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07일. 금정산 고당봉(801.5m) : 부산 금정구 금성동.

 

산행코스만덕고개(만덕1터널) - 남문 - 대륙봉 - 동문 - 원효봉 - 북문 -

          금정산(고당봉) - 금샘 - 북문 - 범어사 주차장 하산완료.

산행시작 : 만덕고개(만덕1터널) : 09시 53분 산행시작.

하산완료 : 범어사주차장 : 15시 00분(5시간 07분 소요 : 휴식시간포함)

 

09 : 53  만덕고개 들머리.

10 : 55  남문.

11 : 20  대륙봉.

11 : 40  동문.

13 : 08  원효봉.

13 : 20  북문.

13 : 44  금정산(고당봉) 정상.

13 : 59  금샘.

14 : 22  북문.

14 : 46  범어사.

15 : 00  범어사 주차장 산행 완료.

 

09시 53분 : 만덕터널위 만덕고개 도착.

우리의 애마는 선두종주팀을 내려놓고 범어사로 가고

 

 

▲ 선두종주팀들은 산대장의 구령에 맞추어 몸풀기를 하고..

 

 

▲ 산행안내도가 있는 곳으로 출발..

 

 

▲ 안내도를 보며 진행할 방향을 숙지한다.

 

 

▲ 첫번째 도로를 건너 이정표를 따라서..

 

 

 

▲ 형제 상봉의 감격을 음미하려는지..,,,산대장님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ㅋㅋㅋㅋㅋ~ 

금정산 산행을 위해 부산에 있는 동생에게 가이드를 부탁 하였단다..

 

 

▲ 만덕고개길..

멀리 좌측으로 파랗게 보이는 지점에서,,

 

 

▲ 겨울철 미끄럼 방지용 모래보관함에서 희미한 길을 따라서 2~3분 가량 치고 올라가면,,

능선길과 만난다. 약 30분 가량 단축되는것 같다.

 

 

▲ 10시 14분 : 잘 정비된 만덕고개 능선길과 만난다..

이길은 부산의 걷기좋은 둘레길로 조성된 <갈맷길>21구간중에 10구간에 해당하는 금성산길이다.

 

 

▲ 석불사를 거쳐 상계봉으로 가는 갈림길.

 

 

▲ 남문과 대륙봉 갈림길.. 

왼쪽은 남문으로가는 비교적 편안한길이고 오른쪽길은 가파른 능선길이다.

두길은 서로 만나게 되어 있기에 왼쪽의 편안한길을 따른다.

 

 

▲ 석불사.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조일현스님이 창건. 작은 사진은 2012년 4월 29일에 갔을때 찍은 사진으로

천연암벽사이에 노천법당을 만들고 깍아지른 석벽에 다양한 불상을 새겨 놓았다.

 

 

▲ 잘 가꾸어진 금정산 편백나무숲이 새로운 힐링 장소로 주목을 받고 있다.

 

 

▲ 만덕고개길 유래. 

이 고개는 일명 만등작, 만등재, 만덕재, 동래곡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상학산에서 백양산으로 이어지는 낮은 능선에 속하는 만덕고개는 장타령에도 그 사연이 나오고 있다.

<꾸벅 꾸벅 구포장 허리가 아파 못 보고>,<고개 너머 동래장 다리가 아파 못 보고>... 

이처럼 옛날 구포 강변 쪽에서 동래로 가기 위해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고갯길이 워낙 가파르고 비탈져서 다리가 아프다는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고갯길이 하도 험하니까 도적들이 끓어 장꾼들의 물품을 털어갔다.

구포장에서 장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 고개 아래 만덕사 절터가 있는 곳에서 많이 모였다가

떼를 지어 넘어가던 고개로 만등고개라고 했다.,,라는 유래가 있다.

 

 

▲ 남문 마을.

 

 

▲ 10시 46분 : 휴정암 삼거리..

여기서 남문쪽으로 향한다.

 

 

▲ 왼쪽은 방금 올라온 남문마을 가는길이고 오른쪽길이 남문으로 가는 길이다.

 

 

▲ 남문마을 하얀집.

차가 주차된걸 보면 차도가 있는가 보다.

 

 

▲ 10시 55분 : 남문(사적215호). 새로 개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 남문 인증샷.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산성으로 금정산에 언제 처음으로 성을 수축하였는지 문헌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조선 숙종(肅宗) 29년에 국방에 대한 새로운 인식속에서

해상을 방어할 목적으로 축성된 것이다. 

성은 내.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성벽은 자연석으로 쌓았지만 중요한 부분은 가공한 무사석으로 쌓았으며

성의 길이는 17,336m이고 , 산성의 높이는 1.5m~3m정도이며 성의 총 면적은 약 2,512,000평에

동,서,남,북의 네 성문을 둔 방대한 산성이었다.

 

 

▲ 역시나 든든한 소나무의 특공대 들이다..

 

 

 

 

▲ 대륙봉 평평바위..

 

 

▲ 11시 20분 : 대륙봉.

 

 

▲ 대륙봉에서 좌측으로 바라본 <파리봉>과 <상계봉> 능선..

 

 

▲ 당겨본 파리봉..

바위 사이를 헤집고 올라가는 구간에 데크 계단이 보인다. 

파리봉이라니까..ㅋㅋㅋㅋㅋ~~ X꼬 + 파리 = (X파리),,,가 아니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 파리봉의 파리(玻璃)는 불교의 일곱가지 보물금, 은, 산호, 마노(석영), 거저(바닷조개 ),

파리(수정), 진주 인데.. 산정의 바위 생김새가 마치 코끼리가 낙동강 물을 들이키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산봉우리를 불명으로 <파리봉>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 우측으로는 부산 금정구의 장전동이 내려다 보이고.

멀리 광안대교쪽과 펑퍼짐하게 보이는 산이 <장산>이다.

 

 

▲ 당겨본 광안대교쪽.

 

 

▲ 대륙봉 기암.

 

 

11시 32분 : 산성마을 길..

대륙봉 정상에서 약12분 가량 소요.

 

 

 

▲ 산성마을 가는길..

금정산의 품에 안긴 듯한 산속의 마을 금성동(일명 : 산성마을)

이곳 금성동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하는 구전에 의하면

옛날에 국(鞠)씨와 두(杜)씨 성씨를 가진 두 가족이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이곳의 전 마을사람들이 왜군에 납치되어 가서,한동안 마을이 텅 비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양산 철마에 살던 장사(壯士)인 김해김씨가 이주해 오면서다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누룩생산이 유명했으며, 물맛 또한 유명하였다 한다.동래부사가 한 모금의 산성물을 마시기 위하여

자주 이곳 금정산성마을을 찾았다고 한다.부사가 즐겨 마시던 샘물은 1960년까지만 해도 동문을 들어서서 40m 되는

지점에 있었다. 지금은 매워지고 없어졌으나 그 자리는조그마한 웅덩이가 되어 물이 고여 있다.

산성토산주는 조선시대 산성주변에 살던 화전민들인 국(鞠)씨와 두(杜)씨가 이 마을에서 처음 술을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산성토산주의 역사는누룩을 만들어 생계로 삼아 온데서 유래한 것으로족히

 

450여 년은 된다고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고유의 맛을 지닌 이 막걸리가 더욱 알려져,

금정산성에서 누룩을 많이 만들고 적게 만드는 차이에 따라

부산. 동래지방과 경남 일원의 쌀값이 올랐다 내렸다 할 정도였다고 한다.

 

 

▲ 잘 정비된 산성과 기분좋은 갈맷길을 따라..6~7분가량 걸어면,,

 

 

11시 38분 : 동문(사적215호).

과거 동래읍성에서 가장 근접하기 쉬운 으뜸관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1807년(순조7년) 늦가을에 토목공사를 일으켜 한달만에 동문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 동문은 홍예식문(虹霓式門 : 무지개 형태의 문) 형태로 넓이는 300Cm, 높이는 340Cm로 

동래부사 정현덕(1867 ~ 1874)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쓸때 이야기,,

그는 두 성문을 아주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한 끝에

사제지간인 두 석공을 찾아 스승에게는 동문을, 제자에게는 서문을 짓게 하였다.

동문을 맡은 스승은 야욕과 욕심이 많아 웅대하게만 짓고자 하였으나

 서문을 맡은 제자는 기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려 스승보다 먼저 짓게 되었다고 한다.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제는 동문과 서문 공사가 끝난 뒤에는

힘을 합쳐 밀양 영남루 공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동문을 뒤로 하고..

 

 

▲ 갈맷길 인증대.

걷기대회라든지 각종 행사를 할때 인증 스탬프를 찍는 곳이다. 

 

 

▲ 동문에서 금정산 최고봉인 고당봉으로 올라가는 기분좋은 갈맷길..

 

 

▲ 산악 자전거를 즐기는 젊은이들,,,

금정산의 주능선인 북문에서 서문까지의 산성길은 산세가 전체적으로 경사가 완만하여

걷기대회 및 산악 자전거를 즐기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 금정산에는 예로부터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며 지금도 곳곳에 샘터가 있다.

 

 

 

▲ 낙동강 화명대교가 그림이다.

 

 

▲ 싸이클 동호인들의 인증샷에

산대장이 젊은이들의 넘치는 에너지가 좋아서인지..넉살좋게 끼어들어 함께 인증샷,,

 

 

▲ 가야할 금정산 고당봉 오름길.

 

 

▲ 고려청자를 빚어낸 천년 신비의 비치색 하늘에 마지막잎새가 바람에 바스락거리며 자연의 노래를 부른다.

저 마지막잎새가 다 떨어지고 노래소리가 멎는날 우리의 산하는 하얀 겨울의 설국이 될것이다.

 

 

▲ 기암에 홀로선 소나무..

 

 

 

▲ 의상봉과 원효봉이 지척이다.

 

 

성벽을 타고 완만한 오르막위로 제4망루와 그 뒤로 의상봉의 암봉

그리고 의상봉 바로 옆으로 무명암봉 하나가 한눈에 들어 오는 참으로 멋진 풍경을 만들고 있다.

그 멋진 그림에 걸음을 잠시 멈추고 한동안 서서 바라보며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가 않다.

 

 

▲ 여기가 <김유신 솔바위>일까?..

 

 

 

바위위의 멋진 천년송.

부산항의 차가운 바닷바람을 이겨내기위해 스스로 몸을 낮추어 바위와 잘 어울린다.

 

 

▲ 부채바위.

 

 

▲ 당겨본 부채바위(일명,수리덤).

독수리가 웅크리고 먹잇감을 기다리다가 그대로 굳어 바위가 되어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 의상봉과 무명바위.

 

 

▲ 당겨본 무명바위.

 

 

 

 

▲ 낙동강 하구언쪽.. 

오름길에서의 헐떡이는 숨을 고르기 위해 쉼터 바위에 올라서면,,

발아래 세상은 너무나 작아 보인다.

그 작게만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내품에 아우러는 넉넉함을 배우고자 한다.

산을 통해 배우려 한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하다..

내 가슴의 크기가..

 

 

12시 24분 : 제4 망루.

 

 

 

 

 

▲ 무명바위..

 

 

12시 29분 : 의상봉.

 

 

 

▲ 원효봉 오름길..

 

 

▲ 미륵봉 아래 미륵사..

금정산의 미륵사는 삼국시대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해에 원효대사가 세운 절이다.

당시 원효대사가 이곳의 미륵암에 주석하면서 미륵삼일부경의 일부를 썻다고 전한다.

또한 원효대사는 이곳에서 호리병 5개를 구하여 왜구 5만명을 거뜬히 물리쳤다는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원효대사께서는 당시 장군기를 꽂았다는 바위구멍이 독성각 옆에 남아 있다.

미륵사 염화전 뒷편의 거대한 바위가 스님이 좌선하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좌선바위라 불리우고 있다.

바위는 여러개의 바위들이 한데 어울려 있는데 해가지고 난 뒤 바위와 바위 사이의 금이 보이지 않게 될 때

바위 전체를 보면 그 형상이 분명히 드러 난다고 전한다,

좌선바위 뒷편에는 미륵불과 닮은 미륵불을 향해 좌선을 하고있는 형상의

절묘한 터에 원효대사가 기도도량을 세워 미륵사 라는 이름이 유래 되었다고 전한다.

원효대사는 왜적 5만 병선이 동래 앞바다에 진을치고 첩자를 뭍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폈다고 한다.

사미승에게 호리병 5개를 구해오게 하여 탑앞에 나란히 세운뒤 가장 높은 바위에 신라 장군기를 꽂았는데

그 장군기를 보고 2명의 첩자가 미륵암까지 올라 왔다고 한다. 

원효대사는 호리병으로 신술을 부려 쳡자의 목을 조르자첩자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호리병을 단칼에

내리치는 순간 그는 그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한다,

그러자 왜적들은 모두놀라 그대로 달아 났다고 전한다. 그때 원효대사가 신라의 장군기를 꽂았다는 바위는

지금도 독성각 옆에 움푹 패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 혹시 여기가 김유신이 수도했다는 바위일까.. 

김유신 장군이 원효봉에서 낭도들을 훈련시킬 때 바위에서 부동자세로 오래 서 있어서 선 채로 소변을

보았는데 어느 낭도가 그 자리에 소나무 한그루를 심었다. 

이 땅달보 소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을 이겨내고 그 푸르름을 뽐내고 있어 김유신 솔바위라 불렸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는 설명이다.

 

 

 

13시 09분 : 원효봉. 

원효봉은 금정산 동쪽 가장 높은 봉우리로 먼저 어둠을 헤치고

동해에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갓 피어난 매화처럼 화려한 자태의 빛깔로 수놓아

으뜸의 새벽 원효봉(678봉)이라 불렸다.

금정산성 제4망루 위쪽에 자리잡고 있어 동해 망망대해를

한눈에 바라보는 전망대 역활을 하고 있는 봉우리이다.

 

 

▲ 고당봉을 향하여..

 

 

▲ 고당봉을 당겨보니,, 수많은 산객이 보인다. 까치가 한가롭다.

 

 

▲ 북문으로 내려가는 방향으로

억새초원을 자랑하는 <장군봉>이 우뚝 드러나 있다.

 

 

▲ 금정구 장전동과 회동저수지.

 

 

13시 20분 : 북문,

 

 

금성산성은 조선시대의 석성이다.

숙종 29년(1703) 경상감사 조태동이 석성으로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증보문헌비고와 동래읍지에 나온다.

그 이전의 기록에도 금정산성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처음 성을 쌓은 시기는 한참 앞서는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파괴하였으나 1972년과 1989년에 복원하였다.

금정산성의 총 길이는 17km에 이르며 동서남북 네 개의 성문을 둔 방대한 산성이었다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있는데 현재는 4km의 성벽이 남아 있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동래, 양산, 기장의 세 읍에 소속된

군사와 승려들이 차출되어 수비하도록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에 해상방어를 목적으로

쌓았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 세심정.

 

 

▲ 고당봉 가는길에 성벽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이왕 공사하시는 손길에 장인정신을 담아 천년만년 허물어지지 않게 튼튼하게 쌓아 달라고 하면 욕심일까..

 

 

▲ 정비중인 등산로..

 

 

▲ 고당봉 오름길에 내려다본 북문,

 

 

▲ 불과 2년전인 2012년 12월 23일에 오를때는 밧줄을 잡고 올랐는데..

어느새 데크 계단으로 깨끗하게 정비 되었다.

 

 

▲ 다시 북문을 내려다 보니.. 불현듯 이런생각이 든다..

중국 만리장성처럼 스케일 크게 축조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 고모당.

 

 

▲ 고모당 내부,, 

고당봉 정상의 고모당에는 오른쪽에 고모영신(姑母靈神 ; 고당할미)위패를,,

왼쪽에는 산왕대신(山王大神 : 금정산 호랑이) 위패를 모셨다.

여기에는 평생을 불심으로 살다간 밀양 박씨 <화주보살>의 얘기가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에 밀양 사람인 박씨가 결혼에 실패하고

불가(佛家)에 귀의,,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된 <범어사>에서

<화주보살>이 되어 사찰의 살림을 꾸려 가는데에 신명을 바쳤다. 

어느덧 나이가 많아 보살은 큰 스님에게

"제가 죽은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에 고모영신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고당재(姑堂齋)를 지내주면 높은 곳에서 수호신이 되어

범어사를 돕겠습니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큰스님은 그 유언대로 고당봉에 산신각을 지어

해마다 단오날에 제사를 지냈더니

과연 <범어사>가 번창한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 아직도 고당봉 정상석 쟁탈전이 치열하다.

 

 

▲ 잠깐 자리교체하는 사이에.. 정상석만 얼른 담아본다.

 

 

▲ 금샘쪽으로 하산한다.

 

 

▲ 멋지게 설계된 회전계단.

 

 

▲ 2년전에 하산하였던 물금 방향..

 

 

▲ 금샘 가는길..

 

 

 

▲ 서울 북한산 비봉 능선의 사모바위와 닮았다.

 

 

▲ <금샘>을 찾아가는 바위길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ㅎㅎㅎ~요상하고도 급작스런 추억 한토막의 발생 현장이다.. 

생각없이 바위를 돌아가는데 50대 초반정도의 아줌씨 두사람이 하이얀 방댕이를 열고(?),,

쏴!~~하는 폭포수 소리에 아줌씨들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이런 민망할데가..ㅎㅎㅎ~ 

 메롱

 아짐씨들,,후다닥,, 줄행랑이다,,

 

 

 ▲ 바위샘..

 

 

▲ 또다른 바위샘..

 

 

 

 

 

 

13시 59분 : 금샘(암상금정). 

<세종실록지리지>에 금정산에 대한 기록이 있다.

‘금정산 바위샘(金井)은 동래현 서북쪽에 있다.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 척이며, 높이는 7척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며, 그 아래에 범어사가 있다.

 

<금샘>과 <범어사> 설화

 

 

세상에 전해오기를 한 마리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범천, 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하여

금정이라는 산 이름을 지었다’

 

금샘설화는 부산의 진산 금정산이

예부터 신령스러운 영산임을 알려주는것과 함께

금정산이란 산 이름과 범어사의 절 이름 그리고 이 사찰의 창건 내력을

알려주는 것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설화는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금정산 산정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황금색 물이 항상 가득차 있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고 하여

금빛나는 우물 금정이란 산 이름과

범천의 고기 곧 범어라는 절 이름을 지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범어사 창건 자적과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동해에 왜인들이 10만 병선을 이끌고 와서 신라를 침략하려고 했다.

대왕이 근심에 쌓여 있는데 꿈속에 신인이 나타나 의상스님과 함께

금정산 "금샘"에 가서 칠 일 동안 밤낮으로 기도하면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대왕이 의상스님과 함께 친히 금샘을 찾아가 기도를 하니

땅이 크게 요동하며 부처님과 천왕과 신중 그리고 문수동자 등이

현신하여 동해로 나가 왜적들을 격파했다.


대왕이 크게 기뻐하여 의상스님을 예공대사에 봉하고

금샘 아래 호국사찰을 세웠으니 곧 범어사이다.

 

 

범어사 창건사적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문무왕과 함께

금샘 아래에서 왜적침입을 막기 위해 칠일 밤낮을

일심으로 독경한 역사의 현장이다.


범어 3기중 1기인 금정암 위의 금빛나는 우물에

금어가 노니는 암상금정(岩上金井)이라 하였다.

 

 

▲ 범어 3기.

 

 

 

▲ 고당봉을 올려다보고 하산. 

 

 

▲ 고당샘.

 

 

 

 

 

▲ 범어사 대웅전.

 

 

 

▲ 보제루,, 

보제(普濟)란,,,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라는 의미다.

 

 

▲ 천왕문 안쪽에 불이문(不二門)이 보인다.

불이(不二)’란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의 다른 말이다.

즉 부처와 중생, 나와 남, 선과 악이 둘이 아니며,

나아가 생과 사도 둘이 아니라는 연기법(緣起法)의 진리를 말한다.

불이문을 다른 이름으로 해탈문이라고도 하는데,

누구나 이 문을 왕래하는 이들이 진리를 깨닫고

잊었던 본성을 되찾으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전각이다.

 

 

▲ 범어사 조계문(보물1461호).

이 건물을 세운 시기를 알 수는 없으나 조선 광해군 6년(1614)에

<묘전화상>이 절내 여러 건물을 고쳐 지을 때 함께 세운 것으로 추측한다.

정조 5년(1781)에 <백암선사>가 현재의 건물로 보수했다.

 

 

 

 

▲ 방치된(?) 야외유물..

 

 

 

▲ 범어사 조계문 인증샷,

 

 

 

 

 

 

15시 00분 : 범어사 주차장 하산완료.

 2014년의 12월 첫주의 마무리 산행,, 매월 첫주에만 맛보던

그 행복했던 1년간의 시간들을 내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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