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1월 20일(목요일).
용화산(342m) 미륵산(432m) : 전북 익산시 금마면.
▣산행코스 : 서동공원주차장-용화산-아리랑고개-미륵산성-우제봉-미륵산-미륵사지-노상마을정류장.
▣산행시작 : 서동공원주차장 출발 10시 34분.
▣산행종료 : 노상마을정류장 도착 15시 15분.
▣소요시간 : 11km / 4시간 41분 소요(점심 및 휴식시간 포함).
10 : 34 서동공원주차장 출발.
11 : 20 절터산.
11 : 29 용화산.
12 : 53 아리랑고개.
13 : 08 미륵산성 동문.
13 : 29 우제봉.
13 : 39 미륵산.
14 : 56 미륵사지 서탑.
15 : 15 노상마을정류장 산행종료.
▲ 09시 44분 : 진안마이산휴게소 익산방면 전망대 쉼터인데... 출입금지다.
▲ 휴게소에서 바라본 마이산... 2017년 10월에 마지막으로 다녀간 이후로는 찾지 못하고 있다..
▲ 10시 34분 : 마한 박물관 앞의 서동공원 주차장 도착...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시대에 익산지역에서 꽃피웠던 마한의 문화를 보고 갔으면 좋으련만..
몸보다 마음이 더 바빠지는 원거리 산행이라 아쉽지만 통과다.
▲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백제무왕의 무왕루와..
▲ 무왕루 앞에 읍을 하고 있는 만조백관(滿朝百官)들..
백제 30대 왕으로 41년 동안 재위했던 무왕(武王, ?~641)은 어려운 시기에 왕 노릇을 하면서 많은 업적을
이룩했고, 한편으로는 갖가지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아들 의자왕 시기에 이르자 애써 지켜 내던 백제는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그는 백제 마지막 시기에 꺼져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그런 탓에 백제의 왕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 <삼국유사>에서..
서동설화에서 "서동" 은 마를 캐는 맛동을 말한다. 예전에 감자 · 고구마가 없었던 시대에 마는 칡뿌리와
함께 중요한 구황식품(救荒食品)이었다. 그래서 마를 캐서 파는 소년들이 있었다.
사비성(부여)에 한 맛동이 있었다. 그 소년은 과부의 아들로 백제의 서울 남쪽 연못가에서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용과 잠자리를 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 아이가 마를 캐서 팔아 살림을 꾸렸기에
사람들이 맛동이라 불렀다. 맛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매우 아리땁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경주로 달려가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동요를 지어 부르게 했다.
▲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맛동의 방을 찾아 밤마다 무얼 안고 뒹군다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가로 꼽는 〈서동요〉가 경주 도성 안에 쫙 퍼졌다. 이 소문이 마침내
구중궁궐에 파묻혀 있는 진평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진평왕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고, 신하들은 왕실의
권위를 타락시켰다며 선화공주를 먼 곳으로 유배 보내자고 했다. 공주가 유배의 길을 떠날 때 왕비는
황금 한 말을 주었다. 서동은 공주를 호위하면서 길을 따라왔다. 공주는 처음에 서동이 누구인 줄 몰랐으나
믿음직스러워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 얼마 지난 뒤에 사랑하는 그 남자가 서동임을 알았다. 공주가 황금을
내놓으면서 우리가 100년 동안 살 수 있는 재산이라고 말하자, 서동이 이게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다.
서동은 공주에게서 사연을 듣고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어릴 적에 마를 캐면서 이런 물건을 진흙처럼 쌓아 놓았소.”
공주가 깜짝 놀라며 “황금은 귀중한 보배이니 우리 부모가 있는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 고
제의했다. 서동은 황금을 모아 금오산 미륵사 옆에 언덕처럼 쌓아 놓았다. 그리고 용화산 사자사로 가서
지명법사를 만났다. 서동이 지명법사에게 황금을 신라 궁전으로 실어 나르는 방법을 묻자, 지명법사는
신통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황금을 신라 궁전으로 보냈다. 진평왕이 이 황금을 보고 놀라 서동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이에 서동은 명성을 얻어 백제의 임금이 되었다.
▲ 무왕이 도성의 연못 언저리든 마룡지든 어디에서 태어났든 간에 용의 정령(精靈)이 과부의 몸을 빌려서
세상에 나왔다고 해서, 가난한 과부의 아들인 서동이라는 상징 조작을 설정했다. 이렇듯 서동은 용의 정령
으로 태어났기에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고, 탁월한 지략으로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으며 마침내 백제의 임금
이 되었다고 했다. 따라서 무왕은 민중 출신으로 백제 귀족을 누를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임금으로 상징
조작되었으며, 장인과 사위의 관계인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고구려와 맞서 옛 땅을 회복하고 정치적
환경을 조성할 인물로 부각된 것이다. 〈서동요〉는 물론 진평왕 시기에 유행한 향가로, 그 내용으로 보아
학자들은 서동을 백제의 동성왕이나 무령왕 또는 원효라고 보기도 하지만 일단 무왕으로 봐야 할 것이다.
라고... 삼국유사에 기록하고 있다.
▲ 10시 42분 : 용화산 들머리..
서동공원을 둘러 보고 본격적인 산행에 든다.
▲ 얕으막한 동네 뒷산을 오르는 기분이다.
▲ 길가에 무인양심가게가 있다.. 계란.. 커피.. 스낵류 등등.. 필요한걸 가져가고 가격표의 돈을 돈통에
넣으란다.. 그런데 아직 이른시간이라 그런지.. 물건 구비가 제대로 안되어 있다.
▲ 11시 06분 : 안내도상의 221봉의 삼각점 도착.
▲ 낮은 산이건 높은 산이건.. 산은 산이다.. 정수리는 쉽게 내어주지 않고 고약한 오름이다.
▲ 11시 20분 : 안내도상의 절터산(278m).. 아무런 표시가 없다. 산이란 이름이 무색한 봉우리다.
▲ 산아래의 군부대에서 실제로 관리하는 헬기장..
▲ 11시 29분 : 용화산 정상.. 정수리에 무명의 산소1기가 있다. 원래는 미륵산과 용화산을 아울러서
용화산이라 불리었는데 미륵사가 창건되면서 미륵산과 용화산이 나뉘게 되었다..
▲ 또 다른 이름으로는 동국여지승람에 일명 군입산(軍入山)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때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한낮 기온 영상 4도.. 바람끼가 없어니 덥다.. 두꺼운 방한복은 베낭속에 넣고 아리랑고개로..
▲ 용화산을 지나 처음으로 조망이 터지는 곳에서 바라본 미륵산.. 미륵산성이 "V"자를 그리고 있다.
▲ 용화산 등산로는 왼쪽은 군부대 철망이고 출입을 금하는 경고문이 미륵산성 동문까지 이어진다.
▲ 11시 55분 : 용리산 갈림길.. 주의할 지점이다.
▲ 이리랑고개로 가는 내림길... 여전히 좌측은 군부대 철망이고.. 등산로는 참호처럼 파였다.
▲ 여기도 무심코 지나칠수 있는 갈림길이다..
▲ 12시 53분 : 아리랑고개(다듬재)..
아리랑고개는 인근 부대의 군인들이 혹독한 훈련 때문에 부르게 되어 명명된 지명이다.
▲ 13시 06분 : 미륵산성 도착. 직진하면 우제봉으로 직등하는 길이고..
▲ 왼쪽 동문으로 간다.
▲ 멋진 뷰를 부여주는 미륵산성.. 저 곳으로 올라가면 미륵산정상으로 바로 가는 길이다..
▲ 성을 따라 우제봉으로 간다.
▲ 오름길에 뒤를 돌아보니 지나왔던 용화산이 잘가라고 손을 흔든다..
▲ 13시 29분 : 우제봉 정상..
▲ 13시 39분 : 미륵산 정상..
▲ 미륵산은 늙은 쥐가 풍요로운 대지를 향해 만찬을 즐기는 모양인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이라고 한다.
▲ 익산 화강암 채석장.
익산의 황등석은 경기도의 포천석, 거창의 거창석과 더불어 국내에서 생산되는 3대 화강암 중 하나.
빛깔이 곱고 단단하며 철분 함유량이 적어 오랫동안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중에서도 으뜸으로 치고 있다.
▲ 익산 삼기면 방향.. 스모그현상이 너무 심하다.
▲ 익산시 산악동우회 공동안내판.. 신선한 아이디어다..
▲ 오래 된 미륵산 이정표.. 20여년 전 제대로 된 이정표 하나 없던 미륵산에 김문암님이 익산시에
설득과 권유로 설치된 이정표라고 한다..
▲ 하산길에 만난 엉덩이 바위...
▲ 잘 만들어진 안전 방호울...
창녕 화왕산 1코스 암릉구간에 기둥식 방호울을 설치한 공무원들이 여기와서 보고 배워야 할것 같다..ㅎㅎ
▲ 의외로 내림길이 고약하다..
▲ 14시 07분 : 사자암 갈림길.. 반대편의 약수터 방향으로 내려 간다.
▲ 서 있는걸 좋아 하는 바위도 있고..
▲ 이 바위는 누워 있는걸 좋아하나 보다..
▲ 내림길의 발디딤이 쉽지가 않다..
▲ 14시 32분 : 냉정 약수터.. 음료로 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수질검사다..
▲ 14시 34분 : 간이 주차장... 사실상의 산행은 여기까지고.. 둘레길로 이어 진다..
▲ 잘 설치된 이정표를 따르면 헷갈릴일은 없다..
▲ 소림사라고 한다.. 소림사.. 어떤 사찰일까.. 기대를 하며 가는길..
▲ 여기가 소림사???... 기대가 너무 컸다..
▲ 산죽터널을 빠져 나오니..
▲ 타임머신을 타고 천년전으로 돌아 간듯한 광활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 갈대를 가지런히 잘라서 이은 지붕의 초옥이 정갈하고 단아해 보인다..
▲ 열려 있는 문안으로 들어가보니..
▲ 복원된 서탑과 동탑이 보인다..
▲ 발굴 전에는 백제 창건 당시 세운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 1기, 석탑의 북쪽과 동북쪽 건물들의
주춧돌, 통일신라 시대에 사찰의 정면 양쪽에 세워진 당간지주 1쌍(보물 236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1980년에서 1995년까지 15년 동안 발굴을 통해 유물 2만여 점이 출토됐으며, 석탑은 무려 18년 동안
해체, 보수정비를 끝내고 일반에 선보였다. 올해 보수를 마친 서탑(14.5m)은 미륵사지의 상징격 이지만
남아 있던 6층 모양대로 복원한 것이어서 고풍스러움은 찾기 힘들다. 동탑(28m)은 터만 남아 있다가
지난 1990년대에 9층 탑으로 복원 됐었다.
▲ 동탑...
▲ 동탑 내부 모습..
▲ 미륵산... 서탑과 동탑..
미륵사지는 우리나라 최대의 사찰이다. 규모는 동서 172m, 남북 148m에 이른다.
당시 백제의 강성한 국력과 백제 건축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미륵사지 창건 설화는 백제 무왕
이 부인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현 미륵산)아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 삼존이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고 한다. 선화공주가 '여기에 절을 지어 주십시요' 하니 왕이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명하여 산을 헐고 못을 메워 미륵 삼존의 상을 만들고 탑과 절을 세운 뒤
"미륵사" 라 칭하였다고 한다.
▲ 국립익산박물관..
▲ 15시 15분 : 노상마을에서 산행을 마치고...
▲ 귀가길에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백제 왕궁유적지를 둘러보고 간다..
▲ 15시 53분 : 백제왕궁유적지..
▲ 왕궁리 오층석탑(국보289호)..
▲ 후원쪽도 엄청 넓다..
▲ 왕궁리 백제유적은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호 모질메산성으로 지정되었다가
1998년 9월 17일 대한민국 사적 제408호로 승격 지정 되었고.. 2015년 7월 4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 되었다.
▲ 백제유적지구에는 오층석탑만이 유일한 건축물로 남아 있다.
▲ 박물관에 들어가려니 굳게 닫혀 있다.
▲ 유적지구에서 출토된 기와조각들..
▲ 백제의 화려했던 유적은 역사의 흔적만 남아있고 쓸쓸한 겨울 창공에 까마귀떼가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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