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4월 12일 경주 남산(468m) : 경북 경주시 남산동.

 

산행코스 : 김유신장군묘역 - 경주 계림 - 보문단지 - 용장1리 - 용장사 - 이무기능선 -

          고위봉(점심) - 백운재 - 이영재 - 삼화령 - 금오산 - 상사바위 - 상선암 -

            석조여래좌상 - 삼릉 - 서남산 주차장 하산완료.

행시작 : 용장 1리 주차장 10시 34분.

하산완료 : 서남산 주차장 15시 26분(5시간 소요 : 점심 및 휴식시간포함)

 

07 : 00  법원 출발.

08 : 27  김유신장군 묘역 도착.

08 : 52  경주 계림.

09 : 49  보문단지.

10 : 24  용장1리 주차장.

11 : 35  이무기 능선.

12 : 21 고위봉 헬기장(점심).

14 : 07  금오산 정상.

14 : 35  상선암 도착.

15 : 26  서남산 주차장 하산완료.

 

 

▲ 08시 27분 : 김유신장군 묘역.

 

 

▲ 신라 태대객간 순충장렬 흥무대왕 김유신 신도비.. 

비각 안에는 김유신의 일대기를 기록한 신도비기 있는데.

최근인 1966년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1933년 정인보가 지은것을

이세호가 1956년에 써서 후손인 김형배가 새겼다. 화강암으로 높이는 262cm이다.

 

 

▲ 흥무문.

김유신장군의 묘로 들어가는 문은 삼문으로 되었다.

제사를 지낼때는 삼문을 다 열어 놓지만

 가운데 정문은 영혼이 들어오시는 문이라 사람들은 드나들수 없고,,

양쪽의 좁은문을 사용하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다.

 

 

▲ 경주 김유신묘(慶州 金庾信墓). 

김유신의 묘는 사적 21호로 송화산 옥녀봉에 있다.

 

 

 

 

 

08시 52분 : 경주 계림.

 

 

 

▲ 신라시조 박혁거세 신화.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3월 초하루에 육부의 조상들이

각각 젊은이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 위에 모여서 의논하기를, "우리들에게는 위로 뭇 백성들을 다스리는

임금이 없으므로 백성이 모두 방종하여제멋대로 행동하니 덕이 있는 분을 찾아 내 임금으로 삼아서

나라도 세우고 도읍을 차려야 할 것이 아니냐?"  라고 하였다. 

 이에 그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 옆에 번갯빛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으로 드리웠는데,

흰 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서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곧 뒤져 보니 자줏빛 나는 알 한 개가 있고 말은 사람을 보자 길게 소리를 뽑아 울면서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 보니 사내아이가 있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랍고 이상해서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키었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두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하였다. 그리하여 그 아이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이름을 짓고

직위의 칭호로는거슬감(居瑟邯)이라고 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다투어 가면서 치하하기를 

"이제 천자(天子)가 내려오셨으니 곧 마땅히 덕이 있는 황후를 찾아 내어 배필을 정해야 하겠다." 고 하였다.

이 날 사량리 알영 우물에서 계룡(鷄龍)이 나타나더니 왼쪽 옆구리로 계집아이를 낳았다.

얼굴이 아주 고우나 입술이 마치 닭의 주둥이와 같았는데,월성(月城) 뒷내물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주둥이가 뽑혀져서 떨어졌다.그래서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고 부른다.

남산 서쪽 기슭에 궁실(宮室)을 짓고 거룩한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는 알로 나왔으니 알은 박[瓠]과 같았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이

박을 '박(朴)'이라고 하기 때문에 성을 박씨라고 하였으며,여자는 자기가 난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의 나이 13세에 이르러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에사내가 임금이 되면서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이라고 하고 혹은 사라(斯羅)또는 사로(斯盧)라고도 이른다.

또, 맨 처음 왕이 계정에서 난 까닭에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하니계룡이 상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기를 탈해왕 때 김알지를 얻었는데, 그 때 닭이 숲 속에서 울었다 해서 나라 이름을 계림이라고

고치었다가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란 칭호로 정하였다고 한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더니이레 후에야 유해가 흩어져서 땅 위로 떨어졌다.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작고(作故)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합해서 장사를 지내려고 하였더니,큰 뱀이 쫓아다니면서 이를 방해하므로

다섯 부분을 다 각각 장사 지내어 다섯 능(陵)으로 만들었다.

이를 사릉(蛇陵)이라고 부르니 담엄사(曇嚴寺) 뒤에 왕릉이 바로 그것이다.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 석탈해 신화. 

신라 제3대 왕이며 석씨 왕조의 시조가 된 탈해에 관한 신화.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탈해왕조와

삼국사기신라본기 제1의 탈해이사금조가 주된 자료이나, 삼국유사 권2의 가락국기에도 탈해왕에

관한 기록이 조금 있다. 이 신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남해왕 때에 아진포에 혁거세왕에게 해산물을 바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바다에서 까치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우짖고 있음을 보았다. 

이상히 여긴 노파가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배 한 척이 있었고 배 안에 큰 궤짝이 있었다.

궤짝을 열어젖뜨리니, 그 속에 단정하게 생긴 한 사내아이와그 밖에 여러 보물, 노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내아이를 7일 동안 보살펴 주자,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기를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사람이다.

그 나라의 왕비에게서 알로 태어났으므로 버림을 받아 이곳에 닿았다.고 하였다.

그 아이는 말을 마치자 지팡이를 끌고 두 사람의 종과 더불어

토함산에 올라가 거기다 돌무덤을 파고 7일 동안 머물렀다.

그런 뒤에 산을 내려와 성 안을 살펴 살 만한 곳을 물색하던 중 호공(瓠公)의 집에 다다랐다.

그는 호공의 집 곁에 남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서,

이튿날 아침 관가에다 그 집은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었는데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호공이 들어와

차지한 것이라고 송사를 제기하였다.

그는 숫돌과 숯을 증거물로 제시하여 그 집을 차지하게 되고

그 소문이 나자 남해왕은 이 사람(탈해)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맏공주와 배필이 되게 하였다.

 

 

▲ 계림 전경(사적 19호). 

계림(鷄林)과 김알지신화 [金閼智神話]

탈해왕 9년 봄이었다.

호공은 대궐에서 밤늦게까지 일을 보고 자기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호공이 집으로 돌아가려면 반월성 너머 서쪽 마을을 지나가야 했다.

그 마을 옆에는 시림(始林)이라고 하는 숲이 있는데

나무가 어찌나 우거졌는지 대낮에도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호공은 밤늦게 이곳을 지날 때면 으레 하인을 데리고 다녔다.

이 날도 호공은 조금쯤 긴장한 채 시림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밤이 깊어 숲속은 조용하지만 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무엇인가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호공은 조금 전에 대궐에서 하던 일을 생각했다. 그 때였다.

죽은 듯이 조용하던 시림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꼬끼오, 꼭, 꼭, 꼬..."

호공이 깜짝 놀라 시림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 조금 전에 무슨 소리 듣지 못했느냐?"

호공은 자기 귀를 의심하며 뒤에 따라오는 하인에게 물었다.

하인은 자기도 들었노라고 하며 시림 쪽으로 다시 귀를 기울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시림에서 닭이 울다니 그곳에는 늘 신비한 구름과 안개가 서리어 있어서

서라벌 사람들은 상서로운 곳으로 여기고 함부로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호공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닭 울음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힘차고 우렁차서 단번에 들을 수 있었다.

그 순간 호공은 닭이 우는 쪽을 바라보다가 그만 걸음을 멈추었다.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만큼 시커멓던 서림이 온통 환한 광명으로 차있고,

숲 위에는 자주빛 구름이 하늘에서 숲속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저건, 아무래도 시림에서 무엇인가 상서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하구나.'
이렇게 생각한 호공은 하인을 데리고 자주빛 구름이 길게 뻗쳐 내린 숲속으로 달려갔다.

"아아!"
호공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숲속에 드리워진 그 구름 속에는 황금빛깔로 된 궤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눈부시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숲속을 환하게 밝히던 그 광명은 바로

그 황금빛깔의 궤에서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궤가 걸려 있는 나무 아래에서

하얀 닭 한 마리가 목을 길게 빼고 우는 것이었다.

"아, 저것은 분명 하늘의 닭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 황금 빛깔의 궤에는 틀림없이 귀한 것이 들어 있을 것이다."

호공의 가슴은 마구 뛰었다.

호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대궐로 들어갔다.

아무리 밤이 이슥해졌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임금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탈해왕은 마침 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탈해왕은 호공이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호공의 이야기를 듣고는 자기도 조금 전에 닭우는 소리를 들었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탈해왕은 호공을 따라 시림으로 거동을 했다.

탈해왕은 숲속으로 길게 뻗쳐있는 자주빛 구름을 보고

나라에 경사가 난 것을 단번에 알았다.

그는 얼마나 기뻤는지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탈해왕은 궤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자 흰 닭은 다시 한번 목을 길게 빼고 운 다음 하늘로 날아갔다.

탈해왕은 흰닭이 날아가는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흰닭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입을 열었다.

"호공은 조심스럽게 저 궤를 내리도록 하시오."

호공은 하인을 시켜 조심스럽게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궤를 내리도록 하였다.

탈해왕은 손수 궤를 열었다.

그랬더니 궤 속에서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한 금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궤 안에는 잘 생긴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너무나 빼어나게 잘 생기고 씩씩해 보였다.

탈해왕은 그 아이를 두 팔로 보듬어 안았다.

그리고는 펄쩍 펄쩍 뛰면서 둥구둥구를 했다.

그러다가 탈해왕은 호공을 바라보고는,

"이건, 아무래도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내린 것 같소."
하고 말했다. 사실 탈해왕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러하옵니다, 마마."

호공이 이렇게 말하자 탈해왕은 더욱 기뻐하였다.
그리고 이번 일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옛 일과 비슷하므로

박혁거세가 세상에 나타나 처음으로 스스로를 가리켜 말한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한번 일어나다)>이란 말에서

'알지'를 따내어 아이의 이름으로 하였다.

알지란 곧 우리나라 말에서 '아기'를 뜻하는 말이다.

알지의 성은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김(金)이라고 하였는데

그의 자손이 바로 오늘날의 경주 김씨들이다.

그리고 금궤가 나온 시림은 숲과 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해서

계림(鷄林)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탈해왕은 알지를 안고 대궐로 향하였다.

그러자 탈해왕의 뒤에는 새와 짐승들이 따라오면서

날고 뛰며 기뻐서 야단들이었다.

탈해왕은 알지를 정성스럽게 길렀다.

알지는 점점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혜로와 탈해왕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탈해왕은 마침내 좋은 날을 골라서

알지를 태자로 세우고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알지는 뒷날 왕위를

유리왕의 둘째 아들 파사에게 사양하고 왕이 되지는 않았다.

이처럼 그는 도량이 넓었다.

알지는 그 뒤 대보의 벼슬에 올라 다만 왕을 도왔을 뿐이다.

그 뒤, 알지의 7대 후손인 미추에 이르러 김씨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로부터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 세 성이 임금을 번갈아 하였는데,

그 중에서 알지의 후손으로 왕위에 오른 이는 무려 30 여명이나 되었다.

 

 

 

 

 

 

▲ 첨성대(瞻星臺) 국보 31호.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세운 천문대. 

직접 첨성대 앞에 서 본게 초등학교 졸업여행때 였으니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것 같다.

   

 

 

 

 

 

 

 

 

 

 

 

 

 

 

 

 

▲ 보문단지 가는길..

 

 

▲ 보문단지내 물레방아 쉼터.   

 

 

 

 

 

 

 

 

 

▲ 10시 32분 : 고위봉 산행들머리인 용장1리 주차장.   

 

 

 

▲ 페기물 처리업체의 광고가 재미있다.   

 

 

▲ 봄 농사를 준비하는 농심..   

 

 

 

▲ 자목련.

    

 

▲ 두릅.

 

 

 

 

 

 

 

▲ 연달래 1.   

 

 

▲ 연달래 2. 

 

 

▲ 산행들머리였던 용장 1리. 

   

 

▲ 저멀리 금오산이 보인다...

  

 

▲ 태봉.

 

 

▲ 이무기능선.

   

 

 

 

▲ 정체구간...   

 

 

 

 

 

 

 

 

▲ 천년바위와 노송의 힘겨운 밀어내기.. 

 

 

▲ 이무기능선에 걸맞게

이무기가 승천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12시 21분 : 고위봉 헬기장 점심. 

   

 

▲ 고위산 정상.

수많은 산객들로 정상 인증샷은 포기하고,,,,.   

 

 

 

 

 

 

 

▲ 삼화령에서 본 고위산.   

 

 

▲ 삼화령 연화대..

삼화령이란  남산의 3군데  높은 곳을 의미하는데

금오봉과 고위봉, 그리고 두 봉우리의 삼각형 위치에 해당하는

이 곳 봉우리를 합하여 삼화령이라 불렀다. 

삼화령(三花嶺)은 신라 시대의 화랑(花郞)이

기예를 닦던 장소이자, 미륵 사상이 융성했던 곳이다. 

선덕여왕시절 생의(生義)스님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나를 따라 오라" 하며

남산 남쪽 골짜기에 데리고 가서 풀을 묶어 놓으며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나를 파내어

시원한 곳에 있게 해주시오" 라고 했다. 

스님은 다음날 그곳에 가 보았더니 꿈속에서처럼

풀을 묶어놓은 곳이 있었다. 

생의스님은 땅을 파 미륵불을 발견하고

삼화령 꼭대기에 모셔놓고 그 자리에 절을 짓고 공양하였다.

지금은 연화대좌만 남아 있다.

 

 

14시 07분 : 금오산 정상.

 

 

▲ 금오산 인증샷..

 "<남산>을 오르지 않고

경주를 보았다고 말할수 없다",,,라고 하였다..

천년고도 경주를 잘 표현한 말이다. 

남산에는 수많은 국보, 보물, 시도지정문화재 등이

보존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산 전체가 노천박물관 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세계에서도 그 유래가 없어 2000년에는

남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 두 봉우리의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남산이라고 한다. 

<남산과 망산의 유래>,

사시사철 언제나 복된 땅이며 동이터서 솟아오른 햇님이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고 불리우는

서라벌 이곳에어느날 두 신이 찾아 왔다고 한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이었고, 또 한 신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 빛나는

눈동자와 예쁜 웃음이아름다운 여신 이었다고 한다. 두 신은 서라벌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살땅이

이곳이구나! 하고 외쳤고이 소리는 새별의 들판에 진동을 했다고 하는데

이때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던 처녀가 놀라 소리나는곳을 보고는산 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쪽으로

걸어 오는걸 보고 처녀는 겁에 질려산봐라~하는 소리를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산 같이 큰 사람을 봐라~ 라고 해야할 말을마음이 급한 나머지 산봐라 하고 외쳤던 것이다.

갑자기 발아래 들려오는 소리에 두 신은 깜짝놀라그자리에서 발을 멈추었는데 그만 왠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수가 없었다 한다.

두 신은 그 자리에서 굳어 움직일수 없는 산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들의 소원대로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 영원히 살게 되었다 한다.

남신은 강하게 생긴 남산이 되었고, 여신은 남산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남산과 망산에 전해오는 유래다.

 

 

▲ 금송정과 상사바위.

점선안의 부처님이 보이나요?

금송정바위속에 숨어있는 부처님을 찾아냈다하는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이다.

남산에서 가장높은 암자인 상선암에서남산 불상 중 좌불로는 가장 큰 마애불상이다.

 

 

▲ 확대한 사진.

이 불상은 머리부분은 돋을새김을 하였으며몸 아래쪽으로 갈수록 선각에 가까운 조각으로

단순화 시켜바위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하며, 전체적인 양식이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 상사바위..

 

   

▲ 상사바위 뒤편.. 

바위 밑에는 평평한 자리가 있어서 산악회마다 산신제를 많이 드리는 곳이다. 

신라때 아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빌던 곳이라 전해진다.

  

 

▲ 금송정에서 바라본 팔각정.

 

 

▲ 바둑바위. 

   

 

▲ 멀리 오른쪽으로 보이는 경주시내.

 

 

 

▲ 상선암.

    

 

 

 

 

 

 

▲ 석조여래좌상(보물 666호). 

   

 

 

▲ 목이 잘린 석조여래좌상. 

1964년 8월 동국대생들에 의하여 땅속에 머리가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 부처님은 한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끈과

아래 옷을 동여맨 끈, 그리고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복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 잘 정비된 하산로를 따라 내려 오면,,

 

 

▲ 아름다운 하산길..

사진작가들이 자주 찾는 길이다.

   

 

▲ 삼릉.

왼쪽부터 54대 경릉왕릉. 53대 신륵왕릉. 8대 아달라왕릉.

 

 

▲ 삼릉의 소나무. 

이곳의 소나무는 유명한 <배명우>님의 소나무사진의 원초지다.

2005년 영국 가수앨린존이 2,800만원, 

2006년5월 홍콩 크리스티경매에서

두점으로이루어진작품이 1억3,000만원. 

2007년11월 영국필립스경매에서는 1억6,000만원에팔려서

유명세를 탔으며 소나무한그루 벤적없이 한국의소나무를

세계에 수출하는 사진작가가 되었다는 소나무다.

 

 

1963년에 도굴되어 유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무덤들의 원형도 원래는 호석둘레에 큰 받침석을 기대어 놓은 태종무열왕릉과 같은 양식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파괴되어 원형의 봉토분처럼 보인다. 안타까운 일이다.. 

   

 

 

 

 

15시 26분 : 서남산 주차장 하산완료.

    

 

 

 

▲ 하산주 장소.. 

주방에서는 어머님이 홀써빙은 아들이.. 전통칼국수 맛,, 맞구요.. 맛있습니다.. 

   

 

▲ 솔향기 회장님 건배.. 

솔향기 벙개팅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 직전회장님 건배.. 

우리 모두의 건강을 위하여!~

위하여!~.. 

   

 

 

꽃이 피는 이유


꽃을 보고 사람들은
꽃이 피었다고 생각합니다.

꽃을 보고 사람들은
꽃이 아름답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추운 겨울을 보내고
아픔과 고통을 겪어낸
꽃의 길은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온몸을 불태워 꽃이 된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마지막 꽃 하나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 더 많은
아름다움이 피어난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 석란정 -- 

 

 

그러나..

우리 솔향기 님들은 압니다. 

<솔향기산악회>가

2009년 6월 28일에 뿌린 작은 꽃씨 하나가

아름다운 향기를 피워내기까지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을 이겨내었기애

오늘이 있음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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