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02월 08일. 백화산(1063.5m) : 경북 문경시.
산행코스 : 이화령 - 조봉 - 황학산 - 마원리갈림길 - 마원리마을 회관 하산완료.
산행시작 : 이화령 : 10시 20분 산행시작.
하산완료 : 마원리 마을주차장 : 14시 37분(4시간 17분 소요 : 휴식시간포함)
10 : 20 이화령 들머리.
11 : 18 조봉.
12 : 11 황학산.
13 : 00 마원리갈림길.
14 : 27 마원리 마을주차장 산행 완료.

▲ 09시 28분 : 이화령휴게소.

▲ 이화령(梨花嶺)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각서리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을 잇는 백두대간이 지나는 해발 548m 높이의 고갯길이다.

▲ 이화령 고개를 이곳에서는 이우릿재로 불러왔으며,
옛 문헌을 보면 이화령은 이화현(伊火峴), 이화이현(伊火伊峴)으로 적고 있다.
1400년대에 작성된 고려사지리지에서부터 조선말까지 전하는 옛 기록물에는
계속해서 이화현이나 이화이현으로 남아 있는데 일제때 신작로가 나면서
일본식 지명으로 이화령이란 엉뚱한 이름이 지금은 터를 잡고
사람들의 입속에 굳어져 가고 있다.
문경지방에는 지난날 “새재로 갈까, 이우리로 갈까”하는 노랫말이 있었다.
길이 험해 혹 산짐승의 피해라도 입을까,
이우리재는 이처럼 “함께 어울려 넘는 고개”라 해서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닌가 싶다.
▲ 일제시대 이화령 신작로 부역에 참가했던 이곳 노인들은
일대에 돌배나무가 있어 봄이면 배꽃이 피기는 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지금 이화령, 이우릿재로 불리는 조선시대의 이화현은
언제 이 길이 개척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새재보다
오히려 더 오래 되었을 지도 모른다.
관음리쪽의 계립령이 주통로로
이용될 당시 이쪽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든 통행로가 있었을 것이고,
또 각서리에 요광원이라는 숙박시설이 있었던 것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 이화령에서 바라본 충북 괴산군..발아래로는 1994년 12월에 개통한 이화령 터널이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에는서북청년단이 주축이 된 88부대가 길을 새로 닦았다고 하며,
이후 2차선 아스팔트 포장이 되면서 우리나라 남북을 연결하는 국도 3호선으로
큰 역할을 해왔는데 최근 이화령터널 개통으로 이 길의 쓰임새는 줄고 있으나
드라이브코스로 옛 추억을 더듬어 이 고갯길을 넘는 차들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온다.
▲ 10시 20분 : 이화령 야생동물 이동 통로를 지나오면..
▲ 북쪽의 조령산 산행 들머리에는쉼터인 파고라와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 남쪽의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백화산 들머리로 오른다.
▲ 백두대간 능선에 오르고..
▲ 대간에 들어서니 소백산 칼바람과 맞먹는
강한 바람이 나무사이로 내달리는 음산한 소리에 옷깃은 여며지고 발걸음은 더욱 바빠진다.
▲ 백두대간길이긴 하지만..가장 특징이 없는 구간이다.
▲ 같은 백두대간상의 구만봉이 건너다 보인다.
▲ 특징없고 볼거리없는 대간길은 이어지고..
▲ 11시 18분 : 조봉.
▲ 이곳 산들이 새와 관련된 이름이 많다.
조봉, 조령, 조령산. 황학산..
아마도 태백준령을 가로막은 험준한 산맥을 새들의 날개짓이 아니면
넘나들기가 힘들어 새들도 쉬어 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 문경쪽 주흘산.
▲ 주흘산과 부봉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 12시 11분 : 황학산.
▲ 겨울산에 다니다 보면..
나무의 밑둥치 부근에는 눈이 적은 것을 볼수 있다. 이유가 뭘까..
▲ 엄청난 적설량.
3단 스틱이 한단만 보이는걸 보면 적어도 7~80센치의 두께일 것이다..
▲ 13시 00분 : 하산지점인 마원리 하산길..
아쉽지만..백화산은 9년전에 올랐던 기억으로 위안을 하고 하산길로 접어든다.
▲ 많이 다닌것 같지는 않으나 누군가 선답자의 족적을 따라 내려간다.
▲ 역시나 산은 멀리서 보라 했던가.
문경의 대표산인 주흘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 중부내륙고속도로의 높은 교각..
▲ 마원리 전경.
▲ 14시 37분 : 마원리 회관 산행 완료.
▲ 시원한 명태국에 소주 한잔으로 얼었던 몸을 녹이고,,
▲ 뫼가람회장님의 건배,,
▲ 무사하산을 자축하는 건배사를 마치고...
유서깊은 마원리의 천주교 박해현장을 돌아본다,
▲ 마원성지를 지키는 성모 마리아상.
경북 문경시 문경읍 마원1리에 위치한 마원성지는
병인박해 당시 목숨을 잃은 박상근 마티아 등 40여명의 순교자들이 살았던 신앙의 터이다.
▲ 마원리.
마원은 본래 조선시대 마포원(馬包院)이 있었던 터라
'마포원','마원' 또는 '마판'이라고 불린 이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신동면 무어리 일부를 병합해 '마원리'라 하고 문경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마원에는 일찍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역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새재를 넘어 모여 들면서 복음이 전해지지 시작했다.
한실, 문경, 여우목, 건학 등과 함께 마원은 교우들이
화전을 일구어 모여 살았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 마을의 역사를 안고있는 느티나무를 지나서..마을로 들어서면,,
▲ 농사가 천하지대본이었던 농경사회의 산물인,,,마원리 토속신앙의 상징물,, 양근석.
▲ 마원성지로 가는길의 멋진 노송.
▲ 마원 성지.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는 문경 토박이로서 아전(하급관리)이었다.
아마도 신유박해(1801년)이후 이 지방으로 숨어든 충청도 신자들과
접촉을 하게 되면서 지방인으로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입교하게 되었을 것이다.
깔레강 신부의 전교 기록에 보면 문경에서 가까운 백화산(1063.5m) 넘어
중턱 허리에 자리잡은 한실에 교우집이 서너집 무리지어 산재하고 있었다
하는데 이 곳 교우들의 영향으로 자형(예비자)와 숙모 홍마리아 등 이
집안이 천주교를 믿게 된 것 같다.
▲ 1866년 병인박해 봄 깔레 강신부의 전례기록에 나타난 박 마티아는 신앙심이 대단히 강했다.
이 지방에 와서 전교하시던 깔레 강신부님을 자기 집에 은신시켜드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죽음을
각오한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친구를 통해 신부님의 신변의 위협을 전해 듣고는 새벽에
신부님을 피신시켜 드리기 위해 생전에 겪어 보지 못한 고생을 감내 했다.
<깔레 강신부>
경북의 사도 깔레(CALAIS) 강신부(1833-1884)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1860년 7월 5일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4월 7일 한국에 입국, 1866년까지 5년 동안 경상도의 서부지역에서 전교활동을
벌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여러 차례 위험을 넘기고 산속에 피신해 있다가
이해 10월 페롱(Feron,권)신부와 함께 한국을 탈출, 중국으로 피신하였고,
이듬해부터 여러번 한국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병인박해때 얻은 병이 악화되어 부득이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1869년 4월 시토회 수도자가 되어 모벡(Maubec) 수도원에서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일생을 마쳤다.
▲ 익숙치 않은 험한 산길에서 넘어지고 허기와 갈증을 느껴야 했다.
그러면서도 돌아 갈 것을 명령하는 신부님을 뒤로하고 돌아 설 수 없어
신부님과 함께 죽겠다고 대답하는 모습 속에서 비장한 순교의 의지를 역역히 읽을 수 있다.
백화산 산중에서 이별 장면은 눈물겹다.
<깔레 강 신부님의 선교 체험기 중에서.....>
“한실 윗산까지 가려면 이제 20리 정도 남은 것 같소.
나 혼자서도 거기까지 갈 수 있을 것이오.
마티아는 너무 지쳤으니 이 근처 마을로 내려가 먹을 것을 얻도록 하시오.”
“아니, 신부님! 어떻게 신부님도 잘 모르시는 이 산속에
신부님만 혼자 가시도록 둘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한실도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폐허가 되었다면
신부님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
신부님이 가시는 곳이면 저도 가겠습니다.
신부님이 이 깊은 산속에서 돌아 가신다면
저도 같이 죽겠습니다.”라고 마티아는 대답하였다.
이처럼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게 되자,
지쳐 쓰러질 지경에 이른 마티아를 더 이상 고생하도록 내 버려 둘 수 없었던 강신부님은
본 마음과는 달리 준엄한 명령조로 마티아에게 말했다.
“마티아 나는 당신에게 명령합니다.
당신이 가져온 마른 과일의 반은 당신이 가져가고 나머지 반은 내게 넘겨 주시오.
그리고 내 말에 복종하시오!” 이 말을 듣자 마티아는 통곡하면서 강신부님을 쳐다 보았다.
그러자 강 신부님도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서로 굳은 악수를 나눈 뒤 두 사람은 서로 헤어졌다. 강신부는
산길을 계속 갔지만, 마티아는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강신부를 울며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짧은 기록이지만 이 기록속에 나타난 박 마티아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훌륭한 신앙인이었다.
▲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묘.
순교자 박 마티아는 깔레 신부님과 이별의 한을 품고 숨어지내다가 1866년 겨울 체포되었다.
마티아는 아전이었기에 문경현감과 친분이 두터워서
현감은 마티아에게 신앙을 버리면 묵인해 줄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현감의 간곡한 권유도 마다하고 상주목으로 이송되어 순교했다.
때는 1866년 12월 21일 나이 서른에 장한 순교의 월계관을 쓴 것이다.
(마원성지 박상근 마티아 순교비에서)
▲ 박해의 회오리가 불어온 것은 1866년 병인년의 일이다.
서슬 퍼런 탄압은 새재를 넘어 이곳 마원에까지 들이 닥치게 되었고
이 때 마을의 교우 40여 명이 충주,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했다.
순교한 박 마티아 시신은 그 가족들이 수습하여 고향에 안장하였는데
1983년 초 안동교구 김욱태 레오 신부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 마원성지를 내려오며..
▲ 역사의 현장을 고스란히 지켜 보았을 노송의 굵고 투박한 껍질에 귀를 살며시 대어 본다.
어느 종교를 초월하여..성현의 말씀이 이땅에 전해지기 위해서는
세상이 주는 안락함을 거부하고 참 진리를 선택하였던
이름 모를 수많은 순교자들,,,그분들의 엄청난 고통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이땅에 진리의 꽃을 활짝 피울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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