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5월 22일 : 전남 강진<가우도~석문공원~다산초당> 트레킹~

 

트레킹코스 : 저두출렁다리 - 가우마을 - 망호주차장 - 석문공원 

다산수련원 - 다산초당 백련사 - 다산수련원주차장.

트레킹시작 : 저두출렁다리 입구  10시 49분.

트레킹완료 : 다산수련원 주차장  16시 40분.

(5시간 51분 소요 : 점심 및 이동 휴식시간포함)

 

10 : 49  저두출렁다리입구 도착.

11 : 29  가우도 한옥마을.

12 : 33  망호 주차장(점심).

13 : 10  망호주차장 출발.

13 : 22  석문공원 주차장 도착.

14 : 20  석문공원 주차장 출발.

14 : 21  다산수련원 도착.

14 : 51  다산초당 경유.

15 : 16  백련사 관람후 원점 회귀.

16 : 14  다산수련원 주차장 트레킹완료.

 

▲ 저두출렁다리 입구.

 



5월의 다섯째주..

 

가우도를 거쳐 석문산에서 다산의 유배길 트레킹을 가잔다..

다섯째라서 회원 모집 하기가 어렵다며 가잔다..

 

지난주에 가우도를 갔다 왔길래 망서리다가,,

내가 언제 가본산 안가본 곳 따지는 사람이던가..

모처럼의 부탁인데,,,

 

가자,,

좋은 사람들의 부탁과 함께..

 



 

▲ 지나온 저두출렁다리.

 



 

▲ 하마가 새끼 하마를 데리고,,

엉금엉금 바다로..

 



 

 

 

 

 

 

 

 

▲ 인동초(忍冬草),

 

종기,매독,임질,치질 등에 약재로 사용하며

민간에선 해독,이뇨, 미용작용이 있다고 하여 차나 술을 만들기도 한다.

 



 

▲ 가우도주민의 자가용..

 



 

 

▲ 망호선착장으로..

 



 

 

 

 

12시 33분 : 망호선착장.

 



 

 

 

 

 

 

 

 

▲ 인증샷 하나 없어서..

 



13시 22분 : 석문공원 도착.

 



 

▲ 석문정.

 



 

 

▲ 아래를 보니

여기에도 구름다리를 설치하고 있다. 

 

 

 

 

 

 

 

 

 

▲ 반대편은 석문산이고..

덕룡산 주작산으로 이어진다.

 

 

 

 

▲ 석위(石韋) : 바위옷.

고사리목 고란초과의 상록 여러해살이풀.

나무줄기와 바위면에 붙어서 자란다.

 

몇년전 부여 낙화암에 갔다가,,

처음 본 고란초와 비슷하다는 생각과

땅에서 잎이 바로 나오는게 신기해서 담아보았는데.

 

야생화를 사랑하시는 분이 보시고.. 댓글로

이름까지 가르쳐 주시고 비슷하게 생긴

<세뿔석위>까지 비교해서 가르쳐주시네요

감사합니다..  

 

 

 

 

 

▲ 다산수련원을 향해서..

 



14시 36분:  다산수련원.

 



 

▲ 두충나무숲길..

 

한때 농촌에서 약용나무가 돈이 된다 하여, 

너도나도 심었던 두충나무다,,

 



 

 

 

 

 

 

 

 

▲ 다산의 18 제자 중의 한사람인 <윤종진>의 묘.

 



▲ 뿌리의 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 정승호 --

 



▲ 다산초당.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

사적 제107호. 정약용이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윤규로의 이 초당으로 옮겨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한 곳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58년 지역민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무너진 초당을 복건하여

이 해 사적 제107호(정다산유적 丁茶山遺蹟)로 지정받았다.

건물은 도리단층기와집으로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하고 있다.

1970년, 1971년, 1975년에 보수공사를 하였다. 

 

 

 

▲ 정석.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며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만 따온것으로

군더더기없는 다산의 성품을 말해준다.

 

 

 

▲ 약천(藥泉).

 

다산이 차를 끓일때 사용했던

물이라고 한다.

 



▲ 연지 석가산.

 

연못가운데에 돌을 쌓아

산모양으로 만들어서 연지석가산이라 하였다. 

 



▲ 다산초당 현판.

추사의 글씨를 집자하였다고 한다.

 



▲ 다산 정약용. 

 

 

 

 

 

 

▲ 동암.

 



 

 

 

▲ 천일각(天一閣).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끝 한모퉁이"라는 뜻이다.

다산이 유배시절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중인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며 이 언덕에 올라 강진만을 바라보며

다산의 스산한 마음을 다스리던 곳이다..

 

지금의 건물은 1975년에 강진군에서

세운 건물이다.


 

 

▲ 백련사 가는길.

 

유배생활중의 벗이요,,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던

통로였다..




 

▲ 강진만.

 



▲ 백련사.

 



 

 

만덕산(408m)에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한다.

사찰의 창건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하였다.

사찰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라고 불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만덕사로 불렀다.

 

하지만 근래에 다시 이름을 고쳐 백련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불교를 숭상하였기에

원묘국사 요세(了世) 스님에 의해 사찰의 교세는 확장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억불정책으로 승려들은 천시되었고

백련사는 퇴보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남해안 일대는 고려청자와 곡창지대로 약탈을 목적으로

자주 출몰하는 왜구들에 의해 점점 폐사될 지경으로 내몰렸고

찰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1170년경 주지 원묘(圓妙)에 의해 중수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중수는 조선 세종 때인 1426년 주지 행호(行乎) 스님이

2차 중수를 하면서 백련사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1430년부터 대대적인 불사작업이 시작되었고 효령대군의 도움이 컷다.

효령대군은 왕위를 동생(세종)에게 양보하고 전국을 유람하면서

강진땅 백련사에 들어 8년 동안 기거하였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면서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 다시 다산 초당으로 돌아가는길의 차밭,,

 



 

▲ 해월루.

 



▲ 해월루에서 바라보는 강진만.

가우도가 보인다.

 

 

 

 

 

 

16시 14분 : 다산수련원 쉼터 주차장 트레킹 완료.

 

 

 

▲ 모내기를 하기위해 써레질이 한창이다,,

 

몇년전만 해도 <써레질>이라하여 머리빗처럼 생긴 농기구를 매단

황소에게,,, 이럇소!~~ 하면서 깊이패인 농부의 얼굴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씨름하던 모습은 농촌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고

기계음이 들판에 울려 퍼진지 오래다. 

 

 

 

 

▲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었던 땅..

 

유배지에서도 백성을 평안하게 다스리는 지침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집필하여

지방의 수령방백들의 간교함을 막으려 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네 민초들은 때가 되면 논밭 갈고

묵묵히 할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댁 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벼가 무럭무럭 자라서 풍년되어

햇반으로 지은 밥상에 가족들 모여 앉아

평안이 깃들기를 바라며

 

멀지만 뜻 깊었던

가우도~다산 유배길의

트레킹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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