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사 전경>
아직 겨울이라기엔 이른 늦가을이었다.
옷은 비록 남루했지만 용모가 예사롭지 않은 한 고구려인이 신라 땅
일선군(日善郡, 지금의 경북 선산)에 있는 부자 모례장자(毛禮長子)의 집을 찾아왔다.
『어떻게 저희 집에 오시게 되었는지요?』
모례장자는 행색과는 달리 용모가 순수한 낯선 객에게 점잖고 융숭하게 대하면서도
일말의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나는 묵호자(墨胡子)라는 고구려 승려입니다. 인연있는 땅이라 찾아왔으니
나를 이곳에 묵을 수 있도록 주선하여 주십시오.』
당시는 눌지왕(訥祗王, 재위417~458)때로서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지 않은 때인지라
모례장자는 묵호자의 불법에 관한 설명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생부터의 인연이었는지 아무래도 낯선 객이 신비스럽고 큰 불도를 알고 있는
대인인 듯하여 지하에 밀실을 지어 편히 거처하게 했다.
이 무렵 신라 조정에서는 중국에서 의복과 함께 보내온 향의 이름과 쓰는 법을 몰라
사람을 시켜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알아보게 했다.
중국 양(梁)나라에서 신라 조정에 두 가지 예물을 보내 왔는데 하나는 의복(衣服)이고
다른 하나는 향내 나는 나무 토막이었다.
조정은 이 같은 선물에 대해 알지 못해 어찌 답신을 보내야 할 지 온통 걱정에 싸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모례장자가 이 소식을 듣고 아도에게 물었더니 『그것은 백단향(白檀香)이나
자단향(紫檀香)같은 향목(香木)인데 그것을 잘게 쪼개 불을 사르면 향기로운 냄새가 풍깁니다.
이를 태우면서 정성이 신성한 곳에까지 이르도록 간곡히 축원하면 무슨 소원이든지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모례장자는 조정에 들어가서
향목과 아도에 대한 사실을 소상하게 임금께 아뢰었다. 이것을 들은 임금과 신하는
크게 반가워하였고 양나라 사신에게 『의복과 향목을 보내주시어 잘 받았습니다.』라고
회신을 보내 나라의 망신을 겨우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얼마가 지난 뒤 나라에서는 묵호자를 청하는 사신을 보내왔다.
『공주마마가 위독하옵니다. 백방으로 약을 쓰고 의원을 불러 치료를 했으나
전혀 효험이 없어 이렇게 모시러 왔사오니 어서 궁으로 함께 가주시지요.』
<아도화상 동상>
불법을 펴기 위해 숨어서 때를 기다리던 묵호자는 때가 온 듯 선뜻 승낙하고 서라벌로 향했다.
묵호자는 눌지왕의 딸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 삼보의
위목(位目: 불,법,승 글자를 써서 붙인 패)을 써 붙이고 그 앞에 단(壇)을 차린 다음
촛불을 밝히고 그 옆에는 다기에 정한수를 떠놓고 향을 피워올려 기도하자
얼마 후 공주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아 병석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눌지왕은 기뻐하며 묵호자에게 소원을 물었다.
『빈승에게는 아무것도 구하는 일이 없습니다.
다만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세워서 불교를 널리 펴고 국가의 복을 비는 것을 바랄 뿐입니다.』
왕은 즉시 이를 허락하여 불사를 시작케 했다.
묵호자는 그때부터 숨겨 둔 불명 아도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아도화상의 어머니 고도령(高道寧)은 중국 위(魏)나라에서 온 사신 아굴마(阿掘摩)와
연정이 깊어 아도를 낳게 되었다. 그 후 아도가 다섯 살이 되자 고도령은 아도를 출가시켰다.
총명하여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아도가 16세가 되던 해 어머니 고도령은
아들을 찾아와 모든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아도는 중국에 가서 아버지 아굴마를 만난 후
현창화상(玄彰和尙)의 문하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한 후 19세때 고구려로 돌아왔다.
어머니 고도령은 아들을 만나 반가웠으나『신라땅에는 천경림을 비롯하여 7곳의
큰 가람터가 있으니 이는 모두 불전(佛前)의 인연지로서 앞으로 불법이 깊이 전해질 곳이다.
그곳에 가서 대교를 전하면 응당 네가 그 땅의 개조가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며
아들을 다시 신라 땅으로 보냈는데 아도는 어머니의 이같은 당부를 잊지 않고
수행에 전력하며 불법을 폈던 것이었다.
그렇게 불법의 씨가 피어 날려고 하던 458년에 눌지왕이 세상을 뜨고 새 임금 자비왕이
등장하자 불법에 불만을 품고있던 무리들이 아도화상을 해치려 했다.
결국 아도는 제자들과 함께 다시 모례장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곳에서 경을 가르치고 설법했다.
많은 신봉자가 따르는 가운데 낮에는 소와 양을 1천 마리씩 길렀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흐른 뒤 아도화상은 행선지도 밝히지 않고 훌쩍 그곳을 떠났다.
모례장자가 가는 길을 물었으나 『나를 만나려거든 얼마 후 칡순이 내려올 것이니
칡순을 따라오시오.』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 해 겨울. 과연 기이하게도 정월 엄동설한에 모래장자 집 문턱으로 칡순이 들어왔다.
모례장자는 그 줄기를 따라갔다. 그곳엔 아도화상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신라불교의
초전지인 지금의 도리사 터였다.
『잘 오셨소, 모례장자. 내 이곳에 절을 세우려 하니 이 망태기에 곡식 두말을 시주하시오.』
아도화상은 모례장자 앞에 작은 망태기를 내놓고 시주를 권했다.
모례장자는 기꺼이 승낙을 하고는 다시 집으로 내려와 곡식 두 말을 망태기에 부었으나
어인 일인지 망태기는 2말은 커녕 2섬을 부어도 차지 않았다.
결국 모례장자는 전 재산을 다 시주하여 절을 세웠다.
모례장자의 시주로 절을 다 지은 아도화상이 잠시 서라벌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데
절이 세워진 태조산 밑에 때 아닌 복사꽃이 만개하여 눈이 부셨다.
아도화상은 이에 절 이름을 도리사(桃李寺)라 칭했고 마을 이름을 도개(桃開)마을이라 했다.
도리사에서는 1976년 경내 화엄석탑 및 담장 석축을 정비하다가 아도화상 석상을 발견했다.
같은 해 탑 해체 작업중 부처님 진신사리 1과가 출현해 전국 불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친견하는 등
세인들에게 화제가 됐다. 지금도 도리사 인근 마을에 가면 양과 소 천마리를 길렀던 곳이라 해서
양천골(羊千谷) 또는 우천골(牛千谷)이라 부르고, 도개동 웃마을에는 외양간이 있었다 해서
우실(牛室)이라 부른다.
또 모례장자의 집터는「모례장자터」 그리고 우물은 모례가정(毛禮家井) 또는
모례정(毛禮井)이라 불리는데 지금도 맑은 물이 샘솟고 있다.
마을에서는 긴 화강암으로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엇갈리게 짜 맞추어 놓았다.
<모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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