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4월 20일(목).
오릉/포석정 : 경상북도 경주시.

 

트레킹코스 : 포석정주차장-오릉-나정-일성왕릉-창림사지-지마왕릉-포석정주차장 트레킹종료.

트레킹시작 : 포석정주차장 09시 29분.

트레킹종료 : 포석정주차장 13시 00분.

전체거리 :  9.81km.

전체시간 : 03시간 31분.

운동시간 : 03시간 06분.

휴식시간 : 00시간 24분.

 

09 : 29  포석정주차장 출발.

09 : 58  오릉.

10 : 50  나정.

11 : 00  육부전.

11 : 10  월암재.

11 : 23  일성왕릉.

11 : 55  창림사지.

12 : 41  지마왕릉.

13 : 00  포석정주차장트레킹종료.

 

시인 T. S. 엘리엇의 유명한 시 "황무지"에 "4월은 잔인한 달" 이라는 표현이 있다..

시의 내용과는 다른 상황일지라도.. 어찌 되었건.. 나 개인에게는 잔인한 4월이 되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한 장단지 근육파열이란다.. 16일간을 꼼짝없이 창밖으로 스쳐가는 봄풍경만 속절없이 바라보다가 2~3일

전부터 증세가 호전되어.. 콧구멍에 봄바람 넣어도 될것 같다..ㅎ~

 

"산이좋아 산악회"는.. 지난달 구미 금오산에 이어 두번째 참석이다.

산악회 회장님의 인사 말씀과.. 아침행사 진행을 마치고.. 산행대장님이 소개하신 분이 28년차의 "산이좋아 산악회"를

창립 하신분이라고 한다... 지금처럼 각종 산행 앱이 보급되기전에.. 달랑.. 지도한장 들고 전국의 산을 누비며 길찾기의

달인으로 인간 네비게이션 수준이었다고 한다... 전국에서 대구가 산악회가 제일 많고 산악회 대형버스도 가장 많다는

소문도 있다...  따라서.. 군소 산악회의 이합집산이 많은 풍토에서 28년을 이어 온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결집력을 다지는 끈끈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09시 29분 : 포석정 주차장 출발..

오늘의 산행코스는 이무기능선을 올라 고위봉 찍고 금오봉을 경유하여 늠비봉을 거쳐서 포석정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암릉에 10km의 산행거리는 무리일것 같아서 모든회원님들이 용장리에서 하차후 하산지점인 포석정에서 역사탐방이다.

 

▲ 겹왕벚꽃.

꽃말은... “정숙과 단아함”이다.

 

▲ 포석정에서 4번국도로 나와서 오릉으로 간다..

 

▲ 우리나라의 자전거도로 시설망은 세계적 수준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국적으로 잘 되어 있다..

 

▲ 오릉 가는길..

 

▲ 친절하고.. 이쁘기까지 한.. 매표소 아지매가.. 민증을 보더니 꽁짜란다..ㅎㅎ~

 

▲ 산만 알고.. 산에만 다니느라 이용율이 많은 지하철 꽁짜는 그러려니 했었는데.. 문화재 꽁짜에 기분이 좋다..ㅎㅎ~

기분좋은 꽁짜의 시간만큼 수명의 시간은 점점 짧아지겠지만.. 주어진 시간.. 그냥 즐기자~..

 

▲ 신라문이라 되어 있다.. 신라 시작의 땅이라는 의미가 있다.

 

▲ 좌측의 연못을 보고 오른쪽으로 돌아 보고자 한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두색이다..

 

▲ 연못 주위 곳곳에 "뱀주의"라는 경고문이 많이 보인다..

삼국사기에서 오릉을.. "사릉(蛇陵)"이라고도 했다는 기록처럼.. 과거부터 뱀이 많았던 모양이다.

 

▲ 숭의문..

 

 

▲ 오릉을 한눈에 볼수 있는 곳이다..(사적 제172호).

봉분 높이 10m 내외, 지름 20m 내외 신라 초기의 왕릉으로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알영부인(閼英夫人),

제2대 남해왕(南解王), 제3대 유리왕(儒理王), 제5대 파사왕(婆娑王) 등 5명의 분묘라 전해진다. 일명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명칭은 박혁거세가 승하 후 7일 만에  그 유체(遺體)가 다섯 개로 되어 땅에 떨어졌으므로  이를 합장하려

하자 큰 뱀이 나와 방해하므로 그대로 다섯 군데에다 매장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연유되었다.

 

▲ 같은 공간에서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서로 넘나들면서 만들어내는 풍경속에 천년의 시공이 무심하고...

그림 좋은 소나무아래 유택을 보니 세상 참 느리게 가는듯하여.. 마음조차 느긋해 지는것 같다.

 

▲ 알영각.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기원전 53년에 알영정 가에 계룡(鷄龍)이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입술이 닭의

부리를 닮은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한 노파가 아이를 거두어 알영이라고 이름 짓고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여자아이의 부리가 떨어지고 13세 때 혁거세왕의 왕비가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 1931년에 세운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

 

알영이 태어난 우물... 알영정인데 덮어 놓았다.

 

▲ 본채는 숭덕전인데.. 문이 잠겨 있다.

 

▲ 숭성각.

 

▲ 신라시조왕 비석.

 

▲ 숭덕전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제사를 모시는 전각이다.

조선 세종11년(1428)에 왕명에 따라 건립되었다. 임진왜란때 불에 타 없어진것을 선조33년(1600)에 다시 세웠고

숙종30년(1704)에 고쳐지었다. 경종3년(1723)에 숭덕전이라는 편액을 걸었고  영조11년(1735)에 건물을 수리하였다.

전각 안에는 혁거세왕의 왕비 알영이 태어났다는 알영정이 있다. 이 전각은 세종이 삼국 시조들의 사당을 지으라는 조서를

내려 세운 제전이므로 행사는 모두 나라에서 주관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박씨문중에서 관리하면서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지금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 홍살문을 세운 기둥은 원래 당간지주(幢竿支柱)로  이곳에 담엄사(曇嚴寺)가 있었다는 설과 일치한다.

 

▲ 문화해설사의집에 들러 팜플랫 챙기고..

 

▲ 숭덕전 정문은 굳게 잠겨 있다.

 

▲ 숭덕전과 길건너 마주보는 교리김밥 본점.. 전국 <3대김밥>집 중에 하나라고...

계란 김밥 유행의 원조 격인 경주의 교리김밥은. 1960년대 구멍가게로 시작해 요석궁이라는 요정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간식으로 사랑 받으며 이름을 날린 교리김밥은 현재 여러 개의 분점이 있을 정도로 경주의 명물이 되었다.

밥의 양보다 계란 지단이 푸짐하게 들어가 있어 폭신폭신한 식감이 키포인트라고 한다.

 

▲ 교리김밥의 원래 위치는..  반월성.. 계림.. 경주 향교.. 최부잣집.. 요석공주가 살던 터로 유명한 요석궁을 앞집으로

경주 교동의 최고의 명당에 자리잡은 교리김밥집이었다. 요석궁요정에 근무하는 수백명의 아가씨와 종업원들이 바로

뒷집인 이집에 와서  김밥과 국수를 줄서서 사먹었기 때문에 요석궁과 함께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2020년에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3형제 며느리들이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는데 주말이면 세 사람이 바쁘게 김밥을 말아도

수요를 채우기가 힘들 만큼 찾는 이가 많다고 한다.

 

▲ 꽃중에 꽃.. 모란...

꽃말은... "부귀영화" 다.

 

▲ 타래붓꽃..

꽃말은 "기쁜 소식" 이다.

 

▲ 삼효각..

삼효각(三孝閣)은 경주김씨(慶州金氏) 영분공파(永分公派) 후인(後人) 병조판서 휘 남보(南寶)의 9대손 김응벽(金應璧),

김응규(金應奎), 김응정(金應井) 삼형제공이 효행으로 조선 명종16년(1561년, 신유) 윤 5월 21일에 효자 정려를 받은

사실을 현창(顯彰)하기 위해 건립한 정려각(旌閭閣)이다.

 

10시 46분 : 육부전 입구..

 

▲ 차례로.. 나정.. 양산재(육부전).. 배씨시조사..  일성왕릉을 찾을 것이다..

 

▲ 나정..

 

▲ 보수공사중인 나정(蘿井).. 완공되면 어떤 그림일까..

 

▲ 신라시조 박혁거세 신화...

어느날 육부중의 고허촌장 소벌공(소벌도리)이 양산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 옆에 번갯빛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으로 드리웠는데, 흰 말 한 마리가 꿇어 앉아서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곧 뒤져 보니 자줏빛 나는 알 한 개가 있고 말은 사람을 보자 길게 소리를 뽑아 울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 보니 사내아이가 있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랍고 이상해서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키었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두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하였다.

그리하여 그 아이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이름을 짓고 직위의 칭호로는거슬감(居瑟邯)이라고 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다투어 가면서 치하하기를 "이제 천자(天子)가 내려오셨으니 곧 마땅히 덕이 있는 황후를 찾아 내어

배필을 정해야 하겠다." 고 하였다. 이 날 사량리 알영 우물에서 계룡(鷄龍)이 나타나더니 왼쪽 옆구리로 계집아이를

낳았다. 얼굴이 아주 고우나 입술이 마치 닭의 주둥이와 같았는데, 월성(月城) 뒷내물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주둥이가 뽑혀져서 떨어졌다. 그래서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고 부른다.

남산 서쪽 기슭에 궁실(宮室)을 짓고 거룩한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는 알로 나왔으니 알은 박[瓠]과 같았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이 박을 '박(朴)'이라고 하기 때문에 성을 박씨라고 하였으며, 여자는 자기가 난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의 나이 13세에 이르러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에 사내가 임금이 되면서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지금은 말도 안되는 신화지만 그때는 통치의 수단으로 통했다..

 

▲ 나정에서 나온 유구들..

 

▲ 멀리 남산을 쳐다 보며 회원님들이 지금 어디쯤 걷고 있을까..

 

11시 00분 : 육부전.

진한(辰韓) 6부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가 건국되기전 진한땅에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취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의 여섯촌을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육부의 촌장들이 각각 젊은이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 위에 모여서 의논하기를,

"우리들에게는 위로 뭇 백성들을 다스리는 임금이 없으므로 백성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니 덕이 있는 분을

찾아 내어 임금으로 삼아서 나라도 세우고 도읍을 차려야 할 것이 아니냐?" 라고 하였다.

 

▲ 굳게 닫혀있는 대덕문..

이에 그들은 알천 언덕에서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에 번갯빛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으로 드리웠는데,

그 곳에는 자줏빛 나는 알 한 개가 있고 그 알을 쪼개 보니 사내아이가 있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그 아이를 박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이름을 짓고 13세 되던해에 신라의 초대 임금으로 추대하니 이해가 바로 신라의

건국년인 기원전 57년이다...

고대의 신화는 통치와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21세기를 사는 지금도 끊임없이 통치자의 신화를 만드는 그런 나라가 있다.

 

▲ 담넘어로 육부전 내부를 담아본다.

그후... 신라 3대 유리왕이 6부촌장들의 신라건국 공로를 기리기 위해 6촌을 6부로 고치고 각기 성을 내렸다.

양산촌은 "이씨"... 고허촌은 "최씨".. 대수촌은 "손씨".. 진지촌은 "정씨".. 가리촌은 "배씨".. 고야촌은 "설씨" 다..

이로써 신라 초대 여섯 성씨가 탄생되었고 시조 성씨가 되었다.

 

▲ 경주최씨 시조 소벌도리공 기적비.

소벌도리공은 육촌장중에 박혁거세를 나정에서 데려오고 왕으로 추대하는데 주도적 역활을 하였던 인물이다.

소벌도리공의 아들 최대벌리(崔大伐利) 혈통으로 25세손 최치원이 경주 최씨의 시조가 되었다.

 

▲ 월암재.

월암재는 1534년 경주에서 태어난 김호 장군을 모시는 재실이다. 김호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분이다. 현재 월암재는 고택문화체험을 할 수 있게 활용되고 있다.

 

▲ 월암재에서 골목길을 빠져 나가니...

 

▲ 남간마을회관이 나오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 일성왕릉과 창림사지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 4월 18일이면 이틀전이다.. 경덕사대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사찰인줄 알았더니 사당이다..

 

▲ 경덕사 육화문..

 

경덕사(景德祠).

이 사당은 신라 개국의 원훈이며 배씨가문(裵門)의 시조인 금산가리촌장 배지타(金山加利村長 裵祗沱)와

그 후손으로 고려 개국 공신인 배현경을 모신 사당이다.

배현경은 삼국통일 최전방에서 활약하며 1등 공신에 녹훈이 되었고 태조왕건 묘정에 배향되었다.

 

▲ 경덕사(景德祠) 경내.

평소에 문이 닫혀 있지만 담장이 낮아서 안쪽이 잘 보인다.

 

▲ 일성왕릉 가는길... 문뜩카페.. 재미있는 이름이다.

 

▲ 보광사.

 

▲ 숭성재(崇聖齋)(문뜩카페).

崇聖齋는 장창곡 남간마을 가장 안쪽인 일성왕릉 입구에 위치하고.. 숭덕전(崇德殿)의 부속 사당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일성왕릉에 제를 올린다고 한다... 카페도 운영하는가 보다.. 차한잔 마시고 싶은데 혼자라서...

 

▲ 일성왕릉 가는길...

 

▲ 앞쪽의 소나무가 호위대장이라면...

 

▲ 뒷쪽은 천군만마의 군사들이 에워싸고 호위 하는것 같다..

 

▲ 귀하디 귀한 토종 흰민들레... 꽃말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 작은 개울다리를 건너...

 

▲ 야자매트가 깔린걸 보니.. 금강저수지로 가는 둘레길인듯 하여 가보기로 한다..

 

▲ 산괴불주머니...

꽃말은... "보물 주머니"이다.

 

▲ 금강저수지..

 

▲ 애기똥풀... 꽃말은... "몰래주는 사랑".. "엄마의 사랑과 정성" 이다..

줄기나 잎을 자르면 노란색의 유액이 흐르는데.. 그 유액이 아기의 묽은 똥과 같아서 "애기똥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벼룩나물꽃..

꽃말은... "기쁜 소식" 이다.

 

▲ 등나무꽃...

꽃말은... "환영"... "사랑에 취하다" 이다.

 

▲ 직진하면 창림사지로 가는길이고.. 다리를 건너면..

 

▲ 해목령으로 올라 금오봉으로 가는 들머리다.

별동대의 산행팀들이 해목령 게눈바위에서 이길로 내려 올 것이다..

 

▲ 남간사지 당간지주..

 

남간사지 당간지주..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사찰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매달아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의 좌우에 세워 단단히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드물게 당간이 남아 있으나 대개는 두 지주만 남아 있다. 이 당간지주는 남간사의 옛터에서 약 500m 떨어진 논 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논을 경작하면서 지주의 아래부분이 약 50cm정도 드러나 있으며, 바닥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기단부가

없어서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던 받침돌도 찾아볼 수 없다. 지주 안쪽 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세 군데에

뚫어 놓았는데, 특히 꼭대기에 있는 것은 십(十)자 모양으로 되어 있어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 육부전이 있는 탑동마을 전경..

 

▲ 교각이 재미있는 다리를 건너 창림사지로..

 

▲ 여러가지 농사용 장비가 많은걸 보니 영농대행업체인듯..

 

▲ 창림사지로 가려먼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데..

 

▲ 창림사지로 이어질것 같은 묵은 임도가 보여서 따라가 본다..

 

▲ 예상적중이다.. 언덕에 올라서니 창림사지 삼층석탑이 보여서 당겨 본다.

 

▲ 희미한 족적을 따라서 언덕에 올라 서니..

 

▲ 창림사지 쌍귀부.. 거북등 위의 비석도 사라지고.. 거북머리도 잘려나간 흔적이다. 거북 발이 앙증스럽다.

 

▲ 경주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보물1867호)... 신라 최초의 궁궐터 였다.

 

▲ 삼층석탑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궁궐이 있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귀중한 석탑이다.

 

▲ 사진작가들이 계절따라 많이 찾는 석탑중에 하나로 석양을 배경으로 한 모습이 아름답다..

 

▲ 삼층석탑에서 바라본 서쪽..

 

▲ 서북쪽으로는 김유신 묘가 있는 송화산이 보이고.. 영천의 도덕산이 아련하다..

 

▲ 흘러 가버린 세월은 말이 없고.. 삼층탑만 외로히 우뚝하다..

 

▲ 야자매트길을 따라 포석정으로..

 

▲ 주변에 많이 보이는 등나무꽃의 향기가 홀로 걷는 나그네의 코끝을 자극한다..

 

▲ 돌아보니.. 삼층석탑이 새로운 천년의 시공을 준비하는것 같다..

 

▲ 가까운 지마왕릉에 다녀온다..

 

▲ 신라 6대 지마왕릉(사적 221호).

 

▲ 마지막으로 지마왕릉에 온 이유는 바로.. 이 용송의 기상을 보기 위해서다..

 

▲ 다시 포석정주차장으로 돌아와서.. 신라의 마지막 역사의 현장이 된 포석정으로 간다.

 

▲ 방문자 건물속에 재현해 놓은 실물 크기의 포석정.

 

 포석정(사적 1호)...

신라왕실의 별궁으로 역대 임금들이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어 신하들과 22m의 수로에 잔을 띄어 시를 읊으며 노닐었다는

곳으로. 신라 49대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남산의 신이 추는 춤을 추면서 "어무산신무"라는 신라춤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 이곳이 신라 55대 경애왕이 927년에 후백제 견훤군대의 습격을 받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곳이다.

경애왕이 죽고 56대 경순왕이 견훤에 의해 즉위했다. 재위 동안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으며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민심은 고려로 기울었다. 이에 군신회의(君臣會議)를 소집하여 고려에 귀부 하기로 결정하고 935년에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했다. 그뒤 왕건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正承)에 봉해졌으며, 녹 1,000석을 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경주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되어

신라의 천년사직은 막을 내린다.

 

 오전에 오릉을 거쳐 육부전과 나정에서 신라의 시작을 보았고.. 오후에 포석정에서 신라의 끝을 보았다...

시작과 끝이 이렇게 가까이 있음이 아이러니하고 천년의 시공이 하루길도 안되는 찰라인것을...

우리는... 천년을 살것처럼 아둥바둥이다. 천년의 시간도 봄날의 일장춘몽이더라. ~~..

 

신라 천년 사직의 마지막 현장인 포석정을 나서며... 애재라 통재라~~..신라 천년사직이여!~..

 

 

16시 46분 : 하산주 거나하게 배불리 먹고 형산강 둔치 주차장에서..

 

18시 41분 : 금호JC 금호대교에서..

비단물길 금호강에 비친 황금빛 노을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아마도.. 오늘 걸었던 곳곳의 풍경들의 잔상들과 겹쳐져서일 것이다...

감사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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