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매화마을 청매실농장.

 

청매실 농장은

1대인 율산(栗山) 김오천(金午千) 선생이

산에 밤나무와 매화 나무를 심어온 오랜 노력의 시간이

받쳐주고 있는 곳이다.

 

율산(栗山) 김오천(金午千)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17세때부터 일본에서 광부생활을 하며 번 돈으로

밤나무는 식량 대용으로

매화나무는 약용을 목적으로 들여와

 

그 넓은 야산에 밭작물은 심지않고 나무를 심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오천"이 아니라 "벌천" 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거름을 하고 나무를 가꿔

오늘날 청매실 농원의 기틀을 마련 하였다.

 

김오천 선생이 수십만평의 땅에 밤나무와 매화나무를 심어

매화농장의 터를 잡자 2대 농장주인 며느리 홍쌍리씨는 매화나무를 늘리고

종자를 개량해 가면서 매화 박사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2대농장주인 홍쌍리씨는 정부지정 명인 14호로 지정될만큼

매화와 매실에 관해서는 일가견을 갖고 있다.

 

현재는 "홍쌍리" 여사의 장남 "김민수" 씨가

매실의 가공, 제품화 및 판매에 노력과 다각적인 홍보와

서비스를 제공하며 창의적인 사고와 진취적인 경영 방식으로

매실식품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청매실 농원에서 만나 볼수있는 매화꽃은

세가지로서 하얀꽃에 푸른 기운이섞인 청매화,

복숭아 꽃처럼 붉은빛이 나는 홍매화,

그리고 눈이 부시게 하얀 백 매화이다.

 

열매는 꽃과 달리

빛갈에 따라 청매, 황매, 금매로 나눈다.

- 홍쌍리 홈피 참조 -

 

 

 

12시 02분 : 섬진교.

강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경남 하동군

왼쪽은 전남 광양시 이다.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산악회에서

"쫓비산" 산행도 하고 "광양매화마을축제" 도 보고 오자며 콜이다.

 

"매화마을축제" 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복잡한 곳을 싫어하는 탓에 여태 미루고 있었는데

 

3월 17일이 축제 마지막 날이고

복잡하지 않을거라는 얘기를 듣지 말았어야 될것을..

 

출발때부터 음주가무이더니

2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를 집행부의 넓으신 아량(?)인지..

더 놀게(가무)해 주느라

2시간 이상 소모하고 난 12시가 넘어서서야 겨우

매화마을로 진입하는 섬진교에 도착한다.

 

더구나 가관인 것은

오후 3시 30분까지 하산 하란다.

 

 

 

모처럼의 미세먼지 없는 쾌청한 날씨와

축제 마지막날 때문인지

수많은 상춘객들의 승용차량과 대형차들이 일대 혼잡으로

도로는 거의 마비상태로 꼼짝도 하지 않고

주차장은 이미 포화상태다,

 

쫓비산 산행들머리인 매화마을까지 걸어 가기로하고

모두 차에서 내린다.

 

쫓비산 산행은 포기하고

매화마을이나 둘러 보자.

 

 

 

▲ 매화마을가는길에 약20%는 꽃비되어 떨어지고

축제마지막날 답게 거의 끝물이다.

 

만개 모습을 못본다면

바람에 흩날리는 낙화라도 볼수 있다면..

 

 


 

▲ 개불알풀꽃(봄까치꽃).

 

 

 

▲ 매화마을로 가려는 사람들과..

 

 

 

▲ 매화마을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셔틀버스를 기다린다.

 

 

 

 

▲ 산책로는 산책로대로...

 

 

 

▲ 도로는 도로대로

차랑과 사람들로 붐빈다.

 

 

 

▲ 두꺼비의 전설이 있는 섬진마을 비.

매화마을부터 돌아보고 다시 오려고 통과 한다.

 

 

 

▲ 좌측이 매화 마을인가 보다.

 

엿가락 품바가락의 풍물소리와 밴드소리들이

스피커속에서 뒤섞여 요란 스럽게 들린다.

 

 

 

모처럼의 화창한...

봄날의 섬진강이 살아 있다.

지리산에서 흘러온 물이 남쪽 바다로 가는

저 아름다운 섬진강에는 지리산 자락의 삶의 이야기와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며 천년 역사의 애환을 품고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 더 둘러보고 싶은데..

 

3시반까지 하산 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란다.

차도 어디있는지도 모르니 찾아가는 시간도 고려해야 된다..

 

불확실한 행동과 판단으로 처음 만난 회원들에게

불편함을 주어서는 안된다.

아쉽지만 돌아가자..

 

 


 

 

 

 

▲ 농원 복판에 보호수처럼 보여서

청매실 시조목이 아닐까 하며...

 

 

 

▲ 염색체험장.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우리나라의 축제와..행사는

가급적 피하는게 맞다.

 

오해는 마시라...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다..

사람이 많은 곳은 교통체증의 후유증이 따르기 때문이다.

  

 

 

 

 

 

율산(栗山) 김오천(金午千)선생 송적비.

 

 

 

▲ 다시 섬진마을로.

 

 

 

▲ 두꺼비와 처녀.

 

옛날 두치강[섬진강] 하류의 두치진(豆恥津) 나루터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마음씨 착한 처녀가 있었다.

 

이 아가씨가 어느 날 저녁밥을 짓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두꺼비 한 마리가

부엌으로 들어와서 큰 눈자위를 껌벅거리며 쳐다 보았다.

처녀는 외롭게 쳐다보는 두꺼비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꺼비한테 밥을 주고 두꺼비가 잠을 잘 집을 지어 함께 살았다.

 

이 두꺼비가 처녀의 보살핌을 받으며 산 지

3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 밤이었다.

 

섬진강 상류에 홍수가 나서 온 동네가 물에 잠기게 되었다.

잠을 깨어 둘러보니 사람과 가축은 물론이고 집까지

노도와 같은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이 처녀도 둥둥 떠내려가며 “사람 살려”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그때였다.

 

그 동안 자기가 기른 솥뚜껑만한 큰 두꺼비가

갑자기 나타나 서둘러 달려왔다.

허우적거리는 처녀 앞에 등을 내밀었다.

 

처녀를 등에 태우고 두꺼비는

있는 힘을 다하여 강기슭을 향해 헤엄쳤다.

강기슭에 도착하자 두꺼비는 그만 죽고 말았다.

이 처녀는 강기슭 동산에 두꺼비를 장사(葬事)지내고,

매년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그 처녀가 두꺼비를 타고 도착한 곳을

두꺼비 나루라는 뜻으로 ‘섬진(蟾津)’이라 부르고,

강은 ‘섬진강(蟾津江)’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

 

 

 

 

▲ 전라남도 광양에서 건너다 보이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심마을.

 

<섬진강의 또다른 유래>.

 

1385년(고려 우왕 11년)경 왜구가

섬진강 하구를 침입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쪽으로 피해갔다고 전해지고 있어

 

이 때부터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이라 불렀다고 설명하고 있다. 

-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 

 


 

▲ 크기가 엄청난 섬진강 벚굴.

 

 

 

▲ 산행도 아닌것이...여행도 아닌것이..

처음 만나는 매화마을의 아쉽고도 어정쩡한 추억이

한동안 떠나지 않을 것 같다.

 

 

 

▲ 엿장수품바..조 팔자씨.

 

오늘하루 완전 꼬인 팔자였는데

"팔자씨"덕분에 풀어지네요.

 

 

 

▲ 조 팔자씨...

표정이 압권이었습니다..

 

집행부와 회원간의 싸인이 맞지 않아서

우리가 타고갈 대형차를 찾지 못한

일부(4명)회원이 엉뚱한 곳으로 갔단다.

 

찾으러 가는데도

차량정체로 거북이운행으로

꼬박 1시간을 넘기고서야 재회다.. 

 

이런 제기럴..

된장,,

 

쫓비산에나 다녀 올걸,,

아니면 매화마을이라도 제대로 둘러 보고 올걸..

에라이..문디거따.

 

놀고잡이 산악회로 온게

잘못 꿰어진 단추였다.

 

조 팔자..품바님..

오늘은 매화마을보다

당신이 더 오래도록 기억 되어 질 것입니다.

웃게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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