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부터 영산으로 이름난 회문산은 많은 아픔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회문산(回文山)이란.. 이름이 어떻게 붙여졌는지부터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홍성문설과 조평설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조선 중기 때 전설적 풍수가인 홍성문 대사가 지은 "회문산가(回文山歌)" 에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고 보는 것이다.

 

조평(1569~1647)설은 고향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에서 병자호란 때 의병을 지원하고 많은 덕을 베풀었던 조선 중기 문신인

조평이 살았던 마을 이름을 따서 회문산이라 부르게 됐다는 설이다.

 

홍문대사(홍성문)가 입산 도통하여 ‘회문산가 24혈’의 명당 책자를 만들면서 영산이라 이름나기 시작하였다.

회문산 정상에 24명당과 다섯 신선이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형국인 오선위기(五仙圍基) 자리가 있는데, 이곳에 관을 보토

하여 묘를 쓰고 나면 당대부터 발복하여 59대까지 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처형을 당할 때 3족을 멸하는 화를 면하기 위해서 동생 란식과 조카 현채가 기거

하였고 두 분의 묘소가 현존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동학군은 이 산을 거점으로 투쟁을 하였으며

한말에 국운이 기울어 일제 침략의 마수가 뻗치던 무렵에는 회문산을 근거지로 하여 정읍의 최익현, 임실의 임병찬 의병장

이 회문산을 거점으로 항일구국운동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1950년 6·25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으로 고립된 인민군과 공산당들이 회문산으로 옮겨와

자리 잡고 험한 산을 의지하여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자 국군은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토벌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2025년 02월 17일(일요일).
회문산 : 전북 순창군.

 

산행코스 : 회문산휴양림매표소-노령문-위령탑-역사관-서어나무갈림길-회문산-임도-야영장-화이트벨리펜션주차장.

산행시작 : 회문산휴양림매표소 09시 45분.

산행종료 : 화이트벨리주차장  13시 03분.

전체거리 : 약7.0km.

전체시간 : 03시간 17분.

운동시간 : 02시간 45분.

휴식시간 : 00시간 32분.

누구하고 : 마나슬루산악회.

 

09 : 45  회문산휴양림매표소.

09 : 51  노령문.

09 : 57  무학대사바위.

10 : 04  위령탑.

10 : 09  역사관.

10 : 56  서어나무갈림길.

11 : 19  회문산.

11 : 32  천근월굴.

11 : 38  작은지붕.

11 : 51  임도.

12 : 33  야영장.

13 : 03  화이트밸리.

 

 09시 40분 : 국립회문산자연휴양림매표소.

 

▲ 휴양림 이용요금표.

동절기(12월~3월)는 입장료 무료... 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통과세다..

 

▲ 구. 매표소 앞을 지나서..

 

▲ 휴양림 빗돌을 지나면..

 

▲ 정면으로 회문산과 작은 지붕이 올려다 보인다.

 

▲ 본 산악회의 코스는 오른쪽으로 삼연봉에 올라서 회문산 돌곳봉을 경유하여 시계역방향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회문산이 안고 있는 역사적인 속살을 둘러 보고자 "회문산역사관"을 경유하여 정상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 겨울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봄의 왈츠처럼 경쾌하다..

오늘 예보는 종일 흐림에 -3도~11도.. 풍속 2~3m/s였는데.. 종일 맑음에 가끔 구름이고 바람은 1m/s내외로 완전 봄날씨다.

 

▲ 회문산에서 문바위.. 돌곳봉을 경유하여 내려오는 길이다.

 

▲ 그런데.. 누군가의 걸음 흔적이 전혀 없다.. 하산길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휴양림으로 향한다...

 

09시 51분 : 휴양림 입구를 산성처럼 축조하였다는 노령문..

 

 

▲ 노령문을 통과하여..

 

▲ 얼음빙벽 맞은편에..

 

▲ 삼연봉으로 이어주는 출렁다리..

 

▲ 구름다리에서 내려다본 계곡하류..

 

▲ 용추폭포..

 

▲ 휴양림 숲속의집..

국립이라 시설좋고 산좋고 물이 좋아 성수기때는 입주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 무학대사바위..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마주 앉아 회문산의 산세를 논했다는 바위다.

 

참고로.. 회문산휴양림 입구 자락에는

고려 말기에 무학(無學)대사가 이성계(李成桂)의 등극을 위하여 1만일 동안 기도하였다는 만일사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이성계와 얽힌 순창고추장 이야기 한토막..

고려 시대 말에 이성계는 스승인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거하고 있던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의 만일사(萬日寺)를

찾아가는 도중 배가 너무 고파서 어느 농가에 들러 고추장에 점심을 맛있게 얻어먹게 되었다... 보잘것없는 농사꾼의 밥상

이었지만 고추장 맛은 기가 막혔다. “이렇게 맛있는 고추장이 있다니?.. 이 고추장만 있으면 다른 반찬은 필요 없겠어.”

 

이성계는 훗날 조선을 세우고 왕이 된 후에도 순창에서 먹었던 고추장 맛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명령을 내렸다.

“순창 현감은 순창의 고추장을 궁궐로 올려 보내도록 하라!” 이렇게 해서 순창 고추장은 조선 시대 말까지 궁궐에서 쓰는

고추장이 되었다.

 

▲ 5번 이정표에서 야영장쪽으로 약70m정도 올라가면..

 

▲ 비목공원이 나오고..

 

10시 04분 : 6.25양민희생자 위령탑..

6.25전쟁을 겪으면서 회문산에 빨치산유격대 전북도당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고 좌익활동자들과 빨치산, 인민군 패잔병들

이 많이 숨어 있었다. 낮에는 국군토벌대가 진입하여 대한민국 치하가 되어, 빨치산에 협조한 주민들을 처형하였고, 밤에는

빨치산들이 내려가 인민공화국치하가 되었으며, 낮사이 국군에게 협조한 주민들을 처형하여 무고한 민간인들의 피해가

2.3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양민들을 위로하는 위령탑이다.

 

▲ 위령탑의 위령시는.. 시인 권진희님이 짓고.. 서예과 교수 여태명님이 쓰고... 조각과 교수 전진환님이 조각하였다는데..

위령탑에 새겨진 조각속의 인물들은 토속한국인들이 아니다.. 분명... 이땅에서 일어난 우리 민초들의 동족상잔의 아픔이

분명한데.. 내눈에는.. 양쪽에 아이를 안고있는 남녀도 한국인의 얼굴이 아니고.. 벽화속의 인물들은 마치.. 고대아랍인들의

벽화를 보는것 같다.. 위령탑으로서의 이해가 하나도 안 가고 애달픈 아픔도 전혀 안 느껴진다.. 왠지모를 무거운 걸음이다.

 

▲ 위령탑 아래에 내려 앉은 백설이 곱다. 희생자 영령들이시여~.. 고운세상에서 영면하시길 합장하고 빕니다.

회문산에서 활동했던 빨치산과 토벌 과정에서 수 많은 주민들이 희생된 아픈 역사가 다시는 이땅에서 반복 되지 않기를...

 

▲ 휴양림 산림문화 휴양관..

 

10시 09분 : 회문산역사관.

6.25전쟁을 앞뒤로 빨치산근거지로 1만여 회의 빨치산토벌전투에서 수많은 군인, 경찰관, 양민들이 숨진 비극의 현장이다.

2011년 7월 11일에 회문산자연휴양림 내 빨치산사령부전시실을 헐고 2억 5000여만원을 들여 104㎡ 규모의 회문산역사관

을 새로 개관하였다.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가 보자.

 

▲ 빨치산 사령부.. 헐리기 전의 모습이다.

봉우리와 골짜기가 많아 첩첩산중을 이루고 있는데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빨치산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이곳에 자리잡고 700여명의 빨치산들이 오랫동안 저항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빨치산의 훈련장이었던 곳에 체력단련장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 역사관 관람..

<회문산가> 를 지었다고 전해지는 홍성문과 관련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조선 중종 때인 혹은 영조 때 인물로 전해진다. 

임실군 운암면 금기리 텃골에서 홍진사와 마을 주막집의 주모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난 그는 홍진사가 죽은 후 어린 나이에

회문산 만일사로 들어갔다. 회문산 자락 사자암 등에서 27년간 도를 닦아 풍수의 이치를 깨닫는다.

 

그는 팔도를 답산한 후 회문산에 많은 명당이 있음을 알고 세상에 전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명당에 욕심만 있지 그것을

감당할 덕을 갖춘 사람이 없음을 개탄했다. 그는 양반들의 횡포에 분노하여 명당 장사로 양반을 희롱했다고도 한다.

<회문산가> 를 통해 회문산에 오선위기혈의 큰 명당이 있다고 해 지금도 많은 풍수가들이 이를 좇고 있다.

 

그는 '돌산에 장사 지낼 수 없다 석산불가장(石山不可葬)"이라는 풍수 금기를 뒤집고 '돌산에도 흙을 메워 쓸 수 있다 라는

"석산보토장(石山補土葬)"이라는 '혁명'을 일으켜 한반도 풍수사에 획을 그었다. 흉지가 명당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다. 또한.. 소설 "남부군"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으며 동학혁명과 한말 의병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 역사관을 나오면 정면으로 마주하는 사방댐이 있고.. 회문산으로 가는 목교가 있다.

 

▲ 회문산을 가장 빠르게 접근할수 있는 코스가 역사관을 지나서 임도를 따라 올라가는 서어나무길이다...

 

▲ 가장 많이 다니는 서어나무길을 버리고 목교를 건넌다..

 

▲ 단 두사람이 지나간듯한 그 누군가의 발자욱을 따라.. 7~8분가량 올라가면..

 

▲ 역사관 갈림길인 능선이 보인다..

 

▲ 임도에 올라서니.. 아무도 없는 나만의 백색의 세상이다..

 

서산대사의 시한수..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길 걸어갈 때..

부수호란행(不須胡亂行)... 함부로 흐트러지게 걷지 말아라~.

금일야행적(今日我行跡)...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마침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 삼연봉에서 내려오는길.. 마나슬루팀들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 회문산길은 절개지로 올라간다.

 

▲ 좌측으로 보이는 회문산.. 큰지붕이다.

 

▲ 처음으로 나타나는 방구돌이 있는 봉우리를 지날 즈음에.. 마나슬루팀들이 올라온다..

 

▲ 바람에 날려온 눈발이 능선에 내려 앉아 두께가 두꺼워 지더니.

 

▲ 점점 점입가경으로 쌓여 있어 걸음을 더디게 한다..

 

▲ 급기야는 산죽의 키높이로 쌓였다.. 잘못 밟으면 무릎까지 빠진다.. 그러나 선답자가 밟은 곳만 디디면 어렵지는 않다.

 

10시 56분 : 서어나무갈림길..

 

▲ 역사관에서 올라오는 회문산 단거리 코스다.

 

▲ 서어나무길 단거리코스를 많이 이용하는 모양이다.. 길이 잘 다져져 있다..

 

▲ 눈을 뒤짚어 쓴 거북바위..

 

▲ 오늘의 회문산길에서.. 가장 많은 눈이 쌓여있는 회문설벽 구간이다.. 거의 키 높이로 보인다..

 

▲ 115cm의 스틱이 손잡이만 남았다.

 

11시 08분 : 장군봉 갈림길.

 

▲ 아무도 가지 않은 장군봉길..

 

▲ 어느산이나 정수리를 쉽게 내어주지는 않는다.. 오늘의 회문산도 크레바스 같은 눈길로 발목을 잡는다..

 

11시 20분 : 회문산..

조선 최고의 풍수가로 알려진 홍성문대사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설화에 의하면 홍성문대사

는 전라북도 임실군 하운암면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회문산은 홍성문대사가 입산 도통하여 "회문산가 24혈"의

명당 책자를 만들면서 영산이라 이름나기 시작하였고..

 

오선위기(五仙圍碁)혈이란 다섯 신선이 둘러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형국을 말하며, 풍수가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됐다

고 한다. 한국의 5대 명당으로 불린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20여 년 전만 해도 회문산 정상과 주변 능선마다 무덤 수십

수백 개가 밀집하였다. 그러나 최근 급격히 그 수가 줄어든다. 이장을 하거나 파묘하기 때문이다. 임병찬 무덤도 후손들이

고향으로 이장해 갈 계획이라는 얘기도 있다고 한다.

 

▲ 덕치면에서 출발하는 회문산 종주코스상에 있는 깃대봉.. 천마봉.. 삼연봉이 1자로 보인다.

 

▲ 하산코스에 있는 작은지붕.. 문바위.. 돌곳봉 능선.. 그 뒤쪽으로는.. 작지만 야무진 인상의 무직산이다.

 

▲ 여분산(如粉山)은.. 같을 여(如), 가루 분(粉)을 쓰는 여분산(如粉山)으로 꽃가루와 같은 산이라는 의미이다.

산 남쪽에는 벌통산이 있는데, 벌은 꽃가루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여분산은 풍수지리상 동남쪽을 뻗어 나온

용이 구림천에 이르러 온순해지면서 전답에 나타난 현룡재전(顯龍在田)의 명당이라고 한다...

 

이러한 명당의 여분산에 또 다른 아픔이 있다.

여분산은 빨치산을 그린 영화 남부군의 원작자 이태(이우태)가조선통신원 전주지부장으로 근무하다가 UN군의 참전으로

퇴로가 막히자 빨치산으로 들어간 산이 <여분산>이다. 소설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한국전쟁 당시 실제로 빨치산으로

활동하였던 사람으로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바로 남부군이다.

 

소설 <남부군>의 작가 이태의 본명은 "이우태"로 1922년 충북 제천시에서 태어나 1948년조선신문학원’을 졸업하고 서울

신문기자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뒤 8개월간 서울신문에서 일하다가 당시 최대의통신사였던 합동통신기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 이후 합동통신이 북한의 관영 통신사인 조선중앙통신사

에 흡수되면서 조선중앙통신 기자가 되었다. 이태는 동료들과 대전으로 파견되었다가 본사의 지시에 따라 일행과 헤어져

전주에서 중앙통신 전북지사 창설 요원이 되었다.

 

하지만 인민군이 북으로 밀려간후 빨치산으로 활동하였고 1952년 토벌대에 체포되었다. 이태는 생포된후 사상 전향

하였고, 이후 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 민추협과 YS의 민주산악회 간부를 지냈으며, 회문산을 몇 차례 다녀

간 것으로 전해진다.

 

▲ 큰봉 뒤쪽 아래에는 붕어섬으로 유명한 옥정호가 있다.

 

▲ 2019년 10월 20일.. 거문도 불탄봉 산행에서 만났던 임병찬 의병장을 회문산에서 다시 만난다.

 

▲ 2019년 10월 20일.. 거문도의 임병찬 의사 순지비다.

 

▲ 아무도 가지 않았다..

오늘의 이땅이 있도록 지켜주신 분들이기에 조심조심 중간지점까지 가서... 고개숙여 읍이라도 하고 오자..

 

▲ 당겨온.. 의병장 임병찬 묘.

고종의 밀명을 받아 비밀독립운동단체인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계획했다가 실패했던 한말 의병장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최익현과 더불어 의거계획을 수립했다. 그해 4월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대규모 의병

을 일으켜 관곡을 취해 군량으로 삼고 진용을 정비해갔으나 6월 격전 중에 최익현과 함께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후 쓰시마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최익현은 단식투쟁 끝에 그곳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했고, 임병찬은 1907년

1월에 풀려나 귀국 했다.

 

1912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전라도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대한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항일 의병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나 동지 김창식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독립의군부 조직을 자백함으로써 항일 의병운동은 실패했다.

 

1914년 6월 13일 거문도에 유배되어 단식한 끝에 1916년 5월 23일 순국했다. 저서인 <돈헌문집>에 일제에 체포되어 취조

받을 때의 기록을 비롯하여 이 시기 항일의병전쟁과 관련된 자료들이 실려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천근월굴(天根月窟)..

중국(中國) 송(宋)나라 때 시인인 소강절(邵康節)선생의 우주론적인 시 가운데 주역(周易)의 복희팔괘(伏羲八卦)를 읊은

싯귀 중에 나오는 글로써 음양의 변화와 조화를 말하고 있다.

 

천근월굴 한왕래(天根月窟 閑往來)... 천근과 월굴을 한가로이 왕래하니..

삼십육궁 도시춘(三十六宮 都是春)... 삼십육궁이 모두 봄이라네~...

 

천근(天根)은 양(陽)으로 남자의 성을 말하고.. 월굴(月窟)은 음(陰)으로 여자의 성을 나타내어 음양(陰陽)이 한가로이 왕래

하니 소우주(小宇宙)인 육체가 모두 봄이 되어 완전하게 한다는 뜻이며...

36궁이란 여자의 성으로 생명이 자라는 성소로서 우주창조의 근본섭리가 깃들어 있으며, 양의 뿌리가 음의 굴에 들어가

음양조화로 생명이 자라서 탄생하는 곳이기에 소강절은 이를 천근월굴(天根月窟)이라고 했다.

 

▲ 왼쪽은.. 천근월굴.  오른쪽은 회문(回文)의 초서체가 아닐까.. 어렵다.

천근월굴(天根月窟)의 글쓴이.. 김석곤(金晳坤 1874~1948)은.. 정읍군 태인면 출신으로 일제강점기때의 서화가이다.

 

▲ 작은지붕으로 가는길..

6·25 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회문산에 들어섰다.

1950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국군과 경찰은 빨치산을 초토화하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펼쳤는데 그때 산불로

7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회문산에는 소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회문산은 강천산의 유명세에 가려 있다가 이태의 소설

‘남부군’의 실제 무대로 세상에 알려졌다.

 

11시 38분 : 작은지붕..

 

▲ 작은지붕에서 바라본 회문산 큰지붕...

 

▲ 작은지붕에서 바라본 장군봉..

 

▲ 작은지붕 바로 아래에 있는 여근목(女根木).

전북 김제의 모악산은 어머니 산이고, 순창의 회문산은 아버지 산으로 음기(陰氣)가 곳곳에 서려 있어 천근월굴바위와

더불어 이곳 여근목에 잘 나타내고 있다. 6.25전란을 전후하여 빨치산 토벌을 위해 온산이 불바다가 되었어도 인근의 반송

과 같이 살아남은 영험한 나무이다..

 

▲ 바위에 내린 눈이 고향의 초가지붕을 연상케 한다..

 

▲ 여근목을 내려 서자말자.. 생존을 위한 멧돼지들의 들쑤심이 묘까지 뒤집었다.. 몇시간 전인 오늘 아침의 일이다.

 

11시 51분 : 임도 만남..

 

▲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임도.. 역시나 아무도 가지 않았다..

 

▲ 시루바위.. 문바위.. 돌곳봉으로 내려가는 하산길인데...

 

아무도 가지 않았다.

 

 헬기장에도 흔적이 없다..

 

 돌곳봉 하산길..

러셀(russel)을 하기에는 눈의 두께가 두텁고 돌곳봉 내림에서 길찾기가 모호하다.. 아서라 말어라. 야영장으로 하산이다.

참고로.. 러셀(russel)이란.. 제설차를 만든 미국 제조회사의 이름을 딴 등산 용어로 눈길 뚫기.. 눈 헤쳐나가기.. 제설작업..

등으로 표현 하는 말이다.

 

 돌곳봉길은 포기하고.. 차단기가 있는 임도를 따라 야영장으로 내려간다.

 

 야영장 갈림길.

 

 다시 임도로 내려서고..

 

12시 33분 : 야영장..

 

 아침에 지나갔던 휴양관..

 

 대형버스주차장이 없는 휴양림이다..

 

 휴양림 매표소에서 약300m가량 내려가면..

 

 사유지 주차장에서 산행 마무리..

 

 눈길이었음에도 평균속도 2.6km.. 산행궤적을 정리하고 하산식 장소인 순창읍으로 이동한다.

 

 순창성당..

 

 1882년부터 시작하여 140여년의 오래된 성당이다..

 

 성당에서 가까운 "ㅁㄱ" 식당에서..

 

800m급의 산이지만.. 큰산 못지 않은 산세를 품었기에

풍수.. 지리.. 종교.. 구국운동의 중심지였고.. 그리고 동족상잔의 현장으로

한국 현대사의 뼈아픈 역사가 깃든 산이기도 하였다..

 

이제는..

화합과 용서와 상생의 길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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