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06일 적상산(1038m) : 전북 무주군 적상면.

 

산행코스 : 서창탐방지원센타 - 장도바위 - 서문 - 서창고개 - 향로봉 -

      서창고개 - 안렴대 - 안국사 - 적상호주차장 하산완료

산행시작 : 서창탐방지원센타  09시 50분.

하산완료 : 적상호 주차장  13시 36분

(3시간 46분 소요 : 점심 및 휴식시간포함)

 

09 : 50  서창마을 주차장 도착.

09 : 57  서창탐방지원센타.

10 : 59  장도바위.

11 : 04  적상산성 서문.

11 : 20  서창 고개.

11 : 31  향로봉(마음에 점찍기).

12 : 47  안렴대.

12 : 59  안국사.

13 : 36  적상호 주차장 하산완료.

15 : 01  무주호 양수발전소 주차장.

 

09시 50분 : 서창마을 도착.

 



▲ 산대장님의 구령에 맞추어..

헛둘헛둘..

 



▲ 마을의 안녕을 빌던 주술적 신물(神物),,

 



▲ 적상산 주변에 조성된 마실길 이정표.

병풍바위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 보무도 당당한 <솔잎산악회>의 히어로..

산대장님을 따라서 적상산의 단풍치마에 안기려는

기분 좋은 발걸음이다.

 



▲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멋진 소나무가 있어서 보니,,

의병장 장지현(張智賢) 장군의 묘역이다.

 



▲ 장군의 기상이 서려 있는듯..

 

하지만 세월앞에는 무상함이,,

5년전만 해도 푸르고 무성하고 받침대가 없었는데..

 



의병장 장지현(張智賢) 장군 묘..

마침 후손들이 묘역을 돌보고 있다.

 

의병장 장지현(張智賢) 장군은

조선 선조때의 의병장으로 자는 명숙, 호는 삼괴장, 본관은 구례이며,

백야 장필무 선생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부터 부친 밑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당시 정치 싸움이 심하여 관직에 나아갈 뜻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문무에 힘써 그 명망이 높았다.


1590년(선조 23)에 천거를 받아 평안도 병마절도사 신립 장군의 부장이 되고,

변방 토벌에 공을 세워 평난원종공신록에 올랐다.
이듬해 사헌부감찰에 올랐으나 얼마 후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와 황간에서 청년들을 교육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가가 위급함을 통감하게 되어

재산을 털어 의병을 규합하여 훈련시켰다.

이 해 5월 왜병 흑전의 2만 병력과 모리의 3만 병력은 파죽지세로 북상해 왔다.

병력, 무기 등이 왜군에 비할 수 없으나 자연요새를 이룬 추풍령에 진을 치고

흑전(黑田)의 주력 부대를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추풍령 싸움에서 의병들의 결사적인 전투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왜군은 4만이 넘는 병력으로 재차 공격해 와서

의병들은 백병전으로 싸우다가 장지현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의 충의와 호국정신을 행재소에서 들은 선조는

1592년 7월 26일 병조참의에 추증하였고,

1697년(숙종 23) 영동 화암서원과 무주 죽계서원에 봉향되었다.


1864년(고종 1)에 순절비가 세워지고,

1980년 황금면(지금의 추풍령면) 사부리의 순국한 전적지에

충절사를 건립하여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고 있다.

 



09시 57분 : 서창 탐방지원센타.

여기서부터는 덕유산국립공원에 속한다.

 



▲ 가을의 끝자락에

화려한 단풍이 한껏 자랑하며 산객을 반긴다.

 



▲ 올가을 제대로 된 단풍을 여기서 보는것 같다.

 

적상산(赤裳山)은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가을 단풍이 붉게 물들면

여인네의 치마와 같다 하여 적상(赤裳)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고 한다.

적상산은 적상면 중앙에 솟은 향로봉과 기봉 두 봉우리를 주봉으로 한다.

북쪽 향로봉과 남쪽 기봉이 마주하고 있는 정상일대는,

흙으로 덮인 토산이라 원시림을 방불케 할 정도로 나무가 울창하다.

 

하지만 지면에서 800-900m 가량되는 산허리 까지는

층암절벽이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바위산이다.

 



▲ 본격적인 등로로 접어든다.

 



▲ 첫번째 전망대에서..

 

발아래로는 들머리인 서창마을이 보이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달린다.

 



▲ 1000m급 이상의 고산이라,,

고왔던 단풍잎을 털어 내고 겨울을 준비하고.

 



▲ 안간힘을 쓰며 마지막까지도 고운자태 그대로인 모습을 보며

힘든 오름짓을 멈추며 잠깐 쉬어 간다.

 



10시 59분 : 장도바위.

고려 말 <최영>장군이 탐라를 토벌한 후 귀경길에
이곳에 이르러 붉은 단풍과 절경에 반해 적상산 정상을 오르던 중
절벽이 앞을 가로막자 차고 있던 장도로 두동강을 내어 길을 열었다하여

<장도바위>라 이름 붙여진 곳이다.

 

 

 

▲ 바위와 노송의 힘겨루기...

 



▲ 부드러움의 유(柔)가 강(剛)함을 이긴다..

 

시간의 기다림 속에..

한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고...

 

연약한 나무뿌리는

엄청난 무게의 바위를 들어 올린다.

 



11시 04분 : 적상산성 서문(사적 146호).

 



고려 후기 거란이 침입한 후

<최영>은 이곳에 산성을 쌓게 하고 창고 짓기를 건의했으며,

 

고려 때 거란과 왜구의 침입에 이미 산성을 이용하여

인근 여러 고을의 백성이 피난한 사실에서

이 산성은 고려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광해군 2년(1610) 이곳에

조선시대 5개의 역사책보관소 중의 하나인 적상산사고를 설치하고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를 보관하였다.

 

 실록전, 사각(史閣), 선원각, 군기고, 대별관, 호국사를 세웠고

임진왜란 이후 진(鎭)을 두어 산성을 수축하고 운영했다.

 

 

 

▲ 적상산성 서문은

 

일명 용담문(龍潭門)이라고도 하며

기록에 의하면 2층 3칸의 문루가 있었다고 전한다.

 



▲ 정상이 가까워 질수록

식생은 참나무가 군락지를 이룬다.

 



▲ 참나무가 많아서인지 겨우살이가 유난히 많다.

 



11시 20분 : 서창고개.

 

 

 

11시 30분 : 향로봉 정상.

 

적상산 제 2봉인 향로봉 정상에는

인증샷을 하려는 산객들로 수십m 장사진을 이루고

심지어는 새치기를 하려는 사람들과

실랑이의 고성도 오고간다.

 

적상산의 실제 주봉에는 군부대 통신탑이 있어서

실세(實勢)의 자리에서 밀려나 있고,,

 

<향로봉>이 적상산의 주봉인것 처럼

실세(實勢) 행세를 하고 있는 허세(虛勢)인데...

 

그 앞에서 인증(?)을 받으려는 수많은 산객들의 모습이

어쩌면 현재의 시국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함도 느낀다. 

 

 

 

▲ 나는 표지목 인증샷은 포기..

 

배경에 표지목이 없어면 어떠리요..

바로,, 나의 두발로 딛고 선 곳이 향로봉인 것을.....

 



▲ 인증샷을 교대하는 사이에 얼릉..

표지목을 담고.

 



▲ 싱싱하고 푸르던 잎 다 떨궈내고

삶의 짐 벗어던진 홀가분한 춤사위에 뭔지 모를 그리움이 묻어 난다.

 

앙상한 가지사이로 쏟아지는

가을 햇살이 너무 좋다..

 



▲ 목생(木生).

 



▲ 적상산의 능선길은 너무나 편안하다.

 



▲ 여기가 바로 적상산(1038m)의 주봉인데..

군부대 통신탑이 자리하고 있다..

 



▲ 마음에 점찍기.. 

육해공군에 쐬주공장 까지..

 



▲ 안렴대 가는길.. 

 

 

 

 

▲ 통영대전간 고속도로.

 너~는,,, 하행선(통영방면)..

 



통영대전간 고속도로.

나는~ 상행선(대전방면)..

 



▲ 안렴대(按簾臺).

 

적상산 제16경인 안렴대는

고려 때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 때도 삼도 안렴사가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진을 치고 난을 피한 곳이라 하여 안렴대라 했다고 한다.

 

또한 병자호란 때는 적상산 사고 실록을 안렴대 바위밑에 있는

석실로 옮겨 난을 피했다는 유서 깊은 사적지이다.

 



▲ 실록을 보관 하였다는 석실이다.

 



 

 

 

 

12시 59분 : 안국사 청하루.

 



▲ 극락전.

 

안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 말사이다.

赤裳誌)》에 따르면 1277년(고려 충렬왕3)월인(月印)이 세웠다고 하나

조선 태조(재위:1392∼1398) 때 자초(自超)가

적산산성(사적 146호)을 쌓으며 지었다고도 전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때

승병들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다.

1613년(
광해군 5) 증축하고 이듬해 사고(史庫)를 두어

사각(史閣)과 선원각(璿源閣)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을 보관하고

덕웅(德雄)을 승장으로 하여 승병 92명을 두고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사찰 이름을 안국사라고 바꿨으며,

1910년에 사고의 책을 규장각으로 옮기자

이철허(李徹虛)가 사고 건물을 경내로 이전하였다.

1968년 유정환(柳正煥)이 이 건물에 천불을 모시고

천불보전이라고 이름을 바꿨고,

 

1990년 초에 댐 건설로 절 지역이 수몰지구에 포함되자

1991년부터 이전을 시작하여 1993년에 절을 완전히 옮겼다.

 



대웅전(大雄殿)과 극락전(極樂殿)과,, 대장전(大藏殿)의

다른점은

 

대웅전(大雄殿)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법당을 말하고

 

극락전(極樂殿)은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法堂)이다.

 

대장전(大藏殿)은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하는 사찰 당우이며

불교의 삼보(三寶) 가운데 법보(法寶)에 해당하는

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다 하여 법보전(法寶殿)이라고도 한다.

 

통 이 대장전에는 진리를 상징하는

법신불(法身佛)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봉안하거나

설법주(說法主)인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 국중제일정토도장.

 



▲ 적상산성.

 



▲ 젊음에 파이팅 한번 외쳐주고..

 



 

 

▲ 적상산 사고지 유구(赤裳山 史庫址 遺構)
전라북도 기념물 제 88호,

적상산 적상산성 안에 세워진 조선왕조실록 보관장소다.

 

 

 

왼쪽건물은 선원각. 오른쪽이 실록각이다.

 

 

 

 

13시 36분 : 적상호 주차장 하산왼료.

 



▲ 적상호에 물이 없다..

적상호는 앙수발전을 위한 인공 호수다.

 



▲ 양수발전소의 도수로 공사관계로

정비중이라고 한다.

 



▲ 유달리 많이 보이는 겨우살이를 뒤로하고..

 

 

 

15시 01분 : 무주호 주차장으로 이동하여.

하산주 준비하는 동안,,

한바꾸,, 휘리리리릭~.

 



▲ 산에서 마을로 내려온 단풍.

 



 

 

 

▲ 저 산위에 아까 보았던 적상호가 있다.

 



 

 

▲ 태양열 발전 집광판.

 

 

 

▲ 실시간으로 표시되는 태양광 발전 현황.

 



 

 

 

▲ 아래 호수에서 윗쪽 호수로 물을 끌어 올려

낙차로 발전하는 양수발전의 개략도..

 



 

 

▲ 연리목.

 



▲ 반송.

 



 

▲ 무주양수발전소 홍보관.

 



 

 

 

 

 

 

 

 

▲ 저멀리 서북쪽으로 충북 영동의 민주지산으로 이어지는

청랑산(1122m) 이 구름에 쌓여 있다. 

 


 

▲ 탑앤탑 솔잎산악회 회장님의 건배.

 

오늘 아침,,

솔잎 회장님의 아침인사 화두(話頭)는 인연법(因緣法)이었다.

 

불교에서는 인간관계의 인연을 겁 (劫)에 비유하여 말한다.

겁이란 1천년에 한번 떨어지는 물방울이

사방 약15Km의 바위를 뚫는 시간을 말하는데

 

다시말해서,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오랜 시간을 말한다.

 

같은 나라에서 태어날 만한 인연은 1천겁의 인연이,

나와같이 하루정도 같은 일을 하려면 2천겁의 인연이,

 

부부가 되려면 8천겁의 인연이,

형제자매로 만나려면 9천겁의 인연이,

부모로 만나려면 1만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솔잎과 함께한 하루가

같은 차를 타고,, 같은 공간에서,,,

적상산 상행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졌던 하루다. 

 

서로가 남남 이었어나

하루길을 함께했어니 2천겁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인연 오래도록 이어갔으면 하는 바램으로

수고하신 솔잎 집행부님들에게 박수 보내고

함께한 인연님들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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