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9월 01일(일).

속리산국립공원 도명산 : 충북 괴산군.

 

산행코스 : 화양동주차장-운영담-화양3교-첨성대-515봉-도명산-마애불-학소대-와룡암-능운대-만동묘-화양동주차장.

산행시작 : 화양동주차장  10시 59분.

산행종료 : 화양동주차장  15시 57분.

전체거리 : 약8.93km.

전체시간 : 04시간 57분.

운동시간 : 04시간 01분.

휴식시간 : 00시간 56분.

 

10 : 59  화양동주차장.

11 : 16  운영담.

11 : 25  화양3교.

11 : 28  첨성대.

12 : 24  515봉.

13 : 52  도명산.

14 : 10  마애불.

14 : 55  학소대.

15 : 02  와룡암.

15 : 12  능운대.

15 : 25  만동묘.

15 : 57  화양동주차장 종료.

 

 10시 59분 : 속리산국립공원 화양동주차장... 2009년 10월에 왔어니 15년만에 이자리에 다시 왔다.

 

 주차장휴게소도 15년전보다 깔끔하게 단장 되어 있다.

 

도명산탐방지원센터앞을 통과하여 화양구곡쪽으로..

 

기암이 약250m지점의 그자리에 옛모습 그대로 앉아 있다.

 

우리의 솔잎님들이 지나간 길가에.. 가을이가 한점.. 내려 왔다.

 

화양천을 건너는 화양2교에서 바라본 상류쪽의 운영담 방향.

화양구곡은 조선 영조가 "송자(宋子)"로 칭한 우암 송시열(1607~1689)이 1666년부터 1688년까지 머물면서 산수를

즐기며 제자에게 강학했던 곳이다.

 

 11시 16분 : 화양구곡중에 제2곡인 운영담(雲影潭).

 

10배 줌으로 당겨온 운영담(雲影潭) 각자(刻字).

운영담(雲影潭)은...화양천 계곡에서 빠르게 흘러내려온 맑은 물이 잠시 고여 구름의 그림자를 맑게 비추며 숨을 가다듬은

후에 다시 흘러간다는.. 주자(朱子)의 시(詩)인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의 뜻을 따온 ‘운영담’이라는 글씨

바위에 새겨져 있다.

 

화양구곡중에 제3곡인 읍궁암(泣弓岩).

계곡을 향해 누운 펑퍼짐한 이 바위 위에서 우암 송시열이 효종임금이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41세 젊은 나이에 승하

하신것을 슬퍼 하며 한양을 향하여 활처럼 엎드려 통곡하였다고 하는 곳이다..

효종 임금을 기리며 매일 새벽과 효종의 제삿날인 5월 4일에 엎드려 곡을 했다고 한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외로운 충정만 하늘에 닿았도다.

새벽이 되도록 통곡만 하다가..

또 다시 엎드려 무릎 끌어안고 탄식하노라~.

 

권상하(權尙夏)의 시(詩)...

읍궁암(泣弓岩)..

 

하마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젊었을때 이곳을 지나는 길에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하여 만동묘지기(혹은 지역 유생)에게 패대기를

당하고 얻어맞는 등의 고초를 당했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화양동서원과 만동묘..

하마비 오른쪽에 있어며... 하산길에 들러볼 생각이다.

 

 화양동서원 묘정비(廟庭碑).

묘정비는 서원에 세우는 비로.. 사원을 건립하게 된 동기와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해 두는 비석이다.

영조 23년(1747)에 세웠으며.. 이재가 글을 짓고.. 유척기가 글씨를 썼다. 묘정비는 서원철폐령이 내려진 후 일본인들이

고의로 글자를 지우고 땅에 묻어버렸다. 일본인들이 글자를 모두 쪼아 없애 버렸기에 해석은 불가능하다.

이후 만동묘와 함께 복원되었다.

 

 화양천 건너편의 암서재(巖棲齊)와.. 화양구곡중의 제4곡인 금사담(金沙潭).

금사담(金沙潭)은 맑은 물과 깨끗한 모래가 금싸라기 같이 보이는 게곡속의 못이라는 의미이다.. 암서재 아래 붉은 타원형

점선안에 "금사담"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암서재 아래 화살표에..

 

금사담(金沙潭)이라는 각자(刻字)가 뚜렷하다.

 

 금사담(金沙潭)오른쪽 석벽에는...

 

창오운단(蒼梧雲斷).. 명나라의 황제가 살던 시대의 구름이 끊기고..

무이산공(武夷山空)...주자(朱子)가 살던 무이산은 비어 있다는 뜻으로 주자학의 본산인 명이 사라지고 없음을 의미한다.

 

 화양천 건너편의 암서재(巖棲齊)는..

금사담(金沙潭) 물가의 큰 반석위에 있는 서재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송시열(宋時烈)이 정계에서 은퇴한 후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화양구곡(華陽九曲)에서..

화양(華陽)이란 '중국 문화의 햇빛'이라는 뜻이다.  송시열은 이 골짜기에 작은 중화(中華:중국의 문화)를 이루려고 했다.

송시열은 이곳에 들어온 후 일상생활도 되도록 중국의 생활방식을 따르기 위해 옷도 명나라 옷과 평정건(平頂巾)을 썼다.

 

11시 25분 : 화양3교... 도명산 들머리.

 

 11시 28분 : 일행들을 먼저 보내고 화양구곡 중에 제 5곡인 첨성대(瞻星臺)를 둘러본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황하가 만 번을 굽이쳐 흘러도 반드시 동쪽을 향해 흘러간다(충신의 절개는 꺾을수 없다)는 뜻이다.

 

첨성대.

 

가운데 글씨는...비례부동(非禮不動)으로...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뜻이다.

 

대명천지(大明天地)는..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 것이고..

숭정일월(崇禎日月)은.. 조선의 해와 달도 숭정 황제의 것이라는 의미로...극치의 사대주의를 보여주는 씁쓸한 글들이고.

송시열의 숭명(崇明)사상이 고스란히 새겨진 글씨다

참고로.. 숭정(崇禎)은 북경의 경산공원에서 1644년에 자살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다.

 

지리산 상내봉의 안락문 같은 분위기다.. 반쯤 들어가다가 일행들과 너무 떨어진것 같아서 부지런히 올라간다.

 

드디어.. 계단위에 솔잎의 꼬랑자가 보인다..

 

 간식거리로 정나눔을 하는 팀들과도 만나고..

 

오늘의 괴산 날씨도 32도를 오르내린다.

도명산 2.2km남은 지점까지 올라와도 바람끼가 없다... 에어컨이 꺼진걸 보니 괴산의 전기사정이 좋지 않은가 보다..ㅎ~

 

무리하지 말자.. 다시 너럭바위에서..

 

 재충전을 하고..

 

 발 딛기가 까탈스런 너덜겅을 만나는데.. 다행히 직등이 아니고 사면으로 수평이동이다.

 

 약간의 오름을 치고올라.. 도명산에서 오른쪽의 갈미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 올라선다.

 

 515봉 된비알 오름의 시작이다.

 

 발아래 화양계곡따라 멀리 우리가 출발하였던 화양동 주차장이 보여서...

 

 줌으로 한껏 당겨 보니 산악회 차들이 제법 보인다. 화양계곡은 여름산으로 많이들 찾는 곳이다.

 

 도명산 정상이 눈높이로 다가오고..

 

 12시 34분 : 515봉 도착..

 

13시 00분 : 간간히 불어주는 그늘에서.. 점찍기가 늦었다고 아우성치는 속 달래기... 먹고 마시고..

 

 도명산 정상이 지척이다.

 

 도명산 통천문..

 

영암 월출산 천황봉의 통천문 보다는 길이가 짧지만.. 들어서니 시원한 통바람이다.

 

 최고의 연리목이 있는 사랑산과 남군자산.. 그너머로는 군자산이 버티고 섰다...

 

 솔잎의 히어로.. 윤회장님..점점 일취월장에.. 플러스 알파로 잘하고 있습니다.

 

 카페 서핑으로 솔잎을 찾아 왔다는데.. 산꾼의 포스(force)가 묻어난다.. 매달 함께 산행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산행을 해보시면.. 참~ 좋은 언니들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겁니다.

 

도명산은 국립공원 속리산에 속하여 있으며 그 중에 예로부터, 천하 절승지로 이름난 화양동계곡 남쪽을 가로 막고

서있는 명산으로 화강암의 바위봉과 기암석벽이 어울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도명산에서 마애불로 가는 내림길이 장난 아니게 가파르다..

 

14시 09분 : 도명산 낙영산 갈림길..

 

▲ 14시 11분 : 마애 삼존불.

 

 왼쪽 동떨어진 암벽에 새겨진 또하나의 불상은 5.4m로 다른 불상과 달리 돋을새김 기법으로 곡선미를 잘 보여준다.

.

석벽엔 마치 밑그림 처럼 불상이 선각(線刻)되어 있다.

삼존불 중 오른쪽 불상은 9.1m 높이에 안면 길이만 2m에 이른다. 가운데 불상은 더욱 커 높이가 14m나 된다.

 

▲ 마애불 앞의 거대한 통바위..

이 바위로 팔공산 갓바위처럼 입체형 불상을 조각하였다면.. 완전 도명산의 유명한 불상이 되었을 것이다.

 

▲ 상류에 낙영폭포가 있는 사지목골에는 매미소리도 더위에 지친듯 고요하다...

 

14시 52분 : 학소대교.

 

화양천 상류..

 

화양천 하류쪽.

화양구곡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있는 경승지로... 1974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84년 속리산국립

공원에 포함되었다. 조선 중기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은거하며 이곳의 경치가 중국의 무이구곡에 버금간다고 보고 아홉

개의 구비마다 이름을 붙이면서 화양구곡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2014년 대한민국 명승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화양구곡 중에 제8곡인 학소대(鶴巢臺).

청학이 바위 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학소대(鶴巢臺).

 

 상류에는 퇴계 이황이 거닐었다는 선유구곡이 있다..

 

▲ 화양구곡 중에 제 7곡인 와룡암 (臥龍岩).

비스듬히 계곡을 질러 뻗은 바위가 용이 꿈틀거리는 듯하여 와룡암이다.

 

▲ 와룡암 (臥龍岩).

 

▲ 화양구곡중에 제 6곡인 능운대(凌雲臺).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능운대라 한다.

 

▲ 첨성대..

 

▲ 아침에 지나쳤던 화양서원으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은... 조선 후기의 정통 성리학자로 본관은 은진으로.. 주자(朱子) 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으며,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명나라를 존중하고 청나라를 경계하는 것이 국가정책

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1689년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서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 만동묘로 들어가는 양추문..

 

▲ 송시열은 숙종15년(1689)에 사약을 받고 죽게될 지경에 처하자 제자 권상하(1641-1721)에게 명나라가 멸망한지 50년

이 지났건만,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와 의종 숭정제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라고 유언을 내리자 제자 권상하가 숙종

30년(1704) 인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화양서원내에 만동묘를 창건하고 스승의 유언대로 만력제와 숭정제의 신위를 봉안

하여 제사를 올렸다. 이후 조선 임금들도 만동묘를 융숭하게 대우하였다. 영조 2년(1726) 나라에서 만동묘에 제전과 노비

를 내려주었고 그 후에도 예조에서 90명이 돌아가며 묘우를 지키게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지원을 했다. 정조는 직접 사필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만동묘는 이후 서원 폐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받았다.

지역의 백성들에게 노역을 빼주겠다고 강요하여 돈을 받아내고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케 하고..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만행이 심했다. 심지어 거슬리는 백성을 멋대로 사형시켜도 처벌받지

않을 지경이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으니 횡포가 대단했었던 모양이다.

 

결국 고종 2년(1865)에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할때 동시에 만동묘를 철폐하고 만동묘에 소속된 재산을 국가와 지방

관청에 귀속시켰다.

 

▲ 만동묘 계단..

만동묘의 계단은 발디딤의 폭이 매우 좁고 단이 높은데, 명나라 황제가 계신 곳을 무엄하게 그냥 걷지 말고 기어서 올라

가라는 의미가 있다...실제로 올라가 보니 단은 높고 폭은 좁아서 바짝 긴장하고 조심해서 올라야 된다. 내려올때 위험하다.

 

▲ 만동묘..

만동묘라는 이름의 유래는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긴 선조의 어필 만절필동(萬折必東)을 모본하여

화양리 첨성대 바위에 새겼는데, 그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서 "만동묘"라고 하였다..

 

▲ 만동묘 시당..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화양계곡 내에 위치한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만력제)과 명나라

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숭정제)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만동묘는 사적 제417호, 만동묘정비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화양서원(화양동서원) 내부에 있던 시설로 화양서원은 서원 철폐 이후 터만 남았다가 1999년 사적

으로 지정 후 2001년부터 04년까지 만동묘와 승삼문, 송자사등 일부 건물을 복원하였다.

 

화양서원.

1695년(숙종 21)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해 권상하(權尙夏).. 정호(鄭澔) 등 노론이 건립을 주도했으며, 1696년 창건

하고 사액을 받았다. 1716년(숙종 42)에는 어필로 편액을 받았다. 서원의 명칭인 '화양'의 뜻은 중화의 정신을 널리 알린다.

라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주차장으로 가는길에 부회장님의 삼인방..

 

 15시 57분 : 화양동주차장 산행종료.

 

 

16시 50분 : 산막이옛길의 맛집.. 지난 7월에 하산식을 했던 집이다.

 

 순두부전골...

 

 회장님의 건배에 이어...

 

 직전회장님의 건배로 마무리..

금당도 2일차인 오늘의 일정은 1차로 어제 못간 교암청풍길을 일출시간에 맞추어 다녀 와서..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2차로.. 오후에는 요트선상투어를 마치고 울포항에서 15시 20분배로 나갈 것이다.

 

 05시 53분 : 세포리...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다..

금당도의 일출 시간이 06시 03분경이니... 가마바위에 도착할 쯔음이면 일출이 시작될것 같다.

 

세포리포구..

“가는 개(갯벌)”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세포리(細浦里)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세포리포구.. 지금이 밀물시간인지 물이 빠르게 들어오고 있다.

 

발풀고사리..

 

 섬도라지.. 약성이 좋은지 향기가 매우 강하다.

 

 06시 10분 : 교암청풍갈림 능선.. 혹시나 밀물에 길이 잠길까봐 가마바위부터 먼저 다녀오기로 한다.

 

 06시 11분 : 금당도에서의 일출이다.. 비견도 등허리에 올라 앉았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둥근해가 참 곱다..

 

가마바위가 보인다.

 

금당도가 선물하는 아침 일출의 햇살 받으며 피어나는 "향기나 꽃"을 아시나요..

 

향기나 꽃님들을 담는 짧은 순간에..

 

손가락 한마디 만큼 올라 왔다.

 

 교암청풍(轎岩淸風)..

가마(轎) 바위(岩)에서 부는 맑은(淸) 바람(風)은 신선지계이며 참으로 비경중에 비경이다.

 

 06시 42분 : 가마바위 끝지점..

 

교암청풍을 찾아 돌아가는 길..

 

호수같은 바다의 푸른빛.. 초록 소나무.. 기암의 조화.. 가히 절경이다.

 

교암청풍길은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교암청풍길이다.

 

교암청풍길 시작이다.

 

땅으로 분출된 마그마가 오랜 세월 동안 해풍과 파도를 얻어 맞으면서 장구한 시간이 만들어 낸 최고의 숨은 경치이자

지질학적 명소로 알려져 있다.

 

금당도 가학리의 동네 주민분이.. 동이 틀때 선상투어를 하면..

아침햇살을 받은 절벽이 붉게 물든 모습이 너무 좋다고 하더니.. 지금쯤 저 바다에서 본다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

 

교암청풍바위는 독특한 지질 현상이 잘 나타난 곳으로 지질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단골로 찾는 곳이라고 한다.

 

잘록한 허리는 세월이 파도와 바람의 힘을 빌려 깍아버렸다.

 

겹겹이 퇴적한 암벽층.. 인간은 이렇게 조각할 수 없다.

 

영겁의 세월 동안 지형의 변화와 함께 깎이고 쓸리고 패여 온갖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를 보노라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찰나의 순간을 살면서 영겁의 세월로 빚어진 이런 기암들을 두 눈으로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가..

 

 여기에서 교암청풍 절벽길은 끝이 나고 위로 올라가야 되지만.. 쉽게 올수 없는 곳이기에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간다.

 

독수리 머리같은 바위와.. 굉장히 발달한 가스층이었던가 보다 곰보투성이다.. 공기층이 빠져나간 타포니 현상이다.

 

 안내도상의 사자바위..

 

사자바위와 가마바위..

자연이 만든 걸작품에 인간이 접근하려니 대단한 집중력으로 조심해야 한다.  모두가 절벽인 길을 인간은 또..

이걸 보겠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꾸역꾸역 찾아온다.

 

 금당도에는 조선 영조때의 실학자 위백규(魏伯珪, 1727∼1798)가 금당도의 경치를 읊은 "금당별곡(金塘別曲)"이 있다.

금당별곡의 아름다운 절경 8곳을 금당팔경으로 부른다.

 

제1경이..울포귀범(鬱浦歸帆)길로..

녹음 우거지고 저물어져간 포구에 흰 돛단배 한가로이 돌아오는 한 폭의 그림 같다.

 

제 2경의.. 공산제월(孔山霽月)길은..

밝은 보름달이 공산위에 비추는 달빛아래에서 공자가 제자들과 담소를 나누었다는 이야기속의 공산제월이다.

 

제 3경은.. 사동효종(寺洞曉種)길로..

이른 새벽 적막을 깨며 들려오는 사찰 종소리의 청아함에 심취(心醉)하게 된다.

 

제 4경은..학령낙조(鶴嶺落照)의 길로..

석양은 학잠의 나뭇가지에 걸렸는데.. 붉고 붉게 비치고만 이르랴.

 

제 5경은.. 기봉세우(箕峯細雨)의 길로...

깎아지른 기암과 그 사이 나무들이 가랑비와 안개 위에 떠 있는 모습에 대한 감탄이다.

 

제 6경의.. 화도모운(花島暮雲)길은...

터질 듯한 저녁노을이 식어지면 화도의 석양은 천연색 구름이어라...

 

제 7경의..각암목적(角岩牧笛)길은..

우뚝우뚝 솟은 암석 사이로 목동의 피리소리가 신선의 노래인가.

 

제 8경의 적벽청풍(赤壁淸風)길은..

깎아 세운 듯한 괴석 적벽에 외로이 선 소나무 가지가 청풍에 한들 거리는구나..

 

교암청풍길을 올라와서 작은계산을 경유하여 세포리로 하산하기 전에 69m봉을 올라 간다.

 

내려다보는 가마바위와 청풍적벽..

 

금당도에서 키우는 백상어...

 

07시 41분 : 69m봉에서..

 

2~3분가량 안부로 내려가면 교암청풍 끝자락의 데크길로 내려 가는 길이다.

 

세포선착장과 비견도.

 

07시 54분 : 세포고개 하산완료..

 

08시 05분 : 외갓집펜션 귀환.. 아침부터 흘린 땀을 씻어내고..

 

환상의 전복죽..

누구라고는 말 안하지만..ㅎㅎ~ 아침트레킹을 안간.. 환상의 남성 두분과  여성횐님들의 작품..

 

죽 전문점에서도 이런 맛은 못 낼것 같은 맛이다.

 

10시 47분 : 선상요트투어 타는곳.

 

 정박하고 있는 요트에 승선..

 

울포항..

금당도의 인구가.. 1975년도에는 6,400명이었던 인구가 1985년도엔 4,000명으로 줄었고, 지금은 1천여 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주말이면 섬은 오히려 더 조용해진다. 면사무소.. 우체국.. 농협 등 관공서 직원들이 가족들을 만나러 뭍으로 나가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건지소는 1980년대 개설 됐었다. 한때는 부자섬이었던 곳이라 주민들의 교육열도 매우 높다.

칠순이상의 노인들도 대부분 육지에서 다양한 학교를 졸업했다.  '녹두장군', '암태도', '자랏골의 비가'를 쓴 작가 송기숙씨

와 가수 거미가 바로 금당도 출신이라고 한다.

 

 요트 운전기사..

 

10시 53분 : 울포선착장 출발.. 승선 인원은 향기나팀 14명.. 가족인듯한 3사람이 전부다.

 

 부채바위... 병풍바위쪽으로..

 

금당 8경중에 제 3경인.. 스님바위.

스님바위는 금당면 울포리에 있는 바위로 둥글고 반질반질하여 마치 스님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스님바위를 이쪽에서 보면 목도리를 하고 치마를 입은 소녀바위라고 한다..

 

 금당도의 최고봉 삼랑산(220m)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금당산(178m)..일명..쟁그랑산이라고도 한다.

 

금당 8경중에 제 2경인.. 부채바위..

 

 나도 한장 건졌다..ㅎㅎ~

 

11시 18분 : 금당 8경중에 제 1경인.. 병풍바위..

여름철에는 녹음이 우거져서 나무들이 바위를 감추어 버리기 때문에 늦가을이나 겨울에 보면 환상적이라고 한다.

 

 요트 투어 가이드... 전국의 사람들을 상대 하면서 쌓인 노하우가 보인다.

 

 병풍바위를 끝으로 되돌아가면서 약 20분 가량 선상 노래방이다.

 

 노래 몆자락에 병풍바위는 저멀리 밀려나고..

 

 비견도의 삶의 현장..

 

교암청풍이 보이기 시작한다.

 

 교암청풍길에서 돌아간 데크..

 금당 8경중에 제 4경인.. 교암청풍..

 

 교암청풍의 사자바위..

 

 금당도 주민의 말대로 아침일출때 온다면 햇살을 받은 붉은 암벽의 모습이 좋을것 같다.

 

 교암청풍 가마바위..

 

 가마바위 끝부분.. 아침에 절벽위 소나무 한그루에서 돌아 갔었다.

 

 교암청풍에 이어서.. 청풍적벽 시작이다..

 

▲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걸작 "절규" 바위라고 한다...

뭉크는... 1893년 완성된 "절규" 작품을 "미친 사람에 의해서만 그려질 수 있는"...것 이라고 했다..

무언가 할말이 있는것 같은... 이 바위 그림은 오로지... 초 자연적인 시간만이 그려 낼수 있는 작품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하려는 말이 무얼까?...

 

 금당 8경중에 제 5경인.. 청풍적벽..

 

▲ 어제.. 청풍적벽길에서 다녀갔던 송장굴이다..

 

▲ 청풍적벽길의 종착지 목섬.. 들물일때는 건너지 못한다..

 

▲ 금당도의 높고 낮은 산들이 언제 종주산행을 하러 오라고 한다.

 

▲ 소남다지 섬과 대남다지 섬..

 

▲ 소화도... 부근 바다는 수심 4~50m의 연산호군락지라고 한다.

 

 금당 8경중에 제 6경인.. 중화도 초가집바위..

 

중화도 초가집바위를 다른 방향에서 보면 트럼프 두상이 나온다고 하던데.. 기회를 노쳤다.

 

중화도 버섯바위..

 

전 축구선수 안정환이 진행하는 MBC예능프로그램 "푹쉬면 다행이야" 촬영세트장... 완도군과 1년 계약을 하였다고..

 

12시 17분 : 금당 8경중에 제 7경인.. 대화도 코끼리바위와 제 8경인 남근바위..

 

 코끼리바위 정면을 지나서 울포항으로 돌아간다...

 

어제 지나 갔던 노을적벽과 장문재...

 

 금당도에 와서 선상투어를 하지 않으면 수박 껍질만 보고 간다더니.. 정말 안보고 왔으면 후회할뻔한 절경이다..

 

13시 04분 : 금당도 중국집 남해루..

 

1박 2일의 금당도일정도 마무리 시간이 다가오고.. 유종의 미를 위해 단체 인증을 하고 섬일주 도로를 휭~하니 돌고..

 

 15시 08분 : 울포선착장에 도착하니 평화페리5호가 들어 오고 있다.

 

 15시 11분 : 울포선착장..

 

 15시 32분 : 우두항 도착..

 

거금대교를 건너서.. 대구로~..대구로..

 

물품 찬조.. 금전 찬조.. 조리 지원..

오며가며 장거리 운전 보시.. 향기나 회장님의 노심초사.. 이런 봉사와 이해심이 있었기에

2024 향기나팀의 여름 여행은 말그대로 향기나는 1박 2일이 되었다.

 

지붕없는 미술관이라는 금당도..

가보고 싶었던 금당도 투어를 무사히 마칠수 있었던건 모든분들의 하나된 마음이었다.

야등번개팀의 새로운 이름..

"향기나"라는 타이틀로 2024년 하기단합 여행겸 트레킹으로 1박 2일의 일정으로 전남 완도군의 "금당도"로 간다..

 

금당도의 행정구역은 전남 완도군 금당면이며 차우리 육산리 가학리 등 10개의 마을로 이루고.. 생활권은 고흥군 또는

장흥군이 훨씬 가까워 출항하는 배도 완도에서는 없고.. 장흥 노력항에서 6항차.. 고흥 우두항에서 4항차.. 고흥 녹동항에서

2항차 가 있다.

무인도 15개.. 유인도 3개로 이루어진 금당군도는 전라남도의 2021년에 "가고 싶은 섬"으로 뽑힌 후 문화관광 사업과

해안절벽을 끼고 도는 교암청풍길이 산꾼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섬트레킹으로 점점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고흥군 우두항에서 연안 여객선 페리호를 타고 15분이면 갈수가 있다.

 

09시 27분 : 고흥군 녹동항... 전복을 사기위해 들렀다.

 

구매는 회장님과 여성 회원님들에게...

 

고흥군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보인다. 조금후에 건너갈 것이다.

 

 09시 58분 : 소록대교.

 

 10시 13분 : 우두항 도착.

 

11시 20분배로 금당도에 들어갔다가 금당도 울포항에서 내일 오후 15시 20분배로 나올것이다.

 

페리호를 기다리는 동안 금당도의 이모저모를 숙지하고.. 주된 관심은 교암청풍길과 노을적벽길이다.

 

목적지인 금당도가 길게 누워 있는 앞으로 우리가 타고갈 평화 페리5호가 들어오고 있다..

 

원래 금당도(金堂島)라 불리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현재의 금당도(金塘島)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지명표기가 변화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이곳 일대에 금일(金日), 금당(金塘), 생일도의 금곡(金谷) 등.. 금(金)자의 지명이

많아 금이 채굴된 고사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0시 40분 : 접안 완료..

 

오늘 우리가 가는 금당도(金塘島)는 이순신 장군의 승전지다.

정유재란이 있었던 1598년, 왜군 함대 100여 척이 3도수군통제영이 위치한 완도 고금도를 공격하기 위해 거금도와 소록도

바닷길로 들어선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조선 수군은 금당도에서 출병해 지금의 거금대교와 연홍도, 고라금해수욕장 인근

에서 격렬한 교전을 펼친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넓은 바다에 유리한 학익진 전법으로 적선을 포위한 후 함포로

왜선 50척을 수장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이때의 절이도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거금대교휴게소에 승전탑이 있다.

 

 11시 12분 : 엔진 시동후 서서히 선미를 회전하더니...

 

뱃머리를 돌린디..

 

▲ 그리고는... 순식간에 우두항을 저만치 밀어 버린다..

 

휴가 기간도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 탓도 있겠지만... 폭염으로 휴일임에도 여행객이 거의 한산하다.

 

 11시 21분 : 우두항 출발 4분만에  금당도가 손에 잡힐듯 가깝다..

금당도의 최고봉은 삼랑산(220m)으로 서쪽에 솟아 있으며, 그밖에도 비교적 기복이 심한 산들이 사방에 둘러 있고 남쪽

일부지역에만 평지가 발달하여 농경지로 이용된다.

기후는 연중 따뜻하고 비가 많다. 주민은 반 이상이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다.  농산물로 쌀· 보리· 고구마· 마늘· 고추·
팥 등이 생산된다.  보리와 고구마는 생산량이 많아 농협수매가 활발하다.   연안 일대에서는 문어· 장어· 멸치· 도미· 새우

등이 많이 잡히며, 감성돔 낚시와 김· 미역· 톳· 다시마 등의 양식업이 활발하다.

 

 울포항 전경.

울포(鬱浦)의 지명 유래는..이 마을의 술맛이 좋아 울금(鬱今)이라 호칭하였으나, 울억 기미로 불리어오다가 이후 울포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1770년 조선 영조대에 인천이씨가 금일읍 평일도에서 띄배(뗏목)를 타고 들어와 처음 입주하였으며..

그후 김씨등이 이주하여 형성되었다고 한다.

 

 11시 31분 : 울포선착장.

 

여객선 매표소와 선상투어 매표소.. 금당도에 단1대뿐이라는 택시도 있다.

 

내일(25일) 오전11시로 예약한 선상투어 배를 타는 선착장도 확인하고...

 

 11시 38분 : 트레킹에 앞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먼저.. 점심식사를 하고... 노을적벽길과 교암청풍길을 트레킹후에 섬 반대편 마을인 가학리에 있는 숙소로 가기로 한다.

 

 13시 07분 : 장문재... 노을적벽길과 송장굴. 용굴이 있는 청풍적벽길로 가는 들머리다.

 

 본격적인 트레킹에 앞서... "가고 싶은섬 금당" 안내판에서 단체 인증샷.

 

그러나 오늘은..  "가고 싶은섬 금당"이 아니라 "오고 싶었던 금당"의 안내판 앞에 서니 감회가 새롭다.

 

오늘의 "향기나"의 여행겸 트레킹은.. 단합에 목적이 있기에 산행이라기 보다는 금당도의 "엑기스"만 볼것이다.

 

 댈추봉 오름길이 급오름도 아닌데.. 만만치가 않다..

오늘의 금당도 기온이 낮최고 34도는... 육지의 34도와는 다르다.. 바다속의 섬이라 습도가 매우 높다..

 

장문재에서 4분가량 올라서니 다행하게도 댈추봉으로 바로 오르지 않고 수평의 사면길로 이어진다.

 

댈추봉 전망대.

 

바로 앞에는 가마바위 능선이고.. 두번째는 비견도가 악어처럼 기어가고.. 그 너머로는 거금도다.

 

세포마을로 이어지는 물길이 지금은 만수기로 가득찬 우유빛갈의 수면이 잔잔하고.. 앞쪽의 바위는 초가집처럼 보인다.

 

댈추봉전망대에서 노을적벽으로 가는 능선은 거의 수평이동이지만 해송들의 키가 낮아서 그늘을 만들어 주지 못한다.

 

13시 31분 : 세포전망대 갈림길.. 가마바위를 가까이에서 볼수 있는 곳이다.

 

노을전망대.. 바로 아래에는 적벽암릉이 병풍처럼 서있다.

 

 노을적벽길의 시작이다.

 

 

노을적벽투어를 마치고 송장굴과 용굴로.. 목섬은 통과다.

 

여기가 송장굴인가보다.. 오랜 옛날 송장을 여기에 안치시키면서 송장굴이 되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해안가로 내려 가면 저기 어딘가에 용굴이 있겠지만.. 여기서 되돌아 올라간다.

 

15시 26분 : 숙소인 외갓집펜션에 도착..

노을적벽길에서 교암청풍길까지 가보려고 했지만.. 고온다습한 날씨로 더이상은 무리라 판단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시원하게 땀을 씻어낸후 환복을 하고..

 

솔잎의 윤회장님이 특별 찬조해준 술이다.

 

녹동항에서 공수한 싱싱한 전복회가 술을 부른다.

양주.. 데낄라.. 쐬주.. 맥주.. 술종류만 9가지라고 했는데.. 모리거따~..ㅎ

 

방안에서의 전복회 파티에 이어서.. 야영장 기분을 내어 본다.

 

가학마을..

장흥에서 1620년 무렵 이씨와 정씨가 처음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는 가학리는 학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김양식이 매우 활발했던 지역이지만 지금은 톳과 미역 그리고 다시마 양식을 많이 하고 있다.

 

가학마을앞 해변.. 지금은 날물이라 물이 빠졌다.

김 하면 금당도 가학리인데 1974년 가학리 인근 무인도에서 최초로 미역양식을 시작했으며.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김양식이 호황을 누려 과거 일본으로 수출까지 하였다. 지주식 김양식으로 최적지이기 때문이다.

당시 가학리의 한 주민은 초등학교 선생으로 부임한 동생을 설득해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김 양식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김농사가 수지맞았다는 것이다.  금당도는 30여년 전까지 김 생산량과 품질면에서 으뜸으로 평가되었다.

한때 13곳이나 됐던 김 공장은 지금은 3곳으로 줄었고 그나마 "물김"도 다른지역에서 들여와 가공만 한다고 한다.

호황을 누렸던 70년대에는 술집이 4곳이나 있었고, 집집마다 젓가락 장단을 맞추는 작부가 3~4명씩 있었다고 한다.

이제 그 호황을 누리던 김 양식은 사라지고 미역과 다시마, 톳으로 교체되었다.

미역철은 4월 20일까지 이어지고,  5월부터는 다시마를 수확하고..  6월부터는 톳이 나온다.

 

우리 "향기나" 회장님의 섭외수준이 탁월합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와글와글 호텔"의 수석 쉐프님을 초빙해서 최고의 향기나는 먹거리를 만들어 주네요.

 

전복과 돼지의 만남..

 

홍여사님은..외갓집 사장님에게.. 무슨 말을 하였는지..

 

외갓집 사장님이 저렇게나 포복절도를 합니까?..ㅋ~

 

이것이 향기나의 저력이다..

 

일몰시간인데.. 해무로 시야도 좋지 않은데.. 빨리 나오시오..ㅎㅎ~

 

들냥이들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요놈들은 여행객들이 펜션에서 하는 일(먹거리)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가학리의 밤도 깊어가고..

 

향기나팀들도 하루의 행복감으로 밤은 더욱 깊어간다.

2024년 08월 18일(일).

주왕산국립공원 절골계곡 : 경북 청송군.

 

산행코스 : 주산지입구-절골탐방지원센터-신술골입구-반환점-운수암절터-주산지입구.

산행시작 : 주산지입구  11시 28분.

산행종료 : 주산지입구  14시 36분.

전체거리 : 약7.14km.

전체시간 : 03시간 08분.

운동시간 : 02시간 08분.

휴식시간 : 00시간 42분.

 

11 : 28  주산지입구.

11 : 38  절골탐방지원센터.

12 : 22  신술골입구.

12 : 28  반환점.

13 : 13  운수암터.

14 : 19  탐방지원센터.

14 : 36  주산지입구 종료.

 

절골탐방지원센터 주차장의 협소로 대형버스진입금지라서 주산지입구에서부터 탐방지원센터까지 걸어서 간다.

 

연일 한 여름의 폭군인 염제(炎帝)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이곳 청송의 날씨도 34도다.

 

 11시 38분 : 주왕산국립공원 절골탐방지원센터.

이곳은 2009년 9월 13일에 처음으로 찾은 곳이니... 15년만에 다시 섰다.

 

절골입구의 대문현판에 운수(雲水) 길이라고 되어 있다.

"절골"이라는 유래는... 옛날 계곡속에 "운수암"이라는 절이 있어 절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절골계곡은 2017년도에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선정한 국립공원 힐링로드 10선에 선정되었던 곳이다.

절골계곡의 맑은 계류를 기대했었는데.. 가뭄으로 물길이 끊기고 메말랐다.

 

 그럼에도 올해의 가을 단풍은 그 어느해보다 고울것 같다.

 

12시 28분 : 대문다리 가기전의 바람길이 좋은 곳에서..

 

권이사님이 준비한 잭 다니엘을 즐기며 쉬었다가 원점회귀하기로 한다.

 

▲ 운수암터 안내문..

운수암은 조선시대 인조 때 창건 되었다고 한다.

운수암이라는 이름은 200년 전 청송 출신의 선비 서원모의 책 "주왕산지"에 등장한다. “계곡십리 길이 끝나는 곳에 평탄한

언덕이 하나 있으니 바로 암자가 위치한 곳이다.”라고 되어 있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돌아가는길에..

 

▲ 지금의 솔잎산악회를 너무나 잘 운영하고 있는 회장님팀을 만나 젊은 에너지와 함께 한다..

 

▲ 버들치.

우리나라 전국의 강이나 계곡수에서 흔히 볼수 있다.

전북 지역에서는 버들치를 조선 중기의 고승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1633)와 연결짓는 전설이 전한다.

전설에 따르면, 진묵이 물가를 지나가는데 청년 유생들이 물가에서 버들치를 잡아 솥에 끓이는 참이었다. 청년들은 지나

가던 진묵을 불러놓고는 억지로 물고기를 먹으라 강요하였다. 마지못해 진묵이 먹으니 이번에는 "중놈이 고기를 먹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하면서 놀리는데, 진묵은 "승려인 내가 어찌 살생을 하리오? 도로 산 채로 내놓으리다." 하더니 허리춤을

내리고 큰 일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버들치들이 산 채로 나와서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때문에 버들치를 전라도 지역에서는 '중고기' 또는 '중태기'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진묵대사의 신통력을 강조하면서도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시대상을 함께 보여주는 전설이다.

 

▲ 가을이 머지 않은것 같다..

 

 

 14시 36분 : 주산지 입구 산행종료..

 

 

▲ 마평교 쉼터.

청송군 주왕산면 지리 마평교 쉼터에서 하산식.

 

▲ 윤회장님의 건배..

 

▲ 이어서 산대장님의 건배.

 

▲ 청송이 고향인 선임자문님의 건배를 끝으로..능이 찹쌀유황닭백숙으로 여름 보신...

 

▲ 아니온듯 깨끗히 정리하는... 솔잎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2024년 08월 15일(목).

삼성산. 용봉. 마성산 : 충북 옥천군.

 

산행코스 : 삼양리철도교-삼성산-용봉-마성산-사목재-4코스-자연휴양림-방문자안내소.

산행시작 : 삼양리철교  09시 53분.

산행종료 : 휴양림방문자안내소  15시 26분.

전체거리 : 약10.8km.

전체시간 : 05시간 34분.

운동시간 : 05시간 08분.

휴식시간 : 00시간 25분.

 

09 : 53  삼양리철도교.

10 : 21  삼성산.

11 : 22  용봉.

13 : 25  마성산.

14 : 04  사목재.

14 : 26  4코스 탈출.

15 : 09  자연휴양림.

15 : 26  방문자안내소 종료.

 

09시 53분 : 삼양리 철도교.

 

주민들이 많이들 이용하는 동네산답게 안내판과 신발먼지털이도 잘 설치되어 있다..

 

급하지 않은 완만한 경사를 4~5분 가량 오르면..

 

삼성산 안부에 올라서고 등로는 주능선으로 이어 진다..

 

성터 흔적.

성터 안내문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돌무더기다.

 

백제와 신라간의 전투 중 가장 치열하였다는 관산성전투의 위치가 고리산이라는 설과 삼성산이라는 설이 있어

옥천향토사쪽에서는 어디가 관산성이라고 정하지 않아 이 곳을 삼성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남성골에서 고구려산성이 발견이 되고.. 대전의 월평산성 발굴에서는 백제성터 밑부분에서

고구려 토기가 발견이 되었는데.. 예산상의 문제로 발굴을 중지했다고 한다.

또한 대전 복용동 당산마을 유적 발굴과정에서  마을이 한꺼번에 화재로 인하여 파괴된 흔적이 발견이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고구려 남하정책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하여 마을이 불 타버렸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관산성은 바로 코앞까지 내려온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기 위해 약 486년을 전후로 나제동맹을 근거로 백제 땅에 신라가

만든 산성일 것이라고 추측을 한다.

 

 10시 21분 : 삼성산.

동국여지승람에 이 산에 3개의 성이 있다고 하여 삼성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바위도 세 조각으로 되어 있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관산성전투는 백제와 신라 간의 전투 중 가장 유명하며 또 기록상으로 삼국시대 전투 중 가장 자세

하게 기록된 전투다. 흔히 백제 성왕의 죽음으로 잘 알려졌다.  4세기 후반 때처럼 백제, 가야, 왜국 대 신라의 적대 구도가

다시 부활하였고,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후반 신라의 삼국통일까지 이어지는 후기 삼국 시대의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친

매우 중요한 전투다.  554년 7월, 관산성에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 건곤일척의 결전이 벌어진다.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아 국가 중흥을 이루려는 백제와 한강 유역 일대를 장악하여 한반도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신라가 국운을

걸고 맞붙은 싸움이었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9,600명이 참살되었고 말 한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전투는 신라의 승리로 끝났고, 이 전투에서 백제 26대 성왕은 적군에게 목숨을 잃었고 약 3만 명의 백제군도 전사하였으며,

120년간 유지되던 나제 동맹이 깨어지게 되었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 패배의 후유증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반면 백제를 패퇴시킨 신라는 사방으로 영토를 넓히며 삼국 통일의 기반을 구축한다.

 

▲ 신라에 붙잡힌 백제 성왕의 목을 하급병사에게 베라고 한것도 부족하여 신라는 성왕의 목을 신라 왕궁 북청의 계단 밑에

묻고 신라 귀족들이 모두 밟고 지나가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고, 나머지 몸은 백제로 반환되었다.

 

이에 분노한 백제측에서 기병을 이끌고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지만.. 성왕이 죽은 구진벼루 위쪽 관산성 아래에서 대패를

당하게 된다. 이후 의자왕때 백제군이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한후 김춘추가 가장 사랑했다던 막내딸과 사위의 목을베어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보내 성왕의 복수를 하게 된다. 결국 김춘추는 그 일로 한을 품고 굴욕을 참아가며 당나라의 협력

을 얻어와 백제를 멸하게 된다.

 

▲ 관산성전투 참고도.

백제 성왕을 붙잡아 죽인 전공을 세운 장군 김무력은 이후 초고속 승진을 한 기록을 여럿 확인할 수 있다.

551년 단양 신라 적성비나 553년 7월 《삼국사기》의 신주 군주로 김무력을 임명할 때 김무력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여섯째

등급인 아찬이었는데, 555년 세워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나 561년 창녕 척경비에서는 3번째 등급인 잡찬으로 관등이

3등급 승진했다. 거의 약 2년 만에 3관등 승진인데 신라의 다른 기록을 봐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3단계 승진은 거의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승진이다. 관산성 전투에서 활약한 전공을 인정받은 듯하다.

 

▲ 용봉을 넘어 마성산으로 가는 능선길.

이 능선이 관산성 전투가 벌어지던 백제 성왕시절의 신라군 최전방 라인 이다.

 

▲ 국사봉..

삼국시대라면 백제땅이다.

 

▲ 식장산..

건너편 능선은 백제의 최전방 라인인.. 식장산이 코 앞에 있고 그 너머가 바로 대전이고 보면 대전 옆의 백제의 구도인

공주(웅진)과 새로운 도읍인 부여(사비)에서 멀지 않은곳 이니 만큼 백제로써는 한치도 더 이상 물러나서는 안되는 절대

사수의 지역인 셈이다..

 

▲ 용봉 오름길에 바라본 옥천읍 전경..

옥천의 신라시대 지명은 고시산군 이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상주의 관성군으로 바뀌었다가 고려시대에 옥주(沃州)를

거쳐 조선시대에 옥천으로 변했다고 한다. 옥천(沃川) 이라는 이름은 강물이 풍부하고 토양이 기름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옥주가 옥천으로 변한것은 조선 태종때의 일인데, 계수관 제도로 인하여 각 지역의 주요 거점 도시만 주(州)를

사용하도록 하고 기타 고을 주(州) 자가 들어가는 다른 도시는 모두 산(山) 이나 (川) 으로 변경 하도록 했다고 한다.

당시 경상도에 속하던 옥주는 태종의 명으로 보은, 황간, 영동, 청산과 함께 충청도로 소속 변경을 하게 되었는데 이미

충청도에는 주요 거점도시로 충주, 청주, 홍주, 공주가 있어 그 이름을 유지했고, 옥주는 옥천이 되었다고 한다.

 

▲ 멀리 도덕봉이 보인다.

예전에는 도둑들이 극성을 부려 도둑봉 이라 불리다가 도덕봉 으로 고쳤다고 한다.

대전 수통골에 있는 도덕봉과 이름의 유래가 똑 같은걸 보면 전국의 도덕봉이란 그 고상한 이름과 달리

대부분 도둑들의 소굴이 이쁜 이름으로 포장 되었을 듯 싶다...

 

11시 22분 : 용봉.

 

▲ 용봉까지는 선명하던 길이었는데... 마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흔적이 희미하다.

 

11시 45분 : 동평성터.

 

▲ 11시 22분 : 성재.

옥천읍 마암리로 내려가는 탈출로다.

 

조여사님의 작품...

밑에서 찍어 드렸다고 한컷 해주시네요.. Give and Take...기브 앤 테이크.. 조여사님 감사합니다.ㅎㅎ~

 

바위지대를 넘어서면 오른쪽으로 옥천군 군서면 평야지대가 보이는데.. 바로 그 평야지대 끝에 현재 지도상에 "말동산"

이라고 되어 있는 성티산성이 있다. 당시 백제의 기마병이 주둔을 했던곳으로 백제의 성왕이 고위 관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전장을 지휘했던 곳이다. 이곳의 백제 기병을 상대하려고 삼년산성에서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 장군의 기병이 내려와

구진벼루(충북 옥천군 군서면 월천리)에 숨어있던것인데, 그걸 알리없는 성왕은 늘 다니던대로 고리산에서 백제의 주력을

이끌고 있는 태자 "부여창"을 만나러 가다가 잡혀서 황당한 참살을 당하게 된다.

 

 마성산성 흔적..

 

마성산 정상.

컨디션 난조로 마성산 정상을 패쓰 했는데.. 김더덕님이 보내주셨다.

 

 마성산 정상의 돌탑... 김더덕님의 작품..

 

마성산성 안내문... 김더덕님의 작품이다..

 

마성산 하산길에 바라본 장령산..

장령산(壯靈山 : 656m)은 장룡산(壯龍山)이라고도 부른다.

충청북도 옥천군의 군서면, 이원면, 옥천읍 경계에 있는 산이다. 

『한국지명총람』에 '장룡산(壯龍山)'이 기록되어 있으며, 산에 '용바우'라는 바위와 '용암사(龍岩寺)'라는 사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지명의 유래가 소개되어 있다. 현재는 장령산 자연 휴양림 지역으로 유명하다.

 

▲ 어느새 식장산도 멀어져 간다.

 

14시 04분 : 사목재.

사목재는 옛날 군서 사람들과 금산 사람들이 옥천읍을 오가는 주요 이동로 였다.

사목재란 이름의 유래는 옛날 이곳에 도둑이 많아 이 고개를 넘으려면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넘어라.. 라는 의미와..

용암사 스님들이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며 넘었던 고개 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사목재 장령산 들머리.

오늘따라 컨디션 난조로.. 더 이상 장령산으로 진행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또한.. 장령산은... 천태산. 대성산. 장령산.  마성산을 잇는 일명 "천.성.장.마"라 하여 약25.6km를 이어가는 종주능선이다..

이중에 천태산. 대성산은 올랐는데 삼성산.. 용봉.. 마성산이 미답산으로 남았었는데.. 오늘 그 마무리가 되었으니..

여기서 임도를 따라 하산 하기로 결정 한다..

 

이길은 장령산 등산로중에 "4코스"에 해당하는 길로.. 오늘로써 세번째 내려 가는 길이다..

 

3코스 접속지점..

 

장령산 자연휴양림을 지나서 주차장에 왔는데 산이좋아의 애마가 보이지 않는다.

회장님께 전화로 문의 하였더니 휴양림측에서 대형버스 진입금지로 한곳에 모여 있다가 차를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15시 26분 : 휴양림 방문자 안내소에서 산행 종료.

 

버스가 올때까지 대기하는 동안 트랭글을 정리..

 

산이좋아산악회 회장님의 건배.

 

 이어서 김고문님의 건배.

 

화랑산악회 회장님까지 건배의 잔을 들고~.. 일배일배부일배~..

 

옥천표,, "장군녹두삼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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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탈출하는 바람에 빼먹은 장령산 코스를 과거의 사진을 부록으로 이어 간다.

 용암사 가는길..

 

▲ 용암사 대웅전.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이다.

용암사는 서기 552년 신라 진흥왕 13년에 의신조사가 속리산에 법주사를 창건하기 저에 이곳의 산세를 보고 감탄을하여

절을 세웠다고 한다. 사찰의 규모가 원래는 상당하였는데, 임진왜란때 불타고 간신히 명맥만 유지 해오다가 근래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중건 되었다고 한다. 용암사라는 이름은 경내에 용처럼 생긴 바위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

이 파괴 하였다고 하며 신라 마의태자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려는 아버지를 떠나 금강산으로 가다가 용암사에 들려

한동안 머물면서 용바위에 올라 서라벌이 있는 남쪽 하늘을 보며 통곡하곤 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대웅전에는 본존불인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고, 그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1880년 복장을 열었을 때 '순치 8년 신묘년'에 만들어진 다라니경이 발견됨으로써 이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조선 효종 2년(1651)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 보물 제 1338호 용암사 쌍석탑.

 

▲ 마애불은 바위의 중간, 마치 공중에 뜬 것같은 형태로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언제 칠했는지 모르지만, 마애불에는 붉은 채색을 칠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 운무전망대..

운무대는 구름이 춤추는곳이고.. 운해가 아름다운곳이다.

특히..운해와 어우러진 일출이 아름답다고 소문난곳이며.. CNN이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50곳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곳은 낮과 밤 기온차가 큰.. 봄철과 가을철이면 운무가 짙게 내려앉아 아름다운 운무해돋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 일명 "틈새바위".

 

▲ 정면에서 바라본 거북바위.

 

▲ 잘생긴 거북바위.

 

 

▲ 왕관바위 틈새를 빠져나와..

 

▲ 마주선 왕관바위..

 

▲ 장령산 정상.

장령산은 장용산으로 불리다가 옥천군에서는 옛날부터 주민들이 부르던 장령산으로 바꾸어 달라는 군민의 희망에 따라

국립지리원 중앙지명위원회에 개명을 신청하여 1995년 5월 1일에 장령산으로 변경되었다.

 

▲ 5코스 데크길의  2전망대.

 

▲ 전망대에서 바라본 금산의 진산 "서대산".

 

▲ 중간의 사목재에서 탈출하는 바람에 못갔던 장령산 길을 과거의 사진으로 이어 보았다.

2024년 08월 11일(일).

주지봉. 문필봉 : 전남 영암군.

 

산행코스 : 죽정마을-양사재.문산재-양인석상.책굴-월대암-죽순봉-주지봉-문필봉-회춘능선-왕인박사유적지주차장.

산행시작 : 죽정마을  09시 16분.

산행종료 : 왕인박사유적지  15시 05분.

전체거리 : 약6.71km.

전체시간 : 05시간 51분.

운동시간 : 04시간 43분.

휴식시간 : 01시간 07분.

 

09 : 16  죽정마을.

09 : 29  지침바위.

09 : 30  양사재. 문산재.

09 : 34  왕인석상. 책굴.

09 : 43  월대암.

10 : 50  죽순봉.

11 : 19  주지봉.

12 : 34  문필봉.

13 : 41  똥바위.

14 : 02  미로바위.

15 : 05  왕인박사유적지주차장 종료.

 

 04시 30분 :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오늘은 말레이시아 키나발루원정을 주관했던 이대장님이 산악회와는 별도의 기획신행으로 전남 영암군 월출산국립공원

자락의 주지봉.. 문필봉으로 가는 날이다... 승차시간이 반월당에서 05시 10분이다.. 지하철 시간도 아니고..

가까운 거리라서 택시를 타기도 그렇고... 걷기로 한다.  새벽에 달구벌 대종을 보며 걷는 길도 괜찮네~..

 

 09시 16분 : 전남 영암군 죽정마을 도착.

 

구림천 목교를 건너가면...

 

이 길은 국립공원 월출산 둘레길인 "기찬묏길 2구간"과 주지봉등산로가 겹치는 구간이다.

 

09시 27분 : 왕인박사 유적지로 통하는 기찬묏길 2구간 갈림길.. 주지봉길은 임도를 따라 직진이다.

 

지침바위.

주변에 자생하던 닥나무를 채취하여 이 바위에다 놓고 찧어서 종이를 만들었다고 하여 지침바위(紙砧岩)라고 부르고 있다.

 

닥나무는 한방에서 열매를 양기부족.. 수종의 치료제로 쓴다. 어린 잎은 식용한다.

옛날에는 닥나무 껍질의 섬유로 저포(楮布)라는 베를 짰다.

닥나무를 종이 원료로 사용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인데 조선시대에 본격화되어 닥나무 재배를 장려하였다.

줄기를 1∼2m 길이로 잘라 밀폐된 솥에 넣고 증기로 두 시간 정도 찐 다음 꺼내어 껍질을 벗긴다.

이것을 그대로 말린 것을 흑피(黑皮)라 하고, 흑피를 물에 불려서 표피를 긁어 벗긴 것을 백피(白皮)라 한다.

흑피는 하급지의 원료로 쓰이고 백피는 창호지, 서류용지, 지폐 등의 원료로 쓰인다.

 

 양사재. 문산재 입구인데.. 공사를 하는 모양이다.

 

좌측은 양사재(養士齊)이고. 우측은 "​학문이 산처럼 쌓인 곳" 이라는 뜻의 문산재(文山齊)인데 보수공사중이다.

문산재(文山齊)는 왕인(王仁)박사가 공부했던 서당 터로 이곳에서 큰 인물이 많이 나왔다고 조선시대에 문을 연 서당이다.

1688년 구림 대동계의 서당으로 건립되어 이용되다가 1966년에 철거되었다.

 

양사재(養士齊)는..

백제 때 왕인이 담소를 나누었던 장소로 전해지기도 하며, 조선 시대 구림 대동계의 서당으로도 이용되었다.

1966년에 문산재와 함께 철거되었으며, 왕인 박사 유적지로 지정되면서 1986년에 중수되었다.

 

 양사재(養士齊)를 올라서면.. 왕인석상과 책굴로 가는길을 가르키는 표지목이 보인다.

 

09시 34분 : 왕인석상(王仁石像).

왕인박사의 후학들이 일본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초빙으로 상대포(上臺浦)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나간 스승을 그리워

하며 세운 왕인석상은 박사가 배를 타고 떠났던 상대포구쪽을 바라보고 있다.

책굴옆의 왕인석상은 문수상, 문수암이란 별칭으로 마을에 구전되어 왔다. 법의를 입고 양손을 소매에 넣어 배 앞에 가지런

하게 새겨놓은 입상으로 직사각형 돌에 조각되었다... 표현으로 보아서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 된다는데 "왕인석상"

이라는 이름은 근래에 붙여졌다고 한다.

 

▲ 책굴(冊屈).. 왕인석상(王仁石像) 오른쪽에 있다..

 

▲ 책굴(冊屈)입구..

왕인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공부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천연 석굴에서 들어가 학업에 전념했는데,

왕인이 책을 읽던 굴이라해서 후세 사람들이 책굴이(冊窟)이라 불렀다. 폭2.5m, 길이7m, 높이5m 정도의 직사각형 굴이다.

이곳에서 학업에 정진한 왕인은 18세에 오경박사(五經博士)에 등용되었다.

오경박사(五經博士)란... 백제에는 여러 전문분야에 박사들이 있었는데 주역(周易)..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춘추(春秋)등  경서(經書)에 능통한 사람을 말하며 귀히 여겼다.

 

▲ 책굴(冊屈)을 올라서면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있다.

책굴은 상부가 뚫려있고 석상도 비바람에 노출되어 외부의 암벽에 누각형태로 책굴이 보호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책굴과 석상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 책굴 암벽 위에서 바라본 구림마을과 왕인석상이 바라보고 있다는 상대포도 보인다.

 

▲ 책굴을 덮고 있는 바위군을 내려다보고..

 

▲ 암벽을 따라 월대암으로 향한다.

 

▲ 이름짓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이름 붙여 놓은 콧구멍 바위다.

 

▲ 월대암(月臺岩)암석은..

토르(Tor)지형으로 월출산 천황봉과 함께 백악기 말인 약 9000만년 전에 화강암으로 이루어져있다.

 

▲ 월대암(月臺岩)에서 바라본 월출산.. 정상인 천황봉은 아직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다.

 

▲ 월대암에서 내려다 본 죽정(竹亭) 마을.

대나무 숲이 우거져 죽정마을이라고 하는데 양쪽으로 우거진 죽림(竹林)이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구림천에 의해 음죽정

(陰竹亭)과 양죽정(陽竹亭)으로 나뉘어 진다. 자연석을 이용해 쌓은 옛 담장은 전라남도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 월대암(月臺岩)에서...

 

▲ 일명... 쩍벌소나무.

 

▲ 주지봉능선의 매력인 암릉지대의 시작이다...

 

▲ 얼굴을 쑤~욱 밀어 올린 월출산의 천황봉의 장엄함이 빛난다.. 아래로는 천년고찰 도갑사가 보인다..

도갑사는 산세가 빼어나고 풍광이 아름다워 옛부터 '호남의 소금강' 이라 불리는 월출산의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형상이라는 산자락 아래 자리잡고 있다.

 

▲ 30배 줌으로 당겨 본 도갑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말사로.. 신라 말기에 영암 구림마을 출신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 가야 할 주지봉능선의 죽순봉...

 

▲ 절벽에 매달려 힘들게 자라지만.. 거기에서 꿋꿋한 모습이 아름답다..

 

▲ 기차를 타면 창 밖의 아름다운 풍경과 순간의 반짝임도 일순간 지나가면 다시오지 않듯이..

 

▲ 지나간 세월 또한 다시 오지 않음이라.. 순간을 놓치지 말자..

 

▲ 문필봉의 기묘한 암릉위로 흰구름이 흐르고..

 

▲ 당겨본 문필봉과 그 아래 스핑크스바위..

 

▲ 당겨본 문필봉의 불곰머리바위.. 반대편에서 보면 영락없는 불곰이다.

 

▲ 어느날 솔씨 하나 날아들어 보금자리 되었구나..

소나무야..

키 커려고 하지 말고 몸집 키우려 하지 마라.. 

키 크고 몸집 커지면 바위가 너를 싫어 할 것이다.. 

그러니 너의 주어진 환경에서 욕심 내지 말고 지금의 그 모습 그대로 오래오래 살아 주기 바란다. 

내가 다시 이 길을 지나는 인연이 온다면.. 다시 만나자꾸나..

 

10시 50분 : 죽순봉 통천문..

 

▲ 아따!~..그눔참 인물이로구나..ㅎ~

 

 11시 19분 : 주지봉 정상의 삼형제 바위.

주지봉의 주(朱)는 붉을 "주" 이고.. 지(芝)는 영지버섯의 "지" 자다. "지초(芝草)"라고도 한다. 지초가 많은 산인가 보다..

 

▲ 헐!~.. 주지봉 정상에 잔치국수가..

식객 허영만씨가 이 맛을 보았다면 뭐라고 평을 했을까..

 

주지봉 내림길에서 바라본 문필봉..  안부까지 내려갔다가 올라가야 한다.

구림마을에서 보면 붓을 거꾸로 세워 놓은 모습이라더니..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위용을 뽐낸다.

 

 주지봉과 문필봉 사이의 안부..여기서 계속 직진하면 문필봉이고 표지판 앞쪽 계곡이 주지골이다.

오늘 산행은 문필봉에 올랐다가 다시 주지봉으로 되돌아가서 회춘바위능선으로 하산할 것이다.

 

 문필봉 입구의 초병격인 암봉..

 

 문필봉을 가늠해 보고 여기에 베낭을 내려놓고 올라간다.

 

 문필봉 오름길 1차 관문.. 로프가 조금 짧다.

어쩌다 선두에 서다 보니 로프의 안전 점검은 필수다.. 눈으로 보고 당겨보고 매달려 보고 돌려보니 괜찮다..

 

 1차 관문을 통과하면.. 2차 관문은 홈통바위로 오른다.. 밧줄이 없어도 충분히 오를수있는 난이도다.

 

▲ 3차 관문.. 밧줄이 달랑 한줄이다.. 후미를 위해 충분한 점검 결과 믿어도 되는 줄이다.

 

문필봉 정상아래의 나마(gnamma)의 흔적..

나마(gnamma)는 화학적 풍화작용에 의해 기반암의 표면에 형성된 접시 모양의 풍화혈로 화강암의 기반암 표면에 가장

잘 형성된다. 대표적인 나마는 속리산의 문장대.. 월출산의 구정봉 등이다.

 

▲ 3차관문을 통과하면 정상 바로 아래에 제법 널따란 암반이 누워 있다.

 

▲ 일명.. 문필봉 다이빙 바위다.

 

▲ 문필봉 정상바위 아래..

 

▲ 문필봉에서 벋어내려간 스핑크스바위 군..

 

▲ 문필봉 정상바위.. 충분히 오를수 있는 경사각인데.. 내림이 문제다..

이대장님이 1주일전에만 오자고 했다면 올라갔을텐데...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다..

 

▲ 문필봉 정상의 나마(gnamma) 흔적만 보고 내려 간다.

 

▲ 지나온 주지봉.. 다시 올라간다.

 

▲ 다녀 간지가 30년이 흘렀어도 산하의 그림은 그대로다... 땅끝기맥이 지나가는 월각산 능선의 산그리메..

땅끝기맥은.. 전남 장흥군 유치면에서 화순군 이양면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상의 839번 지방도로의 곰재(웅치)에서 올라

서면, 국사봉(499.1m), 깃대봉(448m)을 지나고 삼계봉(5.3.9m)에 이르기 전 바람봉 헬기장(430m)에 올라선다.

바람봉에서 북으로 따로 분기하여 각수바위.. 계천산(400m).. 국사봉(614m).. 월출산(808.7m).. 월각산(456m)으로

이어지면서 영산강의 남쪽벽을 이루다가 별뫼산(464m).. 서기산(511m).. 첨봉(354m)을 거쳐 우리나라 육지 최남단인

땅끝 마을에서 바다로 빠지는 도상거리 약 122.7km의 산줄기다.

 

▲ 주지봉으로 다시 돌아가는길..

 

13시 13분 : 다시 올라선 주지봉..

 

▲ 회춘바위능선의 "똥바위"..

회춘바위를 탄다고 해서 이팔청춘이 될까마는.. 그래도 나이 먹는 속도가 세월 빠르게 흘러가는거 같아서 시간의 흐름이

조금은 더디게 흘러 갔어면 하는 바램이다ㅎㅎ.. 마음은 늘~ 청춘으로 살아가 보련다.

 

▲ "똥바위"에서 바라본 문필봉..

 

▲ "회춘바위 능선"에서 내려다 본 구림마을과 왕인박사유적지...

주지봉 아래에 있는 동네가 바로 구림(鳩林) 마을이다. 옛날부터 호남의 명촌을 꼽을때 가장 먼저 회자되는 곳이 구림이다.

역사가 무려 2200년에 이르는 마을이다. 그만큼 옛날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조건을 지녔던 것이다.

거기에다 명촌으로 소문나려면 뚜렷한 인물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도선국사.. 왕인박사.. 최지몽 태사가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배출됐다고 한다.. 국사(國師).. 박사(博師).. 태사(太師).. 즉 사(師) 자 돌림인 3명의 연고지이다.

 

▲ 타임머신을 타고 3~4세기의 백제로 들어가 보니.. 구림 마을앞까지 바닷물(노란색 부분)이 들어오는 항구였다..

상대포구는 왕인박사가 일본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초청으로 일본(왜국)으로 떠난 곳이기도 하고..

통일신라 말 당대 최고의 학자들인 최치원(산라 학자이며 문인), 최승우(신라 문인), 김가기(도교인이며 문장가) 등이

중국 유학을 떠났던 곳이기도 하다.

 

▲ 미로바위..

 

▲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회춘바위라고 하며 정작.. 회춘바위는 못찾았다고 한다.

 

▲ 회춘바위가 궁금해서 찾아보았지만.. 나역시 못찾겠다 꾀꼬리다..

 

▲ 회춘바위는 이정표에서 20m다.. 가까이 있었는데.. 너무 먼곳에서 찾았던가 보다..

 

▲ 수신정을 지나고..

 

▲ 유적지방향으로..

 

▲ 성천(聖泉).

왕인이 마셨다는 샘물로 성천이라 부르는데, 왕인박사가 이곳에서 자라면서 큰 학문을 이뤘으므로 뒷날 사람들이 이곳을

성인의 터 자리라는 뜻으로 "성기동(聖基洞)"이라 하고 시내 곁 우물을 성천이라 불렀다. 그런데.. 덮어 놓았다.

 

▲ 왕인박사 생가터.

 

▲ 왕인사당...

346년에 즉위한 백제의 13대왕 근초고왕과 이 시절 왜국으로 간 아직기, 그리고 왕인과 같이 건너간 "백제 도래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오늘날 큐슈의 "사가현" 그리고 일본 아스카 문화의 효시가 된 이야기등을 볼수 있다.

 

▲ 왕인의 일대기를 그린 석화..

 

▲ 왕인박사상..

왕인박사는 백제 근초고왕 때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의 선진문화를 전파하여 일본 비조문화(飛鳥文化)의 시조로 숭상받는

인물이다.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가기전에 먼저 왕인과 동문 수학하였다는 아직기(阿直岐)에 대해 알아보고 가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700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멸망한 "백제"의 역사 또한 축소되거나 왜곡된 면이 많다.

백제의 최고 전성기를 이룬 왕이 백제의 13대 임금인 근초고왕(346-375)이다. 그는 고구려 "고국원왕"도 전사케 하고,

중국의 요서, 산둥반도까지, 그리고 남해안까지 영토를 넓히며 일본에까지 영향력을 끼친 왕이다.

그러나 375년 13대왕 근초고왕의 시대는 가고 17대 아신왕때에 백제의 국력은 쇠퇴하고 고구려의 광개토왕(391~413)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신라는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으며 백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제의 아신왕은 일본의 힘을 빌려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은 사신을 백제에 보냈고

백제에서도 크게 환대했고… 사신이 오고가는 과정에서 백제에서 왜국(倭國)으로 많은 문물이 건너갔는데 402년에 경서에

능통한 아직기(阿直岐)를 밀사로 파견하고 옷 깁는 기술자인 공녀(工女)와 명마 두필과 칼과 거울을 함께 보냈다.

일본의 응신천황(應神天皇)은 아직기(阿直岐)가 경서(經書)에 밝은 것을 알고 황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어느날.. 왜국 천황이 아직기의 뛰어난 학식을 보고 물었다.

“백제에 그대보다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

“왕인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무척 빼어납니다.”

이렇게 해서 응신천황이 백제에 사자를 보내 왕인(王仁)을 초빙했던 것이다.

 

백제의 아신왕은 곧바로 왕인을 일본으로 보냈다.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초빙으로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

으로 건너가 그 해박한 경서(經書)의 지식으로 응신천황의 신임을 받아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의 문화를 깨우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그의 후손은 대대로 학문에 관한 일을 맡고 일본 조정에 봉사하여

일본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 영월관(전시실)에 잠시 들린다.

 

▲ 일본서기..

일본을 생각하면 언제나 두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36년간의 일제강점기의 치욕.. 그래도..

1,600년전.. 일본에 문명의 씨앗을 뿌린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대단한 긍지임에 틀림 없는 사실이다.

 

▲ 백제목조관음상(모조품)..

1400년전에 나무로 만들어진 목조상이 썩지도 않고 보존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일제때 도굴이나 수집가에 의해 일본으로 유출된 것으로 추측되지만 기록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 백제 성왕의 얼굴을 닮은 구세관음상.

 

▲ 천인천자문.

2008년 영암 왕인문화 축제 때 국내외 1000명이 쓴 천자문이 새겨져 있다.

 

▲ 영월관 뒤로 죽순봉.. 주지봉.. 문필봉이 병풍처럼 둘러 섰다.

문필봉은 "천호봉필(千戶奉筆)"의 형국이라고 한다. 천가구가 문필봉을 받들고 있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유명한 죽순봉.. 주지봉.. 문필봉의 암릉을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즐긴 조망은 너무나도 멋진 시간이었다.

 

15시 05분 : 왕인박사유적지 산행종료.

 

15시 51분 : 왕인박사유적지에서 20여분을 달려 찾아온 돌쇠의 정..

 

▲ 연잎떡갈비정식 상차림..

 

▲ 연잎떡갈비... 맛있다.

 

▲ 이대장님의 건배로 마무리...

 

꽃은 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기에 이쁘게 피워 내는 것이다.

사람은 끝이 두려워 시작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지는 것이 두려워 피우지 않는 꽃은 상상 할 수 없다.

 

오늘..

월출산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주지봉.. 문필봉을 타고 회춘능선으로 하산..

더 할 나위 없이 머~찐 꽃을 피워낸 기획산행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울진 금강소나무숲길 안내도.

오늘 8월 4일은 솔잎산악회의 정기산행일인데.. 하계수련 및 야유회행사로 셋째(8월 18일)로 변경되었다.

마침.. 동료의 제안으로 kj에서 금강소나무숲길 4구간 대왕소나무길로 가니까 같이 가자고 한다.. OK!~..

헐!~.. 하루전 토요일에 kj로부터 문자가 온다.. 대왕소나무길은 긴급방재로 3-1구간 화전민옛길로 변경이 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연락을 받으니.. 마땅히 갈곳이 없다.. 에라이~~ 우짜건노.. 이왕 신청한것 가보자.. 콜~~.

 

2024년 08월 04일(일).

금강소나무숲길3-1구간 : 경북 울진군.

 

산행코스 : 소광국민학교(폐교)-저진터재-너삼밭재-옛화전민마을-부채소나무-병정소나무-화전민터-소광국민학교.

산행시작 : 소광국민학교  09시 27분.

산행종료 : 소광국민학교  12시 42분.

전체거리 : 약8.84km.

전체시간 : 03시간 15분.

운동시간 : 02시간 54분.

휴식시간 : 00시간 20분.

 

09 : 27  소광국민학교(폐교).

09 : 46  저진터재.

10 : 17  너삼밭재.

10 : 26  4코스 갈림길.

10 : 43  옛화전민마을터.

10 : 56  부채소나무.

11 : 20  병정소나무.

12 : 01  화전민터.

12 : 42  소광국민학교(폐교).

 

09시 13분 : 소광국민학교(폐교) 도착.

 

 운동장 오른쪽은 식당(십이령 주막).. 정면쪽의 초가집은 펜션...

 

 출발전에 잠시 주변을 둘러 본다.

 

 

 오늘의 화전민옛길구간을 안내해 주실 숲해설가님.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에 있는 금강소나무숲길은 산림청이 국비로 만든 첫 숲길로 탐방객의 안전과 생태계 보존을

위해 숲길 안내인을 동반한 예약탐방가이드제로 운영되며, 7개 구간별 탐방인원을 하루 80명으로 제한한다.
참가자들은 산림·역사·문화자산에 대한 수준 높은 해설을 들으며 숲길을 탐방할 수 있다.
울진군 북면과 금강송면 일대 총 7개 구간 79.4㎞에 조성된 금강소나무숲길은 
우리나라 최대 금강소나무숲을 비롯한

대왕소나무 등 3그루의 보호수를 비롯해 보부상유적, 화전민터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중에 우리기

걸어야 할 길은 3-1구간으로 화전민옛길이라는 설명이다.

 

이어서 안전수칙도 설명하시는데.. 그 증에 귀에 쏙 들어오는 말은.. 숲해설사님을 추월하지 말라는 말이다..ㅎㅎ~

 

09시 27분 : 트레킹 출발..

운동장을 나오면 마을버스정류장이다.. 여기가 종점이기도 하다..

 

 소광2리마을회관 앞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마을길을 따라 들어 간다.

 

 오른쪽 시멘트길로 오른다.. 왼쪽은 하산길이다.

 

 시멘트길이 끝나면 숲으로 가는데.. 잡초가 무성한걸 보면..

금강소나무숲길 전체 7구간중에 3-1구간길의 선호도가 가장 낮은듯 하다..

 

급하지는 않은 낮으막한 고개길을 올라가면..

 

09시 46분 : 저진터재.

땅에 물기가 많아서 "저진터재" 부른다고 한다.

▲ 디딜방아 쉼터..

 

 화전민집터.

 

12시 42분 : 산행을 종료하고..

 

1만량 뷔페.

 

식사를 마치고 소광초등학교(폐교) 운동장을 바라보니..

가로등아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보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텅빈 운동장을 지키며 무얼 생각할까..

14시 00분에 대구로 출발..

2024년 08월 01일(목).

백운산 : 경남 함양군.

 

산행코스 : 원통재(빼빼재)-화과원갈림길-서래봉-백운산-백운암갈림길-용소폭포-백운암-신촌마을정류장.

산행시작 : 원통재(빼빼재)  09시 40분.

산행종료 : 신촌마을정류장 15시 40분.

전체거리 : 약11.26km.

전체시간 : 06시간 00분.

운동시간 : 05시간 40분.

휴식시간 : 00시간 20분.

 

09 : 40  원통재(빼뺴재).

10 : 21  화과원갈림길.

11 : 22  서래봉.

12 : 06  백운산.

13 : 08  백운암갈림길.

13 : 52  계곡만남.

14 : 33  용소폭포.

14 : 55  백운암.

15 : 40  신촌마을정류장.

 

 09시 40분 : 원통재(빼뺴재)는..

오랜 옛날 산아래 지소마을에 못된 지주에게 집과 토지를 강제로 빼앗기고 눈물로 고향을 등지며 넘었다는고개다.

해발 800m로 경남 함양의 백전면과 서하면의 경계이며 오른쪽의 화살표방향은 대봉산(계관봉)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백운산 들머리 이다.

 

7월장마가 끝나고.. 연이은 폭염경보와 여름휴가시즌이 겹치면서 산행 참가자가 다소 줄었지만..

화랑의 열혈 매니어분들의 산행열정에 하늘도 화답하듯이 백운이 몰려와 거대한 구름그늘을 만들어 주신다.

 

후해령 표지석..

이곳 원통재는.. 빼빼재라고도 하고.. 후해령(뒷바다재)이라고도 한다..

들머리 앞에 세워진 2005년 6월 백전면 청년회에서 설치한 후해령(後海嶺)표지석이 서있다.

그러나.. 일부 극히 산님들이.. 뒤 후(後)깊을 준(浚)으로 잘못 읽어 준해령으로 읽기도 한다.

 

지역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오래전부터 이곳을 "뒷바다재"라 불렀다는 것으로 보아 後(뒤)海(바다)嶺(재)이 맞는것 같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옛날 천지가 물바다였을 때 이곳에 배를 매고 넘었다 하여 뒷바다재라 불렀다.. 라고 한다.

 

그리고... 후해령(後海嶺)의 후(後)는

삼수(水)변의 한자부수인 "氵"가 아닌.. 두인(人)변의 한자 부수인 "彳"를 "해서체"로  쓴글자다.

 

 들머리 초입부터 가파른 계단이다...

 

 원통재에서 백운산으로 가는 능선길은.. 의외로 착하다. 오름이 지겨울정도로 길지도 않아서 적당히 올라서면..

 

능선은 어깨를 낮추어서 산꾼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준다..

 

숲이 깊어 조망은 없지만.. 간간히 요상한 버섯들이 눈요기를 제공한다..

 

이 바위가 안내도상의 선바위인가 보다... 전형적인 육산이라 방구돌 하나도 새롭다.

 

 09시 54분 : 백운산 5.5km라는 이정표가 있는 무명봉에 올라섰다가..

 

길은 다시 편안한 초록길로 이어진다.

 

 각시원추리..

"아양".. "선고".. "근심을 없애준다"라는 꽃말처럼 다소곳한 각시의 자태가 이쁘다.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며.. 해발 약 800m정도에서 자란다.

 

▲ 동물생태 감지카메라..

지리산권역이라 반달곰의 활동범위를 관찰하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곰은 아니지만... 이쁘게 찍어달라고 렌즈앞에서 포즈한번 잡아본다.. ㅎㅎ~

 

▲ 전망바위가 있어 올라가 본다.

 

▲ 동쪽으로는 황석산과 오도산.

 

▲ 진행방향으로는 올라야할 서래봉이 우뚝하고... 그 너머로는 백운산이 흰구름에 몸을 가리고 있다.

 

10시 21분 : 화과원 갈림길...

오늘 산행코스에서 빠져 있지만.. 화과원은 백룡성 선사(1864∼1940)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운동가이고 불교에서는 반농반선(半農半禪)의 선농불교를 주창·실천하였다. 백룡성 선사는 이곳 백운산의 8부능선에 위치

하여 외부에서의 접근이 쉽지 않은 곳에 산림과 황무지를 개간하여 과수를 심고 화과원(華果院)이라는 농장을 설립하였다.

백룡성 선사는 이곳을 거점으로 일제의 억압을 피해 뒷산으로 넘어 다니며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전하는 곳이다.

 

▲ 화과원 갈림길에서 충분히 쉬었지만.. 돌탑봉 오름길이 만만치가 않다.. 앞서가는 회원님들의 걸음도 무거워 보인다.

 

화과원갈림길에서 쉬엄쉬엄 이정표가 있는 무명봉에 올라서면...

 

▲ 가야할 서래봉과 써레바위가 눈앞에 다가온다..

지역 주민에 의하면 서래봉은 논의 바닥을 고르는 농기계 써레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원래는 써레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 서래봉 오름길이 다소 거칠다..

 

▲ 가는장구채.

꽃말은... "동자의 웃음" 이다.

 

11시 15분 : 서래봉 정상.

 

▲ 서래봉 내림길에 바라본 백운산..

하얀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다고 하여 백운산(白雲山)이라고 하였다는데.. 산 이름과 제대로 부합되는 풍경이다.

저 속에서.. 세상의 시비(是非)에서 벗어나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흰구름(白雲)같이 청결하고 자유롭게 살고픈 마음이다..

그래서... 산이 그리움을 부른다... 라고 하는 것이다.

 

▲ 바위채송화 군락..

꽃말은... "가련함".. "청순함" 이다..

 

11시 25분 : 백운암 하산길 이정표..

용소를 경유하여 백운암으로 내려가려면 정상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된다.

 

 은꿩의다리.

꽃말은... "순간의 행복"이다.

 

서래봉을 지나서부터 백운산까지는.. 큰 오르내림이 없이 진행한다.

 

 골등골나물.

꽃말은... "주저".. "망설임"이다.

 

 산꼬리풀.

꽃말은... "충실".. "달성"이다.

 

나무사이로 보이는 백운산이 지척이고.. 흰구름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소리 없는 삶의 몸부림.. 그리고.. 나는 나의 길을 간다.

 

 짚신나물.

꽃말은... "감사함"이다.

 

 미역취.

꽃말은... "경계".. "섬색씨".. "예방" 이다.

 

 나리꽃.

꽃말은... "희망"이다.

 

강한 바람에 부러진 나무가 길을 막고 있다...

 

12시 06분 : 백운산.

 

 12시 06분 : 백운산 옛 정상석.

 

날씨가 좋았다면.. 정상에서 조망 또한 좋아서  지리산 전체를  바라볼수있으며..

북쪽 으로 넉넉한 덕유산과 그 너머에 황석산.. 거망산.. 월봉산. 금원산 기백산도 가까이 보이고 동북 으로는가야산,

황매산도 가물거리며 건너 가까이  동쪽에 갓걸이산(계관봉)과 서쪽에 장안산을  좌우에 두고있다.

 

선두로 올라온 화랑의 준족님들이.. 메뉴도 다양한 간이식당에서 에너지를 보충하고 있다..

 

 경남 함양군 백운산(白雲山1,279m)은...

지리산 고리봉(1305m)에서 뻗어온 백두대간이 1000미터대 이하로 고도를 낮추어 수정봉, 여원재를 거치고.. 고남산,

봉화산, 월경산을 지나 함양군과 장수군 사이에서 다시 1000미터대를 넘어서는 최초의 봉우리이다.

 

 금강초롱.

꽃말은..."가련한 마음".. "각시와 신랑".. "청사초롱" 이다.

 

12시 10분 : 백두대간 북진방향인.. 영취산길 입구에서 에너지를 보충한다..

 

 마타리..

꽃말은... "미인".. "애틋한 사랑".. "무한한 사랑" 이다.

 

 애초의 하산 계획은 화살표 방향으로 중봉 하봉 상연대로 내려갈 생각이었으나.. 짝지가.. 계곡으로 가보자고 한다..

 

 올라왔던 길을 되내려 가며 바라본 황석산 방향..

 

 하산길에 숲으로 파고드는 기분좋은 햇살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언제 그랬냐는듯 활짝 열려 있다.

더운날 에어컨 밑에서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고 시원한 산들바람 맞으며 등산하는 뿌듯한 성취감에..

아직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이다.

 

13시 08분 : 다시 돌아온 백운암 하산길..

 

 선답자가 달아놓은 시그널을 따라가는데..

 

이 길은 주등산로와 달리 많은 산객들이 잘 다니지는 않는듯... 숲으로 덮어버려 길 찾기가 쉽지 않다..

지난 6월 27일의 전남 남원의 천마산의 악몽이 되살아 나는 느낌이다.

 

 너덜길에서는 더더욱 길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오랜 노련함으로 차근히 보면.. 길은 보인다.

 

 습지에서 형사 콜롬보의 눈으로 선행자들의 발자욱을 찾았다..

 

계곡으로 내려가지 않고 사선으로만 길게 이어지던 하산길도 능선을 만나면서 길의 윤곽은 뚜렷해 진다.

 

 경남 소방의 현위치표시목도 만나고..

 

 하염없이 이어지던 길도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계곡의 물소리를 따라서 내려가는 급경사구간의 시작이다.

 

길게 이어지는 밧줄구간을 내려다 보면.. 경사각이 평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장난 아니게 가파르다.

 

 두번째 밧줄구간도 지나고...

 

 가장 난해했던 세번째 밧줄구간을 내려 서면..

 

13시 52분 : 백운산 큰골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만난다.

 

길이라고 할수 없는 너덜겅에 빛바랜 시그널하나가 사람이 지나 갔음을 알려 준다.

 

하산길은 매우 까탈스럽지만 선답자가  걸어 놓은 화랑의 시그널 덕분에 진행은 순조롭다.

 

많은 수량이 아닌데도.. 워낙 고요한 지역이어서 그런지.. 물흐름 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 시그널을... 가장 필요한 곳에 걸어 놓은 솜씨가.. 산행고수의 실력이 돋보인다...

 

 무명폭포..

 

풍덩 뛰어들고 싶다...

 

 용소폭포가 가까워지는지... 물길도 순해지고.. 길다운 길이 보인다.

 

오래되어 망가진 이정표...

전시행정의 표본이다.. 설치할때만 행정실적 사진 남긴다고 떠들썩 하고는 나 몰라다.

 

14시 32분 : 화과원 가는길..

 

14시 33분 : 용소폭포.. 3단 폭포다. 내려가는 길이 없다.

 

 상단폭포..

 

 2단폭포..

 

 3단폭포..

 

 용소폭포에서 백운암까지는 고속도로다.

 

 백운암.

 

 영은사지 부도탑.

 

백운암 입구에 영은사의 옛터가 있고 석장승이 있다.

석장승은 사찰을 수호하고 풍수지리적으로 국가의 번영과 임금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복합적인 기능과 더불이 민간신앙

의 기원대상물이었던 유물의 일종이다. 이 석장승들은 그곳에서 옛 절터를 지키고 있다.

 

우호대장군(右護大將軍)은 높이 280cm, 좌호대장군(左護大將軍)은 높이 270cm이다. 좌호대장군 오른쪽 아랫 부분에

건륭삼십년을유윤이월 일(乾隆三十年乙酉閏二月日)이라는 명문이 있어 영조 41년(1765)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또 돌을 좌호대장군 머리에 던져 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해서 인근 아낙들이 찾아와 돌을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경남 민속자료 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좌호대장군(左護大將軍)..

 

칡꽃..

꽃말은..."사랑의 한숨" 이다.

 

백운산에서 하봉쪽으로 내려와 상연대를 보고 하산 했어야 되는데.. 못 내려온 아쉬움에 다음을 기약한다.

 

상연대 가는길..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 소속 사찰이다.

통일신라 시대 말기인 924년(경애왕 1)에 고운 최치원의 어머니가 경치 좋은 곳에서 노인성(老人星)을 보고 싶다는 어머님

소원을 이뤄드리기 위해 기도처로 건립한 곳으로 전한다...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던 중에 홀연히 관음보살이 나타나

상연(上蓮)이라 불러서 이곳을 "상연대(上蓮臺)"라 이름짓게 되었다고 한다.

창건 이래로 통일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선문(實相禪門)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발전하였다.

역대로 수많은 고승 대덕이 찾아와 머물면서 수도정진, 수도도량으로 이름을 높여 왔다.

절이름이 사(寺)나 암(庵)이 아니고 대(臺)라고 하는 이유는 절벽에 절이 서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백운교 삼거리.. 무슨공사인지 토목공사가 한창이다..

오른쪽으로 가면 대방마을이고.. 화랑의 애마는 좌측의 신촌마을에 있다.

 

 백운교건너 멀리에 화랑의 애마가 보인다...

 

백운교위에서 바라본 백운계곡..

 

15시 40분 : 신촌마을정류장 산행종료.

 

사위질빵..

꽃말은..  "비웃음" 이다.

 

예전에는 가을 수확철이 되면 사위가 처갓집으로 가서 가을걷이를 도와주는 풍습이 있었다.

사위를 아끼던 장인 장모가 오랜만에 처갓집에 온 사위가 고생하는 것을 안타까워 볏짐을 조금씩 지게 하였는데 이를 본

다른 농부들이 질빵풀 덩굴로 질빵끈을 만들어도 끊어지지 않겠다고 놀렸다...(질빵 덩굴은 쉽게 끊어지는 성질이 있다.)

놀림이 창피했던 사위는 꾀를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질빵풀이 사위질빵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진다.

 

16시 43분 : 순두부집.. 언젠가 와본곳 같다.

 

 원더풀 산대장님의 건배...

오늘도 산행대장 재능기부 하신다고 수고 많았습니다.

 

 이어서...

산행을 거듭할수록 숨은 매력을 발산하는 덕장회장님의 건배..

 

8월의 흰구름산 좋았구요.

9월의 지리산.. 거림에서 세석평전~의신마을까지..

음양샘에서 보약생수 마시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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