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3월 22일. 수인산(562m) : 전남 강진군 박동리.

 

산행코스수인산 주차장 - 홈골제 - 수인사 - 병풍바위 - 북문 - 

홈골 -홈골제 - 수인산 주차장 하산완료.

산행시작 : 수인산주차장 : 11시 39 산행시작.

하산완료 : 수인산 주차장 : 15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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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퇴원후 첫 나들이다.

장거리에 버스타고 갈일이 걱정이었으나

상처부위가 아프지도 않고

의외로 내몸이 적응을 잘하고 있다.

 

스스로도 빠른 회복에

놀란다.

 

 

 

"A"조 들머리..지미 마을에서 산세만 눈요기하고

아쉬움의 발길을 돌린다.

 

전에 같으면 당연히 "A'조에 합류하여 올라 갔겠지만

회복중이라 눈으로만 올라 가기로 한다. 

 

 

 

▲ 닭벼슬을 닮았다는 계관바위..

 

  

 

▲ 지미마을 산행 들머리 입구의 붉은동백.

 

 

 

▲ "A"팀을 올려 보내고 "B"코스로 가는길에

사료용 목초가 보리처럼 새파랗다. 

 

 

 

▲ 장흥군 소재지를 가로 지르는

탐진강의 둔치..

 

방도시치고는 거리가 깨끗하고

휴식공간을 잘 만들어 놓았다. 

 

 

 

▲ 지로마을 주차장, 

 

 

 

▲ "B"팀 들만의 인증샷. 



 

▲ 꽃샘추위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차가운 날씨는 아니고 햇살고운날에

활짝핀 매화. 

 

 

 

 

▲ 홈골재(상수원 저수지). 

 

 

 

 

▲ 홈골저수지를 지나면 수인산 들머리인 곳에

마치 여염집 같은 분위기의 수인사라는 사찰이 있다. 

 

 

 

▲ 경내로 들어서니

특이하게도 마당에 태극기가 휘날린다. 

 

 

 

 

 

▲ 노루귀. 

 

 

 

 

여기서 마음에 점을 찍고

더이상 무리 하면 안될것 같아서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개불알풀 꽃..일명,, <봄까치 꽃>이라고도 한다.

 

유럽이 원산지로 우리나라, 일본,중국,타이완 등지에 분포하며

양지바른 길가의 풀밭에서 자란다. 

 

 

 

 

 

 

 

 

감나무과수원.

나무껍잘아 벗겨지고 하얗게 속살이 드러나서

죽은 나무인줄 알았더니

 

나무에 황가루를 뿌렸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해충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한번 수인산을 올려다 보고.. 

 

수인산 (561m)은 고려말 남해안으로

침략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수인산성을 비롯해,

조선시대 병마절도사가 거주하던 병영터가 있는

국방상의 요충지에 자리잡은 천혜의 요새다. 

 

 

 

하산하여..

동네한바퀴 돌아 본다..

동민여러분~~이라는 유모어가 생각난다. 

 

 

 

전라병사영지. 

 

 

 

초대병사 마천목 장군 비.

병영성을 쌓았다고 한다. 


 

 

 

하멜 기념관 입구의

네댈란드식 풍차.

이곳은 하멜이 7년간 노역생활을 했던 곳이다. 

 

 

 

하멜 동상..

 

하멜의 고향인

네델란드 호르큼시에서 기증 하였다. 

 

 

 

하멜기념관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보고서』의 저자 헨드릭 하멜(Hendric Hamel)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강진과 네덜란드 호르큼 시와의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위해 개관하였다. 

 

 

 

하멜기념관 관람.

 

전시실은 『하멜보고서』를 비롯하여 하멜의 생애,

17세기 조선과 네덜란드의 사회·문화·역사적 상황, 그리고

1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하멜 일헹이 타고온 범선.

-- 하멜 표류기 --

하멜이 탄 네덜란드 배 스페르웨르호(號)

1653년(효종 4) 1월에 네덜란드로부터 출발.

같은 해 6월 바타비아, 7월 타이완에 이르고,

거기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8월 중순 제주도 부근에서 파선 조난을 당하였다. 

 

선원 64명 중 28명 익사, 하멜 이하 36명이 제주도에 표착

관원에게 체포되어 14년간 군역(軍役) ·감금 ·태형(笞刑) ·유형

구걸 풍상을 겪으며 조선 팔도 여러 곳의 풍속 사정을 기록했다. 

 

특히 부록인 《조선국기(朝鮮國記)》에는

한국의 지리 ·풍토 ·산물 ·경치 ·군사 ·법속(法俗) ·

교육 ·무역 등에 대하여 하멜이 보고 들은 바를 기록.

하멜과 그 일행은 제주도에 표착한 다음 해인 1654년 5월

한양에 호송되었다가 2년 후에는 전라도 지방으로 분산 이송.

1666년 9월 하멜 이하 8명은 야음을 타서 읍성(邑城)을 탈출,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하여 1668년 7월에 귀국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 존재를 유럽인에게 알렸을 뿐 아니라,

당시 조선의 실정 풍속 생활을 아는 데 귀한 사료가 된다.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병영성으로 가는길 <한골목 담장>. 

 

한골목은 병마절도사가 수인산성을 순시할 때 통행하던 길이었는데,

이 길의 담장이 높이 쌓아졌던 것은 병사들이

주로 말을 타고 이 길을 다니므로 집안이 다 보여

이를 가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골목의 담장은 황토와 돌을 이용하여 빗살무늬 방식으로 쌓아

다른 지역과 비교되는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일명 ‘하멜식 돌담’이라 하여

하멜 관련 유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농촌 개발이 확산됨에 따라 돌담이 훼손되고

점차 한골목의 원형이 파괴되는 것을 우려하여,

한골목은 2006년에 등록문화재 26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병영성.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년) 갑오경장까지

조선조 500여 년간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이다. 

 

그러나 1894년 갑오농민전쟁(동학)을 맞아 병화로 소실되었고,

이어 1895년 갑오경장의 신제도에 의해 폐영되고 말았다.

-- 강진군청 홈패이지 발췌 --

 

 

 

성문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게

입구에 반달 모양의 외성을 쌓았다.

 

 

 

▲ 진남루..

 

 

 

병영성(사적 397호)은 조선태종 17년(1417)에

초대병마절제사 마천목(馬天牧 1358~1431) 장군이 축조하였다. 

 

이후 고종 32년(1895)년 갑오경장까지 제주도를 포함해

53주 6진을 총괄했으니 그 위치와 역할이 대단했다할 수 있다. 

 

병영성은 설성이라고도 불리는데

그에는 전설이 하나 전해진다. 

 

 병영성을 쌓은 <마천목> 장군이 성을 쌓기 위해 고민하던 중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 일망대에서 활을 쏘았다 한다.

잠이 깨어 꿈속의 장소를 찾아가니 간밤에 내린 눈이 모두 녹았지만

성벽의 형태처럼 동그랗게 눈이 녹지 않고 있어

그 자리를 따라 성을 쌓았다. 하여

설성(雪城)이라고도 불리운다.

-- 강진군청 홈패이지 발췌 --

 

 

 

 

 

정문을 반달모양으로 방어벽을 쌓은것이 특이하다.

 

 

 

▲ 병영성안,,

병영성 성곽의 총 길이는 1,060m이며,

높이는 3.5m, 면적은 93.139㎡(28.175평)인데,

현재 사적 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병영성 내의 당시 건물이나 유적은 소실되고 없으나

성곽은 뚜렷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의의를 고려하여 현재 복원 중이다. 

 

특히 병영성은 서양에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소개했던

하멜이 1656년 강진 병영으로 유배되어

7년 동안 살면서 노역했던 곳으로서,

주변의 ‘하멜 기념관’과 함께 하멜 관련

역사문화 유적지로서의 역할도 크다.

 

 

 

▲ 서문 쪽..

 

병영성 안에는 백성들이 아닌 군사들만

머물던 곳이다.

 

 

 

▲ 동문쪽.

 

 

 

 

 

▲ 전남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85호)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 여름철에 폭풍이 휘몰아쳐

큰 은행나무의 크고 작은 가지들이 많이 부러졌다. 

 

이를 보고 받은 병사가 부러진 큰 가지를 성안으로

가져오게 하고 이로써 많은 가구를 만들게 했다. 

 

이 때 목침도 만들어 이것을 병사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 목침을 베고 잠을 자던 병마절도사는

그날로 병이 나서 신음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유명한 의원도 병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백약이 무효인지라 끝내는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굿)를 하고

점도 쳐보니 은행나무 목침을 병사가 사용한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지가 부러진 은행나무에 제사를 올리고

목침을 다시 붙어 주어야 완쾌가 된다고 하였다.

이에 무당의 말을 따라 그대로 하였더니 병사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지금도 은행나무 고목을 살펴보면

목침덩이가 들어있는 듯이 볼록해진 곳을

볼 수 있다고 한다.

 

 

 

▲ 병영마을 돌담길.

 

 

 

▲ 이곳 병영마을은 전라도의 군수권을 통괄했던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던 병영성이 있던 곳으로 성 안에는

백성이 아닌 군사들이 머물렀다. 

 

그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데

대표적인 곳이 전라병영성지와

병영마을의 돌담들이다.

 

 

 

▲ 노부부가 시골향기 진한 농촌거름의 냄새를 풍기며 지나간다.

 

 

 

▲ 병영마을의 자랑인 돌담은 하멜이 가르쳐주어 쌓은 네덜란드 식이다.

가능한 납작한 돌을 골라 15도 정도 눕혀서 촘촘하게 쌓고

흙으로 고정시킨 후 다음 층은 반대방향으로 15도 정도를 눕혀 쌓는 것으로

이 마을 사람들은 ‘하멜식 담쌓기’라 부른다. 

 

이 방식으로 담을 쌓으면 마치 빗살무늬 토기와 같은 무늬가 된다.

돌담 위에는 기와를 얹거나 구들장처럼 넓고 납작한 돌로 마무리를 했다. 

 

병영마을 뿐 아니라 인근 도룡 마을에도

이 같은 하멜식 담쌓기를 흔히 볼 수 있다.

 

 

 

 

 

병영마을의 돌담은 다른 곳에 비해 담장이 높은 것도 특징이다.

보통 2m 정도로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곳도 있으니

말을 타고 순시를 할 때 집안이 훤히 보일 것을 염려한 것이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폭이 6-7m나 되는 넓은 골목이 있으니

이를 ‘한골목(골목이 크고 넓다는 의미)’이라 부른다. 

 

이를 중심으로 2m 내외의 골목들이 질서 정연이 연결되어 있으니

이 또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골목임을 알 수 있다. 

 

담장이 검게 변한 곳이 있는데 이는 1894년 동학농민 전쟁으로

불이 탄 흔적이니 500년이 넘는 장고한 세월의 역사가

돌담에 모두 담겨있다.

 

 

 

하산지점으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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