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안내지도.

 

 

 

▲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光化門).

 

경복궁은,,,1395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하고

처음 지은 궁궐로 330여 동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정도전이 붙인 궁명 ‘경복(景福)’은

<시경>에 ‘임금이여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소서(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라는

구절에서 나온 이름으로 ‘덕으로써 영원한 복을 누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1867년 고종대에 중건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각의 90% 이상이 헐렸으나

1995년부터 꾸준한 복원사업을 벌여 고종 때 중건 모습의 30% 정도를 되찾았다.
 

 


 

▲ 흥례문(興禮門).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 있는 중문.1395년(태조 4년)에 완공하였고.

예를 편다는 의미의 홍례문(弘禮門)이라 했는데. 임진왜란때 불타,

1889년(고종 4년)에 중건하면서 고종의 아버지 <이하응>이

청나라 건릉제의 이름인 홍력(弘歷)에서 홍자를 피하기 위해

흥례문(興禮門)이라 고쳤다고 한다..

 

 

 

▲ 근정문.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이다.

근정문은 모두 3개인데 동쪽의 일화문으로는 문관신료들이 출입하고

서쪽의 월화문을 통해서는 무관신료들이,,,

가운데는 좀더 높게 만들어서 어도(御道)라고 해서임금님만 다닐수 있다.

근정문 안으로 근정전이 보인다.

 

 

 

▲ 근정전(勤政殿) 국보223호.

근정문을 지나면 만인지상의

임금님이 정사를 보시던 근정전이다.

 

근정전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태조 3년(1394)에 지었으며, 정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었는데,

처음 있던 건물에 비해 많이 변형하였다.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여진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그 형태가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다.

 건물의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훌륭한 솜씨로

12지신상을 비롯한 동물들을 조각해 놓았다.

 

건물 안쪽은 아래·위가 트인 통층으로 뒷편 가운데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가 있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병풍을 놓았고,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정승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햇빛을 가릴 때 사용하였던 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

근정문 좌우로는 복도 건물인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근정전은 조선 중기 이후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킨 왕궁의 위엄을 갖춘 웅장한 궁궐건축이다.

 

 

 

▲ 경복궁 근정전 용상.임금님만 앉으셨던 저 자리,,용상,,지금은 주인을 잃었다..

 

 

 

▲ 용상(어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고,, 그렇지만,, 그래도..감히,, 저 자리에 앉을수야 없겠지만.

이 사진을 보시는 분들..뒤편의 일월오악도의 십장생 그림을 보시고 좋은꿈 꾸시고..

로또 대박이 나시기 바랍니다..

 

 

 

▲ 추녀와 용마루는 시멘트로 되어 있어 많이 아쉬웠지만..

경복궁 수난사를 보면 이나라가 겪어야 했던

아래 그림의 아픔이었기에 이해가 간다.

 

 

 

▲ 1930년대의 일제강점기에 항공촬영 하였다는

피가 거꾸로 솟듯 화가 치미는 폐허가 된,, 경복궁 사진이다.

 

이 나라 최고의 통치자인 임금이 계셨던 근정전을

조선총독부 건물이 흉물스럽게 가로막고 있다.

 

 

 

▲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는

복도 형식의 건물인 행각(行閣)이다.

 

 

 

▲ 경복궁 경회루 (景福宮 慶會樓) 국보 224호.

그림으로만 보아오던 경회루다.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고쳐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이때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는 왕비의 침전 뒤편에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에는 48개의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 높이를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경복궁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경회루 바로 옆에 있으며.

뒷쪽 수림이 있는 곳이 인공으로 만든 <아미산>이다.

 

인공 <아미산>은 경회루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으로 만들었다.

 

 

 

▲ 경회루 연못 뒤로 북악산이 보인다.

 

 

 

▲ 경회루와 인공섬.

 

 

 

▲ 만시문(萬始門).

만시(萬始) 란 만물자시(萬物資始) 에서 온 말로 “만물이 의뢰하여 비롯하다.” 란 뜻이다.

 

『주역』의 건괘를 설명하는 단전에서 유래한다.

“위대하다, 건원(乾元)이여!~만물이 의뢰하여 시작하니, 이에 하늘을 통괄한다.” 라고 하였다.

 

『본의』에서는 이에 대해 원(元)은 큼이요 시작이다.

원(乾元)은 천덕(天德)의 큰 시작이므로 만물의 생성이 모두 이것에 의뢰하여 시작하며,

또 사덕(四德)의 머리가 되어 천덕의 처음과 끝을 꿰뚫으므로 하늘을 통괄한다고 말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 국립민속 박물관.

 

 

 

▲ 외발 인력거.

 

 

 

▲ 자경전(慈慶殿)... 보물 809호.

교태전 동쪽에 위치한 자경전은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 신정왕후(조대비)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경복궁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었다.

신정왕후(조대비)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세자빈이었다.

효명세자가 즉위하지 못한 채 승하하고 아들 헌종이 즉위하면서 왕대비가 되었다.

 

헌종과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을 효명세자의 양아들로 입적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왕대비 처소를 짓고 자경전이라 이름하였다.

 

‘자경(慈慶)’은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의 안어른께 경사가 있기를 기원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 사극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낯익은 곳,,

 

 

 

▲ 자경전 십장생 굴뚝. (보물 810호)

 

자경전 뒤뜰 담장에 조성된 십장생 굴뚝은 독특한 형태와 문양과 함께 빼어난 조형미를 보여준다.

십장생 굴뚝의 몸체는 복을 상징하는 박쥐와 쇠를 먹어버린다는
불가사리 등으로 장식하고

가운데는 해, 산, 구름, 학, 거북, 불로초 등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십장생 문양을 한 화면으로 구성하였다.

 

마치 한 폭의 십장생도를 보는 듯한 이 장식은

굴뚝의 실용성과 함께 빼어난 조형미를 보여준다.

 

몸체 위로는 한옥처럼 소로, 도리, 서까래 등을 벽돌로 짜맞추고

기와를 덮어 조형미를 더했다.

 

 굴뚝은 자경전 뒷담의 한 면을 돌출시켜 만든 것이다.

굴뚝은 네모 형태로, 가운데는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새겨 넣었다. 

십장생 무늬는 가장 한국적인 무늬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조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굴뚝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얹었으며

지붕 위에는 연기를 빠지게 하는 시설을 해 놓았다.

 

굴뚝이면서 장식적인 기능을 충실히 하고 그 조형미 역시 세련되어

조선시대 궁궐에 있는 굴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峨嵋山).,,,,  보물 811호.

궁궐로 들어온 여인들,

한번 들어오면 살아서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궁중여인들이다.

평생을 구중궁궐에 살아야만 하는 중전을 위해

경회루 연못을 만들때 나온 흙으로 만든 화초의 계단 꽃마당이다.

 

아미산은 중궁전의 가장 깊은 후원이다.

중국 산동성 박사현 이라는 곳에 있는 명산인 아미산을 만들어

중전의 시름을 덜어 주었다.

굴뚝 앞의 석조물의 동쪽은 낙하담(落霞潭)이다.

 '노을이 떨어지는 깊은 웅덩이'

해와 양(陽)을 뜻하고 있다.

 

서쪽에 있는 석보물은 함월지(含月沚)이다.

 '달을 머금은 연못'이다.

달과 음(陰)을 상징하는 것으로.

결국 이곳은 음과 양이 어우러져 있는 선경(仙景)이라는 얘기다.

 

아미산의 굴뚝은 

보물 811호로 지정이 되어 있고, 

8각형으로 된 몸체위에 기와로 된 지붕을 올리고, 

기와 위에는 네모난 작은 집에 구멍이 뚫려있어 

쪽으로 연기가 빠져나가게 만들어져 있다

 

 

 

▲ 교태전 가는길에..

 

 

 

▲ 서울에 사는 친구에게 얼굴 한번 보자고 전화 했더니만사 제치고 달려왔다..  고마워~~

오키

 

 

 

▲ 사정전(思政殿).,, 보물 1759호

이 전(殿)은 모든 이치는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는다,,,라는 뜻의 편전(便殿)으로

왕이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고 종친 대신들과 주연을 함께 하기도 하고

왕이 친림(親臨)하여 문·무 과거를 보이기도 한 곳이다.

 

 

 

▲ 근정전 뒤쪽.

 

 

 

▲ 흥례문 광장.때마침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을 한다..

 

 

 

▲ 신구의 조화..

과거의 시간이 머물고 있는 경복궁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재현 하는데..

바깥에는 첨단의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고왼쪽으로 쌍둥이 빌딩이 보인다.

 

 

 

▲ 흥례문 광장.

수문장 교대식을 지켜보는 관람객..

여기저기 중국인 관광객들의 말소리가 많이도 들린다.

일본인 관광은 아예 없는것 같다.

 

우측의 큰북을 고수가 북을 세번 치는 것을 신호로

교대병이 들어 온다..

북소리가 천둥이 울리듯 굉장히 크고 장엄하다.

 

 

 

▲ 북소리를 신호로 나팔을 불며 협생문으로 들어온다..

 

 

 

▲ 군대의 위병 교대식 보다도 더 엄격 한것 같다.

 

 

 

▲ 대오를 맞추어 좌우로 정렬..

 

 

 

▲ 이어서,, 교대 수문장들이 깃발을 세우고 보무도 당당히 들어 온다.

 

 

 

 

▲ 수문장 깃발 창끝으로 <인왕산>이 보인다.

인왕산에는 <중종>과 폐비 <신씨>와의 애닯은 사랑이야기,,

 

인왕산 정상 바로 밑에 넓은 바위가 있고 그 밑에 주름잡힌 치마가 연상되
치마바위가 있으니 이 치마바위에는 애닯은 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조선 제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의 폭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박원종, 성희안 등이 주축이 된 반정이 성공하여 진성대군이
조선 제11대 임금으로 즉위하였으니 이 분이 중종이다.

중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된 분이 단경왕후이니
이 분은 바로 연산군의 추종자였던 신수근의 딸이었다.
신수근은 중종반정의 반대세력으로 반정과정에서 역적으로 참살되었으니
왕후는 역적의 딸인셈이다.

반정공신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왕비를 그대로 존속시킨다면 자신들의 처지가 위태롭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사사로이는 왕비의 친정아버지를 죽인 장본인들이 아닌가.
아무래도 후환이 두렵고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역적의 딸을 왕비로 삼을 수 없다는 공신들의 끈질긴 요구가
날마다 계속되었다. 결국 중종도 어쩔 수 없이 왕후 신씨를 폐위시켜
인왕산 밑에 있는 사가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왕후로 책봉된 지 불과 7일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중종과 폐비 신씨는
10여년을 두터운 정으로 함께 살아온 부부가 아니던가.
그들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부부였기에 신하들의 강요에 못 이겨
헤어졌지만 그 정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종은 종종 경회루에 올라 폐비 신씨가 살고 있는
인왕산 쪽을 바라보곤 하였다는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폐비 신씨는 인왕산에 올라
병풍바위 밑에 있는 바위에 궁중에서 입던 치마를 걸쳐놓아
왕이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에 치마를 펼쳐 놓았다가 저녁이 되면 거둬들이면서
서로간의 사랑의 정을 주고 받았다고 하니 얼마나 애달픈 사랑이야기인가.

이 때부터 이 바위에 치마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한 나라의 주인이었던 왕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인왕산 치마바위 이야기다.
치마바위 쪽에서 경복궁을 바라보면
경복궁의 경내와 경회루가 확실하게 보인다.

 

 

 

▲ 마주보고 군례로써 교대 절차를 하고..

 

 

 

 

 

▲ 근무지로 이동하며 수문장 교대식을 마치게 된다..

 

 

 

▲ 서울 친구가 기어이 한턱 쏜다며 찾아간,,,

경복궁에서 약 10여분 거리의 안국동 전통거리..

 

 

 

▲ 한정식 골목.. 

 

 

 

▲ 왼쪽에 보이는 <여자만> 한정식집에서..

인사동의 <여자만> 한정식집은

"수렁에서 건진 내딸"과.. "영심이"의 영화감독 <이미례>님이 운영하는 곳이다.....

<여자만>은 전남 고흥에 있는 바다개펄 이름이다.

꼬막조개와 찹쌀밥..고등어구이..남도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곳이다..

 

요렇게... 늦은 점심을 서울 친구 덕분에 먹고 나오니,, 바로 앞집이..

 

 

 

▲ 찻집.. 귀천이다. 

<귀천> 은 시인 천상병의 시 제목중 하나로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이
찻집을 열면서 옥호로 쓴것이다.

천상병의 오랜친구인 시인 강태열이 3백만원을 선뜻 내 놓아서
이루어진 이 작은 찻집이 천상병과 그의 아내 <목순옥>의
생활 터전이다.

시인 천상병..

가난했던 한 시인이 천국으로 떠났다.

조의금이 몇백 걷혔다. 생전에 그렇게 「큰돈」을 만져본 적 없는 시인의 장모는 가슴이 뛰었다.

이 큰 돈을 어디다 숨길까. 퍼뜩 떠오른 것이 아궁이였다.

 

거기라면 도둑이 든 다해도 찾아낼 수 없을 터였다.

노인은 돈을 신문지에 잘 싸서 아궁이 깊숙이 숨기고서야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시인 의 아내는 하늘나라로 간 남편이 추울 거라는 생각에 그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 푸르스름한 빛이 이상했다. 땔나무 불빛 사 이로 배추이파리 같은것들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조의금은 그렇게 불타버렸다.
다행히 타다남은 돈을 은행에서 새돈으 로 바꾸어주어,

그 돈을 먼저 떠난 시인이 「엄마야」라며 따르던 팔순의 장모님 장례비로 남겨둘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은 늘 「엄마」의 장례비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 슬픈 동화 같은 이야기는 시인 천상병가의 이야기이다.

평생 돈의 셈법이 어둡고 돈으로부터 자유로왔던 시인이었다.

지상에 소풍왔던 천사처럼 순진무구하게 살다간 시인의 혼은 가고

남은 자리마저 그런 식으로 자유로와 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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