패였다. 같은 달에는 경남 함양군 법화산에서 수도사단의 공세에서 수백명의 빨치산이 몰살당했고,
52년 1월 17일경 지리산 천왕봉 근처 대성골 전투에서 경남도당과 남부군 57사단은 군경의 포위에 결정적으로 괴멸된다.
당시 전투는 소설 <남부군>에서 이태가 ‘남부군 최후의 날’이라는 소제목으로 묘사하며, 자신이 소속된 81사단만 포위되어
작살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92사단은 물론 경남도당과 57사단, 그리고 전남도당과 전북도당 일부 부대
까지 군경의 포위공세에 토끼몰이 식으로 밀려 대성골에 총집결했다가 싸그리 괴멸한 전투였다.
<실록 정순덕>에서 정순덕은 1만명의 빨치산이 대성골에 빽빽이 들어찼다고 했지만, 그건 남한내 총 빨치산의 숫자에
가깝고, <빨치산의 딸>에 의하면 그 1/10인 대략 1천명 남짓이 포위된 상태였다. <이현상 평전>, <전남유격투쟁사> 등
여러책을 종합해 봤을 때 전남도당에서 ‘투쟁인민’이라고 하는 후방의 노약자들만 1천명이고 전투병은 수백명 수준으로
추정된다.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들은 이 대성골 전투로 결정적인 손실을 입는다.
특히 경남도당 지휘부는 부위원장 김삼홍을 제외하고 아예 전멸해버렸는데, 정순덕은 이때 경남도당 위원장 남경우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다. 토벌대측에서는 항공기로 소이탄을 떨어뜨려 대성골 일대를 불태웠는데 불길이 얼마나 강한지
한겨울에도 무려 5일간 타들어 갔다. 정순덕은 좁은 바위틈새에 숨어 선채로 최소 5일 이상 버티며 살아남는다.
그러나 남편 석성조는 이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며칠후 생존자에게 듣는다.
▲ 정순덕의 증언에 의하면 2천명(?)이나 되었다는 57사단은 대성골 전투로 불과 60여명 남았다.
잔존 병력은 2개 중대로 편성되었고 부대장 이영회는 부상으로 그때까지 복귀하지 못해 참모장 박창선이 대신 이끌었다.
정순덕의 중대장은 삼천포 출신의 임학주였다. 정순덕은 중대부(본부) 소속으로 간병, 취사, 환경정리를 담당하였다.
1952년 1월 17일, 각지에서 쫓기던 빨치산들이 이 대성골로 밀리고 밀려 집결하던 날 토벌군은 의신에서 종일 야포로 이곳
을 때렸고 이후 미군 비행기는 휘발유통을 떨어뜨려 이곳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한다.
그 이후 남부군은 급격한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급기야는 완전 토벌되고 말았다.
▲ 원 대성동마을.. 집터가 있었던 축대가 보인다.
지리산 전투 중 가장 처절했다는 대성골전투, 그 대성동마을에 드디어 도착했다.
1968년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전국 모든 화전민들을 산 아래로 강제 이주시켰고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1970년 저 아래 대성마을로 내려갔다고 전한다.
▲ 원 대성동마을 쉼터.
▲ 대성동마을 2.1km 지점에서부터...
▲ 시작된 너덜겅은 마음까지도 완전히 너덜거리게 만든다.
▲ 대성동마을에 사람들이 쓰던 물건 흔적을 만난다..
▲ 재만 남은 대성동마을... 지리산 대성동휴게소, 일명 ‘대성주막’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한때는 산꾼들에게 막걸리한잔으로 피로를 풀었던 곳인데...ㅠㅠ~
▲ 불에 탄 흔적들... 2023년 3월에 발생한 산불로 대성계곡 일대가 모두 타버린 상태다.
▲ 지금도 혼자 거주 중인 임현종씨가 밭일을 하고 있다.
그는 4대째 여기서 살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집 근처에 후박나무 수백 그루를 심어 유명한 지리산 산림왕 고 임봉출씨다.
▲ 산사면에 있는 집들은 다 타서 무너졌고 계곡 쪽 가옥 한 채만 멀쩡했다.
▲ 개집 같기도 하고..
▲ 대성동 동구밖에 노송만이 그날의 아픔을 알고 있겠지..
▲ 벌때 습격사건으로 출동한 소방대원들.. 회원들 중에 누군가가 119에 신고를 하였다고 한다.
아무런 탈이 없어야 될텐데..
▲ 두번째 팀..
7방인가 9방인가 쏘였다는 분과 사고경위 청취..
▲ 16시 30분 : 의신마을 1.8km.
▲ 산불에 탄 흔적들..
그나마 다행인것은 소나무는 타버렸지만 활엽수는 1여년만에 자연적으로 회복된 듯 하고..
소나무림이 적고 활엽수의 밀도가 높아 숲 내부에는 바람이 세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축구장 170개에 달하는 면적이
불탔다고 알려졌는데 그당시 산불 진화 과정에서 진화대원 1명이 숨지기도 했다는데 다행히도 산불 발생 하루만에 비가
내리면서 진화가 되었다고 한다.
▲ 길은 착한 오솔길이지만.. 지친 발걸음 때문인지 가도가도 줄어들지 않는 느낌이다.
▲ 세번째 소방대원팀..
▲ 꽃무릇..
지금 전남 영광 불갑산에는 꽃무릇축제가 한창이다.
▲ 세석탐방로 입구까지 구급차가 올라 와 있다.
▲ 항일투사 30인 의총(義塚).
한일 강제병합이 있기 2년전 1908년 2월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온 몸으로 저항하며 결사항전하다 최후를 맞이
한 항일 무명 영웅 30인이 이곳 지리산 화개면 의신마을 공동산에 잠들었다.
이곳에 묻힌 항일의병은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맹활약하다 1908년 1월말 의신마을에 도착했다.
의병들은 마을 서당에 본부를 두고 배명고지(지리산역사관 뒤 능선)에 초병(哨兵)을 세우고 벽소령 길목을 경계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게 베 한 조각을 나누어 주면서 토시와 발등덮개를 만들게 하고 음력설을 쇠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 2일(음력 설날) 아침 승려로 가장한 일본군이 절골(용화정사 터)에 있는 마을 주막으로 오는 것을 발견하고
발포하였으나 일본군의 유인작전이었다. 일본군(변장대)은 마을에 침투하여 의병을 향해 기습공격을 하였다.
항일의병 80여명은 일본군에 맞서 이틀간 격렬히 저항했지만 일제의 막강한 화력 앞에 의병 50여명이 전사하고 생존자는
산청쪽으로 몸을 피했다. 이후 의신마을 주민들은 항일 의병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제 등, 진평전 및 계곡 산허리에 묻어
주었으며 이곳 30명의 무명 항일영웅들의 묘는 그 중의 하나이다.
▲ 의신마을에서 세석까지 9.1km 오름길은 추천 하고 싶지 않은 길이다.
▲ 마을길따라 바로 올라가면 서산대사가 출가하였다는 원통암가는 길이다.
▲ 마을에도 구급차가 3대가 와 있다..
▲ 서산대사길..
편하고 힐링의 길이다. 2017년에 서산대사길과 원통암을 다녀왔었다.
▲ 의신(義信)마을 유래.
선인들의 말씀과 기록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 길지(吉地)로 십승지지(十勝之地)가 있는데, 지리산(智異山)에는 청학동
(靑鶴洞)이 있다. 지리학자들의 기록이나 구전에 의하면 지리산 덕평봉(德平峰) 회포(回包) 40여리라고 하니 오늘날 대성리
전역이 청학동 범위에 위치하는데.. 그 중에 의신마을은 가장 길지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 의신동천..
▲ 17시 14분 : 의신(義信)마을 선학정 산행 종료.
의신마을로 하산이 전부 완료되면 약800m 거리에 있는 의신마을 아래쪽 주차장에서 버스가 올라오기로 함..
▲ 후미팀이 내려 올동안 트랭글을 정리하고..
후미에 섰던 산대장님도 내려 오고 벌에 쏘인분들도 다행히 말벌이 아니어서 위급한 상황은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소방대원들도 전부 철수하면서 벌쏘임 사건은 일단락 되고.. 하산주장소로 이동.
▲ 덕장 회장님의 배려로 씻지도 못하고 하산한 회원님들을 위해서 물 좋은곳에서 잠시 정차.. 역시나 덕장다운 배려다.
▲ 18시 09분 : 화개장터 인근 식당..
▲ 산대장님의 건배..
▲ 이어서 회장님의 건배..
용장(勇將)밑에는 약졸이 없고.. 덕장(德將)밑에는 배신자가 없고.. 지장(智將)밑에는 잔꾀 부리는 사람이 없다" 라는
말이 있다.. 한데.. 용(勇)과 덕(德).. 그리고 지(智) 까지 갖추었으니 화랑산악회의 홍복이라면 홍복이다.
모든 회원님들의 무사무탈..
산악회 회장으로서는 최고의 하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