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9월 10일

옥계폭포 : 충북 영동군 심전면.

 

북대구IC -> 영동IC -> 노근리 평화공원 -> 영동군 -> 옥계계곡 주차장

거리 : 약115km.....소요시간 : 약 1시간 20분.

 

▲ 옥계폭포 주차장.

바로 옆에는 고당사라는 예스러움이 없는 사찰인데... 일반사찰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옥계폭포를 다녀와서 둘러 보기로 한다.

 

▲ 진입로 입구에 도로가 협소하여 교행이 어려우며.. 노약자나..또는. 장애인이 탑승한 차량만 진입이 허용 된다는

안내문에 따라 도보로 걸어간다.

 

▲ 주차장에서 3~4분가량 도로를 따라 가면 가든과 카페가 보인다.

 

▲ 옥계저수지.

 

▲ 주차장에서 12~3분 가량 걸어오니 옥계폭포가 보인다.

 

▲ 3대 악성(樂聖)중의 한분이신..

난계(蘭溪), 난계(蘭溪), 박연(朴堧)의 상징탑.

박연(朴堧, 1378년 ~ 1458년)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도학자, 경세가, 문장가, 천문학자, 음악가이다.

초명은 연(然), 자는 탄보(坦父), 아호는 난계(蘭溪), 당호는 송설당(松雪堂)이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밀양 박씨 좌복야공파후 난계파조이다.

 

▲ 폭포로 가는길 입구에 소독제가 비치되어 있다.

 

▲ 정자에서 바라보는 옥계폭포는..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아침에 본다면 가히 선경일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풍광에 매료된 조선시대의 악성(樂聖) 박연선생이 이곳을 자주 찾아와 피리를 불었다고 하며..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시도 읊고..그림도 그렸을 것이다.

 

▲ 가까이 다가 갈수록...상상 이상의 높은 물줄기에 수량(水量)도 많고 떨어지는 물소리가 우렁차다.

 

▲ 폭포를 둘러싼 암벽도 한폭의 동양화다.

 

▲ 옥계폭포(玉溪瀑布)에서 전설따라 삼천리.. 옥계폭포의 옥(玉)은 여자를 뜻하는 말이다.
폭포를 바라보면 여자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높이가 20여미터 되는 폭포는 
비단자락을 드리운 듯 곱고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주위 풍광도 뛰어난데다 울창한 숲이 있어 한여름에도 서늘하고 오색물보라를 일으키며 
내리꽂히는 물줄기는 속세가 아닌 선계를 방불케 한다.

어느 날 옥계폭포를 찾은 난계 박연 선생님은 오색영롱한 폭포수 밑에서 피리를 연주할 때
바위틈에 피어난 난초에 매료됐다 하여 난초의 난(蘭)에 흐르는 시내 계(溪)를 써서 
호를 난계(蘭溪)라고 하였다.

이 폭포는 박연 선생님을 비롯하여 많은 묵객들의 혼을 빼앗기도 했다.
옥계폭포는 음폭(陰瀑)이다. 그런데 언제 생겨났는지 폭포가 내리꽂히는 웅덩이 안에

우뚯 솟은 양바위가 생겨났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물 한가운데 우뚝 솟은 양바위가 폭포의 경관을 해친다 하여
멀리 옮겨 버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마을에는 희귀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젊은사람이나 늙은사람 가릴 것 없이 남자들은 객사를 하거나 사고로 죽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몇몇 사람들이모여 양바위를 옮겨 벌어진 일이라고 입을 모았고

다시 양바위를 제자리로 옮겨 놓았다.
이렇게 하여 음폭과 양바위의 陰·陽은 조화를 이루게 되었고...
그러자 거짓말 같이 마을은 예전처럼 평온해졌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영동군청>에서 발췌..

 

▲ 역사상 3대 악성으로 불리우는 우륵, 왕산악과 더불어 이곳이 고향인 난계 박연(朴堧) 선생이 말년에 이 폭포에 자주 와서 피리를 불었다고 하여 박연폭포라고도 전해 진다.

 

▲ 아들을 점지해준다는 속설에 따라.. 돌 하나마다의 소원들이 담겨져 있다.

 

▲ 폭포상부..

 

▲ 우렁찬 굉음이 시원하게 힐링이다.

 

▲ 누군가가 전설속의 남근탑을 만들어 놓았다..

 

▲ 폭포의 상부가 궁금하여...폭포를 나오며 되돌아 보니... 앞쪽의 두루뭉실한 바위가 양바위라고 하는데.. 내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고 폭포 아랫쪽에 세찬 물 세례를 맞고 있는 시커먼 돌이 보인다.. 혹시?.. 저 돌이 양(陽)바위가 아닐까?...라는 생각...

 

▲ 달이산 들머리..

 

▲ 웬 파이프 관이?..위에 온천이라도?...

 

▲ 위에서 내려다 본 폭포 전망대..

 

▲ 언덕위의 파이프관을 넘어...

 

▲ 길은 다시 계곡으로 떨어지고..

 

▲ 이끼낀 시멘트다리에서...

 

▲ 상류쪽으로 가면 마을이 나오고 삼단폭포가 있다는데...오늘의 목표는 옥계폭포의 상부를 보고자 했기에..

 

▲ 하류쪽(폭포 상단)으로...10여미터 내려가면..

 

▲ 옥계폭포상단부에 또 다른 소(沼 : 웅덩이)가 있다.. 올라올때 보았던 파이프 관이 보인다.

관의 용도는 아래쪽의 저수지 물을 뿜어 올려서 폭포수 위로 순환시켜주는 용도라고 한다.

아마도.. 해발 551m의 작은 산이다 보니 평소에는 수량이 적어 건폭이 될것이다..

 

▲ 옛날 용이 살았다는 전설속의 웅덩이다.

 

▲ 좀더 높은곳에서 내려다 보니 폭포아래도 보인다.

 

▲ 좀더 폭포와 가까운 곳에서 폭포속의 양(陽)바위(?)를 배경으로..

 

▲ 다시 옥계저수지...

올라갈때는 몰랐던 저 건물의 용도가 확연해 진다...

모르긴 몰라도...폭포위로 물을 올려주는 펌프가 있는 발전시설일 것이다..

 

▲ 다시 고당사로..

 

▲ 돌아오는 길에 <노근리 사건>의 현장으로..

 

▲ 곳곳에 기총소사의 자국이 선명하다.

 

<노근리 학살사건>...

1950년 7월 26일 미국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예하 부대는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 위에 피난민들을 모아놓고 기관총을 발사한 데 이어, 이들이 철로 밑 굴다리로 숨어들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때 생존자들은 당시 최소한 양민 200여 명이 숨졌다고 증언했다.

 

▲ 미국 측은 미군이 노근리에서 저지른 만행을 계속 부인해왔으나,

1999년 9월 미국연합통신(AP)은 6·25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6일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일어난 미군의 '노근리양민학살사건'을 뒷받침하는 미군 공식문서와 참전미군들의 증언을 전세계에 타전했다.

AP가 발굴한 미군 상급부대의 '예하 부대에 보내는 명령서'에 따르면 미군 상급부대는 한국에 주둔한 미군 부대에 피난민 500여 명을 '적'으로 취급할 것을 명령했다.

이 보도를 계기로 한국에서 반미 분위기가 고조되자,그해 10월 한국과 미국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협의에 착수했고,

노근리양민학살사건 정부대책단 및 진상조사반이 구성되었다.

2001년 1월 12일 한·미양국조사단은 노근리 사건이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이라는 것을 인정했으며,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2004년 2월에는 '노근리사건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7월부터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사업이 추진되었다.

 

▲ 때 맞추어 아픔의 역사...굴다리 위로 열차가 지나간다.

 

▲ 홍보 전시관의 굳게 닫힌문. 코로나가..역사의 아픔조차 문을 걸어 잠그게 한다.

 

▲ 위령탑.

노근리 현장에 평화공원을 만들어 아픔을 평화의 길로 승화시키고 있다.

2010년 4월 노근리양민학살사건을 고발한 영화 "작은 연못 : 감독 이상우" 이 제작되어 사건의 진실과 실체를 널리 알렸다. 또한, 노근리양민학살사건의 전모를 파헤쳐 전세계에 알린 3명의 AP기자는 2000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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