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청도군 각남면의 <죽바위>와 <대산사> 위치도.

얼마전에 우연히 알게 된 "죽바위"와 멀지 않은곳에 있는 "대산사"를 찾아 본다.

 

▲ 죽바위와 명품 소나무.

죽바위의 옛 이름은 죽바위(粥岩)인데 이는 죽을 넓은 그릇에 담아둬야 편하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죽바위(粥岩)로 불렀다.

지금으로부터 300여년전 어떤 이승(異僧) 한 사람이 이 곳을 지나다가 바위를 보고 나무꾼에게 물었다.

"이 바위가 잘 생겼는데 이름이 무엇이요?"하니 죽(粥)바위라 부른다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이승(異僧)이 "

이 곳은 장사(壯士)가 태어날 고장인데 장수가 어찌 죽을 먹고 힘을 쓰겠느냐"하며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대나무 한 그루를 구해와서 심어놓고 "앞으로는 죽암(竹岩)이라 부르시오"하고는 길을 떠났다.

그로부터 이 바위를 죽암(竹岩)이라 부르게 되었고, 대나무는 수백 그루로 늘어갔다.

세상이 평온해지자 죽바위를 중심으로 하는 운정산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사슴이 마을 뒷산까지 내려와서

울게 되자 마을 이름도 구만동에서 녹명동(鹿鳴洞)으로 바꿔 불렀다 한다.

 

▲ 가을의 화창한 날씨 만큼이나 상냥한 네비아가씨의 안내를 받으며.. 가창 우록을 지나 팔조령을 넘어

시원하게 뚫린 청도군 풍각면과 운문면을 잇는 20번 국도를 달려 각남면 녹명리로 접어들면 운성교 난간에

죽바위200m라는 표시를 따라간다.

 

▲ 바위 위에는 멋진 노송이 그림처럼 홀로 서있고 그아래로는 정갈한 쉼터 정자가 있는 간이 주차장이다.

 

▲ 범상치 않아 보이는 10여미터의 우람한 바위와 그위에 명품소나무.. 올라가 보고 싶다.

 

▲ 죽바위 좌측으로 세월의 무게가 무거웠던지 허리굽은 노송아래를 지나가면..

 

▲ 죽암묘원의 오른쪽을 따라 쭉~ 올라가면서..

 

▲ 오른쪽으로는 대단한 규모의 죽바위가 계속 따라 온다..

 

▲ 죽암묘원 끝부분의 망주석과 소나무 사이로 희미한 길이 보인다.

 

▲ 길은 비교적 뚜렷한 편이다.

 

▲ 홈통같은 암반을 따라 올라 간다.

 

▲ 죽바위 상단부에 도착.

 

▲ 명품소나무까지 얼추 150m는 되어 보인다.

 

▲ 영양제 수액을 주입하고 있다.

 

▲ 삼각대를 설치하고 오늘도 홀로 연출을 한다.

 

▲ 마을도 내려다 보고..

 

▲ 잘 나오는지.. 카메라 렌즈도 보고.. 잘 나왔다..ㅎ~

 

▲ 단일바위로 어지간한 운동장이다..

 

각남면 녹명리(鹿鳴里)의 옛이름은 구만동(救萬洞)이라 하였다.

이조 제 14대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길을 나누어 창녕, 영산, 밀양을 거쳐 파죽지세(破竹之勢)

로 쳐들어 왔다.구만동 앞에 있는 운정산(雲亭山)은 사방이 한 눈에 보이는 요지였다. 왜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동민과 이웃마을 주민들은 이 산 속에 숨어서 성을 쌓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싸울 준비를

갖춘 후 왜적을 기다렸다. 다행히 왜적은 이 곳에 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쳐 북상하였다.

그곳에 숨어 있던 1만여 명이 목숨을 건졌다 하여 그 후부터 이 곳을 구만동이라 하였다 한다.

▲ 죽바위 상단부 투어를 마치고..

 

▲ 300여년전 도승이 심었다는 대나무인가 보다..

 

대나무숲 안으로 폐사되어 자물쇠가 잠긴 암자 안쪽에 부처님만 사색에 잠겨 있다..

 

죽바위를 떠나며 멀리서 바라본 원경..

 

멀지않은 곳에 신라 천년고찰이라는 대산사를 찾아간다.

 

▲ 대산저수지 뚝방길에서..

 

▲ 대산사 오르는 길이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길이고, 외길이라서 반대쪽에서 오는 차를 만나면 매우 위험

하다...라고 알고 왔는데.. 좁은 구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보수가 잘되어 있어서 별 무리없이 오를수가 있었다.

 

▲ 오름길에 내려다 본 대산저수지..

 

▲ 대산사 입구 주차장.. 스님이 송풍기로 낙엽을 쓸어내고 있다.

 

▲ 조용한 산사에 빗자루로 쓸어내던 옛모습은 없어지고 송풍기모터의 소리만 계곡을 울린다.

 

▲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인 대산사 원통전..

경북 청도의 월은산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제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새들이 많은 곳이다.

이러한 산의 형상 때문인지 제비알을 훔쳐가는 뱀이 많았던 모양이다.

 

▲ 나를 대산사로 오게한 2층탑이다..

이 탑은 1950년경에 조성해 놓은 것으로 어른 키보다는 조금 더 큰 2m정도의 석탑이다.

네모난 자연석 위에 이층기단과 2층탑의 형상으로 갖추고 있는데, 기단의 네모진 자연석 모서리에

멧돼지를 조각하였는데, 그 형상이 부릅 뜬 눈과 툭 튀어나온 주둥이가 매우 해학적이다.

이것은 뱀을 쫓기 위해 특이하게도 지대석에 멧돼지 형상을 조각하여 만든 돼지탑을 조성해 놓았다.

▲ 풀이 자라 멧돼지조각을 덮어버렸다..

 

▲ 가까이서 찍어보니 멧돼지조각 같기도 하다..

 

▲ 지대석위에 핀 와송..

 

▲ 대산사는 신라 흥덕왕 5년(830)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 대산사 법당..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삼한시대의 마한에 속한 목지국(目支國: 충남 직산 일대)에서 남해상에

표류해온 42수관음보살상(四十二手觀音菩薩像) 3구가 있었는데 이중 1구는 청도 운문사에 봉안하고

또 1구는 간 곳을 알 수 없으며, 나머지 1구를 대산사에 봉안하여 용봉사(龍鳳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법당이 소실되고, 천수관음불상은 왜적들의 도적질이 두려워 땅 속에

묻었는데, 그 사실을 안자가 고철로 팔려는 생각에 불상을 파내던 도중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임란 후에 불상을 파내어 법당에 다시 봉안하였는데, 고종 13년(1876) 명성왕후의 꿈에

부처님이 현몽하여 많은 시주를 하고 절을 중건하였다.

그 후 다시 의문화상(義文和尙)이 중수하여 대산사라 개칭하였다. 이후 여러 번 수리하여 보존되었으나

1930년 일제강점기에 또다시 야습한 도적 때들의 방화로 법당은 사라지고 불상은 반소된 것을 봉안해오다

주변 땅에 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난 2000년 여름 사찰경내 밭에서 발견된 천수관음불상 수인에서

용봉사의 내력을 느낄 수 있다.

 

▲ 달을 감추었다는 월은산 등산로가 궁금하여 대산사 경내를 나와서..

 

▲ 대산사 좌측으로 돌아가니..

 

▲ 월은산 들머리가 있다..

 

▲ 들머리가 뚜렷한걸 보니.. 제법 많은 산꾼들이 알게 모르게 찾는 산인듯 하다.

 

▲ 청도군 각남면 옥산리 전경..

 

▲ 청도 반시축제가 2022년 10월 14일부터 16일까지 열린다.

 

▲ 귀가길에 남지장사의 산초가 생각나서

 

▲ 청련암 가는길..

 

▲ 산초열매.. 한발 늦었다.. 돌아설까 하다가 이왕온것.. 이삭줍기라도 하자.. 1시간동안 종이컵 하나..ㅎㅎ

 

▲ 최정산남지장사 사문을 들어 선다.

 

▲ 684년(신문왕 4)에 양개 조사(陽价祖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남지장사는 신라 시대에는

왕이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유지들도 시주 많이 해 사세가 매우 컸다고 한다.

한때는 8개의 암자를 거느렸고 수도하는 승려만도 3,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궁예(弓裔)가 일으킨 전쟁 때 폐사되었다가 1263년(원종 4) 보각 국사 일연(一然)이 중창하였으며,

무학 대사(無學大師)[1327~1405]가 수도하기도 한 곳이기도 하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 대사 유정(惟政)이 승병 훈련장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왜군에게 점령되어 불에

탔으며, 1653년(효종 4)에 승려 인혜(印惠)가 대규모 사찰로 다시 건립하였다.

1767년(영조 43) 모계(慕溪)가 중창한 뒤 팔공산 내의 북지장사와 서로 대칭되는 곳에 위치한 절이라

하여 남지장사라 하였다.

 

▲ 보수중인 극락보전..

 

▲ 오늘도 혼자서 잘 놀았던 하루다..

광명루를 나와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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