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08일(수).

지천지 낙화담 : 경북 칠곡군.

 

산행코스 : 지천지둘레길주차장-발암산 낙화정-출렁다리-거점센터-지천지 주차장트레킹종료.

산행시작 : 지천지둘레길주차장   12시 05분.

산행종료 : 지천지둘레길주차장   13시 34분.

전체거리 : 약 3.13km.

전체시간 : 01시간 29분.

운동시간 : 01시간 27분.

휴식시간 : 00시간 02분.

 

12 : 05  지천지둘레길주차장 출발.

12 : 27  낙화정.

13 : 16  출렁다리.

13 : 22  거점센터.

13 : 34  지천지둘레길주차장 트레킹종료.

 

 12시 05분 : 경북 칠곡군 지천지 도착.

"지천저수지"는 지천면 창평리 남부와 달서리 남동부에 걸쳐 있는 저수지로.. 신동지 또는 낙화담이라고도 불린다.

 

▲ 핀스파크 지천점.

저수지 수면을 임대하여 수상 레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는 웨이크보드, 수상스키, 바나나보트 등 각종 수상 레포츠 시설과수상 시소, 수상 암벽, 수상 징검다리 등

어린이들도 즐길 수 있는 물놀이 기구가 있다. 여름철 수상레저를 즐기는 곳이라고 한다.

 

▲ 제방끝자락에 봉긋하게 솟은 봉우리가 발암산이고 낙화담 절벽이다.

 

▲ 시계방향으로 다녀오고자 한다.

 

▲ 쌍열각 복사비.

 

▲ 트레킹을 마치고 쌍열각을 찾아보고자 한다.

 

▲ 제방둑에 무엇을 심었기에.. 태극기와 새마을기로 경계선을 만들어 놓았다. 국가 상징물이라도 되는가?...

 

▲ 둑에서 보니 지천지가 생각보다 엄청 넓고 크다.

 

▲ 제방 끝지점까지 오니.. 낙화정 올라가는 길이 두갈래다.. 마을을 경유하여 올라가는길과 데크길을 따라 가는 길이 있다.

 

▲ 데크를 따라 오르기 위해 가까이 가보니 곽씨부인의 딸이.. 왜군을 피해 순절하였다는 낙화담 바위다.

 

▲ 낙화담 바위 절벽아래 낙석방지용 철책그물이 쳐저 있다..

 

▲ 낙화담의 암석은 전북 진안의 마이산 암석처럼 모래와 진흙으로 이루어진 퇴적층에 자갈이 박혀있는 역암이다.

 

▲ 타포니 현상으로 움푹 파인곳에 무속인들이 켜놓은 촛농이 녹아 내려 보기에도 흉하다.

 

▲ 안쪽을 보니 촛불연기로 새까맣게 그을려 있다.

 

▲ 절벽의 경사가 급하고 좁은 공간에 겨우 한사람이 지나갈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 기둥의 기초를 튼튼하게 했겠지만.. 워낙 급한 경사라 지나가기가 조심스럽다.

 

▲ 데크를 올라서면.. 건너편에 농공단지가 보이고..

 

▲ 오른쪽은 경부고속철도가 지나가고..

 

▲ 좌측으로는 발암산 낙화정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 배수로를 건너면..

 

▲ 안양사라는 절(?)인데.. 내가 보기에는 무속인들의 거처인듯 하다..

 

▲ 안쪽에 한채가 더있다.. 사람의 기척은 전혀 없다..

 

12시 27분 : 발암산 정상의 낙화정.

 

▲ 지역 주민들이 가끔씩 찾는 듯...

 

▲ 지천지 상류쪽으로 황학지맥이 열을 지어 달려 간다.

황학지맥(黃鶴枝脈)은... 보현지맥 석심산에서 분기하여 상주시 중동면 낙동강으로 벋어 내리던 팔공지맥이 가산에서

가지를 쳐 오계산.. 백운산.. 황학산.. 소학산.. 자봉산.. 장원봉..용산..마천산..죽곡산..을 거쳐 금호강 대구 달성군 다사읍

강정보에서 맥을 다하는 41.1km의 산줄기다.

 

▲ 낙화정 바로 아래의 절벽끝.. 이곳이 곽씨부인과 딸이 투신한곳이 아닐까 생각하며... 왔던길을 되돌아서 내려 간다.

 

▲ 마침 고속철 KTX가 지나간다.

 

▲ 다시 데크는 지천지 물가로 내려간다.

 

▲ 고속철 밑으로 지천지와 신리마을을 잇는 통로가 나온다.

 

▲ 무속인들이 굿을 할때 촛불을 켜는 곳인듯.. 지금도 가끔씩 행사를 하는지 쓰지 않은 초가 줄을 서있다.

 

▲ 고속철 출입방지 철망과 지천지 사이가 협소한데도.. 둘레길을 만들었다... 그래서 길은 만들면 길이 된다.

 

▲ 대구 수성못의 3배쯤은 되어 보인다.

 

▲ 조그만 언덕위에 태극무늬가 새겨진 기준점..

 

▲ 낙화담에서 출렁다리까지 거의 중간지점이 되는 곳에..

 

▲ 두번째 고속철 아래 통로가 나오고..

 

▲ 등로를 살짝 벗어나서 조망이 트일것 같은 물가로 나가니..

 

▲ 여기도 무속인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행사때 마다 와서 사용하는듯 하다.

 

▲ 여기에는 초향을 켜는 곳이 세군데나 있다.

 

▲ 다시 등로로 돌아가니.. 여기서부터는 지천지와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하여 철로터널 위쪽으로 이어진다.

 

▲ 마을 뒷산과 이어지는 신2리방면의 이정표.. 여기에 다시 온다면 마을 뒷산과 연계하면 좋을것 같다.

 

▲ 안내도에 징검다리 표시가 있더니...ㅎㅎ 이것이 징검다리다..

 

13시 16분 : 출렁다리..

 

▲ 지천지 건너 처음에 올라갔던 낙화담 봉긋 솟았다. 산세가 바라처럼 생겼다고 해서 발암산 혹은 바래덤으로 불린다.

 

▲ 거점센터.

낙화담 저수지 주변에 대한 산재해 있는 자원 개발 및 거점센터 다목적 주차장 등생활기반시설 및 낙화담 둘레길 및 

생태공원 경관개선을 통한 쾌적한 환경조성으로 지역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정주여건을 충족해 낙화담 창조적 마을을

만들었다고 한다

 

▲ 야외무대도 있고.. 거점센터에서 캠핑장.. 로컬푸드 매장.. 커피트럭.. 심야영화관.. 승마체험장 등 여러 시설들이 

갖추어져있고..주차장.. 세면장.. 사워실.. 화장실.. 관리동 등 편의시설도 잘 되어 있다.

 

▲ 솟대위의 흰구름도 봉황이 날아 가는것 같다.

 

▲ 다시 돌아온 핀스파크..

 

▲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심천리에 있다는 쌍열각을 찾아 가는길에.. 들린 사양서당강당의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볼수는

없고 담장너머에서 본당만 담아 보았다.

정구(鄭逑,1543~1620)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字)는 도가(道可)이고, 호(號)는 한강(寒岡)이며, 시호(諡號)는 문목(文穆)

이다.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 했다고 하며,1563년에 이황(李滉)을, 1566년

에 조식(曺植)을 찾아 뵙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성리학(性理學)을 배웠고, 1573년(선조 6) 김우옹(金宇顒)이 추천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됐으나 나가지 않는 등 여러 번 관직에 임명 되어도 사양 하다가,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 했으며,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 강원도관찰사.. 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전체적으로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의 수령으로 더 많이 활약 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당대의 대학자요, 명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 같은 마을 사양서당과 인접한 경수당으로 가니 역시나 대문은 굳게 잠겨있고.. 문화재 보수팀들이 보수를 하고 있다.

 

▲ 심천리 마을 입구를 지나가는데.. 절벽위에 "신동입석"이라는 글자가 보여서 찾아가 본다.

 

▲ 풍월문..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에 위치한 유적지로.. 풍월문은 혜사정이라 불리며 신동입석과 함게 칠곡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재 중의 하나다.. 독립운동가인 혜사(慧社) 강원형(姜遠馨)을 추모하는 재실로 1956년 건립하였다.

강원형은 본관이 진주이고 자는 성윤(聖允)이다. 1862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 시독을 지냈다...

 

▲ 풍월문 담장 넘어로 본 고택...

 

▲ 풍월문 담장을 따라 뒤로 돌아가면..

 

▲ 신동입석 위로 흩어지는 하얀구름과 파란 하늘.. 선사시대의 하늘도 저러했으리라...

 

▲ 쌍열각(경북 칠곡군 지천면 심천리 산 58-3)..

심천2리에서 동네분들에게 "쌍열각"을 물으니.. 아무도 모른다.. "오래된 비각"을 찾는다고 하니 아주머니 한분이 대뜸..

알아 들어시고는 친절하게 위치를 가르쳐 주신 덕분에 겨우 찾아 왔다.

 

쌍열각(雙烈閣)... 처음에는 "웃갓"에 세웠으나 후손들이 이곳 심천으로 옮겨 쌍열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임진왜란때 권관 이심옥의 부인 열부 현풍 곽(烈婦 玄風郭) 씨와 딸인 망우당 곽재우(望憂堂 郭再祐)의 오형제중 다섯째인

계공랑 곽재기(啓功郞 郭再祺)의 부인 광주 이씨 모녀의 순절이 조정에 알려져 왕명(인조20년 1642년)으로 정려 (旌閭)

내려졌다.

 

쌍열비(雙烈碑)는..

권관 이심옥의 처 열부 현풍 곽씨와.. 계공랑 곽재기(啓功郞 郭再祺)의 처 광주이씨 모녀의 정절을 기리기 위한 쌍열비다.

참고로...이 비는 1642년 응교 이도장 공(李道長 公)의 글이다.

 

쌍열비문(雙烈碑文)..

광릉(廣陵)을 본(本)으로한 권관 이공(權官 李公)의 휘(諱)는 심옥(心玉)이요 그의 처(妻) 곽씨(郭氏)는 포산인(苞山士人) 

헌(憲)의 따님이다. 품성(稟性)이 단장(端莊)하고 몸가짐이 엄정(嚴正)하여 친척(親戚)이나 노복(奴僕)들도 그 얼굴보기가

드물었다. 만력임진지변(萬歷壬辰之變)에 여러 사람이 산중에 피(避)하던중 왜적(倭賊)에게 잡혀 왜적倭賊)이 칼을 빼어서

겁탈(劫奪)코져하니 곽(郭)씨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서 팔을 비틀어도 부동(不動)하고 머리와 얼굴을 칼로쳐도 부동(不動)

하고 허리와 등을 갈라도 역시 부동(不動)하니 이에 왜적(倭賊)이 죽은줄 알고 돌아가니 집안 여러사람들이 황급히

구원(救援)하니 십사일(十四日)만에 임종(臨終)하였다.

분하고 분하여 임종시(臨終時)에도 가족과 여러 사람들에게 그 얼굴을 보이지 않았으며 치료와 식음을 전폐(全廢)하였다.

이때 출가한 따님이 있었으니 현풍곽(玄風郭)씨의 곽재기선병(郭再祺先兵)에게 출가하였는데 피란후 일월이 지나

근친중(覲親中) 갑자기 왜적을 만나 피하지 못하고 급히 달아나 스스로 천길되는 발암밑의 물로 낙화같이 뛰어내려 죽음을

당하였다. 아마도 규문(閨門)의 예(禮)가 아니며 평일(平日)에도 그 갸륵한 유래(由來)를 듣지 않았으랴 위급(危急)함에

임(臨)하여 스스로 뜻 세우니 이와같이 높고 뛰어나구나 일의 전말을 예조(禮曺)에서 듣고 정려(旌閭)할것을 명(命)하니

그 아들 사의 원우(司議 元雨)씨가 돌을 세울것을 방표(傍表)하고 명(名)하여 쌍열비(雙烈碑)라 나에게 글을 청하니

탄식(歎息)하여 기(記)하노라 세상(世上)에 보기드문 정절(旌節)이요 일가의 밝은 빛이라 지금 오십(五十)여년이라

모든사람들이 분해하니 어제일과 같도다 내진실로 아노니 돌은 훼손되어도 그 이름은 멸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그 말을

믿지 않으리오.. 우리 권관공은 족손(族孫)관계인지라 그 숙행(叔行)의 아름다움은 부모형제 종족(宗族)에 드러난 일이라

친목(親睦) 뿐 아니라 사의(司議)의 청을 져버리지 못하여 감히 그 사이에 이름을 붙혀 고루(固陋)하여 어려우나 좌(左)에

글을 쓰노라.

통훈대부 전 행사간원사간 지제교 이도장 지(通訓大夫 前 行司諫院司諫 知製敎 李道長 識)

임오(壬午.. 一六四二年) 오월 일 입(五月 日 立).

 

화창한 가을햇살과..

적당한 따사로움과.. 바람이 좋은 한낮의 시골풍경..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곡식 말리기를 보며.. 훌쩍 떠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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