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9월 08일(일).

농다리. 초평호둘레길 : 충북 진천군.

 

산행코스 : 농다리주차장-농다리-야외음악당-초롱길-하늘다리-둘레길-미르309출렁다리-용고개-농다리주차장.

산행시작 : 농다리주차장  11시 19분.

산행종료 : 농다리주차장  14시 58분.

전체거리 : 약4.8km.

전체시간 : 03시간 39분.

운동시간 : 02시간 27분.

휴식시간 : 01시간 12분.

 

11 : 19  농다리주차장.

11 : 28  농다리.

11 : 36  용고개.

11 : 38  야외음악당.

11 : 43  초롱길.

11 : 57  하늘다리.

12 : 07  둘레길.

13 : 03  미르309출렁다리.

13 : 34  야외음악당.

14 : 10  농다리.

14 : 58  농다리주차장 종료.

 

 11시 19분 : 농다리 소형차주차장.

 

농다리 대형차 주차장.

소형차주차장과 길 하나를 사이로 마주하고 있는 대형차주차장이 매우 협소해서 전국에서 모인 차들로 이미 만차가 되어..

여기서 하차하고 버스는 다른곳에 가 있다가 다시 태우러 온다고 한다.

 

 농다리주차장에서 초평호둘레길 입구인 농다리까지는 약 550m를 걸어가야 한다.

 

구산동 마을 표시석.

진천군 문백면 구산동은 고려초 개국공신 상산 임씨의 천년 세거지다...상산(常山)은 진천(鎭川)의 옛 지명이다.

상산(진천) 임씨의 시조 임희(林曦)는 고려 혜종비 의화왕후(義和王后)의 아버지로서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진 것을 연유로

상산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농다리 스토리움(Nongdari Storium)..

스토리움은 스토리(Story)와 공간(Rium)의 합성어다. 이야기가 있는 공간, 역사문화관 등의 전시관이다.

 

▲ 중부고속도로 밑을 지나가면...

 

▲ 미호강 건너편에 인공폭포가 시원하게 흐른다... 폭포 위에 "생거진천" 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2009년에 설치되었고 높이 80m, 폭 24m 이다.

 

▲ 이곳 충북 진천에는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속담으로..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

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살아서는 진천에서 살고 죽어서는 용인에 묻힌다는 뜻이다.

이 속담은 단순히 살아있는 곳과 죽은 후에 묻히는 곳을 구분하는 의미뿐 아니라, 효도와 선조를 존경하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 부교와 농다리.

농다리에 관해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전설에 가깝다. 임장군 임연은 매일 아침 세금천(현 미호강)에서 세수를 했는데,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하천 건너편에서 젊은 부인이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듣고 친정에 가기 위해 내를 건너려 하고 있었다.

임장군은 여인의 지극한 효성을 배려해 즉시 용마로 돌을 실어 날라 하루아침에 다리를 놓아 부인이 무사히 건너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진다.

 

▲ 농다리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에 위치한 길이 93.6m, 너비 3.6m, 높이 1.2m의 옛 돌다리이다.

고려 초에 권신과 임장군이 축조했다는 천년이 넘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돌다리인데 생김새 또한 특이한 게

자랑이다. 하늘의 28수 별자리를 따라 28칸 돌 교각으로 조성되어 있었으나. 오랜기간 일부 교각이 유실로 25칸만 남아

있다가.. 2008년 28칸으로 원형 복원을 완료하였다.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 작은 돌을 물고기비늘처럼 쌓아올린후 지네모양을 본떠 만들어진 모양으로 인해 "지네다리"라고도 불리기도한다.

 

미호강은 충북 음성에서 발원하여 진천, 청주를 거쳐 세종시에서 금강에 합수되며 길이는 89km이다.

 

▲ 뜻밖에도 10수년전에 같이 산악회 활동을 하던 회원님(남자)을 만났다.

 

▲ 오랜만에 만나는 추억의 아이스께끼~..

 

▲ 용고개의 청룡..

 

▲ 초평저수지가 조성되기전에 화산리라는 마을이 있었고..마을로 넘어 다니던 "용고개"에 얽힌 전설따라 삼천리 이다.

 

▲ 고개너머에는 황룡이다.

 

11시 38분 : 현대모비스 야외음악당.

2015년 미르숲 개장 이후 야외음악당에서 양희은.. 이은미.. 박미경 등 유명 가수들이 공연을 펼치면서 미르숲 음악회는

힐링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고... 미르숲은 진천 대표 관광지인 농다리, 초롱길, 하늘다리와 연결하면서 전국적인 생태

명소로 떠올랐다.

 

▲ 초평저수지 전경.

충북 진천군은 현대모비스의 사회공헌사업인 미르숲 조성을 하면서 현대모비스는 2010년 공모사업에 진천군을 선정해

사회공헌사업비 100억원을 기부하였고... 진천군은 초평면 화산리 산 7-1 일대 군유림 108㏊를 사업 대상지로 제공했다.

사업은 자연환경국민신탁이 맡아 2012년부터 10년간 숲 조성과 관리를 담당하였고... 2021년 12월 28일 진천군에 관리가

전환 되었다.

 

▲ 초롱길 진입..

먼저 미르309출렁다리로 가서 시계 역순으로 한바퀴 돌려다가 미르309출렁다리쪽은 관람객이 너무 많아서 피하고..

시계 순방향인 초롱길에서 부터 시작 한다.

 

▲ 코로나가 다시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요즘에는 가급적 사람 많은곳을 피하는게 좋다.. 호젓해서 좋다..

 

▲ 이쪽은 초롱길이고 건너편은 초평저수지 둘레길이다.

 

▲ 쏘가리를 닮은 바위 주둥이에 미끼를 끼워 놓았다..

 

▲ 초평저수지 어업권을 가진 어부가 어로활동을 하는지 한가롭다...

 

▲ 짚라인도 있는가 보다.

 

12시 21분 : 바람길이 좋은 초평저수지 둘레길에서... 조촐하고 오분순한 점찍기다..

 

잭 다니엘에.. 오징어 초장.. 환상적인 조합이다.

 

▲ 미르309출렁다리에서 회장님을 만난다.

 

▲ 미르309출렁다리.. 미르는 용(龍)의 순 우리말이다. 

진천군이 80억원을 들여 금년 2024년 4월 12일에 국내 주탑 (主塔·주 케이블의 최고점을 지지하는 탑)이 없는 출렁다리 중

가장 긴 진천군 “초평호 미르309 출렁다리”가 개통했다. 폭 1.6m이며, 일반적인 교량과 달리 주탑과 중간 교각이 없어

짜릿함을 느낄수 있을 뿐 아니라 탁 트인 초평호의 전경을 만끽할 수 있으며 초평호 둘레길인 초롱길 초입에 있는 “미르숲”

과 주변 산의 등산로와 연결 되어 있다.

 

▲ ㅎㅎㅎ~

용의 입에 여의주 대신 머리를... 초평저수지 용에게 용용 죽겠지 하고 눌리는 겁니까?..ㅎㅎ

 

▲ 웃음으로 더위를 날려 버리는 멋진 퍼포먼스(performance) 였습니다..ㅎㅎ~.

 

▲ 발밑에 초평저수지가 선물하는 보석같은 "윤슬" 이다.

 

▲ 농다리 처럼 발이 많이 달린 지네다리다.. 70kg 성인 1650명이 동시에 건너갈수 있는 안전한 다리로 설계 되었다.

 

▲ 하늘에서 내려다본 초평저수지다.. 한반도 지형을 둘러싼 용의 모습처럼 보인다.

 

▲ 아래쪽의 황토길을 가기위해 내려가는데...

 

▲ 119구급대가 떳다... 70대라고 하는데 더위에 지쳤나 했더니.. 심장병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 여기서 청봉의 핵심 임원님들을 만난다.

 

▲ 황토 맨발숲길로 진입하려는데.. 관리인이 신발을 신고는 못간다고 한다.... 벗고 씻고 귀찮아서 안갈랍니다..ㅎㅎ~.

 

▲ 현대모비스 야외음악당에서.. 물멍~..

중심봉에서 내려 오면 한반도 전망대가 있다. 거기에서 보는 초평저수지가 가히 선경의 경지다.

 

▲ 용고개..

 

▲ 다시 중부고속도로 밑을 지나오니..

 

▲ 농다리문화공간에..

 

▲ 진천군 출신들의 명사들과 소개글을 새겨 놓은 동판을 길바닥에 설치해 놓았다..

 

▲ 진천 만뢰산 아래에 김유신 생가가 있다.

 

▲ 물봉선화.

꽃말은... "나를 건더리지 마세요" 이다.

 

▲ 대형버스주차장은 아직도 만원이다.

 

▲ 진천을 다녀간 지방수령들의 공적비.

 

▲ 임수전부자 충신문.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충신 임수전.. 임현 부자의 정려각이다.

임수전은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아들 임현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죽산 봉성에서 격전

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아들 임현은 만주의 부차성 전투에서 명의 원군으로 나가 싸우다 전사하였다.

임수전 부자 충신문은 임수전 부자가 나라를 위해 순국한 뜻을 기리는 정려각이다.

 

▲ 15시가 다 되어 청봉의 애마가 오고.. 하산식 장소로 이동한다.

 

▲ 상호가 농민 쉐프의 묵은지 화련이다... 하산주 장소인데.. 상호가 이쁘다.

 

▲ 가게로 들어서니 주인장의 취향을 짐작할수 있는 진열장이다..

 

▲ 살아서는 진천에 살으리랐다 했는데.. 살고 있지는 못할지언정... 객의 발길이 인연따라 여기까지 왔으니 인심 좋고

푸짐한 진천의 밥 한상을.. 배 두드리며 먹어 보기나 하자..

 

▲ 좋은땅에 오니 기운이 솟는가 봅니다.

 

▲ 직전 회장님의 익살에... 회장님도 웃지요.. 청봉님들도 마냥 웃지요.. ㅎㅎㅎ~.. 이런 웃음이 평범한 일상의 행복입니다.

 

▲ 곳간에서 인심 난다 라는 말처럼... 커다란 가마솥에서도 살기좋은 진천의 넉넉한 인심이 묻어나는것 같다.

 

▲ 생거진천의 땅에서... 미르(용)의 기운까지 받았는데.. 천하대장군.. 여장군도 함박웃음으로 배웅해 준다..

그리고.. 한결같은 청봉님들의 환대에 감사합니다..

2024년 09월 05일(목).

지리산국립공원 대성골 : 경남 산청군/하동군.

 

산행코스 : 거림계곡주차장-거림탐방지원센터-천팔교-세석고원갈림길-음양수샘터-대성골-의신마을.

산행시작 : 거림계곡주차장  10시 20분.

산행종료 : 의신마을 선학정  17시 14분.

전체거리 : 약14.3km.

전체시간 : 06시간 43분.

운동시간 : 05시간 52분.

휴식시간 : 00시간 51분.

 

10 : 20  거림계곡주차장.

10 : 28  거림탐방지원센터.

11 : 30  천팔교.

11 : 38  북해도교.

13 : 02  세석교.

13 : 24  세석고원갈림길.

13 : 38  음양수샘터.

14 : 07  대성골갈림길.

16 : 09  대성골.

17 : 14  의신마을선학정 종료.

 

 10시 20분 : 거림계곡주차장.

 

거림계곡상가지역.

 

 길상암 갈림길.

 

 길상암을 품고있는 도장골의 시천천은 촛대봉에서 발원하여 와룡폭포를 만들고 거림의 내대천과 합류한다..

 

 거림탐방지원센터 앞의 상가.

약 40년전에 다녀 간곳이라.. 그때도 상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가물가물한 기억을 소환해 보아도 아리송하다.

거림계곡길은 분명 그자리인데 환경은 많이 낯설게 변했다.

 

탐방로를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 건물뒤로 돌아 가면..

 

10시 28분 : 거림탐방지원센터를 지나.

 

 거림탐방로 대문을 들어서서 데크계단을 1~2분 올라서면...

 

 노송아래 쉼터가 있다.

 

거림(巨林)이라는 마을이름처럼 과거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하게 계곡을 메우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군수용

으로 많이 베어졌고.. 8·15광복 후에는 땔감으로 마구 베어져 한때 벌거숭이 계곡이 되기도 했다.

 

 거림(巨林)계곡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에 있는 계곡으로 지리산 주능을 제일 편안하게 오를수 있는 코스 중에 하나이다.

 

 오름길은.. 여전히 착하게 이어지지만.. 이곳 경남 산청의 낮기온이 33도로.. 여름 더위가 식을줄 모른다..

 

그나마.. 거림계곡을 타고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가 있어 다소 위안을 삼으며.. 쉬엄쉬엄 진행한다.

 

11시 17분 : 거림탐방로 대문을 통과한지 1시간이 되어 간다... 아주 이상적인 산행속도다.

 

 11시 30분 : 천팔교 도착.

불교에는 백팔번뇌가 있고 지리산은 산이 넓어니 천팔번뇌가 있어서 천팔교일까?ㅎㅎ~.

그러나.. 알고 보니... 천팔교라는 이름은 여기가 해발고도 1008미터라서 천팔교라고 이름 지어 졌다고 한다.

 

천팔교를 지나서 약간의 오름을 치고나면 다시 편안한 산죽길로 이어지고..

 

충분한 수량도 아니고 요란한 굉음도 아니지만 물보라를 튀기며 떨어지는 소리는 더위를 잊기에는 충분하다.

 

다시.. 살짝 고도를 올리면...

 

 11시 38분 : 북해도교 도착...

왜? 하필 북해도(홋카이도)교 라고 이름 지었을까..

북해도교라는 명칭은 거림에서 산행을 시작해서 현 위치에 도착과 동시에 피부에 찬 기운이 느껴져 추운지방을 연상케

하는데에서 유래되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추운것을 연상하는것이 일제강점기시절 일본의 북해도를 아주 추운곳이라 여겨

이름을 북해도교라고 지었다고 한다.

온 나라가 일본 잔재의 흔적지우기를 하고 있는 마당에 아름다운 명칭으로 바꾸면 어떨까..

 

북해도교를 지나면... 거대한 방구돌이 버티고 선 이곳에서 부터..

 

능선을 타고 오르는 된비알의 시작이다...

 

여기까지 오는동안은 그래도 잊을만 하면... 간간히 불어주던 바람도 된비알 오름에서는 조용하다.

 

힘든구간임을 국공에서도 아는지...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여기서 물도 마시고 화랑 총무님이 정성의 손길로 담아주신

삶은계란 두알과.. 두유 한팩.. 바나나 하나... 그 중에 바나나로 더위에 힘들어 하는 몸을 달랜다.

 

쉼터에서 4~5분 올라서니... 된비알은 끝나고..

 

난간없는 데크길이 나오고...

 

 길가에 벌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옆에서 보니 "뽀뽀바위"처럼 보인다...

 

꽃며느리밥풀.

꽃말은... "질투" 다..

 

무명다리.

 

12시 32분 : 두번째 쉼터..

 

쉼터 저 멀리 남부능선 끄트머리에 흰구름이 넘실거리고 있는 삼신봉이 까마득하게 다가온다. 여기서 점찍기를 한다.

 

지리고들빼기..

꽃말은... "순박함" 이다.

 

13시 02분 : 세석교..

 

흔히들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라고 한다. 해발고도 1400m가 넘는 곳에서 생명의 젖줄인 맑은물이 흐른다..

 

해발 1500m대의 세석고원에서 물을 품었다가 내어주는 소중한 물이다.

 

13시 24분 : 세석고원갈림길..

세석산장까지는 약 500m이지만.. 왕복1km다.. 오늘은 의신마을 하산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울 같아서 통과하기로 한다.

 

과남풀..

꽃말은... “당신의 슬픔을 함께 합니다.” 이다.

 

과남풀은 우리의 이름으로는 "칼잎용담"이라는 아주 좋은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남풀이라고 불리운다.

용담’은 뿌리가 용의 쓸개처럼 아주 쓰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칼잎용담은 그런 용담을 닮았고, 잎이 칼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과남풀이라고 불리우는것은 한이름에 근거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관음초(觀音草)라고 하는데.. 관음초가 음이 변하면서

‘관음’이 ‘과남’이 되고 ‘초’가 ‘풀’로 쓰이면서 과남풀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다른.. 자료에서는 꽃잎의 색깔이 지나치게 남색이라고 해서 과남풀이라고 명명했다는 주장도 있다.

 

음양수 너럭바위..

1953년 여름, 여성 빨치산 김점분이 자기대원 15명과 함께 여기서 포위당하자 모두 권총으로 자결했다는 곳이다.

그 옛날 깊은 상처는 이제 다 아물었을까.. 뭇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여기 앉아 노닥거리고 밥도 먹고 쉬었다 간다.

 

음양수 너럭바위에 있는 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 선생의 기도제단(좌선대)..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을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의 이야기가 있다.

이 글은 중산리 법계교 부근에 있는 우천 허만수 추모비(宇天 許萬壽 追慕碑)뒷면에 새겨진 전문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산이 좋아 처자식도 버리고 홀로 지리산에 들어간 우천선생은 세석고원 음양수샘 아래 초막을 짓고 30여 년간 산짐승처럼

살면서 지리산 곳곳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샘터를 개발, 보수하는가 하면 숱한 사람을 안내하고 구조하는데 한평생을 바친

전형적인 산악인이자 지리산을 가장 사랑했던 산사람이다. 그래서 산악인들은 그를 "지리산 산신령"으로 부른다.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선생은 1916년 진주 옥봉동에서 태어났다.

열 살 무렵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입명관(立命館) 중학교시절 ‘동정(童貞)클럽’이라는 등산반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했다. 동정클럽이란 이름은 산을 즐기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공부보다 산을 더 좋아하는 아들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부모는 그를 일시 귀국시켜 강제로 혼인시켰는데 선생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다시 부인(전경림)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광복을 맞아 부인과 세 딸을 데리고 귀국

해 진주에서 대동서점을 열었지만 몸과 마음은 늘 산에 있었다. 결국 2년 만에 서점 문을 닫고 산으로 떠났다.

 

자굴산에서 땅굴을 파고 원시인처럼 2년여를 보내고 지리산에 들어가 오직 지리산을 위해 여생을 받쳤다.

그러다 그가 회갑 년이 되던 해 1976년 6월에 정든 세석의 철쭉을 뒤로 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칠선계곡, 거림골,

도장골 또는 신선너덜에서 아무도 모르게 숨을 거두었으리라는 말만 무성할 뿐 그의 최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평소에 칠선계곡에서 영면 할것이라고 자주 시사했다고 한다.

 

 너럭바위 아래에 있는 음양수 샘.

오른쪽에서 나오는 하나는 음이요 왼쪽위에서 나오는 하나는 양이요, 두 물줄기가 합쳐 샘을 이룬다는 음양수 샘이다.

이곳이 이상향이라 믿었던 일단의 사람들이 여기 들어와 살다가 아래로 강제 철수되어 청학동에 정착했다는 말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음수"라 하고..

 

 좌측 위쪽에 "양수" 있다.

 

 음양수샘에서 0.5l 페트병에 담아서 마셔보니.. 거부감이 없고 시원하다.

 

▲ 산오이풀꽃.

꽃말은... "애교" 다...

 

▲ 비만 오면 물길이 되는 하산길이라 발목 부상을 조심조심....

 

▲ 돌확.. 돌절구.. 사람이 거주하였다는 증거다.

 

▲ 동자꽃.

꽃말은... "기지".. "정열".. "기다림" 이다.

 

▲ 거림옛길로 내려가면 북해도교와 만나고... 우천 허만수 선생이 거처하던 초막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 이 길은 쌍계사길과 청학동으로 이어지는 삼신봉까지의 남부능선을 따라가는 길이다..

의신마을은 조금더 가다가 오른쪽으로 탈출이다.

 

13시 54분 : 조망바위에서.. 촛대봉과 시루봉. 그 사이에 청학연못이 있다.

 

촛대봉과 시루봉(장군봉) 능선 중간 서쪽 아래 해발고도가 1500m도 넘는 세석고원에 신비한 연못이 있다.

자연 상태의 연못이 아니고 청학동의 이상향을 완성시키는 의도에서 옛 선인들이 의도적으로 지형을 갖추려는 듯 인공

으로 조성된 연못이다. 대슬랩이 앞 물을 막아주고 둥글게 돌조각을 세워 뒷물 길을 막았다.

 

청학연못의 길이는 대략 10~15m 넓이는 대략 6~7m 정도 되며 깊이는 대략 1m 내외로 짐작되는 타원형의 연못이며

대슬랩에 새겨진 몇 개의 파자(破字)가 있는데 정확한 해석은 아직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청학연못의 조성시기는 사람에 따라 다소 엇갈리는데 대략 150년 전 쯤 됐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인들의 기록을 기초로 하여 고려조까지 거슬러 말하는 사람도 있다.

 

▲ 촛대봉 아래의 청학연못.

청학(靑鶴)은 날개가 여덟이고 다리가 하나이며 얼굴이 사람같이 생겼다는 상상의 길조(吉鳥)로서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전설의 새라고 한다. 이 새가 울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하여 옛 사람들은 청학이 사는 청학동을 신선의 고장이라 여겼다.

이상향의 청학동 위치는 지금의 삼신봉 아래 청학동과는 다른 개념이라고 한다.

 

▲ 당겨 본 세석고원.

지리산은 1967년 12월 20일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483㎢로서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있는 국내 최대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지리의 웅장함과 광활함을 보여주는 곳이며 지리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말해주는 곳이기도 한 세석평전은 고원지형을

형성하고 있어 세석고원으로 지칭되기도 하는 곳이다. 세석(細石)이란, 잔돌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뜻으로 불리는 것이

라고 한다. 세석고원은 예전에는 세석평전이라고 하였는데.. 일본의 잔재라고 하여 고원이라고 바뀌어 지고 있다.

 

▲ 지리 주능선상의 영신봉과 창불대.

창불대는 부처님을 찬양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 좌측으로는 지리 주능선의 칠선봉.. 덕평봉이 성삼재 방향으로 달려 간다.

 

▲ 남부능선의 암릉을..

 

넘고 넘어서..

 

14시 07분 : 의신마을 갈림길... 5시까지 하산이라 마음이 바쁘다.. 6.9km밖에 안남았다..ㅎㅎ~

 

▲ 화랑 대성골...뫼들.. 군대에서 챠트 글씨 깨나 써본 솜씨다.. 멋집니다.

 

▲ 조망바위가 있어 올라가 보니.. 저 멀리 하동의 진산 형제봉이 아스라히 보인다.

 

▲ 발아래로 길게 뻗어나간 하산길의 대성골.. 어디가 그 계곡의 끝인지 전혀 가늠 할 수가 없다.

 

14시 44분 : 큰세개골 도착.

 

▲ 여기서부터 대성골까지는 거의 너덜길이다.

 

▲ 대성골이 의신마을까지 중간지점이다.

 

▲ 이곳 무명폭포를 지나면서 부터.. 미구에 닥쳐올 자연 재난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갑자기 앞서가는 여성 회원님들이 고함을 지른다.. 말벌이다!~~ 라는 비상 싸이렌을 울린다.

뒤에 따라가던 우리 다섯명.. 가운데 선 나를 뺀 앞뒤 두명에게 벌들의 총공격이다. 모르긴 몰라도 기관총은 총도 아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가운데에 선 나는 벌들의 공격이 전혀 없다.

아마도 벌들이 그랬을 것이다.. 우리 말벌 보다 더 지독한 넘을 만났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공격을 안한다ㅎㅎ..

 

벌이 공격해 오면 당황하지말고 침착하게 빨리 그곳을 벗어 나는게 상책이다.

앞뒤 모두가 벌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고함을 치며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두팔을 마구 휘젓는다..

그런 행동을 하면 벌들이 공격해 오는줄 알고 더 달려 든다.. 침착하라는 내말은 이미 귓등이다..

내가 벌에 쏘이지 않은 것은 침착하게 조용한 행동으로 걸음을 빨리하여 지나왔기 때문이다.

 

▲ 한바탕 소동이 있고서야 위험지대를 벗어 난다.

 

▲ 백금녀..오천평보다도 더 펑퍼짐한 엉덩짝으로 바위를 뭉개버렸다.. 얼마나 숨통이 막히랴!~ㅋ..

저 방구돌은 전생에 무슨 업보를 받고 태어났을꼬?..ㅎㅎ..

 

▲ 작은세개교.

 

▲ 작은세개골.

 

▲ 드디어 대성골 진입.

지리산 대성골..하면.. 빨치산 토벌이야기를 빼놓을수가 없다.

57사단을 결성한지 1개월도 안된 52년 12월 2일, 군경의 제1차 대토벌작전이 시작된다. 먼저 남부군 직속 81사단, 92사단

과 합동작전인 경남 하동군 악양지서 습격사건인 악양전투는, 대토벌작전 하루전날 대공세 준비중인 수도사단의 아가리에

뛰어 들어가는 대실패였다. 같은 달에는 경남 함양군 법화산에서 수도사단의 공세에서 수백명의 빨치산이 몰살당했고,

 

52년 1월 17일경 지리산 천왕봉 근처 대성골 전투에서 경남도당과 남부군 57사단은 군경의 포위에 결정적으로 괴멸된다.

당시 전투는 소설 <남부군>에서 이태가 ‘남부군 최후의 날’이라는 소제목으로 묘사하며, 자신이 소속된 81사단만 포위되어

작살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92사단은 물론 경남도당과 57사단, 그리고 전남도당과 전북도당 일부 부대

까지 군경의 포위공세에 토끼몰이 식으로 밀려 대성골에 총집결했다가 싸그리 괴멸한 전투였다.

 

<실록 정순덕>에서 정순덕은 1만명의 빨치산이 대성골에 빽빽이 들어찼다고 했지만, 그건 남한내 총 빨치산의 숫자에

가깝고, <빨치산의 딸>에 의하면 그 1/10인 대략 1천명 남짓이 포위된 상태였다. <이현상 평전>, <전남유격투쟁사> 등

여러책을 종합해 봤을 때 전남도당에서 ‘투쟁인민’이라고 하는 후방의 노약자들만 1천명이고 전투병은 수백명 수준으로

추정된다.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들은 이 대성골 전투로 결정적인 손실을 입는다.

 

특히 경남도당 지휘부는 부위원장 김삼홍을 제외하고 아예 전멸해버렸는데, 정순덕은 이때 경남도당 위원장 남경우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다. 토벌대측에서는 항공기로 소이탄을 떨어뜨려 대성골 일대를 불태웠는데 불길이 얼마나 강한지

한겨울에도 무려 5일간 타들어 갔다. 정순덕은 좁은 바위틈새에 숨어 선채로 최소 5일 이상 버티며 살아남는다.

그러나 남편 석성조는 이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며칠후 생존자에게 듣는다.

 

▲ 정순덕의 증언에 의하면 2천명(?)이나 되었다는 57사단은 대성골 전투로 불과 60여명 남았다. 

잔존 병력은 2개 중대로 편성되었고 부대장 이영회는 부상으로 그때까지 복귀하지 못해 참모장 박창선이 대신 이끌었다.

정순덕의 중대장은 삼천포 출신의 임학주였다. 정순덕은 중대부(본부) 소속으로 간병, 취사, 환경정리를 담당하였다.

 

1952년 1월 17일, 각지에서 쫓기던 빨치산들이 이 대성골로 밀리고 밀려 집결하던 날 토벌군은 의신에서 종일 야포로 이곳

을 때렸고 이후 미군 비행기는 휘발유통을 떨어뜨려 이곳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한다.

그 이후 남부군은 급격한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급기야는 완전 토벌되고 말았다.

 

▲ 원 대성동마을.. 집터가 있었던 축대가 보인다.

지리산 전투 중 가장 처절했다는 대성골전투, 그 대성동마을에 드디어 도착했다.

1968년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전국 모든 화전민들을 산 아래로 강제 이주시켰고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1970년 저 아래 대성마을로 내려갔다고 전한다.

 

▲ 원 대성동마을 쉼터.

 

▲ 대성동마을 2.1km 지점에서부터...

 

▲ 시작된 너덜겅은 마음까지도 완전히 너덜거리게 만든다.

 

▲ 대성동마을에 사람들이 쓰던 물건 흔적을 만난다..

 

▲ 재만 남은 대성동마을... 지리산 대성동휴게소, 일명 ‘대성주막’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한때는 산꾼들에게 막걸리한잔으로 피로를 풀었던 곳인데...ㅠㅠ~

 

▲ 불에 탄 흔적들... 2023년 3월에 발생한 산불로 대성계곡 일대가 모두 타버린 상태다.

 

▲ 지금도 혼자 거주 중인 임현종씨가 밭일을 하고 있다.

그는 4대째 여기서 살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집 근처에 후박나무 수백 그루를 심어 유명한 지리산 산림왕 고 임봉출씨다.

 

산사면에 있는 집들은 다 타서 무너졌고 계곡 쪽 가옥 한 채만 멀쩡했다.

 

▲ 개집 같기도 하고..

 

▲ 대성동 동구밖에 노송만이 그날의 아픔을 알고 있겠지..

 

▲ 벌때 습격사건으로 출동한 소방대원들.. 회원들 중에 누군가가 119에 신고를 하였다고 한다.

아무런 탈이 없어야 될텐데..

 

▲ 두번째 팀..

7방인가 9방인가 쏘였다는 분과 사고경위 청취..

 

16시 30분 : 의신마을 1.8km.

 

▲ 산불에 탄 흔적들..

그나마 다행인것은 소나무는 타버렸지만 활엽수는 1여년만에 자연적으로 회복된 듯 하고..

소나무림이 적고 활엽수의 밀도가 높아 숲 내부에는 바람이 세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축구장 170개에 달하는 면적이

불탔다고 알려졌는데 그당시 산불 진화 과정에서 진화대원 1명이 숨지기도 했다는데 다행히도 산불 발생 하루만에  비가

내리면서 진화가 되었다고 한다.

 

▲ 길은 착한 오솔길이지만.. 지친 발걸음 때문인지 가도가도 줄어들지 않는 느낌이다.

 

▲ 세번째 소방대원팀..

 

▲ 꽃무릇..

지금 전남 영광 불갑산에는 꽃무릇축제가 한창이다.

 

▲ 세석탐방로 입구까지 구급차가 올라 와 있다.

 

 

▲ 항일투사 30인 의총(義塚).

한일 강제병합이 있기 2년전 1908년 2월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온 몸으로 저항하며 결사항전하다 최후를 맞이

한 항일 무명 영웅 30인이 이곳 지리산 화개면 의신마을 공동산에 잠들었다.

 

이곳에 묻힌 항일의병은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맹활약하다 1908년 1월말 의신마을에 도착했다.

의병들은 마을 서당에 본부를 두고 배명고지(지리산역사관 뒤 능선)에 초병(哨兵)을 세우고 벽소령 길목을 경계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게 베 한 조각을 나누어 주면서 토시와 발등덮개를 만들게 하고 음력설을 쇠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 2일(음력 설날) 아침 승려로 가장한 일본군이 절골(용화정사 터)에 있는 마을 주막으로 오는 것을 발견하고

발포하였으나 일본군의 유인작전이었다. 일본군(변장대)은 마을에 침투하여 의병을 향해 기습공격을 하였다.

항일의병 80여명은 일본군에 맞서 이틀간 격렬히 저항했지만 일제의 막강한 화력 앞에 의병 50여명이 전사하고 생존자는

산청쪽으로 몸을 피했다. 이후 의신마을 주민들은 항일 의병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제 등, 진평전 및 계곡 산허리에 묻어

주었으며 이곳 30명의 무명 항일영웅들의 묘는 그 중의 하나이다.

 

▲ 의신마을에서 세석까지 9.1km 오름길은 추천 하고 싶지 않은 길이다.

 

▲ 마을길따라 바로 올라가면 서산대사가 출가하였다는 원통암가는 길이다.

 

▲ 마을에도 구급차가 3대가 와 있다..

 

▲ 서산대사길..

편하고 힐링의 길이다. 2017년에 서산대사길과 원통암을 다녀왔었다.

 

▲ 의신(義信)마을 유래.

선인들의 말씀과 기록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 길지(吉地)로 십승지지(十勝之地)가 있는데, 지리산(智異山)에는 청학동

(靑鶴洞)이 있다. 지리학자들의 기록이나 구전에 의하면 지리산 덕평봉(德平峰) 회포(回包) 40여리라고 하니 오늘날 대성리

전역이 청학동 범위에 위치하는데.. 그 중에 의신마을은 가장 길지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 의신동천..

 

17시 14분 : 의신(義信)마을 선학정 산행 종료.

의신마을로 하산이 전부 완료되면 약800m 거리에 있는 의신마을 아래쪽 주차장에서 버스가 올라오기로 함..

 

▲ 후미팀이 내려 올동안 트랭글을 정리하고..

후미에 섰던 산대장님도 내려 오고 벌에 쏘인분들도 다행히 말벌이 아니어서 위급한 상황은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소방대원들도 전부 철수하면서 벌쏘임 사건은 일단락 되고.. 하산주장소로 이동.

 

▲ 덕장 회장님의 배려로 씻지도 못하고 하산한 회원님들을 위해서 물 좋은곳에서 잠시 정차.. 역시나 덕장다운 배려다.

▲ 18시 09분 : 화개장터 인근 식당..

 

▲ 산대장님의 건배..

 

▲ 이어서 회장님의 건배..

용장(勇將)밑에는 약졸이 없고.. 덕장(德將)밑에는 배신자가 없고.. 지장(智將)밑에는 잔꾀 부리는 사람이 없다" 라는

말이 있다.. 한데.. 용(勇)과 덕(德).. 그리고 지(智) 까지 갖추었으니 화랑산악회의 홍복이라면 홍복이다.

 

모든 회원님들의 무사무탈..

산악회 회장으로서는 최고의 하루일 것이다.

2024년 09월 01일(일).

속리산국립공원 도명산 : 충북 괴산군.

 

산행코스 : 화양동주차장-운영담-화양3교-첨성대-515봉-도명산-마애불-학소대-와룡암-능운대-만동묘-화양동주차장.

산행시작 : 화양동주차장  10시 59분.

산행종료 : 화양동주차장  15시 57분.

전체거리 : 약8.93km.

전체시간 : 04시간 57분.

운동시간 : 04시간 01분.

휴식시간 : 00시간 56분.

 

10 : 59  화양동주차장.

11 : 16  운영담.

11 : 25  화양3교.

11 : 28  첨성대.

12 : 24  515봉.

13 : 52  도명산.

14 : 10  마애불.

14 : 55  학소대.

15 : 02  와룡암.

15 : 12  능운대.

15 : 25  만동묘.

15 : 57  화양동주차장 종료.

 

 10시 59분 : 속리산국립공원 화양동주차장... 2009년 10월에 왔어니 15년만에 이자리에 다시 왔다.

 

 주차장휴게소도 15년전보다 깔끔하게 단장 되어 있다.

 

도명산탐방지원센터앞을 통과하여 화양구곡쪽으로..

 

기암이 약250m지점의 그자리에 옛모습 그대로 앉아 있다.

 

우리의 솔잎님들이 지나간 길가에.. 가을이가 한점.. 내려 왔다.

 

화양천을 건너는 화양2교에서 바라본 상류쪽의 운영담 방향.

화양구곡은 조선 영조가 "송자(宋子)"로 칭한 우암 송시열(1607~1689)이 1666년부터 1688년까지 머물면서 산수를

즐기며 제자에게 강학했던 곳이다.

 

 11시 16분 : 화양구곡중에 제2곡인 운영담(雲影潭).

 

10배 줌으로 당겨온 운영담(雲影潭) 각자(刻字).

운영담(雲影潭)은...화양천 계곡에서 빠르게 흘러내려온 맑은 물이 잠시 고여 구름의 그림자를 맑게 비추며 숨을 가다듬은

후에 다시 흘러간다는.. 주자(朱子)의 시(詩)인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의 뜻을 따온 ‘운영담’이라는 글씨

바위에 새겨져 있다.

 

화양구곡중에 제3곡인 읍궁암(泣弓岩).

계곡을 향해 누운 펑퍼짐한 이 바위 위에서 우암 송시열이 효종임금이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41세 젊은 나이에 승하

하신것을 슬퍼 하며 한양을 향하여 활처럼 엎드려 통곡하였다고 하는 곳이다..

효종 임금을 기리며 매일 새벽과 효종의 제삿날인 5월 4일에 엎드려 곡을 했다고 한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외로운 충정만 하늘에 닿았도다.

새벽이 되도록 통곡만 하다가..

또 다시 엎드려 무릎 끌어안고 탄식하노라~.

 

권상하(權尙夏)의 시(詩)...

읍궁암(泣弓岩)..

 

하마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젊었을때 이곳을 지나는 길에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하여 만동묘지기(혹은 지역 유생)에게 패대기를

당하고 얻어맞는 등의 고초를 당했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화양동서원과 만동묘..

하마비 오른쪽에 있어며... 하산길에 들러볼 생각이다.

 

 화양동서원 묘정비(廟庭碑).

묘정비는 서원에 세우는 비로.. 사원을 건립하게 된 동기와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해 두는 비석이다.

영조 23년(1747)에 세웠으며.. 이재가 글을 짓고.. 유척기가 글씨를 썼다. 묘정비는 서원철폐령이 내려진 후 일본인들이

고의로 글자를 지우고 땅에 묻어버렸다. 일본인들이 글자를 모두 쪼아 없애 버렸기에 해석은 불가능하다.

이후 만동묘와 함께 복원되었다.

 

 화양천 건너편의 암서재(巖棲齊)와.. 화양구곡중의 제4곡인 금사담(金沙潭).

금사담(金沙潭)은 맑은 물과 깨끗한 모래가 금싸라기 같이 보이는 게곡속의 못이라는 의미이다.. 암서재 아래 붉은 타원형

점선안에 "금사담"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암서재 아래 화살표에..

 

금사담(金沙潭)이라는 각자(刻字)가 뚜렷하다.

 

 금사담(金沙潭)오른쪽 석벽에는...

 

창오운단(蒼梧雲斷).. 명나라의 황제가 살던 시대의 구름이 끊기고..

무이산공(武夷山空)...주자(朱子)가 살던 무이산은 비어 있다는 뜻으로 주자학의 본산인 명이 사라지고 없음을 의미한다.

 

 화양천 건너편의 암서재(巖棲齊)는..

금사담(金沙潭) 물가의 큰 반석위에 있는 서재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송시열(宋時烈)이 정계에서 은퇴한 후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화양구곡(華陽九曲)에서..

화양(華陽)이란 '중국 문화의 햇빛'이라는 뜻이다.  송시열은 이 골짜기에 작은 중화(中華:중국의 문화)를 이루려고 했다.

송시열은 이곳에 들어온 후 일상생활도 되도록 중국의 생활방식을 따르기 위해 옷도 명나라 옷과 평정건(平頂巾)을 썼다.

 

11시 25분 : 화양3교... 도명산 들머리.

 

 11시 28분 : 일행들을 먼저 보내고 화양구곡 중에 제 5곡인 첨성대(瞻星臺)를 둘러본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황하가 만 번을 굽이쳐 흘러도 반드시 동쪽을 향해 흘러간다(충신의 절개는 꺾을수 없다)는 뜻이다.

 

첨성대.

 

가운데 글씨는...비례부동(非禮不動)으로...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뜻이다.

 

대명천지(大明天地)는..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 것이고..

숭정일월(崇禎日月)은.. 조선의 해와 달도 숭정 황제의 것이라는 의미로...극치의 사대주의를 보여주는 씁쓸한 글들이고.

송시열의 숭명(崇明)사상이 고스란히 새겨진 글씨다

참고로.. 숭정(崇禎)은 북경의 경산공원에서 1644년에 자살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다.

 

지리산 상내봉의 안락문 같은 분위기다.. 반쯤 들어가다가 일행들과 너무 떨어진것 같아서 부지런히 올라간다.

 

드디어.. 계단위에 솔잎의 꼬랑자가 보인다..

 

 간식거리로 정나눔을 하는 팀들과도 만나고..

 

오늘의 괴산 날씨도 32도를 오르내린다.

도명산 2.2km남은 지점까지 올라와도 바람끼가 없다... 에어컨이 꺼진걸 보니 괴산의 전기사정이 좋지 않은가 보다..ㅎ~

 

무리하지 말자.. 다시 너럭바위에서..

 

 재충전을 하고..

 

 발 딛기가 까탈스런 너덜겅을 만나는데.. 다행히 직등이 아니고 사면으로 수평이동이다.

 

 약간의 오름을 치고올라.. 도명산에서 오른쪽의 갈미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 올라선다.

 

 515봉 된비알 오름의 시작이다.

 

 발아래 화양계곡따라 멀리 우리가 출발하였던 화양동 주차장이 보여서...

 

 줌으로 한껏 당겨 보니 산악회 차들이 제법 보인다. 화양계곡은 여름산으로 많이들 찾는 곳이다.

 

 도명산 정상이 눈높이로 다가오고..

 

 12시 34분 : 515봉 도착..

 

13시 00분 : 간간히 불어주는 그늘에서.. 점찍기가 늦었다고 아우성치는 속 달래기... 먹고 마시고..

 

 도명산 정상이 지척이다.

 

 도명산 통천문..

 

영암 월출산 천황봉의 통천문 보다는 길이가 짧지만.. 들어서니 시원한 통바람이다.

 

 최고의 연리목이 있는 사랑산과 남군자산.. 그너머로는 군자산이 버티고 섰다...

 

 솔잎의 히어로.. 윤회장님..점점 일취월장에.. 플러스 알파로 잘하고 있습니다.

 

 카페 서핑으로 솔잎을 찾아 왔다는데.. 산꾼의 포스(force)가 묻어난다.. 매달 함께 산행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산행을 해보시면.. 참~ 좋은 언니들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겁니다.

 

도명산은 국립공원 속리산에 속하여 있으며 그 중에 예로부터, 천하 절승지로 이름난 화양동계곡 남쪽을 가로 막고

서있는 명산으로 화강암의 바위봉과 기암석벽이 어울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도명산에서 마애불로 가는 내림길이 장난 아니게 가파르다..

 

14시 09분 : 도명산 낙영산 갈림길..

 

▲ 14시 11분 : 마애 삼존불.

 

 왼쪽 동떨어진 암벽에 새겨진 또하나의 불상은 5.4m로 다른 불상과 달리 돋을새김 기법으로 곡선미를 잘 보여준다.

.

석벽엔 마치 밑그림 처럼 불상이 선각(線刻)되어 있다.

삼존불 중 오른쪽 불상은 9.1m 높이에 안면 길이만 2m에 이른다. 가운데 불상은 더욱 커 높이가 14m나 된다.

 

▲ 마애불 앞의 거대한 통바위..

이 바위로 팔공산 갓바위처럼 입체형 불상을 조각하였다면.. 완전 도명산의 유명한 불상이 되었을 것이다.

 

▲ 상류에 낙영폭포가 있는 사지목골에는 매미소리도 더위에 지친듯 고요하다...

 

14시 52분 : 학소대교.

 

화양천 상류..

 

화양천 하류쪽.

화양구곡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있는 경승지로... 1974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84년 속리산국립

공원에 포함되었다. 조선 중기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은거하며 이곳의 경치가 중국의 무이구곡에 버금간다고 보고 아홉

개의 구비마다 이름을 붙이면서 화양구곡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2014년 대한민국 명승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화양구곡 중에 제8곡인 학소대(鶴巢臺).

청학이 바위 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학소대(鶴巢臺).

 

 상류에는 퇴계 이황이 거닐었다는 선유구곡이 있다..

 

▲ 화양구곡 중에 제 7곡인 와룡암 (臥龍岩).

비스듬히 계곡을 질러 뻗은 바위가 용이 꿈틀거리는 듯하여 와룡암이다.

 

▲ 와룡암 (臥龍岩).

 

▲ 화양구곡중에 제 6곡인 능운대(凌雲臺).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능운대라 한다.

 

▲ 첨성대..

 

▲ 아침에 지나쳤던 화양서원으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은... 조선 후기의 정통 성리학자로 본관은 은진으로.. 주자(朱子) 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으며,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명나라를 존중하고 청나라를 경계하는 것이 국가정책

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1689년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서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 만동묘로 들어가는 양추문..

 

▲ 송시열은 숙종15년(1689)에 사약을 받고 죽게될 지경에 처하자 제자 권상하(1641-1721)에게 명나라가 멸망한지 50년

이 지났건만,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와 의종 숭정제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라고 유언을 내리자 제자 권상하가 숙종

30년(1704) 인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화양서원내에 만동묘를 창건하고 스승의 유언대로 만력제와 숭정제의 신위를 봉안

하여 제사를 올렸다. 이후 조선 임금들도 만동묘를 융숭하게 대우하였다. 영조 2년(1726) 나라에서 만동묘에 제전과 노비

를 내려주었고 그 후에도 예조에서 90명이 돌아가며 묘우를 지키게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지원을 했다. 정조는 직접 사필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만동묘는 이후 서원 폐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받았다.

지역의 백성들에게 노역을 빼주겠다고 강요하여 돈을 받아내고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케 하고..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만행이 심했다. 심지어 거슬리는 백성을 멋대로 사형시켜도 처벌받지

않을 지경이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으니 횡포가 대단했었던 모양이다.

 

결국 고종 2년(1865)에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할때 동시에 만동묘를 철폐하고 만동묘에 소속된 재산을 국가와 지방

관청에 귀속시켰다.

 

▲ 만동묘 계단..

만동묘의 계단은 발디딤의 폭이 매우 좁고 단이 높은데, 명나라 황제가 계신 곳을 무엄하게 그냥 걷지 말고 기어서 올라

가라는 의미가 있다...실제로 올라가 보니 단은 높고 폭은 좁아서 바짝 긴장하고 조심해서 올라야 된다. 내려올때 위험하다.

 

▲ 만동묘..

만동묘라는 이름의 유래는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긴 선조의 어필 만절필동(萬折必東)을 모본하여

화양리 첨성대 바위에 새겼는데, 그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서 "만동묘"라고 하였다..

 

▲ 만동묘 시당..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화양계곡 내에 위치한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만력제)과 명나라

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숭정제)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만동묘는 사적 제417호, 만동묘정비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화양서원(화양동서원) 내부에 있던 시설로 화양서원은 서원 철폐 이후 터만 남았다가 1999년 사적

으로 지정 후 2001년부터 04년까지 만동묘와 승삼문, 송자사등 일부 건물을 복원하였다.

 

화양서원.

1695년(숙종 21)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해 권상하(權尙夏).. 정호(鄭澔) 등 노론이 건립을 주도했으며, 1696년 창건

하고 사액을 받았다. 1716년(숙종 42)에는 어필로 편액을 받았다. 서원의 명칭인 '화양'의 뜻은 중화의 정신을 널리 알린다.

라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주차장으로 가는길에 부회장님의 삼인방..

 

 15시 57분 : 화양동주차장 산행종료.

 

 

16시 50분 : 산막이옛길의 맛집.. 지난 7월에 하산식을 했던 집이다.

 

 순두부전골...

 

 회장님의 건배에 이어...

 

 직전회장님의 건배로 마무리..

금당도 2일차인 오늘의 일정은 1차로 어제 못간 교암청풍길을 일출시간에 맞추어 다녀 와서..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2차로.. 오후에는 요트선상투어를 마치고 울포항에서 15시 20분배로 나갈 것이다.

 

 05시 53분 : 세포리...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다..

금당도의 일출 시간이 06시 03분경이니... 가마바위에 도착할 쯔음이면 일출이 시작될것 같다.

 

세포리포구..

“가는 개(갯벌)”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세포리(細浦里)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세포리포구.. 지금이 밀물시간인지 물이 빠르게 들어오고 있다.

 

발풀고사리..

 

 섬도라지.. 약성이 좋은지 향기가 매우 강하다.

 

 06시 10분 : 교암청풍갈림 능선.. 혹시나 밀물에 길이 잠길까봐 가마바위부터 먼저 다녀오기로 한다.

 

 06시 11분 : 금당도에서의 일출이다.. 비견도 등허리에 올라 앉았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둥근해가 참 곱다..

 

가마바위가 보인다.

 

금당도가 선물하는 아침 일출의 햇살 받으며 피어나는 "향기나 꽃"을 아시나요..

 

향기나 꽃님들을 담는 짧은 순간에..

 

손가락 한마디 만큼 올라 왔다.

 

 교암청풍(轎岩淸風)..

가마(轎) 바위(岩)에서 부는 맑은(淸) 바람(風)은 신선지계이며 참으로 비경중에 비경이다.

 

 06시 42분 : 가마바위 끝지점..

 

교암청풍을 찾아 돌아가는 길..

 

호수같은 바다의 푸른빛.. 초록 소나무.. 기암의 조화.. 가히 절경이다.

 

교암청풍길은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교암청풍길이다.

 

교암청풍길 시작이다.

 

땅으로 분출된 마그마가 오랜 세월 동안 해풍과 파도를 얻어 맞으면서 장구한 시간이 만들어 낸 최고의 숨은 경치이자

지질학적 명소로 알려져 있다.

 

금당도 가학리의 동네 주민분이.. 동이 틀때 선상투어를 하면..

아침햇살을 받은 절벽이 붉게 물든 모습이 너무 좋다고 하더니.. 지금쯤 저 바다에서 본다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

 

교암청풍바위는 독특한 지질 현상이 잘 나타난 곳으로 지질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단골로 찾는 곳이라고 한다.

 

잘록한 허리는 세월이 파도와 바람의 힘을 빌려 깍아버렸다.

 

겹겹이 퇴적한 암벽층.. 인간은 이렇게 조각할 수 없다.

 

영겁의 세월 동안 지형의 변화와 함께 깎이고 쓸리고 패여 온갖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를 보노라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찰나의 순간을 살면서 영겁의 세월로 빚어진 이런 기암들을 두 눈으로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가..

 

 여기에서 교암청풍 절벽길은 끝이 나고 위로 올라가야 되지만.. 쉽게 올수 없는 곳이기에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간다.

 

독수리 머리같은 바위와.. 굉장히 발달한 가스층이었던가 보다 곰보투성이다.. 공기층이 빠져나간 타포니 현상이다.

 

 안내도상의 사자바위..

 

사자바위와 가마바위..

자연이 만든 걸작품에 인간이 접근하려니 대단한 집중력으로 조심해야 한다.  모두가 절벽인 길을 인간은 또..

이걸 보겠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꾸역꾸역 찾아온다.

 

 금당도에는 조선 영조때의 실학자 위백규(魏伯珪, 1727∼1798)가 금당도의 경치를 읊은 "금당별곡(金塘別曲)"이 있다.

금당별곡의 아름다운 절경 8곳을 금당팔경으로 부른다.

 

제1경이..울포귀범(鬱浦歸帆)길로..

녹음 우거지고 저물어져간 포구에 흰 돛단배 한가로이 돌아오는 한 폭의 그림 같다.

 

제 2경의.. 공산제월(孔山霽月)길은..

밝은 보름달이 공산위에 비추는 달빛아래에서 공자가 제자들과 담소를 나누었다는 이야기속의 공산제월이다.

 

제 3경은.. 사동효종(寺洞曉種)길로..

이른 새벽 적막을 깨며 들려오는 사찰 종소리의 청아함에 심취(心醉)하게 된다.

 

제 4경은..학령낙조(鶴嶺落照)의 길로..

석양은 학잠의 나뭇가지에 걸렸는데.. 붉고 붉게 비치고만 이르랴.

 

제 5경은.. 기봉세우(箕峯細雨)의 길로...

깎아지른 기암과 그 사이 나무들이 가랑비와 안개 위에 떠 있는 모습에 대한 감탄이다.

 

제 6경의.. 화도모운(花島暮雲)길은...

터질 듯한 저녁노을이 식어지면 화도의 석양은 천연색 구름이어라...

 

제 7경의..각암목적(角岩牧笛)길은..

우뚝우뚝 솟은 암석 사이로 목동의 피리소리가 신선의 노래인가.

 

제 8경의 적벽청풍(赤壁淸風)길은..

깎아 세운 듯한 괴석 적벽에 외로이 선 소나무 가지가 청풍에 한들 거리는구나..

 

교암청풍길을 올라와서 작은계산을 경유하여 세포리로 하산하기 전에 69m봉을 올라 간다.

 

내려다보는 가마바위와 청풍적벽..

 

금당도에서 키우는 백상어...

 

07시 41분 : 69m봉에서..

 

2~3분가량 안부로 내려가면 교암청풍 끝자락의 데크길로 내려 가는 길이다.

 

세포선착장과 비견도.

 

07시 54분 : 세포고개 하산완료..

 

08시 05분 : 외갓집펜션 귀환.. 아침부터 흘린 땀을 씻어내고..

 

환상의 전복죽..

누구라고는 말 안하지만..ㅎㅎ~ 아침트레킹을 안간.. 환상의 남성 두분과  여성횐님들의 작품..

 

죽 전문점에서도 이런 맛은 못 낼것 같은 맛이다.

 

10시 47분 : 선상요트투어 타는곳.

 

 정박하고 있는 요트에 승선..

 

울포항..

금당도의 인구가.. 1975년도에는 6,400명이었던 인구가 1985년도엔 4,000명으로 줄었고, 지금은 1천여 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주말이면 섬은 오히려 더 조용해진다. 면사무소.. 우체국.. 농협 등 관공서 직원들이 가족들을 만나러 뭍으로 나가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건지소는 1980년대 개설 됐었다. 한때는 부자섬이었던 곳이라 주민들의 교육열도 매우 높다.

칠순이상의 노인들도 대부분 육지에서 다양한 학교를 졸업했다.  '녹두장군', '암태도', '자랏골의 비가'를 쓴 작가 송기숙씨

와 가수 거미가 바로 금당도 출신이라고 한다.

 

 요트 운전기사..

 

10시 53분 : 울포선착장 출발.. 승선 인원은 향기나팀 14명.. 가족인듯한 3사람이 전부다.

 

 부채바위... 병풍바위쪽으로..

 

금당 8경중에 제 3경인.. 스님바위.

스님바위는 금당면 울포리에 있는 바위로 둥글고 반질반질하여 마치 스님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스님바위를 이쪽에서 보면 목도리를 하고 치마를 입은 소녀바위라고 한다..

 

 금당도의 최고봉 삼랑산(220m)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금당산(178m)..일명..쟁그랑산이라고도 한다.

 

금당 8경중에 제 2경인.. 부채바위..

 

 나도 한장 건졌다..ㅎㅎ~

 

11시 18분 : 금당 8경중에 제 1경인.. 병풍바위..

여름철에는 녹음이 우거져서 나무들이 바위를 감추어 버리기 때문에 늦가을이나 겨울에 보면 환상적이라고 한다.

 

 요트 투어 가이드... 전국의 사람들을 상대 하면서 쌓인 노하우가 보인다.

 

 병풍바위를 끝으로 되돌아가면서 약 20분 가량 선상 노래방이다.

 

 노래 몆자락에 병풍바위는 저멀리 밀려나고..

 

 비견도의 삶의 현장..

 

교암청풍이 보이기 시작한다.

 

 교암청풍길에서 돌아간 데크..

 금당 8경중에 제 4경인.. 교암청풍..

 

 교암청풍의 사자바위..

 

 금당도 주민의 말대로 아침일출때 온다면 햇살을 받은 붉은 암벽의 모습이 좋을것 같다.

 

 교암청풍 가마바위..

 

 가마바위 끝부분.. 아침에 절벽위 소나무 한그루에서 돌아 갔었다.

 

 교암청풍에 이어서.. 청풍적벽 시작이다..

 

▲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걸작 "절규" 바위라고 한다...

뭉크는... 1893년 완성된 "절규" 작품을 "미친 사람에 의해서만 그려질 수 있는"...것 이라고 했다..

무언가 할말이 있는것 같은... 이 바위 그림은 오로지... 초 자연적인 시간만이 그려 낼수 있는 작품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하려는 말이 무얼까?...

 

 금당 8경중에 제 5경인.. 청풍적벽..

 

▲ 어제.. 청풍적벽길에서 다녀갔던 송장굴이다..

 

▲ 청풍적벽길의 종착지 목섬.. 들물일때는 건너지 못한다..

 

▲ 금당도의 높고 낮은 산들이 언제 종주산행을 하러 오라고 한다.

 

▲ 소남다지 섬과 대남다지 섬..

 

▲ 소화도... 부근 바다는 수심 4~50m의 연산호군락지라고 한다.

 

 금당 8경중에 제 6경인.. 중화도 초가집바위..

 

중화도 초가집바위를 다른 방향에서 보면 트럼프 두상이 나온다고 하던데.. 기회를 노쳤다.

 

중화도 버섯바위..

 

전 축구선수 안정환이 진행하는 MBC예능프로그램 "푹쉬면 다행이야" 촬영세트장... 완도군과 1년 계약을 하였다고..

 

12시 17분 : 금당 8경중에 제 7경인.. 대화도 코끼리바위와 제 8경인 남근바위..

 

 코끼리바위 정면을 지나서 울포항으로 돌아간다...

 

어제 지나 갔던 노을적벽과 장문재...

 

 금당도에 와서 선상투어를 하지 않으면 수박 껍질만 보고 간다더니.. 정말 안보고 왔으면 후회할뻔한 절경이다..

 

13시 04분 : 금당도 중국집 남해루..

 

1박 2일의 금당도일정도 마무리 시간이 다가오고.. 유종의 미를 위해 단체 인증을 하고 섬일주 도로를 휭~하니 돌고..

 

 15시 08분 : 울포선착장에 도착하니 평화페리5호가 들어 오고 있다.

 

 15시 11분 : 울포선착장..

 

 15시 32분 : 우두항 도착..

 

거금대교를 건너서.. 대구로~..대구로..

 

물품 찬조.. 금전 찬조.. 조리 지원..

오며가며 장거리 운전 보시.. 향기나 회장님의 노심초사.. 이런 봉사와 이해심이 있었기에

2024 향기나팀의 여름 여행은 말그대로 향기나는 1박 2일이 되었다.

 

지붕없는 미술관이라는 금당도..

가보고 싶었던 금당도 투어를 무사히 마칠수 있었던건 모든분들의 하나된 마음이었다.

야등번개팀의 새로운 이름..

"향기나"라는 타이틀로 2024년 하기단합 여행겸 트레킹으로 1박 2일의 일정으로 전남 완도군의 "금당도"로 간다..

 

금당도의 행정구역은 전남 완도군 금당면이며 차우리 육산리 가학리 등 10개의 마을로 이루고.. 생활권은 고흥군 또는

장흥군이 훨씬 가까워 출항하는 배도 완도에서는 없고.. 장흥 노력항에서 6항차.. 고흥 우두항에서 4항차.. 고흥 녹동항에서

2항차 가 있다.

무인도 15개.. 유인도 3개로 이루어진 금당군도는 전라남도의 2021년에 "가고 싶은 섬"으로 뽑힌 후 문화관광 사업과

해안절벽을 끼고 도는 교암청풍길이 산꾼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섬트레킹으로 점점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고흥군 우두항에서 연안 여객선 페리호를 타고 15분이면 갈수가 있다.

 

09시 27분 : 고흥군 녹동항... 전복을 사기위해 들렀다.

 

구매는 회장님과 여성 회원님들에게...

 

고흥군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보인다. 조금후에 건너갈 것이다.

 

 09시 58분 : 소록대교.

 

 10시 13분 : 우두항 도착.

 

11시 20분배로 금당도에 들어갔다가 금당도 울포항에서 내일 오후 15시 20분배로 나올것이다.

 

페리호를 기다리는 동안 금당도의 이모저모를 숙지하고.. 주된 관심은 교암청풍길과 노을적벽길이다.

 

목적지인 금당도가 길게 누워 있는 앞으로 우리가 타고갈 평화 페리5호가 들어오고 있다..

 

원래 금당도(金堂島)라 불리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현재의 금당도(金塘島)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지명표기가 변화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이곳 일대에 금일(金日), 금당(金塘), 생일도의 금곡(金谷) 등.. 금(金)자의 지명이

많아 금이 채굴된 고사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0시 40분 : 접안 완료..

 

오늘 우리가 가는 금당도(金塘島)는 이순신 장군의 승전지다.

정유재란이 있었던 1598년, 왜군 함대 100여 척이 3도수군통제영이 위치한 완도 고금도를 공격하기 위해 거금도와 소록도

바닷길로 들어선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조선 수군은 금당도에서 출병해 지금의 거금대교와 연홍도, 고라금해수욕장 인근

에서 격렬한 교전을 펼친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넓은 바다에 유리한 학익진 전법으로 적선을 포위한 후 함포로

왜선 50척을 수장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이때의 절이도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거금대교휴게소에 승전탑이 있다.

 

 11시 12분 : 엔진 시동후 서서히 선미를 회전하더니...

 

뱃머리를 돌린디..

 

▲ 그리고는... 순식간에 우두항을 저만치 밀어 버린다..

 

휴가 기간도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 탓도 있겠지만... 폭염으로 휴일임에도 여행객이 거의 한산하다.

 

 11시 21분 : 우두항 출발 4분만에  금당도가 손에 잡힐듯 가깝다..

금당도의 최고봉은 삼랑산(220m)으로 서쪽에 솟아 있으며, 그밖에도 비교적 기복이 심한 산들이 사방에 둘러 있고 남쪽

일부지역에만 평지가 발달하여 농경지로 이용된다.

기후는 연중 따뜻하고 비가 많다. 주민은 반 이상이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다.  농산물로 쌀· 보리· 고구마· 마늘· 고추·
팥 등이 생산된다.  보리와 고구마는 생산량이 많아 농협수매가 활발하다.   연안 일대에서는 문어· 장어· 멸치· 도미· 새우

등이 많이 잡히며, 감성돔 낚시와 김· 미역· 톳· 다시마 등의 양식업이 활발하다.

 

 울포항 전경.

울포(鬱浦)의 지명 유래는..이 마을의 술맛이 좋아 울금(鬱今)이라 호칭하였으나, 울억 기미로 불리어오다가 이후 울포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1770년 조선 영조대에 인천이씨가 금일읍 평일도에서 띄배(뗏목)를 타고 들어와 처음 입주하였으며..

그후 김씨등이 이주하여 형성되었다고 한다.

 

 11시 31분 : 울포선착장.

 

여객선 매표소와 선상투어 매표소.. 금당도에 단1대뿐이라는 택시도 있다.

 

내일(25일) 오전11시로 예약한 선상투어 배를 타는 선착장도 확인하고...

 

 11시 38분 : 트레킹에 앞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먼저.. 점심식사를 하고... 노을적벽길과 교암청풍길을 트레킹후에 섬 반대편 마을인 가학리에 있는 숙소로 가기로 한다.

 

 13시 07분 : 장문재... 노을적벽길과 송장굴. 용굴이 있는 청풍적벽길로 가는 들머리다.

 

 본격적인 트레킹에 앞서... "가고 싶은섬 금당" 안내판에서 단체 인증샷.

 

그러나 오늘은..  "가고 싶은섬 금당"이 아니라 "오고 싶었던 금당"의 안내판 앞에 서니 감회가 새롭다.

 

오늘의 "향기나"의 여행겸 트레킹은.. 단합에 목적이 있기에 산행이라기 보다는 금당도의 "엑기스"만 볼것이다.

 

 댈추봉 오름길이 급오름도 아닌데.. 만만치가 않다..

오늘의 금당도 기온이 낮최고 34도는... 육지의 34도와는 다르다.. 바다속의 섬이라 습도가 매우 높다..

 

장문재에서 4분가량 올라서니 다행하게도 댈추봉으로 바로 오르지 않고 수평의 사면길로 이어진다.

 

댈추봉 전망대.

 

바로 앞에는 가마바위 능선이고.. 두번째는 비견도가 악어처럼 기어가고.. 그 너머로는 거금도다.

 

세포마을로 이어지는 물길이 지금은 만수기로 가득찬 우유빛갈의 수면이 잔잔하고.. 앞쪽의 바위는 초가집처럼 보인다.

 

댈추봉전망대에서 노을적벽으로 가는 능선은 거의 수평이동이지만 해송들의 키가 낮아서 그늘을 만들어 주지 못한다.

 

13시 31분 : 세포전망대 갈림길.. 가마바위를 가까이에서 볼수 있는 곳이다.

 

노을전망대.. 바로 아래에는 적벽암릉이 병풍처럼 서있다.

 

 노을적벽길의 시작이다.

 

 

노을적벽투어를 마치고 송장굴과 용굴로.. 목섬은 통과다.

 

여기가 송장굴인가보다.. 오랜 옛날 송장을 여기에 안치시키면서 송장굴이 되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해안가로 내려 가면 저기 어딘가에 용굴이 있겠지만.. 여기서 되돌아 올라간다.

 

15시 26분 : 숙소인 외갓집펜션에 도착..

노을적벽길에서 교암청풍길까지 가보려고 했지만.. 고온다습한 날씨로 더이상은 무리라 판단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시원하게 땀을 씻어낸후 환복을 하고..

 

솔잎의 윤회장님이 특별 찬조해준 술이다.

 

녹동항에서 공수한 싱싱한 전복회가 술을 부른다.

양주.. 데낄라.. 쐬주.. 맥주.. 술종류만 9가지라고 했는데.. 모리거따~..ㅎ

 

방안에서의 전복회 파티에 이어서.. 야영장 기분을 내어 본다.

 

가학마을..

장흥에서 1620년 무렵 이씨와 정씨가 처음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는 가학리는 학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김양식이 매우 활발했던 지역이지만 지금은 톳과 미역 그리고 다시마 양식을 많이 하고 있다.

 

가학마을앞 해변.. 지금은 날물이라 물이 빠졌다.

김 하면 금당도 가학리인데 1974년 가학리 인근 무인도에서 최초로 미역양식을 시작했으며.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김양식이 호황을 누려 과거 일본으로 수출까지 하였다. 지주식 김양식으로 최적지이기 때문이다.

당시 가학리의 한 주민은 초등학교 선생으로 부임한 동생을 설득해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김 양식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김농사가 수지맞았다는 것이다.  금당도는 30여년 전까지 김 생산량과 품질면에서 으뜸으로 평가되었다.

한때 13곳이나 됐던 김 공장은 지금은 3곳으로 줄었고 그나마 "물김"도 다른지역에서 들여와 가공만 한다고 한다.

호황을 누렸던 70년대에는 술집이 4곳이나 있었고, 집집마다 젓가락 장단을 맞추는 작부가 3~4명씩 있었다고 한다.

이제 그 호황을 누리던 김 양식은 사라지고 미역과 다시마, 톳으로 교체되었다.

미역철은 4월 20일까지 이어지고,  5월부터는 다시마를 수확하고..  6월부터는 톳이 나온다.

 

우리 "향기나" 회장님의 섭외수준이 탁월합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와글와글 호텔"의 수석 쉐프님을 초빙해서 최고의 향기나는 먹거리를 만들어 주네요.

 

전복과 돼지의 만남..

 

홍여사님은..외갓집 사장님에게.. 무슨 말을 하였는지..

 

외갓집 사장님이 저렇게나 포복절도를 합니까?..ㅋ~

 

이것이 향기나의 저력이다..

 

일몰시간인데.. 해무로 시야도 좋지 않은데.. 빨리 나오시오..ㅎㅎ~

 

들냥이들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요놈들은 여행객들이 펜션에서 하는 일(먹거리)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가학리의 밤도 깊어가고..

 

향기나팀들도 하루의 행복감으로 밤은 더욱 깊어간다.

2024년 08월 18일(일).

주왕산국립공원 절골계곡 : 경북 청송군.

 

산행코스 : 주산지입구-절골탐방지원센터-신술골입구-반환점-운수암절터-주산지입구.

산행시작 : 주산지입구  11시 28분.

산행종료 : 주산지입구  14시 36분.

전체거리 : 약7.14km.

전체시간 : 03시간 08분.

운동시간 : 02시간 08분.

휴식시간 : 00시간 42분.

 

11 : 28  주산지입구.

11 : 38  절골탐방지원센터.

12 : 22  신술골입구.

12 : 28  반환점.

13 : 13  운수암터.

14 : 19  탐방지원센터.

14 : 36  주산지입구 종료.

 

절골탐방지원센터 주차장의 협소로 대형버스진입금지라서 주산지입구에서부터 탐방지원센터까지 걸어서 간다.

 

연일 한 여름의 폭군인 염제(炎帝)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이곳 청송의 날씨도 34도다.

 

 11시 38분 : 주왕산국립공원 절골탐방지원센터.

이곳은 2009년 9월 13일에 처음으로 찾은 곳이니... 15년만에 다시 섰다.

 

절골입구의 대문현판에 운수(雲水) 길이라고 되어 있다.

"절골"이라는 유래는... 옛날 계곡속에 "운수암"이라는 절이 있어 절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절골계곡은 2017년도에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선정한 국립공원 힐링로드 10선에 선정되었던 곳이다.

절골계곡의 맑은 계류를 기대했었는데.. 가뭄으로 물길이 끊기고 메말랐다.

 

 그럼에도 올해의 가을 단풍은 그 어느해보다 고울것 같다.

 

12시 28분 : 대문다리 가기전의 바람길이 좋은 곳에서..

 

권이사님이 준비한 잭 다니엘을 즐기며 쉬었다가 원점회귀하기로 한다.

 

▲ 운수암터 안내문..

운수암은 조선시대 인조 때 창건 되었다고 한다.

운수암이라는 이름은 200년 전 청송 출신의 선비 서원모의 책 "주왕산지"에 등장한다. “계곡십리 길이 끝나는 곳에 평탄한

언덕이 하나 있으니 바로 암자가 위치한 곳이다.”라고 되어 있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돌아가는길에..

 

▲ 지금의 솔잎산악회를 너무나 잘 운영하고 있는 회장님팀을 만나 젊은 에너지와 함께 한다..

 

▲ 버들치.

우리나라 전국의 강이나 계곡수에서 흔히 볼수 있다.

전북 지역에서는 버들치를 조선 중기의 고승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1633)와 연결짓는 전설이 전한다.

전설에 따르면, 진묵이 물가를 지나가는데 청년 유생들이 물가에서 버들치를 잡아 솥에 끓이는 참이었다. 청년들은 지나

가던 진묵을 불러놓고는 억지로 물고기를 먹으라 강요하였다. 마지못해 진묵이 먹으니 이번에는 "중놈이 고기를 먹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하면서 놀리는데, 진묵은 "승려인 내가 어찌 살생을 하리오? 도로 산 채로 내놓으리다." 하더니 허리춤을

내리고 큰 일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버들치들이 산 채로 나와서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때문에 버들치를 전라도 지역에서는 '중고기' 또는 '중태기'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진묵대사의 신통력을 강조하면서도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시대상을 함께 보여주는 전설이다.

 

▲ 가을이 머지 않은것 같다..

 

 

 14시 36분 : 주산지 입구 산행종료..

 

 

▲ 마평교 쉼터.

청송군 주왕산면 지리 마평교 쉼터에서 하산식.

 

▲ 윤회장님의 건배..

 

▲ 이어서 산대장님의 건배.

 

▲ 청송이 고향인 선임자문님의 건배를 끝으로..능이 찹쌀유황닭백숙으로 여름 보신...

 

▲ 아니온듯 깨끗히 정리하는... 솔잎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2024년 08월 15일(목).

삼성산. 용봉. 마성산 : 충북 옥천군.

 

산행코스 : 삼양리철도교-삼성산-용봉-마성산-사목재-4코스-자연휴양림-방문자안내소.

산행시작 : 삼양리철교  09시 53분.

산행종료 : 휴양림방문자안내소  15시 26분.

전체거리 : 약10.8km.

전체시간 : 05시간 34분.

운동시간 : 05시간 08분.

휴식시간 : 00시간 25분.

 

09 : 53  삼양리철도교.

10 : 21  삼성산.

11 : 22  용봉.

13 : 25  마성산.

14 : 04  사목재.

14 : 26  4코스 탈출.

15 : 09  자연휴양림.

15 : 26  방문자안내소 종료.

 

09시 53분 : 삼양리 철도교.

 

주민들이 많이들 이용하는 동네산답게 안내판과 신발먼지털이도 잘 설치되어 있다..

 

급하지 않은 완만한 경사를 4~5분 가량 오르면..

 

삼성산 안부에 올라서고 등로는 주능선으로 이어 진다..

 

성터 흔적.

성터 안내문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돌무더기다.

 

백제와 신라간의 전투 중 가장 치열하였다는 관산성전투의 위치가 고리산이라는 설과 삼성산이라는 설이 있어

옥천향토사쪽에서는 어디가 관산성이라고 정하지 않아 이 곳을 삼성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남성골에서 고구려산성이 발견이 되고.. 대전의 월평산성 발굴에서는 백제성터 밑부분에서

고구려 토기가 발견이 되었는데.. 예산상의 문제로 발굴을 중지했다고 한다.

또한 대전 복용동 당산마을 유적 발굴과정에서  마을이 한꺼번에 화재로 인하여 파괴된 흔적이 발견이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고구려 남하정책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하여 마을이 불 타버렸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관산성은 바로 코앞까지 내려온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기 위해 약 486년을 전후로 나제동맹을 근거로 백제 땅에 신라가

만든 산성일 것이라고 추측을 한다.

 

 10시 21분 : 삼성산.

동국여지승람에 이 산에 3개의 성이 있다고 하여 삼성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바위도 세 조각으로 되어 있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관산성전투는 백제와 신라 간의 전투 중 가장 유명하며 또 기록상으로 삼국시대 전투 중 가장 자세

하게 기록된 전투다. 흔히 백제 성왕의 죽음으로 잘 알려졌다.  4세기 후반 때처럼 백제, 가야, 왜국 대 신라의 적대 구도가

다시 부활하였고,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후반 신라의 삼국통일까지 이어지는 후기 삼국 시대의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친

매우 중요한 전투다.  554년 7월, 관산성에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 건곤일척의 결전이 벌어진다.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아 국가 중흥을 이루려는 백제와 한강 유역 일대를 장악하여 한반도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신라가 국운을

걸고 맞붙은 싸움이었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9,600명이 참살되었고 말 한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전투는 신라의 승리로 끝났고, 이 전투에서 백제 26대 성왕은 적군에게 목숨을 잃었고 약 3만 명의 백제군도 전사하였으며,

120년간 유지되던 나제 동맹이 깨어지게 되었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 패배의 후유증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반면 백제를 패퇴시킨 신라는 사방으로 영토를 넓히며 삼국 통일의 기반을 구축한다.

 

▲ 신라에 붙잡힌 백제 성왕의 목을 하급병사에게 베라고 한것도 부족하여 신라는 성왕의 목을 신라 왕궁 북청의 계단 밑에

묻고 신라 귀족들이 모두 밟고 지나가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고, 나머지 몸은 백제로 반환되었다.

 

이에 분노한 백제측에서 기병을 이끌고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지만.. 성왕이 죽은 구진벼루 위쪽 관산성 아래에서 대패를

당하게 된다. 이후 의자왕때 백제군이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한후 김춘추가 가장 사랑했다던 막내딸과 사위의 목을베어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보내 성왕의 복수를 하게 된다. 결국 김춘추는 그 일로 한을 품고 굴욕을 참아가며 당나라의 협력

을 얻어와 백제를 멸하게 된다.

 

▲ 관산성전투 참고도.

백제 성왕을 붙잡아 죽인 전공을 세운 장군 김무력은 이후 초고속 승진을 한 기록을 여럿 확인할 수 있다.

551년 단양 신라 적성비나 553년 7월 《삼국사기》의 신주 군주로 김무력을 임명할 때 김무력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여섯째

등급인 아찬이었는데, 555년 세워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나 561년 창녕 척경비에서는 3번째 등급인 잡찬으로 관등이

3등급 승진했다. 거의 약 2년 만에 3관등 승진인데 신라의 다른 기록을 봐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3단계 승진은 거의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승진이다. 관산성 전투에서 활약한 전공을 인정받은 듯하다.

 

▲ 용봉을 넘어 마성산으로 가는 능선길.

이 능선이 관산성 전투가 벌어지던 백제 성왕시절의 신라군 최전방 라인 이다.

 

▲ 국사봉..

삼국시대라면 백제땅이다.

 

▲ 식장산..

건너편 능선은 백제의 최전방 라인인.. 식장산이 코 앞에 있고 그 너머가 바로 대전이고 보면 대전 옆의 백제의 구도인

공주(웅진)과 새로운 도읍인 부여(사비)에서 멀지 않은곳 이니 만큼 백제로써는 한치도 더 이상 물러나서는 안되는 절대

사수의 지역인 셈이다..

 

▲ 용봉 오름길에 바라본 옥천읍 전경..

옥천의 신라시대 지명은 고시산군 이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상주의 관성군으로 바뀌었다가 고려시대에 옥주(沃州)를

거쳐 조선시대에 옥천으로 변했다고 한다. 옥천(沃川) 이라는 이름은 강물이 풍부하고 토양이 기름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옥주가 옥천으로 변한것은 조선 태종때의 일인데, 계수관 제도로 인하여 각 지역의 주요 거점 도시만 주(州)를

사용하도록 하고 기타 고을 주(州) 자가 들어가는 다른 도시는 모두 산(山) 이나 (川) 으로 변경 하도록 했다고 한다.

당시 경상도에 속하던 옥주는 태종의 명으로 보은, 황간, 영동, 청산과 함께 충청도로 소속 변경을 하게 되었는데 이미

충청도에는 주요 거점도시로 충주, 청주, 홍주, 공주가 있어 그 이름을 유지했고, 옥주는 옥천이 되었다고 한다.

 

▲ 멀리 도덕봉이 보인다.

예전에는 도둑들이 극성을 부려 도둑봉 이라 불리다가 도덕봉 으로 고쳤다고 한다.

대전 수통골에 있는 도덕봉과 이름의 유래가 똑 같은걸 보면 전국의 도덕봉이란 그 고상한 이름과 달리

대부분 도둑들의 소굴이 이쁜 이름으로 포장 되었을 듯 싶다...

 

11시 22분 : 용봉.

 

▲ 용봉까지는 선명하던 길이었는데... 마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흔적이 희미하다.

 

11시 45분 : 동평성터.

 

▲ 11시 22분 : 성재.

옥천읍 마암리로 내려가는 탈출로다.

 

조여사님의 작품...

밑에서 찍어 드렸다고 한컷 해주시네요.. Give and Take...기브 앤 테이크.. 조여사님 감사합니다.ㅎㅎ~

 

바위지대를 넘어서면 오른쪽으로 옥천군 군서면 평야지대가 보이는데.. 바로 그 평야지대 끝에 현재 지도상에 "말동산"

이라고 되어 있는 성티산성이 있다. 당시 백제의 기마병이 주둔을 했던곳으로 백제의 성왕이 고위 관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전장을 지휘했던 곳이다. 이곳의 백제 기병을 상대하려고 삼년산성에서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 장군의 기병이 내려와

구진벼루(충북 옥천군 군서면 월천리)에 숨어있던것인데, 그걸 알리없는 성왕은 늘 다니던대로 고리산에서 백제의 주력을

이끌고 있는 태자 "부여창"을 만나러 가다가 잡혀서 황당한 참살을 당하게 된다.

 

 마성산성 흔적..

 

마성산 정상.

컨디션 난조로 마성산 정상을 패쓰 했는데.. 김더덕님이 보내주셨다.

 

 마성산 정상의 돌탑... 김더덕님의 작품..

 

마성산성 안내문... 김더덕님의 작품이다..

 

마성산 하산길에 바라본 장령산..

장령산(壯靈山 : 656m)은 장룡산(壯龍山)이라고도 부른다.

충청북도 옥천군의 군서면, 이원면, 옥천읍 경계에 있는 산이다. 

『한국지명총람』에 '장룡산(壯龍山)'이 기록되어 있으며, 산에 '용바우'라는 바위와 '용암사(龍岩寺)'라는 사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지명의 유래가 소개되어 있다. 현재는 장령산 자연 휴양림 지역으로 유명하다.

 

▲ 어느새 식장산도 멀어져 간다.

 

14시 04분 : 사목재.

사목재는 옛날 군서 사람들과 금산 사람들이 옥천읍을 오가는 주요 이동로 였다.

사목재란 이름의 유래는 옛날 이곳에 도둑이 많아 이 고개를 넘으려면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넘어라.. 라는 의미와..

용암사 스님들이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며 넘었던 고개 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사목재 장령산 들머리.

오늘따라 컨디션 난조로.. 더 이상 장령산으로 진행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또한.. 장령산은... 천태산. 대성산. 장령산.  마성산을 잇는 일명 "천.성.장.마"라 하여 약25.6km를 이어가는 종주능선이다..

이중에 천태산. 대성산은 올랐는데 삼성산.. 용봉.. 마성산이 미답산으로 남았었는데.. 오늘 그 마무리가 되었으니..

여기서 임도를 따라 하산 하기로 결정 한다..

 

이길은 장령산 등산로중에 "4코스"에 해당하는 길로.. 오늘로써 세번째 내려 가는 길이다..

 

3코스 접속지점..

 

장령산 자연휴양림을 지나서 주차장에 왔는데 산이좋아의 애마가 보이지 않는다.

회장님께 전화로 문의 하였더니 휴양림측에서 대형버스 진입금지로 한곳에 모여 있다가 차를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15시 26분 : 휴양림 방문자 안내소에서 산행 종료.

 

버스가 올때까지 대기하는 동안 트랭글을 정리..

 

산이좋아산악회 회장님의 건배.

 

 이어서 김고문님의 건배.

 

화랑산악회 회장님까지 건배의 잔을 들고~.. 일배일배부일배~..

 

옥천표,, "장군녹두삼계탕"

,

,

,

,

,

중간에 탈출하는 바람에 빼먹은 장령산 코스를 과거의 사진을 부록으로 이어 간다.

 용암사 가는길..

 

▲ 용암사 대웅전.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이다.

용암사는 서기 552년 신라 진흥왕 13년에 의신조사가 속리산에 법주사를 창건하기 저에 이곳의 산세를 보고 감탄을하여

절을 세웠다고 한다. 사찰의 규모가 원래는 상당하였는데, 임진왜란때 불타고 간신히 명맥만 유지 해오다가 근래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중건 되었다고 한다. 용암사라는 이름은 경내에 용처럼 생긴 바위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

이 파괴 하였다고 하며 신라 마의태자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려는 아버지를 떠나 금강산으로 가다가 용암사에 들려

한동안 머물면서 용바위에 올라 서라벌이 있는 남쪽 하늘을 보며 통곡하곤 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대웅전에는 본존불인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고, 그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1880년 복장을 열었을 때 '순치 8년 신묘년'에 만들어진 다라니경이 발견됨으로써 이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조선 효종 2년(1651)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 보물 제 1338호 용암사 쌍석탑.

 

▲ 마애불은 바위의 중간, 마치 공중에 뜬 것같은 형태로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언제 칠했는지 모르지만, 마애불에는 붉은 채색을 칠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 운무전망대..

운무대는 구름이 춤추는곳이고.. 운해가 아름다운곳이다.

특히..운해와 어우러진 일출이 아름답다고 소문난곳이며.. CNN이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50곳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곳은 낮과 밤 기온차가 큰.. 봄철과 가을철이면 운무가 짙게 내려앉아 아름다운 운무해돋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 일명 "틈새바위".

 

▲ 정면에서 바라본 거북바위.

 

▲ 잘생긴 거북바위.

 

 

▲ 왕관바위 틈새를 빠져나와..

 

▲ 마주선 왕관바위..

 

▲ 장령산 정상.

장령산은 장용산으로 불리다가 옥천군에서는 옛날부터 주민들이 부르던 장령산으로 바꾸어 달라는 군민의 희망에 따라

국립지리원 중앙지명위원회에 개명을 신청하여 1995년 5월 1일에 장령산으로 변경되었다.

 

▲ 5코스 데크길의  2전망대.

 

▲ 전망대에서 바라본 금산의 진산 "서대산".

 

▲ 중간의 사목재에서 탈출하는 바람에 못갔던 장령산 길을 과거의 사진으로 이어 보았다.

2024년 08월 11일(일).

주지봉. 문필봉 : 전남 영암군.

 

산행코스 : 죽정마을-양사재.문산재-양인석상.책굴-월대암-죽순봉-주지봉-문필봉-회춘능선-왕인박사유적지주차장.

산행시작 : 죽정마을  09시 16분.

산행종료 : 왕인박사유적지  15시 05분.

전체거리 : 약6.71km.

전체시간 : 05시간 51분.

운동시간 : 04시간 43분.

휴식시간 : 01시간 07분.

 

09 : 16  죽정마을.

09 : 29  지침바위.

09 : 30  양사재. 문산재.

09 : 34  왕인석상. 책굴.

09 : 43  월대암.

10 : 50  죽순봉.

11 : 19  주지봉.

12 : 34  문필봉.

13 : 41  똥바위.

14 : 02  미로바위.

15 : 05  왕인박사유적지주차장 종료.

 

 04시 30분 :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오늘은 말레이시아 키나발루원정을 주관했던 이대장님이 산악회와는 별도의 기획신행으로 전남 영암군 월출산국립공원

자락의 주지봉.. 문필봉으로 가는 날이다... 승차시간이 반월당에서 05시 10분이다.. 지하철 시간도 아니고..

가까운 거리라서 택시를 타기도 그렇고... 걷기로 한다.  새벽에 달구벌 대종을 보며 걷는 길도 괜찮네~..

 

 09시 16분 : 전남 영암군 죽정마을 도착.

 

구림천 목교를 건너가면...

 

이 길은 국립공원 월출산 둘레길인 "기찬묏길 2구간"과 주지봉등산로가 겹치는 구간이다.

 

09시 27분 : 왕인박사 유적지로 통하는 기찬묏길 2구간 갈림길.. 주지봉길은 임도를 따라 직진이다.

 

지침바위.

주변에 자생하던 닥나무를 채취하여 이 바위에다 놓고 찧어서 종이를 만들었다고 하여 지침바위(紙砧岩)라고 부르고 있다.

 

닥나무는 한방에서 열매를 양기부족.. 수종의 치료제로 쓴다. 어린 잎은 식용한다.

옛날에는 닥나무 껍질의 섬유로 저포(楮布)라는 베를 짰다.

닥나무를 종이 원료로 사용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인데 조선시대에 본격화되어 닥나무 재배를 장려하였다.

줄기를 1∼2m 길이로 잘라 밀폐된 솥에 넣고 증기로 두 시간 정도 찐 다음 꺼내어 껍질을 벗긴다.

이것을 그대로 말린 것을 흑피(黑皮)라 하고, 흑피를 물에 불려서 표피를 긁어 벗긴 것을 백피(白皮)라 한다.

흑피는 하급지의 원료로 쓰이고 백피는 창호지, 서류용지, 지폐 등의 원료로 쓰인다.

 

 양사재. 문산재 입구인데.. 공사를 하는 모양이다.

 

좌측은 양사재(養士齊)이고. 우측은 "​학문이 산처럼 쌓인 곳" 이라는 뜻의 문산재(文山齊)인데 보수공사중이다.

문산재(文山齊)는 왕인(王仁)박사가 공부했던 서당 터로 이곳에서 큰 인물이 많이 나왔다고 조선시대에 문을 연 서당이다.

1688년 구림 대동계의 서당으로 건립되어 이용되다가 1966년에 철거되었다.

 

양사재(養士齊)는..

백제 때 왕인이 담소를 나누었던 장소로 전해지기도 하며, 조선 시대 구림 대동계의 서당으로도 이용되었다.

1966년에 문산재와 함께 철거되었으며, 왕인 박사 유적지로 지정되면서 1986년에 중수되었다.

 

 양사재(養士齊)를 올라서면.. 왕인석상과 책굴로 가는길을 가르키는 표지목이 보인다.

 

09시 34분 : 왕인석상(王仁石像).

왕인박사의 후학들이 일본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초빙으로 상대포(上臺浦)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나간 스승을 그리워

하며 세운 왕인석상은 박사가 배를 타고 떠났던 상대포구쪽을 바라보고 있다.

책굴옆의 왕인석상은 문수상, 문수암이란 별칭으로 마을에 구전되어 왔다. 법의를 입고 양손을 소매에 넣어 배 앞에 가지런

하게 새겨놓은 입상으로 직사각형 돌에 조각되었다... 표현으로 보아서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 된다는데 "왕인석상"

이라는 이름은 근래에 붙여졌다고 한다.

 

▲ 책굴(冊屈).. 왕인석상(王仁石像) 오른쪽에 있다..

 

▲ 책굴(冊屈)입구..

왕인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공부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천연 석굴에서 들어가 학업에 전념했는데,

왕인이 책을 읽던 굴이라해서 후세 사람들이 책굴이(冊窟)이라 불렀다. 폭2.5m, 길이7m, 높이5m 정도의 직사각형 굴이다.

이곳에서 학업에 정진한 왕인은 18세에 오경박사(五經博士)에 등용되었다.

오경박사(五經博士)란... 백제에는 여러 전문분야에 박사들이 있었는데 주역(周易)..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춘추(春秋)등  경서(經書)에 능통한 사람을 말하며 귀히 여겼다.

 

▲ 책굴(冊屈)을 올라서면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있다.

책굴은 상부가 뚫려있고 석상도 비바람에 노출되어 외부의 암벽에 누각형태로 책굴이 보호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책굴과 석상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 책굴 암벽 위에서 바라본 구림마을과 왕인석상이 바라보고 있다는 상대포도 보인다.

 

▲ 책굴을 덮고 있는 바위군을 내려다보고..

 

▲ 암벽을 따라 월대암으로 향한다.

 

▲ 이름짓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이름 붙여 놓은 콧구멍 바위다.

 

▲ 월대암(月臺岩)암석은..

토르(Tor)지형으로 월출산 천황봉과 함께 백악기 말인 약 9000만년 전에 화강암으로 이루어져있다.

 

▲ 월대암(月臺岩)에서 바라본 월출산.. 정상인 천황봉은 아직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다.

 

▲ 월대암에서 내려다 본 죽정(竹亭) 마을.

대나무 숲이 우거져 죽정마을이라고 하는데 양쪽으로 우거진 죽림(竹林)이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구림천에 의해 음죽정

(陰竹亭)과 양죽정(陽竹亭)으로 나뉘어 진다. 자연석을 이용해 쌓은 옛 담장은 전라남도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 월대암(月臺岩)에서...

 

▲ 일명... 쩍벌소나무.

 

▲ 주지봉능선의 매력인 암릉지대의 시작이다...

 

▲ 얼굴을 쑤~욱 밀어 올린 월출산의 천황봉의 장엄함이 빛난다.. 아래로는 천년고찰 도갑사가 보인다..

도갑사는 산세가 빼어나고 풍광이 아름다워 옛부터 '호남의 소금강' 이라 불리는 월출산의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형상이라는 산자락 아래 자리잡고 있다.

 

▲ 30배 줌으로 당겨 본 도갑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말사로.. 신라 말기에 영암 구림마을 출신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 가야 할 주지봉능선의 죽순봉...

 

▲ 절벽에 매달려 힘들게 자라지만.. 거기에서 꿋꿋한 모습이 아름답다..

 

▲ 기차를 타면 창 밖의 아름다운 풍경과 순간의 반짝임도 일순간 지나가면 다시오지 않듯이..

 

▲ 지나간 세월 또한 다시 오지 않음이라.. 순간을 놓치지 말자..

 

▲ 문필봉의 기묘한 암릉위로 흰구름이 흐르고..

 

▲ 당겨본 문필봉과 그 아래 스핑크스바위..

 

▲ 당겨본 문필봉의 불곰머리바위.. 반대편에서 보면 영락없는 불곰이다.

 

▲ 어느날 솔씨 하나 날아들어 보금자리 되었구나..

소나무야..

키 커려고 하지 말고 몸집 키우려 하지 마라.. 

키 크고 몸집 커지면 바위가 너를 싫어 할 것이다.. 

그러니 너의 주어진 환경에서 욕심 내지 말고 지금의 그 모습 그대로 오래오래 살아 주기 바란다. 

내가 다시 이 길을 지나는 인연이 온다면.. 다시 만나자꾸나..

 

10시 50분 : 죽순봉 통천문..

 

▲ 아따!~..그눔참 인물이로구나..ㅎ~

 

 11시 19분 : 주지봉 정상의 삼형제 바위.

주지봉의 주(朱)는 붉을 "주" 이고.. 지(芝)는 영지버섯의 "지" 자다. "지초(芝草)"라고도 한다. 지초가 많은 산인가 보다..

 

▲ 헐!~.. 주지봉 정상에 잔치국수가..

식객 허영만씨가 이 맛을 보았다면 뭐라고 평을 했을까..

 

주지봉 내림길에서 바라본 문필봉..  안부까지 내려갔다가 올라가야 한다.

구림마을에서 보면 붓을 거꾸로 세워 놓은 모습이라더니..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위용을 뽐낸다.

 

 주지봉과 문필봉 사이의 안부..여기서 계속 직진하면 문필봉이고 표지판 앞쪽 계곡이 주지골이다.

오늘 산행은 문필봉에 올랐다가 다시 주지봉으로 되돌아가서 회춘바위능선으로 하산할 것이다.

 

 문필봉 입구의 초병격인 암봉..

 

 문필봉을 가늠해 보고 여기에 베낭을 내려놓고 올라간다.

 

 문필봉 오름길 1차 관문.. 로프가 조금 짧다.

어쩌다 선두에 서다 보니 로프의 안전 점검은 필수다.. 눈으로 보고 당겨보고 매달려 보고 돌려보니 괜찮다..

 

 1차 관문을 통과하면.. 2차 관문은 홈통바위로 오른다.. 밧줄이 없어도 충분히 오를수있는 난이도다.

 

▲ 3차 관문.. 밧줄이 달랑 한줄이다.. 후미를 위해 충분한 점검 결과 믿어도 되는 줄이다.

 

문필봉 정상아래의 나마(gnamma)의 흔적..

나마(gnamma)는 화학적 풍화작용에 의해 기반암의 표면에 형성된 접시 모양의 풍화혈로 화강암의 기반암 표면에 가장

잘 형성된다. 대표적인 나마는 속리산의 문장대.. 월출산의 구정봉 등이다.

 

▲ 3차관문을 통과하면 정상 바로 아래에 제법 널따란 암반이 누워 있다.

 

▲ 일명.. 문필봉 다이빙 바위다.

 

▲ 문필봉 정상바위 아래..

 

▲ 문필봉에서 벋어내려간 스핑크스바위 군..

 

▲ 문필봉 정상바위.. 충분히 오를수 있는 경사각인데.. 내림이 문제다..

이대장님이 1주일전에만 오자고 했다면 올라갔을텐데...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다..

 

▲ 문필봉 정상의 나마(gnamma) 흔적만 보고 내려 간다.

 

▲ 지나온 주지봉.. 다시 올라간다.

 

▲ 다녀 간지가 30년이 흘렀어도 산하의 그림은 그대로다... 땅끝기맥이 지나가는 월각산 능선의 산그리메..

땅끝기맥은.. 전남 장흥군 유치면에서 화순군 이양면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상의 839번 지방도로의 곰재(웅치)에서 올라

서면, 국사봉(499.1m), 깃대봉(448m)을 지나고 삼계봉(5.3.9m)에 이르기 전 바람봉 헬기장(430m)에 올라선다.

바람봉에서 북으로 따로 분기하여 각수바위.. 계천산(400m).. 국사봉(614m).. 월출산(808.7m).. 월각산(456m)으로

이어지면서 영산강의 남쪽벽을 이루다가 별뫼산(464m).. 서기산(511m).. 첨봉(354m)을 거쳐 우리나라 육지 최남단인

땅끝 마을에서 바다로 빠지는 도상거리 약 122.7km의 산줄기다.

 

▲ 주지봉으로 다시 돌아가는길..

 

13시 13분 : 다시 올라선 주지봉..

 

▲ 회춘바위능선의 "똥바위"..

회춘바위를 탄다고 해서 이팔청춘이 될까마는.. 그래도 나이 먹는 속도가 세월 빠르게 흘러가는거 같아서 시간의 흐름이

조금은 더디게 흘러 갔어면 하는 바램이다ㅎㅎ.. 마음은 늘~ 청춘으로 살아가 보련다.

 

▲ "똥바위"에서 바라본 문필봉..

 

▲ "회춘바위 능선"에서 내려다 본 구림마을과 왕인박사유적지...

주지봉 아래에 있는 동네가 바로 구림(鳩林) 마을이다. 옛날부터 호남의 명촌을 꼽을때 가장 먼저 회자되는 곳이 구림이다.

역사가 무려 2200년에 이르는 마을이다. 그만큼 옛날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조건을 지녔던 것이다.

거기에다 명촌으로 소문나려면 뚜렷한 인물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도선국사.. 왕인박사.. 최지몽 태사가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배출됐다고 한다.. 국사(國師).. 박사(博師).. 태사(太師).. 즉 사(師) 자 돌림인 3명의 연고지이다.

 

▲ 타임머신을 타고 3~4세기의 백제로 들어가 보니.. 구림 마을앞까지 바닷물(노란색 부분)이 들어오는 항구였다..

상대포구는 왕인박사가 일본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초청으로 일본(왜국)으로 떠난 곳이기도 하고..

통일신라 말 당대 최고의 학자들인 최치원(산라 학자이며 문인), 최승우(신라 문인), 김가기(도교인이며 문장가) 등이

중국 유학을 떠났던 곳이기도 하다.

 

▲ 미로바위..

 

▲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회춘바위라고 하며 정작.. 회춘바위는 못찾았다고 한다.

 

▲ 회춘바위가 궁금해서 찾아보았지만.. 나역시 못찾겠다 꾀꼬리다..

 

▲ 회춘바위는 이정표에서 20m다.. 가까이 있었는데.. 너무 먼곳에서 찾았던가 보다..

 

▲ 수신정을 지나고..

 

▲ 유적지방향으로..

 

▲ 성천(聖泉).

왕인이 마셨다는 샘물로 성천이라 부르는데, 왕인박사가 이곳에서 자라면서 큰 학문을 이뤘으므로 뒷날 사람들이 이곳을

성인의 터 자리라는 뜻으로 "성기동(聖基洞)"이라 하고 시내 곁 우물을 성천이라 불렀다. 그런데.. 덮어 놓았다.

 

▲ 왕인박사 생가터.

 

▲ 왕인사당...

346년에 즉위한 백제의 13대왕 근초고왕과 이 시절 왜국으로 간 아직기, 그리고 왕인과 같이 건너간 "백제 도래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오늘날 큐슈의 "사가현" 그리고 일본 아스카 문화의 효시가 된 이야기등을 볼수 있다.

 

▲ 왕인의 일대기를 그린 석화..

 

▲ 왕인박사상..

왕인박사는 백제 근초고왕 때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의 선진문화를 전파하여 일본 비조문화(飛鳥文化)의 시조로 숭상받는

인물이다.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가기전에 먼저 왕인과 동문 수학하였다는 아직기(阿直岐)에 대해 알아보고 가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700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멸망한 "백제"의 역사 또한 축소되거나 왜곡된 면이 많다.

백제의 최고 전성기를 이룬 왕이 백제의 13대 임금인 근초고왕(346-375)이다. 그는 고구려 "고국원왕"도 전사케 하고,

중국의 요서, 산둥반도까지, 그리고 남해안까지 영토를 넓히며 일본에까지 영향력을 끼친 왕이다.

그러나 375년 13대왕 근초고왕의 시대는 가고 17대 아신왕때에 백제의 국력은 쇠퇴하고 고구려의 광개토왕(391~413)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신라는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으며 백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제의 아신왕은 일본의 힘을 빌려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은 사신을 백제에 보냈고

백제에서도 크게 환대했고… 사신이 오고가는 과정에서 백제에서 왜국(倭國)으로 많은 문물이 건너갔는데 402년에 경서에

능통한 아직기(阿直岐)를 밀사로 파견하고 옷 깁는 기술자인 공녀(工女)와 명마 두필과 칼과 거울을 함께 보냈다.

일본의 응신천황(應神天皇)은 아직기(阿直岐)가 경서(經書)에 밝은 것을 알고 황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어느날.. 왜국 천황이 아직기의 뛰어난 학식을 보고 물었다.

“백제에 그대보다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

“왕인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무척 빼어납니다.”

이렇게 해서 응신천황이 백제에 사자를 보내 왕인(王仁)을 초빙했던 것이다.

 

백제의 아신왕은 곧바로 왕인을 일본으로 보냈다.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초빙으로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

으로 건너가 그 해박한 경서(經書)의 지식으로 응신천황의 신임을 받아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의 문화를 깨우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그의 후손은 대대로 학문에 관한 일을 맡고 일본 조정에 봉사하여

일본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 영월관(전시실)에 잠시 들린다.

 

▲ 일본서기..

일본을 생각하면 언제나 두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36년간의 일제강점기의 치욕.. 그래도..

1,600년전.. 일본에 문명의 씨앗을 뿌린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대단한 긍지임에 틀림 없는 사실이다.

 

▲ 백제목조관음상(모조품)..

1400년전에 나무로 만들어진 목조상이 썩지도 않고 보존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일제때 도굴이나 수집가에 의해 일본으로 유출된 것으로 추측되지만 기록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 백제 성왕의 얼굴을 닮은 구세관음상.

 

▲ 천인천자문.

2008년 영암 왕인문화 축제 때 국내외 1000명이 쓴 천자문이 새겨져 있다.

 

▲ 영월관 뒤로 죽순봉.. 주지봉.. 문필봉이 병풍처럼 둘러 섰다.

문필봉은 "천호봉필(千戶奉筆)"의 형국이라고 한다. 천가구가 문필봉을 받들고 있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유명한 죽순봉.. 주지봉.. 문필봉의 암릉을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즐긴 조망은 너무나도 멋진 시간이었다.

 

15시 05분 : 왕인박사유적지 산행종료.

 

15시 51분 : 왕인박사유적지에서 20여분을 달려 찾아온 돌쇠의 정..

 

▲ 연잎떡갈비정식 상차림..

 

▲ 연잎떡갈비... 맛있다.

 

▲ 이대장님의 건배로 마무리...

 

꽃은 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기에 이쁘게 피워 내는 것이다.

사람은 끝이 두려워 시작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지는 것이 두려워 피우지 않는 꽃은 상상 할 수 없다.

 

오늘..

월출산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주지봉.. 문필봉을 타고 회춘능선으로 하산..

더 할 나위 없이 머~찐 꽃을 피워낸 기획산행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